<캠벨 선교사>
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선교사
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선교사
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선교사 기념비 (배화학원, 종교교회, 자교교회)
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선교사 묘비
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姜慕仁, 1853-1920) 선교사는 1853년 4월 1일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하여, 21세 되던 1874년 조셉 캠벨(Joseph Campbell)목사와 결혼하여 1남 1여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1880년 남편 캠벨 목사와 사별하고, 자녀들도 수년 내 모두 잃었다. 이 같은 불행을 격은 그는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는 신앙의 힘으로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극복하며 “一生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貢獻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의 간호원 양성소에서 간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해외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1886년 미국 남 감리회 해외 선교사로 선임되어 중국의 상해 소주(蘇州) 등지에서 10여 년 간 봉직했다. 캠벨 선교사는 그 후 미국 ‘남감리회해외여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1897년 10월 9일 서울에 도착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으며 한국으로 오면서 중국인 양녀(養女) 여도라(Dora Yui, 余小姐)를 데리고 왔다. 여도라는 한국에서 간호사로, 교사로, 전도자 등으로 활동하면서 캠벨의 선교사업을 훌륭하게 조력했다. 한국에 도착한 캠벨 선교사는 윤치호의 마중을 받았으며 남대문 근처의 남송현(南松峴) 선교부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리드(李德) 선교사 부부가 이미 훌륭하게 선교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감리회의 상동병원과 북장로회의 제중원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고자 했다. 그는 1898년 8월 1일 ‘고가나무골’(漢城府 仁達坊 古磵洞, 지금의 내자동으로 주로 내시들이 살던 곳) 이항복의 집터로 선교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여성 기숙학교(Boarding School)를 육성했다. 이것이 1898년 10월 2일 남감리회의 대표적 여학교 ‘배화학당’ 창설이다. 처음 이름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어린이 헌금이 일부 쓰여졌기 때문에 “캐롤라이나 학당(Carolina Institute)”이라 했다. 이때 교사(敎師)는 2명이었고, 과목(科目)은 한글과 한문이었다. 학생은 6명으로 첫 학생은 선교사 사택 수위였던 박씨의 딸이었다. 다른 학생은 캠벨이 순회 전도하며 데려온 아이들이다. 초기 수업 때 캠벨은 영어로 밖에 말할 수 없어 손짓, 발짓, 무언극으로 표현했다. 이 같은 교육은 춤을 추듯한다하여 “발레 수업”이라 했다. 그 후 1903년 12월 ‘배화학당’이 되었으며 교육과정은 산술, 독본, 생리학, 지리, 역사 등으로 확대되었다. 배화(培花)란 “꽃을 기른다”는 뜻이며,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을 의미했다. 그 후 배화학당은 1909년 배화여학교로 인가를 얻어 졸업생을 정기적으로 배출했다. 캠벨 선교사는 1898년부터 1912년까지 초대 교장으로 봉직했다. 한편 그는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1년 배화학당 안에 미국에서 루이스 워커(Lousie Walker)가 보내준 돈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Chapel)’이라 했다. 이곳에서 시작된 예배 모임이 오늘날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정춘수 전도사와 홍다비다 전도부인 중심의 신앙 공동체가 이전(移轉)하여 종교(宗橋)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윤상은 전도인 중심의 루이스 워커 기념예배당 잔류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자교(紫橋)교회로 발전했다고 한다. 캠벨 선교사는 여성 교육 사업과 병행하여 전도부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도부인 양성사업도 주력했다. 그의 생애와 신앙의 특징은 첫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둘째,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중심”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 철저한 기도와, 큰 이상과 포부를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며 실행했다. 넷째, 과거와 현재, 근대문명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며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했다. 1918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이듬해 되돌아오려고 준비 중 신병을 얻었다. 주위 친지들은 병이 회복된 뒤에 여행을 권유했으나 1919년 8월 무리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1920년 11월 12일 별세했다. 장례식은 1920년 11월 15일 배화학당장으로 거행되었다.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으며 비문에는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 기록되었다. (참고자료: 배화백년사, 감리교 인물사전, 종교-자교교회사)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젠센 선교사>
앤더스 크리스 젠센(Jensen, Anders Kristian) 선교사 가족 묘
앤더스 크리스 젠센(Jensen, Anders Kristian) 선교사
앤더스 크리스 젠센(Jensen, Anders Kristian, 全善, 별명: Kris, 1897-1956) 선교사는 1897년 3월 14일 덴마크 네스보그(Naesborg)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자회사에서 일하다가 1914년 미국으로 이민했다. 1차 세계대전 때 미 육군으로 참전하여 1818년 11월 11일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1924년 아이오와주 코넬 대학을 졸업하고, 1927년 보스턴대학 신학부를 졸업했다. 그 후 미국 감리교 국내선교부에서 일하다가 1927년 8월 선교사로 내한하여 경기·서울지역에서 1956년까지 활동했다. 내한 초기 인천에서 7년간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34년 안식년으로 귀국했다. 1년 후 다시 돌아와 수원 인천 원주 서울 등지의 순회 선교사로 시무했다. 1940년 일제의 추방령으로 출국되었다. 8·15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일하던 1950년 6월 개성 출장 중에 6·25 전쟁을 만난다. D. N. 클락의 기록에 의하면 젤러스(L.Zellers)와 북한군 포로가 되고, 평양에서 압록강(만포진)에 이르는 “죽음의 행렬”에 낀다. 3년간의 억류 생활을 하다가 1953년 5월 휴전으로 석방되어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5월 13일 뉴욕에 도착했다. 그러나 1954년 10월 부인과 함께 또다시 내한하여 한국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재건하려는 교회에 도움을 주면서 전후(戰後) 복구사업에 진력했다. 1955년 연세대학 재단이사로 활동하고, 1956년 11월 20일 한국을 방문한 ‘미국고문단’ 일행과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회담을 마치고 귀가 중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11월 23일 감리회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마치고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요한복음 15장 13절 첫 부분(Greater love hath no man...)을 기록하고 그 밑에 Because man goeth to his long home, and the mourners go about the streets. Then shall the dust return to the earth as it was. and the spirit shall return unto God who gave it(사람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은 거리를 왕래하며. 육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라 기록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M. K. 젠센(1904-1998) 과 딸 클레어 리 젠센 묘
감리회 첫 여성 목사 M. K. 젠센(1904-1998)
매드 키스터 젠센(Jensen, Maud Keister)목사는 1904년 9월 27일 미국 뉴저지에서 출생하여 1926년 5월 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1928년 7월 13일 A. K. 젠센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딸(Clair Lee)과 아들 필립(Philip,성장하여 미국에서 교수와 감리교 목사로 활동함)을 낳았다. 내한 초기에는 인천지방에서 선교하다가 감리회 초기 여성 목사로 안수 받았으며 드루(Drew)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선교부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6년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한국에 남아 선교활동을 계속했다. ‘정동제일교회의 역사(유동식)’에 따르면 1958년 8월 17일 조직된 정동교회건축기성회 임원으로 위촉되었다. 남편 젠센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미국에서 모금(7만$)하여 ‘젠센기념관’을 2층 양옥으로 건립했다. 이 건물은 1960년 12월 3일 선교 75주년 행사 때 정동제일교회에 헌증되었다. 이 기념관은 교육관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특별집회나 부인회 등의 모임장소로 제공되고, 학생들을 위한 활동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총리원 주최 회의 장소나 특별집회 용도로 제공하도록 하였다. 1969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가 1970년 2월 28일 선교사직을 정년퇴임하고 뉴저지 주 매디슨(Madison)에 살다가 1998년 10월 12일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감리회 첫 여성 목사 M. K. 젠센(1904-1998) 후면
젠센 부부의 딸 클레어 리 젠센(Jensen, Clair Lee,1929-1996)
1929년 10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울 외국인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사와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미국 뉴저지에서 사회봉사 사업가로 복지와 장애인을 위해 일했다. 1996년 2월 26일 미국에서 별세하여 유해는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피터스 선교사 가족>
엘리자베스 C. 피터스(Pieters, Elizabeth Campbell,1872 -1906) 여성 선교사
엘리자베스 C. 피터스(Pieters, Elizabeth Campbell,1872 -1906) 여성 선교사
1902년 미국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던 유태계 러시아인 알렉산더 A. 피터스와 결혼했다. 1904년 9월 13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선교사업에 활동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건강이 약화되고 폐결핵을 앓다가, 러일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 필리핀 마닐라로 갔다가 일본이 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폐결핵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06년 1월 4일 서울에서 34세로 별세했다. 묘지는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남편 A. 피터스는 1930년 “엘리자베스 추모사업”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결핵환자 진료소를 마련하고, 크리스마스 실 운동을 전개했다.
알렉산더 A. 피터스 선교사(Pieters, Alexander Albert, 彼得,1871-1958)
1871년 12월 30일 러시아(Ecoternoslav)에서 유태인으로 출생하여 인문고를 졸업했다. 1895년 4월 일본(나가 사키)에서 피터스 목사의 전도와 세례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 개명했다. 1891년 ABS 루미스(Loomis, Henry) 일본 총무에 의하여 권서(Colporteur)로 채용되어 1895년 5월 16일 내한했다. 1895년 9월부터 1898년 6월까지 3년 간 ABS 권서 겸 한국 부총무로 활동하면서 빠른 시일에 한국어를 익혔다. 서울 근교와 호남과 충청지역을 순회하며 성서도 판매했다. 1897년부터 시편 번역에 착수하여 1898년에 12월 6일, 62편의 시편을 번역하여《시편 촬요》라는 제목으로 한국 최초의 구약성서를 발행했다. 그의 시편 번역에 대하여 루미스 총무는 1902년 10월 ABS 본부 헤이븐 (Wm. I. Haven)에게 “피터스는 4년 전에 여름 휴가를 이용하여 당시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편을 번역하는데 보냈다. 그는 히브리어 본문으로 번역하였으며 예약에 의해 1,500부가 인쇄되었고, “수요를 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고 보고했다.(자료:대한성서공회사) 1898년 7월 1일부터 1900년 가을까지는 BFBS 권서 겸 부총무로 활동했다. 그의 좋은 성품과 ABS 권서로서 3년간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켄뮤어 총무는 적임자로 판단하여 2년 간 연봉 140파운드와, 매월 15$의 전세비를 지급했다. 이때 시편을 찬송가로 여러 편 운률화(韻律化)했다. 예를 들면 기도와 간구를 위한 찬송가 479장(내가 깊은 곳에서)은 시편 130장을 운률화한 것이다. 1900년, 미국 매코믹신학교에서 신학을 시작하고 1902년 목사 안수를 받아 1904년 9월 미국북장로회 소속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구약 성서번역위원(1906)과 성서개역위원회 임원(1911) 등으로 활동했다. 1913년 황해도 재령으로 옮겼다가 1921년 평북 선천으로 이동했다. 1927년 서울로 돌아와 성서 개역에 참여하고 1937년 구약성서 완성에 공헌했다. 1941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8년 6월 29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에바 필드 피터스 (Pieters, Eva Field, 1868-1932) 여성 의료선교사
에바 필드 피터스 (Pieters, Eva Field, 1868-1932) 여성 의료선교사
1868년 미국에서 출생하여 노스웨스턴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1897년 10월 14일 미국 북장로회 여성독신 의료선교사로 실드(Shields, Esther)와 함께 내한했다. 그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1908년 A. 피터스와 결혼했다. 그 후 이들은 10년 간 황해도 재령에서 기독교 교육과 의료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에바 필드 선교사는 수학 교과서를 편찬한 공적이 있다. 리차드(Richard)와 루벤(Reuben) 두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들은 평양외국인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922년 선천으로 이동 한국교회를 위하여 새로운 찬송가도 편집하여 발행했다. 그러나 불치의 암으로 인하여 그가 봉직했던 세브란스 병원에서 1932년 7월 20일 64세로 별세했다. 묘지는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남편 A. 피터스는 1932년 “에바 필드 추모사업”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치과 수술실을 마련했다. 비문에는 “예수 안에 잠들다.(A sleep in Jesus)”라고 기록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벙커 선교사>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 선교사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 선교사 부부 묘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 선교사
D. A. 벙커는 1853년 8월 10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883년 오하이오 주 오벌린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이 무렵이 한ㆍ미조약(1882)이 체결된 후여서
구 한국정부는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고 미국 측에 교사를 초청했다.
미국 공사 푸드의 주선으로 국무성을 통하여
유니온 신학교에서 벙커, 길모어(Gilmore), 헐버트(Hulbert) 등 3인이 선발되어
1886년 5월 두 여성(엘러스, 길모어 부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교육 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 했다.
D. A. 벙커는 육영공원에서 고관 자제들과 관리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며,
1887년 의료선교사 애니 엘러스와 결혼했다.
육영공원이 폐쇄 될 때(1894)까지 8년간 교사로 봉직했다.
그 후 배재학당으로 옮겨 미국 감리회 소속의 선교사로 활동 했다.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1902) 후 배재학교의 학당장이 되어 1911년까지 교육 발전에 열성을 다하였으며,
후임자 신흥우에게 교장 자리를 인계했다.
그는 종래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 방법을 개선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고대사, 물리학, 화학, 수학, 정치학 등 새로운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1892년 3월에는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通政大夫 戶曹參議” 정3품 당상관의 품계에 올랐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그는 1896년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될 때
윤치호가 작사한 국가(國歌)를 스코틀랜드 민요 ‘로렐라이’에 맞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부르게 하는 등
한국 최초의 애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옥중(矯導所) 전도를 통하여 인권을 보호하고, 민족 지도자들을 개종시켰다.
1902-1904년 독립협회 지도자 이상재 남궁억 등과 이승만 신흥우 등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투옥되었다.
이때 정부의 허가를 받아 감옥을 출입하면서 그들의 석방운동을 펴는 한편,
수감자들을 매주 만나 위로하고 신앙 상담과 예배를 드렸다.
선진 외국에서 시행되는 죄수들의 처우 개선, 야만적 고문제도의 폐지, 음식이나 의복을 차입할 수 있는 자유,
독서의 자유 등 인권 보호를 건의했다.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관련 서적과 과학, 철학, 역사 등 서적을 감옥에 넣어 주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이상재 등 민족 지도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옥중 전도와 연계하여 감옥 안에 학교가 개설된 사례도 있었다.
당시 투옥되었던 신흥우의 아버지(申冕休)는
“옥중(獄中)에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예전에도 없는 일이다.
죄를 범하고 오랫동안 갇혀 있을 때에 울적함을 견디기가 어려워 책이나 읽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내 아들 흥우가 옥에 갇혀 마땅히 징역을 치를 것이지만
힘에 겨운 일을 시키지 아니하고 다른 죄수들과 같이 책을 읽게 하고 글도 쓰게 했다”
는 ‘獄中開學顚末’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1890년 6월 한국성교서회(The Korean Tract Society) 창립위원으로 활동했고,
1896년 이후에는 동대문교회에서 목회 활동도 했다.
1905년 9월 11일에는 교파를 초월한 기구로
“한국복음주의선교단체 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조직하여
하나의 한국 교회 연합을 지향하는 역사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초대 서기 겸 회계 및 찬송가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08년 자신의 선교사역을 계속하면서 성서 보급을 위하여 미국성서공회 책임자로 활동했다.
한편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하여 시해되고 고종 황제는 극도의 불안 상태에 있을 때,
벙커, 게일, 언더우드, 에비슨 선교사가 번갈아 왕실에 들어가
고종 황제를 호위하면서 왕의 신변 보호에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그 후 1926년 7월 4일 73세의 노령으로 선교사직에서 은퇴하여 부인과 함께 귀국했다.
1930년 한국에 잠시 방문하였으며,
1932년 11월 28일 80세로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별세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 달라' 유언하여
그의 부인은 남편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한국으로 돌아와
1933년 4월 8일 정동제일 감리교회에서 고별 예배를 드리고,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Until the day dawn the shadows free away(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라는 어구가 기록되어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 부인 애니 엘러스(Bunker, Annie Ellers, 房巨夫人) 추모비
미국 미시건주 버오크에서 1860년 8월 31일 장로교회 목사의 딸로 출생하였다.
1881년 일리노이 주 록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페르시아 선교사로 갈 계획으로 보스턴 의과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한국으로 와 달라는 알렌(H. N. Allen, 安連)의 요청과 한국정부의 초청에 의하여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했다.
그는 다음 해(1887년, 27세 때) 미국에서 함께 내한한 7년위의 육영공원 교사 D. A.벙커와 결혼했다.
한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봉직하면서
제중원 의사, 명성황후 시의(侍醫), 정신여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6년 은퇴하여 귀국했다.
그 후 다시 내한하였다가,
1938년 10월 8일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애니 엘러스 선교사는 가냘픈 여성으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제중원 의사로 열심히 봉직하여,
왕실과 고관들의 환영을 받았다.
여성 환자 치료와 간호에 주력하고,
고종황제의 어의(御醫)로 활동하던 알렌 의사와 협력하며 황후의 옥체를 진료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業精至善 施療衆民)로 그는 정3품 벼슬에 해당하는 당상계 통정대부(堂上階 通政大夫)의 높은 품계에 올랐으며,
명성황후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그의 글인 ‘閔妃와 西醫’라는 제목에서는
“나는 1888년 3월부터 여관(女官)의 직임을 띠고
나의 본직인 의사로서 황후의 옥체를 시위(侍衛)하게 된 것을
나로서는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라 하였다.
그는 왕비에게는 손을 대고 진맥(診脈)도 못하던 시절에
놀랍게도 황후의 가슴을 헤치고 진찰했다.
이 같은 과정은 1895년 한국학연구지 에 ‘My first visit to her majesty, The Queen’ 제목의 글에 자세히 발표되었다.
전택부는
“알렌은 고종황제를 진찰한 적은 있으나 황후의 가슴에다 청진기를 댈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대궐에서 기별이 오기를 황후께서 탈이 났으니 약을 지어 보내라고 했다.
알렌은 그 증세를 물은 다음 짐작해서 약을 지어 보냈다.
며칠 뒤 또 기별이 나오기를 조금도 차도가 없으니 다른 약을 지어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또 병세를 들은 뒤에 짐작해서 다른 처방으로 약을 지어 보냈다.
또 며칠 뒤에 내시가 나와 약효가 전혀 없으니 다른 방도가 없느냐? 다그쳐 물었다.
그래서 알렌은 용기를 내어 황후를 직접 진찰하기 전에는 약효를 낼 수 없으니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하여 엘러스가 궁중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진찰했다”는 것이다.
당시 왕비를 진찰하려면 손목에 실을 감아 병풍 뒤로 연결하여 진맥(診脈)하던 시절에,
엘러스는 참으로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으로 황후의 가슴을 헤치고 청진기를 들이댔다.
1886년 9월 14일은 황후가 현대 의술에 의한 최초의 진단을 시도한 날이라 할 수 있다.
언더우드(Underwood, H. G, 元杜尤)가 설립한 경신(儆新)학교와 엘러스가 세운 정신(貞信)여학교는
한국 장로교단 최초의 남매 학교이다.
경신사(고춘섭 편저)에 따르면 “1887년 언더우드학당에 고아 몇 명이 들어왔다.
여느 때와 같이 목욕을 시킨 다음 새 바지저고리를 입히고 머리를 곱게 빗어 땋아 주었다.
그런데 목욕을 시키는 과정에서 한 아이가 여자임을 발견하고 언더우드는 기겁을 했다.
곧바로 제중원 여의사 엘러스가 거주하는 옆집으로 보내 정동여학당의 첫 걸음이 되었다.”
한편 정신백년사(박광현 편저)’에는
“1887년 6월 엘러스 선교사는 정동 소재의 제중원 사택에서 한명의 고아(5살, 정례)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얼마 안가서 그해 겨울에는 3명으로 늘었다.
이것이 정동여학당의 시초이고 이 자리가 바로 현재의 정동 1번지이다.”라 했다.
그는 정신여학교 기틀을 마련하고 초대 교장으로 1888년 9월까지 봉직했다.
그 후 남편 벙커가 배재학당으로 옮기게 되어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소속을 바꾸어 활동했다.
한국 YWCA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창설에 협력하여 5천엔의 창립기금을 헌금하기도 했다.
1926년, 40년간의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남편과 함께 귀국하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중
1932년 11월 28일 80세로 남편이 별세하자,
남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안고 재차 내한했다.
1937년 다시 내한하여 소래에 머물다가
1938년 10월 8일 78세로 서울 정동 그레이 하우스에서 별세하여
10월 12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경성화장장에서 화장한 후
유골은 남편이 묻혀있는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하나님을 믿자,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라는 정신 학교의 교육 이념이 새겨져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그린필드 선교사>
마우드 S. 그린필드(Greenfield, Maud Saxe) 여성 선교사
마우드 S. 그린필드(Greenfield, Maud Saxe, 1874-1910)는 1874년 미국 뉴욕주 왈덴(Walden)에서 출생했다. 1907년 9월 15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남편(Greenfield, M. Willis)과 함께 내한하였으며, 1909년 정신여학교 제6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전임자였던 제5대 교장이며 에드워드 H. 밀러(密義斗)의 부인 헨리 밀러(Miller, M. Henry)선교사가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신여학교 교장 재임 중인 1910년 1월 5일 아들 그린필드(Greenfield, Willis Saxe)를 낳았지만, 산후 후유증으로 1910년 1월 29일, 출산한지 3주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는 1909년 9월 한국의 장례절차에 관하여 "시신의 매장 준비(Preparation of the body for burial)"라는 제목의 논문을 선교잡지(KMF)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묘비에는 여성 선교사로서 한 아내와 어머니로 헌신한 그린필드를 사랑 가운데 기억하며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And whom he called, them he also justified, them he also glorified. Rom. 8:30)"라는 기록이 쓰여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남편 M. W. 그린필드 선교사
윌리스 M. 그린필드(Greenfield, M. Willis, 權弼斗,權日斗 )는 1907년 9월 15일 부인(Maud Saxe)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1908년 3월 서울에서 경신학교 교장 서리로 취임하였으며, 다음해인 1909년 사임했다. 1908년 11월 11일 숭신방(명륜동)에 이석진 조사를 파송하여 숭신예배처소(명륜 중앙교회)를 마련했다. 조선 예수교장로회 사기에 의하면 같은 해 청송군 수락(水洛)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예배당도 건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1910년에는 구미 옥계교회에 약 15평의 토당 초가 예배당을 건축하기도 했다. 1911년 이후에는 대구지역 선교부로 옮겨 경상북도 지방에서 폭 넓은 전도 활동을 하다가, 1911년 12월 6일 경상노회(慶尙老會)가 설립되면서 선교사의 선교 구역은 12개로 분구(分區)되어, 그린필드 선교사는 칠곡, 포항, 경산 등지에서 전도 활동을 하게되었다. 1911년 칠곡군 남율(南栗)교회를 설립하고, 이사윤(李士允)조사로 하여금 시무 하도록 했다. 그는 특히 한국에서 시골길의 장거리 전도여행 기록보유자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1913년에 경북지방에서 180여일 동안을 시골마을과 산길을 두루 걸어다녔는데 그 도보(徒步) 거리가 무려 6천리(1530마일, 2,461km) 이상이었으니, 참으로 열정적인 선교사였다. 1914년에도 열심히 전도한 결과 영일군 대전(大田)교회를 설립하는데 기여했으며, 같은 해 경산군에 조사와 권사, 임시전도사를 대동하고 김처진(金處鎭) 씨 집에 임시전도소를 마련하고 전도에 힘을 써, 경산군 경산읍 교회도 설립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1909년부터 1914년 사이에 교육과 전도에 관한 주제로 8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의 논문 중에 1913년 10월 선교잡지(The Korea Mission Field)에 게재한 '대구지역 선교사업의 의의와 전망'에 관한 논문에서, "지나간 세월에 어둠 속에서 지내던 한국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과 손길을 통하여 선교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한국인에게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한국은 기독교 국가가 이를 때까지 하나님 도움이 계속 될 것이다."라는 어록(語錄)을 남겼다. 그 후 1916년 6월 5일 장로회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한 뒤에는 대구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활동(1908-1914)하다가 귀국한 밀즈(Mills, Anna Rae) 여사와 재혼하여 여생을 보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 레이놀즈 선교사>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가족묘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가족묘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가족묘
존 볼링 레이놀즈(Reynolds, John Bolling, 李保璘) 가족묘
레이놀즈와 팻시 보링의 둘째 아들로 1894년 9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미국에서 공부한 뒤 1920년 남장로회 교육선교사로 내한하여 순천 광주와 전주 신흥학교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시립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1970년 3월 20일 테네시에서 75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평소에도 “미국은 제2고향이고, 한국이 제1고향”이라고 하면서 한국을 많이 사랑했다. 평생 김치를 좋아했고, 애국가를 매일아침 피아노로 연주했으며, 죽음이 가까워지자 양화진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했다. 화장한 유해를 그의 부인이 연로하여 한국에 올 수 없어 소포로 보내졌다. 우체국 검열과정에서 유해가 ‘화공 약품’으로 오해받아 함부로 취급되고, 유골이 흩어지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선교사의 헌신을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 그렇게 외롭게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 묻혔다. 하관식에는 원일한(언더우드 3세) 장로 부부 등 몇 분이 참석하였다는 것을 이강필 소장의 증언으로 알게 됐다.
아버지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1867년 12월 11일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다. 햄덴 시드니 대학 재학 중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어 외국선교를 꿈꾸며 라틴어 희랍어 불어 독어에 통달하고, 축구 야구 정구 등 운동도 열심히 했으며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유니온 신학교에서도 수학했다. 1892년 5월 5일 팻시 볼링(Patsy Bolling)과 결혼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3일 부부가 함께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들은 미국 남장노회가 선교사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이며 이때 테이트(崔馬太)와 그의 여동생 매티 데이트, 전킨(全緯廉)과 부인 리번, 데이비스 양 등 7인의 선교사가 함께 내한하였다. 레이놀즈는 한국에 도착하여 첫 활동으로 미 남장로회 선교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1893년 1월 북장로회와 연합하여 공의회를 조직, 초대 의장에 당선됐다. 이 때 공의회의 선교정책은 선교지의 중복과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구역의 예양 협정(禮讓協定)을 체결하고, 전도 대상자는 부녀자. 청소년을 우선하였으며 성경과 모든 문서는 한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선교지는 호남지방을 배정 받아 1894년 3월, 전주 군산 목포 순천 등 5대 도시를 순회 전도하였다. 1895년부터 ‘성서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위원으로 활동하고, 1896년 전주에 선교본부를 설치하였다. 1887년 여름 전주에서 다섯 사람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고 교회도 건립하여 호남지방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언어학자와 성서번역가로서 게일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1895~1938) 성서 번역에 종사하면서 1900년 신약성서 완역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1910년 구약성서 완역에 독보적 구실을 했다. 1911년 독노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1917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수와 신학지남(神學指南) 편집인 등으로 폭 넓게 헌신하였다. 1937년 은퇴하여 귀국하였다.
어머니 보링(Patsy Bolling) 선교사
1868년 9월 28일 미국에서 출생하였으며, 음악 애호가로 미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한국적 현모양처로서 대외 활동보다 가정에 충실했으며 남편을 위하여 피아노를 연주하고 손님 접대에 정성을 다했다. 출생 당년에 사망한 W. D. 레이놀즈는 레이놀즈 부부의 맏아들로 1893년 한국에서 출생하여 같은 해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밀러 선교사>
밀러 가족 묘
에드워드 H. 밀러(Miller, Edward Hughes. 한국명 : 密義斗)
1873년 7월 18일 미국 펜실베니아 루스벌에서 출생했다. 로스앤젤러스에서 옥시덴탈 대학을 졸업(1898)하고 1901년 9월 10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한국에서 미 북장로회 여성 선교사 헨리(Miller, Mattie Henry)와 결혼(1902)했다. 경신학교 교장으로 인재 양성을 위한 학생교육에 진력(1905-1913)하였으며, 연희전문(연세대)에서 화학 교수와 이사로 활동(1918-1942)했다. 한편 1927년 12월부터 1939년 12월까지, 12년간에 걸쳐 서교동장로교회 제3대 교역자(당회장)로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교회를 운영함에 있어 전도부인 급여를 자비로 지원했으며, 응암교회를 설립하는 등 전도사업을 활성화했다. 교인들을 지도할 영수(領袖)와 서리집사에 이르기까지 직접 선거를 통하여 임기제로 교인들 스스로 선임하게 했다. 교회를 치리함에 있어서는 대단히 엄한 면모도 있었다. 예를 들면 심씨라는 분은 '불신자(不信者)와 약혼'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교회 헌법에 위반하였다고 책벌(責罰,1933)받기도 했다. 박씨라는 분은 다른 교회에 출석한 것이 문제가 되어 제명(1938)된 일도 있었다. 세례 문답에 있어서도 어느 교인은 성찬의 뜻을 잘 구별하지 못하여 세례를 받지 못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한글을 이해하지 못해서 탈락된 일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4차례를 거듭해서 세례 문답에 응했으나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사유로 성례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학습 문답의 경우에도 3차례씩이나 계속해서 '도로 학습' 또는 '기다림' 등으로 판정하여 교인들이 보다 열심히 신앙 훈련을 쌓으면서 한글을 깨우치고 더 공부하도록 했다. 1928년 2월 19일에는 학국교회 역사상 3쌍동이(정순택-유순도 자녀)의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진귀한 성례식을 집례하기도 했다. 그는 행주교회와 도내리교회 당회장으로도 겸직한 기록(老會錄)이 있다. 또한 제1회(1911년) 노회부터 1930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예수교장로회 산하의 경충노회와 경기노회에서 서울을 포함한 경기남부, 청주 동편, 경기 중앙시찰 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공천위원, 목사장립 예식위원, 정사위원 등으로 폭 넓은 노회 활동을 했다. 이 밖에 기독교서회 이사(1934), YMCA 이사 등으로 문서선교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같은 그의 폭 넓은 선교활동은 일본 당국자들에게 곱지 않게 보여 간첩 염의로 투옥(1941.12.27-1942.5.26)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강제 추방되어 1943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저서로는 '천로지남(1914)'과 '예수께서 구원하심(1938)' 등이 있다. 그는 귀국한 뒤에도 우리나라의 해방을 위해서 미국에서 한국인을 위한 한국어 방송을 담당했다. 그리고 1966년 6월 6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정신여학교 교장 헨리 밀러 (1873-1966)선교사
M.헨리 밀러(Miller, Mattie Henry) 선교사는 1873년 미국 아이오아에서 출생했다. 1897년 훼어필드 파존스 대학을 졸업하고, 1900년까지 무디 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01년 5월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어, 1902년 밀러(밀의두) 목사와 결혼했다. 정신여학교 제5대(1905-1909)와 제8대(1910-1912) 교장으로 인재 양성에 전념했다. 1905년에 찬송가 수 십 곡을 번역하고, 정신학교 교가(校歌)도 작사 작곡했다. (주: 그후 정신교가는 아담스에 의해 곡이 바뀌고, 박목월에 의해 작사됨). 특히 M. 헨리 선교사는 남편의 선교사역을 도우면서 '초학지지' '산수 교과서' 등을 편찬하는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한국의 교육선교 분야에 공헌했다. 1943년 남편과 함께 귀국했다.
<기타 성공회 신부, 수녀 묘>
성공회(Anglican) 선교사 묘역
한국에 내한한 최초의 성공회 선교사는 1890년 9월 29일 영국 캔터베리 대교구의 코프(Corfe, Charles John)주교였으며, 양화진에 처음으로 안장된 성공회 선교사는 1896년에 내한한 터너 제2대 주교였다. 양화진에는 1926년에 내한한 차드웰 주교와 1960년에 내한한 구드윈 주교의 묘지도 함께 있다. 이밖에 허지스(Hodges, 許世實), 카트라이트(Cartwright, 車神父) 신부와, 노라(Nora, 1849-1919), 웹스터(Webster, 1856-1898), 로이스(Lois, 1854-1899)수녀 등도 묻혀 있다. 그리고 찰스워스(Charesworth, ? -1904)를 비롯하여 성체 성사를 받은 외국인과 한국인 묘도 있다.
카트라이트(Cartwright, 車神父) 신부
카트라이트(Cartwright, 車神父) 신부
웹스터(Webster, 1856-1898) 수녀
웹스터(Webster, 1856-1898)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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