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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빈턴. 토프트, 리챠드,코엔,차드웰,터너,구드윈,위더슨,존슨,켄드릭브록크만,벨/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3 (서울) /성화사랑

영국신사77 2013. 6. 17. 00:02

<빈턴>

 

레티샤 빈턴(Vinton, Letitia Coulter) 과 세 자녀의 묘

 

레티샤 빈턴(Vinton, Letitia Coulter)

 

1873년 1월 31일 영국 글래스고에서 출생하여, 1891년 4월 3일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한국에서 12년(1891-1903)간 활동하면서 남편의 선교 사역을 협력하다가 1903년 12월 4일 30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남편 C. C. 빈턴(Vinton, Cadwallader C.)


1856년 미국에서 출생했다. 1891년 4월 3일 미국 북 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내한 초기 제중원 의사를 시작으로 원장이 되었다가 ‘육체를 치유하는 것보다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 생각하고 1893년 11월 사임하고 자택에서 진료와 복음 전도를 겸하였다. 그는 한글 성서의 출판과 보급을 위하여 성서공회(聖敎書會) 창설에 참여하여 기초를 확립하였으며, “상임성서실행위원회가 한글 신약 전서의 단편 성경들을 처음으로 출판하기 시작했을 때, 그 관리인(Custodian)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성서공회사, Kenmure편지, 1904)이 있다. 그는 평양, 의주, 만주 등지를 자주 여행하면서 전도했다. 1891년 여름에는 마펫(Moffett)과 만주에서 털리(Turley)에게 ‘로스역 성경’ 출판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성경은 잘 읽혀지지 않고, 벽지로 발라지며, 폐지로도 팔고 있다고 했다. 그는 1897년 4월 1일 창간한 장로교 최초의 신문인 그리스도 신문(The Christian News)의 편집인(Business manager)으로 활동했다. 이 신문은 2부가 왕실에 전달되고, 정부는 460여부를 구입하여 서양의 문명 계몽 용도로 전국의 관청(367군, 중앙부처)에 보급했다. 그는 전도를 위한 기금 확보를 위하여 ‘재봉틀’을 수입하여 팔았고, 성서공회 건물을 이용하여 ‘벽지장사’를 하기도 했다. 1904년에는 부산 나병환자 수용소 설치에 공헌했다. 그는 1907년 12월 16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908년 미국으로 돌아가 1936년 6월 26일 뉴욕에서 별세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캐뒤(Vinton, Cadwallader C.)


청일 전쟁기간 중 한국의 기후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1894년 8월 22일 사망하여 묻혔다. 1894년은 동학혁명(東學革命)과 청일 전쟁(淸日戰爭)으로 한국 사회는 극도로 불안했다. 그해 여름은 폭염(暴炎)까지 겹쳐 더욱 힘들었다. 일본군은 톈진조약(天津條約) 위반을 구실로 청일 전쟁에 승리하여 궁궐(宮闕)까지 장악했다. 혼비백산한 백성들은 피난 행렬이 이어지고, 미국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해병대를 투입하여, 집안에 머물도록 했다. 방안에만 갇혀 지내던 선교사 가족들은 무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여 병으로 앓거나 희생되었다. 빈턴 2세 캐뒤도 이때 사망했다. 당시의 상황을 언더우드 부인 릴리어스(Lillias)는 에 이렇게 기록했다. “전쟁 동안에는 모두 서울에 남아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몹시도 무더운 날 울안에만 갇혀 지내던 선교사들이 병에 걸렸다. 전킨(Junkin)목사 부부도 우리 집에서 여름을 보냈지만 아이 한명이 죽고 말았다. 이는 몇 주 동안의 더위로 희생된 사례였다. 언더우드와 우리 아들도 여름 내내 앓았다. 에비슨 가(家)의 두세명, 알렌 가의 두 명, 아펜젤러 가의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스크랜톤 가의 아이들은 열 때문에 쇠약해 졌다. 홀 의사는 열병에 걸려 죽었다. 빈턴 부부의 아기도 그해 여름에 죽었다.” 한편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는 甲午에 “日淸이 失和하야 彼此에 交鋒하므로 京城에서 義州까지 兵火가 經한 沿路는 安堵키 不能한지라 宣敎師 等은 京城으로 避寓하고, 我敎徒 等은 山峽에 逃散하니”라 기록되었다.


토미(Vinton, Thomas)


1896년 8월 19일 사망하여 묻혔다.


왈터(Walter)


생존한 빈턴 가족은 도로시(Dorothy) 및 휴(Hugh C.)가 미국 오레곤주(Portland)와 워싱턴주(Seattle)에 살았다는 로드(Rhodes, Harry A.)선교사의 기록이 있다.

 

 

<토프트>

 

 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한국명: 杜永瑞, 1865-1928)

 

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한국명: 杜永瑞, 1865-1928)


1865년 7월 4일 영국 웰링톤에서 출생하였다. 1884년 구세군 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890년 스웨덴 출신 힐다랄손(Hildaralson) 사관(정위)과 결혼하였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랜드 등 북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및 인도 북부지방 사령관 등으로 40년간 봉직하다가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에서 그의 일생을 마쳤다. 부인 힐다랄손은 농아(聾啞)사업의 공로로 창립자 훈장을 받았다. 제임스 토프트(Toft, James)는 한국 구세군 제5대 사령관(參將)으로 1926년 8월 16일 내한하였다. 이들 부부는 서울 역에 도착하여 육아원 음악대와 많은 인사들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곧바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사관회의를 주재하는 등 활발하고 바쁜 일정을 시작했다. “한국구세군사(장형일)”에 따르면 지방 순회 첫 일정은 1926년 9월 4일, 고산지방을 시작으로 10일에는 충북 영동의 심천 주곡과, 11일부터 대구, 영덕, 13일에 의성, 26일에 충남 홍성, 29일에 개성을 순회하였다. 그리고 10월 7일 전주, 14일 해주 등지를 두루 순회하면서 사관회의를 주재하였다. 1926년 11월 4일에는 세계 구세군을 통괄하는 브람웰 부우드(Bramwell Booth) 대장 일행이 방한하였다. 그는 초대 대장의 아들로 돈독한 신앙과 실천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온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아 그의 한국 방문은 큰 행사 중의 하나였다. 부우드는 서울에 도착하여 자동차 위에서 “구세군은 인종, 계급 상하를 불구하고 흑암 중의 죄인을 구원하고, 죄, 욕심, 술, 도박보다 큰 힘을 준다.”고 연설했다. 그런데 부우드 대장의 한국 방문기간 중 ‘구세군 분규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 사관 대우에 대한 불만으로 허곤 윤수만 등이 20개 항목으로 된 진정서를 낸 사건이었다. 진정 내용에는 한국인 사관의 참모권 부여, 차별 대우의 개선, 만행(蠻行) 사관의 축출과 선행(善行) 사관의 승진, 생활비 인상 요청 등이었다. 부우드는 이 사건에 대하여 유감을 표시하고 분규행동은 비 복음적, 비 구세군적이라 지적하고 이 사건으로 배운바가 많아 1927년은 “전능의 해”로 삼기를 기원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20여명의 사관들이 면직되었으며, 그는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며 구세군의 명예를 손상시킨 충격으로 병을 얻었다. 그가 한국에 부임한지 2개월 반 만에 겪는 엄청난 사건이었으며, 책임이 그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과중한 정신적 부담이었다. 결국 이로 인하여 1928년 5월 25일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치료와 간호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1928년 6월 15일 새벽 3시 별세하고 말았다. 1928년 7월호 구세신문에는 “구세군 조선사령관 참장 두영서씨 별세”라는 제목으로 차드(Robert Chard, 한국명: 車宇道) 서기 장관은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다. “참장께서 조선에서 일하신 것은 참으로 어려운 처지와 형편 아래에서 나아가게 되었는데 조선 임명 첫해에 당하신 그 고난과 낙망은 육체와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나, 그것도 불구하고 일을 계속하여 건강이 악화되어 별세 2주일 전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종말에는 이 세상을 영영 하직하고 영원한 나라로 가서 만왕의 앞에 계시게 되었도다... 참장은 일평생 선한 싸움을 싸우셨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셨고 이 세상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사신이가 되었도다.” 그는 구세군 사령관 재임 기간 중 정동 사관학교, 대구군영, 해주군영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을 확장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쿠퍼(Harold Cooper, 한국명: 具佑保) 참모 정위는 “그가 우리 지방(해주)에 여러 영문을 방문하여 주신 것을 심히 기뻐하며 전하신바 복음과, 끼치신바 모범과, 감동과 감화는 우리와 함께 머물러 있을 것이다. 지방 영문을 순회할 때에 태산준령을 넘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피곤한 내색도 보이지 아니하고, 구주를 위하여 기쁨으로 하셨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편벽됨이 없이 곧고 바르게 하셨다.”고 하였다. 장례식은 차드(Robert Chard) 서기장관의 인도로 거행되고 유해는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He is with Christ"라 기록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리챠드, 이도식 사관 >

 

리챠드, 이도식 사관

 

 윌리엄 리처드(Richards, Williams J. 한국명 : 이도식)


1878년 영국 런던에서 윌담스토우 출신 존 리처드 부장의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열두 살 때 구세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캐더린(Catherine)의 묘 앞에서 헌신을 다짐했다. 런던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덴마크에서 7년간 선교사관으로 봉직하였다. 1909년 2월 8일 메리 킬로(Richards, Mary K.) 부관과 결혼하였으며 만국 본영의 문학부에서 봉직했다. 1913년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선교사관으로 파송되어 지방장관과 청년부 서기관으로 봉직하였다. 1918년 6월 2일 한국 구세군 서기장관으로 명령을 받아 내한하였다. 이 무렵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한국의 첫 인상과 예배의 모습을 그의 딸은 <선교사관 자녀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아버지(리처드),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서울에 온 것은 1918년 6월 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종려나무와 바나나 나무만 보다가 한국에서 소나무를 처음 보니 아주 신기했다. 눈도 많이 와서 겨울에는 난로를 피웠다.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할 때는 반드시 성경책을 색 보자기에 소중히 싸가지고 왔다. 그리고 책보를 풀어 성경책과 찬송가를 꺼낸 뒤에는 그 책보를 착착 개어서 앞에 놓았다가 다시 싸가지고 가곤했다. 마루 바닥에 앉아 “찬송합시다”라는 찬송을 부를 때에 어떤 할머니는 남이 다 부른 후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길게 여음을 끄는 것이 신기했다.” 한국에 부임한 리처드 서기장관은 구세군을 발전시키는데 노력하였다. 선교자금을 조달하고 한국 여성사관을 양성하였으며 고아원(육아원)을 개원하여 구제사업에도 공헌했다. 그는 브래지(George French, 한국명 : 夫來智) 사령관이 갑자기 전근되어 사령관 직무 대리를 수행하면서 1918년 한국 구세군 개전 10주년 대회 준비에 과로하며 힘썼다. 구세군 고아원 운영 과정에 대하여 그의 딸 기록에는 “나는 아버지가 밤중에 초롱불을 들고 나가 거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가끔 보았다. 서울의 고아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사관학교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깍아 주고 새 옷을 갈아 입혔다. 그때 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놀랬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중에 천연두를 묻혀 와서 온 사관학교에 퍼지게 되었다.” 결국 고아원 운영과정에서 퍼진 천연두 때문에 구세군 선교사 가족들이 사망하고 리처드 자신도 선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이 땅에 묻히게 되었다. 이 무렵 구세공보와 관련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구세군 선교사 가족들은 천연두로 인하여 여러 명이 희생 되었다. 리처드가 서울고아원을 운영하면서 거리에서 아이를 데려오는 과정에서 이미 천연두에 감염된 아이를 고아원에 수용하므로 인하여 천연두가 확산된 것으로 해석된다. 실베스터(설 보덕) 정령 집에도 천연두가 전염 되어 실베스터 선교사 두 아들이 앓아눕게 되었다. 이때까지 리처드는 이 전염병에 감염되지 아니하여 그?매일같이 실베스터 가족의 심방을 비롯하여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1월 19일 실베스터의 셋째 아들 더글러스 실베스터가 두 살의 어린나이로 천연두에 의하여 사망하였다. 뒤이어 같은 해 1월 28일 실베스터의 큰 아들 고던 실베스터도 사망하였다. 이때 리처드는 두 아이의 장례식을 집례 하였으며, 눈 위로 먼 길을 걸으며 평동에서 양화진까지 왕래하게 되었다. 결국 리처드도 이로 인하여 다음 주간에 병에 걸렸으며 얼마간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그도 천연두로 인하여 1920년 2월 5일 별세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실베스터 가족에 뒤이어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구세공보에 보도된 ‘한국에서 순직한 선교사관 리처드 부령의 감화’라는 제목에서 뿌람월 푸드는 리처드의 죽음에 대하여 “리처드 부령은 강직하고 열렬한 구세군 주의의 좋은 표본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헌신하여 그의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어디든지 나아갔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봉사 순종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라 했다. 리처드는 “나의 가장 큰 기쁨과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의 나라에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그 후 그의 부인과 4자녀의 가족들은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의 아버지(캐나다 사령관)와 캐나다 구세군의 헌금으로 아영 영문에 1922년 12월 8일 ‘리처드기념관’ 이 건립되었다. 묘비에는 "Duty done Victory Won" 이라 쓰여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코엔>

 

 R. C. 코엔(Roscoe C. Coen) 묘 예정지와 아들 M. S. 코엔 묘


로스코에 C. 코엔 (한국명: 高彦)은 미국에서 시카고대학을 졸업(1918)하고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8년 10월 1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부인(Mary Bushanan)과 함께 내한했다. 그는 서울 연지동 1번지와 136번지에 거주하면서 선교사로서 특히 경기 중앙시찰구역과 남부시찰장 등으로 15처의 교회를 주관하는 등 많은 선교 활동을 했다. 노량진교회에서 동사목사(同事牧師)로 활동(1921-1923)을 비롯하여, 광주 신사리(新沙里)교회, 광주 鎭村교회에서 곽안련(Clark, Charles Allen)선교사와 상계(相繼) 시무한바 있다. 용인 아곡(牙谷, 1925)교회, 시흥 삼성(三星, 1919, 1929)교회, 안성 안성읍교회(1928), 방축리(防築里)교회, 대갈리(大葛里)교회에서 당회장 등으로 시무했다. 그리고 광주 용수리교회(1927), 용인 문촌교회, 아고리교회에서 사경회 강사로 활동했다. 경ㆍ충노회에서는 목사가족구조부(1920-1928), 학무부(1922-1923), 공천부(1922), 경기남편시찰장(1923), 목사장립위원, 부회계(1927-1928), 재정부(1925-1930) 등에서 활동했다. 이밖에 진우, 쌍동, 상동막, 신대교회와 시흥지역에서 둔전, 금광, 둔토, 세곡, 송파, 심곡, 교회, 수원지방의 학현, 부림교회 등 경기 중앙 및 남부시찰 구역의 교역자로 헌신하였다. 그리고 “미국북장로회선교역사” 편찬위원(1931)으로 활동하고 노해리 선교사를 도와 “The Korea Misson Field”의 편집에도 참여하였다. 조선예수교서회 실행위원(1934)과 한국에 있는 중국인 선교사업 감독으로 활동했다.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서 성서와 영어를 강의했으며 재단 이사(1940)로 선임되기도 했다. 연세대교수 재임 기간에 인접하여 있는 서교동교회 교역자로 겸직(1935. 11. 10 - 1936. 4. 29)하면서 당회장 직무를 비롯하여 성례와 성찬식을 집례하고, 구역을 조직하여 가정기도회를 갖게 하였다. 12집사를 교인들을 통하여 민주적으로 뽑게하여 교회를 섬기게 했다. 1942년 강제 출국되었다가 1946년 다시 내한하여 서울에서 선교사업 복구활동과 영락교회 맹인 선교사업을 지원했다. 1946년 조선기독교연합회(NCC) 대표로 참여한바 있으며 1948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양화진 제2묘역(가-7)은 코엔 부부의 묘지로 예정되어있지만, 지금까지 빈자리로 남아있다. 할 수만 있다면 믿음의 후배인 우리들이 그 분들을 아들 옆으로 모실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다. 부인 메리 B. 코엔 (Coen, Mary Bushanan)은 미국에서 R. C. 코엔과 결혼했다. 1918년 10월 1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남편과 함께 내한했다. 그는 한국에서 남편의 선교 활동을 내조하면서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음악을 가르쳤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M. S. 코엔 (Coen, Miles Stanley -1919)


코엔 부부사이에서 1919년 낳은 아들이다. 그의 출생 일은 알 수 없으나 1919년 2월 23일 사망하여 양화진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묘역에는 작은 비문이 세워져 있다.

 

 

<차드웰 성공회 주교>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주교 묘 전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주교 묘 후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주교 묘 전면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車愛德, 1892-1967)은 1892년 8월 1일 영국 햄스테드(Hampstead)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 런던대학과 처선트신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에 부제, 1923년 사제로 서품 되었다. 1926년 내한하여 1928년까지 충북 진천에서 활동하였고, 1931년까지는 북한의 배천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1년부터 1941년까지는 평양에서 성공회 사제로 봉직하였다. 그가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일제는 영국 선교사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일본이 일으킨 중국 침략 전쟁을 강력한 항의 성명으로 발표하였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그 첫 번째 피해자인 차드웰은 1940년 7월 24일 외환관리법 위반과 단파 라디오를 소지했다는 죄목으로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쿠퍼 주교도 같은 해 8월 10일 연행되어 4일간의 구류를 살았다. 차드웰은 1941년에야 석방되어 한국에서 제일 늦게 강제 추방된 선교사가 되었다. 그가 한국을 떠난 뒤에는 스리랑카와 영국에서 활동하다가, 8·15 광복이 되어 1946년 다시 내한하여 청주에서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1950년 6·25 전쟁 기간 중 7월 18일 간첩 혐의로 공산군에 체포된 쿠퍼(Alfred Cecil Cooper, 具世實) 주교가 납북(拉北)되자 그를 대신하여 차드웰이 성공회를 지켰다. 이에 따라 캔터베리 대주교는 공백기의 책임을 차드웰에게 맡기기로 하고, 보좌 주교로 임명하여 1951년 11월 30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주교 승품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 선교를 위하여 성직자의 확보가 1차적 과제라고 생각하고 긴급히 독신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독신 선교사를 요청한 사유는 선교비의 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교사가 빨리 한국어를 습득하고, 적어도 10년간 봉사할 수 있는 젊은 사제를 파송해 주기를 바랬다.  그 후 교회(성공회)들은 차드웰의 목회 지도아래 전쟁의 상처를 씻으며 건실하게 성장해 갔다. 여기에는 한국인 성직자들의 노력이 매우 컸다. 차드웰 주교는 1953년 5월 31일 서울 대성당에서 1949년 이래 처음으로 부제성직에 김태순과 윤주현을, 사제성직에 이천환과 김경득을 각각 안수하였다. 그 후 이천환(李天煥)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승인을 받아 75년간의 선교사 시대를 마감하고 1965년 5월 27일 주교 승좌식을 갖고 한국인 초대 주교로서 서울교구를 창립한 인물이 되었다. 1955년 차드웬은 주일복음 설교집을 출판하였다. 선교 활동에서 출판물은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1963년 은퇴 후에도 인천성당에서 1년간 봉직하였다. 한편 한국전쟁 중 체포되었던 쿠퍼 주교가 1953년 11월 14일 귀환하였으나 1955년 1월 16일 마지막 미사를 집전한 뒤 사임했다. 그리고 새로운 한국 주교를 물색하여 1956년 1월 17일 아프리카 가나의 교구장이던 데일리(John Daly, 한국명: 김요한)가 한국 교구의 제5대 교구장으로 전임 발령되었다. 차드웰 선교사는 1967년 11월 21일 부산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여 양화진 성공회 구역에 안장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주교 묘비 전면

 

묘비에는 “May His Wounds both wound and heal me, He enkindle, cleanse, anneal me. Be his Cross my strength and stay(주님의 상처는 나를 상하게 하여 고치며, 불 붙여 깨끗이 하여 단련하고. 주님의 십자가는 내 힘과 의지가 되어지이다.”이라 쓰여 있다.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주교 묘비 후면 

 

 

<터너 주교>

 

아더 B. 터너(TURNER, Arthur Beresford) 한국 성공회 주교


아더 B. 터너(TURNER, Arthur Beresford 한국명: 端雅德, 1862-1910) 주교는 1862년 8월 29일 영국 솔스베리에서 출생하여 1885년 옥스퍼드(Oxford) 키블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896년 12월 2일 영국성공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대성당에서 코프 주교를 보좌하였으며, 공덕동성당과 인천성당에서 봉직하였다. 1904년 7월 초대 주교였던 코프가 사임하여 제2대 한국 주교로 1905년 1월 25일 터너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서품되었다. 그는 겸손한 인격과 통솔력을 발휘하며 수원과 진천까지 선교범위를 확장하고 교회의 자립에 힘썼다. 성공회가 운영하는 병원을 비롯하여 고아원과 학교기관도 자립시켰다. 교회마다 부설학교를 설립하여 여성의 기본 상식과 실업(實業)교육을 실시하고 교회 조직과 토착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YMCA 초대(1903)이사, 체육위원회 위원장, 황성기독청년회 회장(1907) 등으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에 축구를 처음으로 보급하여 한국 최초의 축구선수(이호성 등)를 양성한 인물이기도하다. 1910년 10월 28일 오후 4시 인천 성 누가병원에서 신병으로 별세하여 11월 1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후임 주교 트롤로프(Trollope, 조마가)와는 같은 학교 동급생 관계였다. 터너의 죽음에 대하여 게일(Gale, J. S.) 선교사는 "터너 주교의 죽음으로 서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지난 14년간 그는 우리들과 함께 지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똑같은 아주 친절한 주인이며, 기쁨을 주는 손님이었고, 확고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한국과 한국인 그리고 모든 친구들을 위해 살았습니다."라고 추도사를 선교 잡지에 게재하였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아더 B. 터너(TURNER, Arthur Beresford)  

 

<구드윈 주교>

 

찰스 구드윈 (GOODWIN, Charles) 한국 성공회 주교


찰스 구드윈 (GOODWIN, Charles 한국명: 具斗仁) 주교는 1913년 5월 5일 미국 코네티컷에서 출생하여 1931년 성바올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예일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36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수료하였다. 1939년 미국 케임브리지성서공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사제로 서품 받았다. 1939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과 영국에서 성서 원전과 신약을 전공하고 고전어의 대가가 되었다. 1960년 9월 대한성공회 주교로 내한하여 부산과 서울 관구에서 활동하였다, 성공회대학과 연세대 신과대학에서 교수로 성서 원전과 고전어를 강의하였다. 성서원어와 한국어 비교연구에 공헌 후 귀국하여 1997년 6월 28일 별세하였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찰스 구드윈 (GOODWIN, Charles) 한국 성공회 주교  


 

<마리 위더슨 선교사>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1898-1956) 선교사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1898-1956) 선교사


마리 위더슨은 1898년 4월 4일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여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으로 이주하였다. 성장하면서 천성이 온순하고 신앙이 돈독하였다. 1925년 요하네스버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남아프리카 영문 담임사관으로 일했다. 이때 크리스 위더슨을 만나 1926년 약혼하였다. 1927년 가을 결혼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먼 길을 외롭게 떠나 1927년 가을 부산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여 결혼했다. 남편(Chris)을 내조하며 선교사로서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1934년까지 7년간 한국에 살았으며 이때 첫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은 고아들의 친구가 되었다. 고아들은 주로 거리에서 데려온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항상 전염병의 감염과 위협을 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크리스가 전염병으로 앓게 되고 부인 마리도 발진티푸스로 앓아눕게 되었다. 그는 고열로 헛소리를 하면서 며칠동안 의식을 잃은 일도 있었다. 의식을 회복하고 첫 걱정으로 고아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였다.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아이들을 잘 보살폈다. 그 후 1934년 2월 한국을 떠나 아프리카 케냐에서 봉직하였다. 위더슨 부부는 1953년 1월 19일 한국 전쟁 기간 중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부산으로 다시 돌아 왔다. 6∙25전쟁으로 폐허화된 상황 속에서 구세군을 다시 조직하고 부흥시켰다. 이때 남편은 구세군 사령관으로, 부인은 고아원 원장 겸 가정단 총재로 봉직하였다. 그들은 한국에서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진정으로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을 위하여 봉사하였다. 위더슨 부인은 위암으로 투병하면서 크리스마스 자선냄비 때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거리로 나와 전도지를 뿌리며 동료들을 격려했다. 병상에서 글로 써 가정단 사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사령관 남편에게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내가 죽어도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부탁합니다. 오늘 나는 한국 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됨을 무한한 기쁨으로 압니다.”라고 유언 했다. 그는 귀국을 원하지도 않았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갈수 있다.”고 하면서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면서 1956년 5월 10일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장례식 때에 그를 조문하는 60여대의 자동차가 늘어섰으며 이승만 대통령과 김태선 서울시장 등 주요인사 90여명의 조객록이 작성되었다. 묘비는 1956년 9월 17일 건립되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구세군 사령관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魏道善)은 1926년 11월 내한하였다. 한국 구세군 사령부에서 정위로 8년간 봉직하다가 1934년 2월에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케냐에서 총무서기관으로 일하다가 구세군 한국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53년 1월 9일, 한국 전쟁 기간 중 구세군 사령관으로 부산 수영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는 내한하여 사관회의를 주재하였으며 해군 장교구락부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와 구세군이 공동으로 주최하며 신익희 국회의장 등이 임석한 환영식에 참가했다. 한국사령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주요 업적으로는 첫째 54명의 사관을 배출하고 13개소의 전장부를 신설하거나 재건하였다. 둘째 19개소의 건물을 신축하거나 개수하고, 7개소의 사회사업소를 개설하였다. 셋째, 서울(아현, 마포, 돈암, 영등포 등), 부평, 춘천, 대구, 부산 등지에 급식소를 신설하여 월 평균 5천명에게 음식을 나눴다. 이밖에 245,673명에게 일반구제 사업을 펼쳤으며 영동병원을 통하여 입원 및 외래환자를 돌보아 주었다. 그는 사랑하는 부인과 한국에서 사별하고 1957년 8월 1일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돌아갔다.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1898-1956) 선교사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1898-1956) 선교사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1898-1956) 선교사 비문 앞면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1898-1956) 선교사 비문 후면

 


<테일러>

 

조지 A. 테일러,  아들 앨버트 W. 테일러 묘

 

조지 A.테일러(Taylor, George Alexander) 묘


조지 A. 테일러(Taylor, George Alexander,1829-1908)는 1829년 3월 17일 미국에서 출생했다. 그는 버지니아와 알라스카에서 금(金)을 채굴한 경력이 있으며, 1896년 11월, 67세의 고령으로 내한했다. 평안북도 운산 금광의 제임스 모스(James Morse)와 동업자 레이 헌트(Leigh S. J. Hunt)의 금광에 한국 최초 채금(採金) 전문가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이 금광은 1896년 미국무역(American Trading Co.)이 광권(鑛權)을 허가받아 동양연합광산(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에 승계되었다. 이 광산은 너무 많은 금이 생산되어 일명 “노다지”로 불려 졌다. 노다지란 목적한 광물이 �아져 나오는 광맥(Bonanza)의 뜻으로 사용 되지만 이 용어는 “운산금광”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금을 찾아 너무 많은 사람이 접근하여 “노터치(No touch)"라는 접근 금지 경고판을 써 놓았는데 이 표시가 금이 많이 나오는 상징으로 오인되고 ”노터치“가 “노다지”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금광은 고종 황제에 의하여 1910년까지 광권(鑛權)이 보호되고, 그 후 총독부도 개입하지 않아 1939년까지 미국인 광산으로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조지 테일러는 이 광산에 종사하면서 한국 무역업의 기반을 구축할 정도로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1908년 12월 10일 79세로 한국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묘비에는 “한국 광산 개척자(Pioneer mining engineer to Korea)”, “Master, the long, long shift is o'er, I have earned it Rest.(주님!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라 쓰여 있다. 

 

앨버트 W. 테일러(Taylor, Albert Wilder) 묘


조지 A. 테일러의 아들 앨버트 W. 테일러(Taylor, Albert Wilder)는 상속 받은 재산으로 형 윌리암(William)과 서울 소공동에 “W. W 테일러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M), 포드, 크라이슬러, 오버랜드(Overland) 등에서 제작한 “자동차”를 한국에 수입. 판매하였다. 또한 미국의 영화사로부터 영화(필림)를 수입하여 여러 극장에 대여하였다. 쉐퍼(Sheaffer) 만년필을 포함한 수많은 생활 용품들도 그들의 무역을 통하여 한국에 유통되었다. 앨버트 W. 테일러는 메리 린레이(Mary Linley)와 결혼하였으며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양식 저택을 짓고 살았다. 이 집은 서울 종로구 행촌동 1-18번지에 있으며, 아직도 그 원형이 보존되어 건축가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이집에 살고 있는 안정희(1931.10.25생), 서금순(1937.10.15생) 증언(2005.7.20)에 의하면 “17가구의 무연고자가 지금도 살고 있으며, 아직도 방음(防音)이 잘되고, 현관 바닥과 창틀이 원형대로 보존되어있다.”고 했다. 이 곳에는 둘레 6.8m, 높이 23m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울시 보호수(고유번호1-10)로 지정되어있다. 이 터는 임진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 승리한 권율(權栗, 1537-1599)장군의 소유였으며, 1920년 앨버트 테일러가 구입하여 “즐거운 세상의 궁전(Palace of Earthly Delights”이란 뜻의 “딜쿠슈아(Dilkusha)"로 명명하여 1923년 건축되었다. 전망이 좋고 집이 잘 지어져 주한 외국인들의 사교 공간으로 빈번히 사용되었다.


여주인 메리 부인은 연극배우로 런던에서 연극을 했고. 1917년 앨버트를 만났을 때는 상하이, 요코하마 등 극동 무대에서 활약했다. 서울 외국인학교 공연과 외국인 축제 때에는 연극 지도에 앞장섰다.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어 1942년 그립숄(Gripsholm) 배편으로 미국에 돌아갔다. A. W. 테일러는 8.15 광복후 한국에 남겨둔 재산을 회수하고자 미군정청 고문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가 살던 “딜크슈아”는 이미 큰 손실을 입었으며, 불법 점유자들이 살고 있었다. 남기고 간 자산은 은행 계좌에 보존되어 있었으나 그 가치는 매우 낮게 평가되었다. 그는 1948년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인은 캘리포니아 맨도시노(Mendocino)에서 1982년 93세로 별세하였다. 앨버트 부부에게 부르스(Bruce)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성장하여 영국 총영사 제랄드 핍스의 딸 조이스 핍스(Joyce Phipps)와 결혼하였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존슨 선교사>

 

왈터 V. 존슨(Johnson, Walter Virgil) 선교사


왈터 V. 존슨(Johnson, Walter Virgil, 贊, 1874-1903)은 1874년 8월 30일 미국 미주리에서 출생했다. 1898년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1901년 오번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년 반 동안 워싱턴에서 교역자로 목회 생활을 하다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부인 에밀리 H. 존슨(Johnson, Emily Hartman)과 함께 한국 선교를 자원했다. 존슨 목사 부부는 한국에 선교사로 부임하기 위하여 미국을 출발하여 태평양을 항해 중일 때, 부인은 귓병(化膿, Abscess)을 앓게되었다. 불행하게도 병균이 뇌에 침투되어 건강이 더 악화되자 한국 땅은 밟아보지도 못하고 1903년 1월 13일, 27세에 일본 코베(Kobe)에서 숨지고 말았다. 존슨은 사랑하던 부인을 일본 땅에 묻고 한 달 정도를 일본에 머물다가 1903년 2월 12일 홀로 내한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전념하며 온갖 충성을 다하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도 역시 겨우 한 달 정도의 선교사 준비 과업을 수행하다가 천연두(Smallpox)로 인하여 선교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1903년 3월 18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돌아보는 이 없이 외롭게 묻혀있다. 한국 체재기간이 너무 짧아 그를 기억하거나 아는 이가 별로 없지만,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다. 묘비에는 "Faithful unto death(죽도록 충성을 다하였느니라)"라는 기록도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켄드릭 선교사>

 

루비 R. 켄드릭(Kendrik, Ruby Rachel) 선교사


루비 R. 켄드릭(Kendrik, Ruby Rachel, 1883-1908)은 1883년 1월 28일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했다. 1905년 캔자스 여자 성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감리회에 선교사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미달로 2년을 기다려야 했다. 1년은 교사로, 1년은 대학 특별과를 더 공부한 뒤 1907년 9월 텍사스 엡윗 청년회 후원으로 미국 남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한국에 체재하는 기간이 1년도 못되었지만 황해도 개성에서 여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이 기간의 주된 일은 선교사역의 준비와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에 불과하여 선교의 꽃을 피우지는 못했다. 급성 맹장염으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으나 1908년 8월 15일 25세의 젊은 처녀 선교사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지에는 고향 엡윗 청년회원들이 모금하여 묘비를 세웠는데, 화강석을 조각하여 만든 비문 상단에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만일 내게 천의 생명이 있다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이라는 인상적인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碑文)은 그가 생존시 텍사스 엡윗 청년회에 보낸 편지 속에 있었던 내용이며, 이 편지가 미국에 배달되었을 때 이 청년회는 연합 대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그들의 후원으로 한국에서 열정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는 켄드릭 편지에 참석자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편지를 받고 난 바로 다음날 엡윗 청년회에는 또 하나의 소식이 전해졌다. 켄드릭 선교사가 한국에서 별세하였다는 전보였다. 회의 참석자들 모두는 놀라고 슬퍼했다. 그러나 이 대회 참석자 중 20명이 선교사로 자원하는 놀라운 결단의 기회가 되었다. 그 후부터 텍사스 엡윗 청년회는 해마다 헌금하여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지원했다. 캔드릭은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명, 20명, 50명씩 한국으로 나오라고 일러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루비 R. 켄드릭(Kendrik, Ruby Rachel) 선교사 묘

 

비문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만일 내게 천의 생명이 있다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루비 R. 켄드릭(Kendrik, Ruby Rachel) 선교사

 

<브록크만 선교사>

 

브록크만 가(家) 3대의 묘지

 

프랭크 M. 브록크만(Brockman, Frank Marion) 선교사


프랭크 M. 브록크만(Brockman, Frank Marion,1878-1929 巴樂萬)은 1878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으며, 네브래스카 오마하(Omaha) YMCA 학생부 간사로 활동했다. 1905년 내한하여 1906년 한국 YMCA 부총무로 봉직하면서 직업교육을 주도했다. 직업교육 과정은 목공, 철공, 화공, 염색, 그림, 도자기, 제화 등 전문교육이었다. 이 무렵 직업교육은 하나의 새로운 전문직 창출(創出)을 위한 교육이었다. 특히 강연회와 토론회는 큰 성과가 있었다. “산업교육의 필요성, 과학교육의 필요성, 산업의 기능과 국가 발전, 기업과 사회 발전, 복지사회의 건설” 등 다양한 주제의 강연회와 토론회는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으며 청년들의 사회 참여를 유도했다. 이때의 강연회와 토론회 분위기에 대하여 질레트(P. L. Gillett) 총무는 “YMCA의 강연회와 토론회는 다른 데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미국에서도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없다. 37회의 토론회와 38회의 강연회는 300명 내지 400명의 청중이 모여들어 강당은 언제나 꽉 찼다.”라고 보고했다.(자료: 한국YMCA운동사) 그 후 브록크만은 1908년 황성기독청년회에서 공동총무로 활동했다. 그리고 1914년, 조선중앙 YMCA와 9개 학생 YMCA 등을 포함하여 조선 YMCA연합회(현, 한국 YMCA연맹)를 조직하여 초대 총무로 선임되었다. 이승만 박사와 함께 상류 지식층 청년들을 상대로 YMCA 학생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서민 중심의 교회였기 때문에 그들은 지식층을 수용하기 위하여 활동했다. 평양 숭실, 선천 신성, 광주 숭일, 전주 신흥, 군산 영명학교 등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 YMCA를 조직했다.  1910년 6월, 최초의 학생 하령회(夏令會, Summer Conference)의 주역을 담당했다. 1911년 6월에는 개성에서 전국 21개 학교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2회 하령회를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항일(抗日)과 애국(愛國)을 다짐했다. YMCA 하령회 때문에 그는 105인 사건과 연루되었다.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모사(謀事) 했다는 것이다. 전택부 선생은 이 사건을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과 신민회 회원들이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러 갈 때 암살하려고 음모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YMCA 세력과 학생 Y가 미워서 꾸며낸 것도 사실이다."라고 했다.(자료: 양화진 외인열전) 105인 사건은 1911년 11월 11일 선천 신성학교 학생과 선생을 검거하여 서울로 압송한 사건 등에서 비롯된다. 여하튼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저다인(L. L. Gerdine) 회장은 강제 사면되고, 질레트 총무는 국외 추방되었으며, 이승만 박사는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브록크만은 YMCA 사업에 너무 열중하다가 35세 때(1912)에야 친구들의 권유로 R. S. 브록크만 (Mrs. R. S. Brockman) 부인과 만혼(晩婚)했다. 그 후 1916년부터 협동 총무로서 1922년까지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선교잡지 《조선 청년》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23년, 신흥우 총무와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미국 국제 본부를 방문하여 1925년부터 10명의 농촌 기술자를 미국과 캐나다에서 파송 받고, 재정 원조도 약속 받기로 하는 등 성공적인 과업을 이룩했다. 그가 주도한 지도자협의회는 농촌운동 역사상 획기적인 것이었다. 1927년, 과로로 인한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했다. 1929년 6월 10일 미국에서 별세하여 프린스턴신학교 장(葬)으로 집례되었다.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으로 돌아왔다. 묘비에는 '24년 간 한국의 증인 일꾼, 평화의 인, 친구(For twenty four years in Korea, Seer Builder, Peace Maker, Friend)'라 기록되었다. 그는 평생을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그의 형 플렛쳐 S. 브록크만(Brockman, Fletcher Sims, 1874-1939)은 중국 YMCA 총무로 활동하면서 1903년 한국 YMCA 창설 자문위원회 특별 강사로 내한했다. 1903년 10월 28일 황성기독청년회 창설공로자이다. 1905년 동생 브록크만의 한국 파송도 주선했다. 그 뒤에도 가끔 YMCA 초빙을 받아 중국에서 한국에 입국하여 지도자 훈련 등에 참여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어머니 (Mrs. Brockman, W. A. 1840-1915)


1840년 2월 26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915년 3월 7일 한국에서 별세했다.

 

딸 바바라 브록크만(Brockman, Barbara, 1914-1922)


191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22년 8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샤롯 위더스픈 벨>

  

샤롯 위더스픈 벨(Bell, Charlotte Ingram Witherspoon) 선교사

 

샤롯 위더스픈 벨(Bell, Charlotte Ingram Witherspoon) 선교사

 

샤롯 위더스픈 벨(Bell, Charlotte Ingram Witherspoon) 선교사


유진 벨의 아내인 샤롯 위더스픈 벨(Bell, Charlotte Ingram Witherspoon) 선교사는 1867년 5월 13일 미국 켄터키주(Louisville)에서 신학대학장의 딸로 출생했다. 1884년 유진 벨과 결혼했고,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1893년 임명되었다. 출발이 지연되어 1895년 2월 12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나 1895년 4월 9일 긴 여행 끝에 서울에 도착했다. 남편과 서울에서 얼마동안 활동하다가 호남지역으로 배치되어 1898년 목포로 옮겼다. 1896년 5월 27일 아들 헨리(Henry)를 낳고, 딸 샤롯(Charlotte)은 1899년 1월 6일 낳아 양육했다. 선교 지역이 목포로 변경됨에 따라 우선 마을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가정학교를 시작했지만, 주부 선교사로서 살림살이에 어려움이 컸다. 예를 들면 서울에서 함께 일하던 유모를 동반하지 못하여 새 유모를 맞는 과정의 어려움, 집안 일을 돌보는 시골 하인들이 서구 문명에 익숙하지 못한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서 겪는 어려움 등이었다. 더욱이 선교사 사택 건축공사가 한참 진행중인 상태에서 한편에는 총각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이, 그리고 다른 방에는 여성 선교사 스테레퍼(Straeffer)가 살았으며, 또한 어학 선생까지 동거하였으니 집안을 꾸려가기란 참으로 벅찬 일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남편 E. 벨 목사는 시골의 전도여행과 선교회 활동 등으로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아 심리적 갈등이 있었다. 당시 처했던 상황과 마음가짐에 대하여 그의 여동생에게 1899년 2월 보낸 편지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남편이 선교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가사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힘쓰고 있다. 남편을 위하여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나의 선교사역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어려운 일을 해낼 것 같지 않으나 해야만 한다. 나는 언제나 향수에 젖지만 한국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믿는다.”  결국 그는 심장병을 얻어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일년이 넘도록 외롭게 고생하며 지내다가 1901년 4월 12일 전도 여행 중 목포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이때에도 남편 E. 벨은 전주(全州) 여행 중에 있었다. 언더우드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을 치르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남편은 장례식을 치른 뒤 서둘러 목포로 내려가 두 자녀를 데리고 귀국했다가, 1902년 12월 말 목포로 다시 돌아와 선교사업을 계속했다. ‘샤롯기념예배당’은 1903년 6월 28일 목포에서 헌당되었다.(자료:양림교회사). 양화진 묘비는 2002년 다시 건립되었다.


유진 벨(Bell, Eugene, 裴裕祉, 1868-1925)선교사


1868년 4월 11일 켄터키주 스코트 선교구에서 출생했다. 1891년 루이스빌 센트럴 대학을 졸업하고, 1894년 캔터키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1895년 4월 9일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1908년 그의 집 사랑채에서 3명의 여학생을 모아놓고 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가 광주에 있는 오늘의 수피아여학교이며, 남학생을 모아 공부를 가르친 곳은 숭일학교로 발전했다. 광주 기독병원 설립에도 산파역을 담당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대 총회장(1914), 전라노회 창립 부회장(1911) 등으로 활동했다. 그가 설립했거나 시무한 교회는 목포에서 양동교회(1898)와 광주에서 구소리(九巢里,1899), 송정리(1901), 북문내(1904), 향사리(1908) 일곡(1909), 월성리(1916), 금당리(1917)교회 등이 있다. 그리고 담양 무정(1900) 및 담양읍교회, 해남 우수영(1902) 및 백호(1903)교회, 함평 영흥교회(1903), 장성 소룡(1905) 및 장성읍교회(1912), 나주 상촌(1907)교회, 삼도리(1915) 및, 동수리교회(1922), 화순 백암리교회(1920) 등이 있다.(자료: 조선예수교장로교회사기) 그는 호남지방 선교에 헌신하다가 지나친 격무로 건강이 악화되어 1925년 9월 28일 57세로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곳에는 1904년 재혼하고, 제암리 교회 학살 현장 진상 조사 후 광주로 귀향하다가 병점 건널목에서 열차와 자동차 충돌사고로 1919년 3월 별세한 마가렛트(Bell Margarlet W.) 두 번째 부인도 함께 안장되었다. E. 벨의 딸 샤롯은 성장하여 린턴(Linton, W. A., 仁敦)과 결혼하고, 호남지역 선교사로 40여년 활동했으며, 그 후손들이 유진벨 재단을 설립, 운영 중에 있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