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제일교회(기장)
청주제일교회는 1904년에 청주읍 교회로 세워졌다. 1900년 말부터 북장로회의 민노아 목사는 장로교의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은 충청도(忠淸道) 지방에 선교의 뜻을 두고 보조자 김흥경(金興京)조사와 함께 청주지역을 돌며 전도하여 김원배(金源培), 방흥근(方興根), 이영균(李英均), 김재호(金在皓), 이범준(李範俊) 등과 같은 유망한 청년들이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들 중심으로 1904년 남문밖에 여섯 개의 방을 가진 커다란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김흥경의 처소 겸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전도한 이들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열었다. 교회가 정치·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는 젊은층에게 새로운 가치와 활동의 공간을 제공하였으므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교회에 나왔고, 사회의 변화와 구국을 갈망하던 젊은 청년들도 열심히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교회 설립 1년 만에 교인이 50여명을 넘을 정도로 부흥하였다. 교인의 증가로 이 초가집으로는 더 감당할 수가 없어 1905년에 새로운 부지를 물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부지를 매입할 만한 자금이 문제였다. 마침 교회 설립자의 한 사람인 김원배가 임종 유언으로 교회에 기부금 100원을 헌납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온 교인들이 교회건축을 위한 헌금 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새로운 교회부지를 매입하고, 거기에 교회를 크게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그곳이 현재 청주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남문로 1 가 154번지 일대의 지역이다.
청주제일교회
이곳은 본래 청주 영장(營將)의 관사와 죄인들을 가두는 옥사가 있었던 장소로 조선 후기 천주교 대 박해 때에 많은 교인들이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순교의 피눈물을 흘리던 역사적인 곳이다. 그러므로 청주읍교회는 개신교회로서, 조선시대 천주교인들이 고문당하고 순교 당한 바로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데에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은 당시 동학운동(1894∼95) 때 관군 편을 들어 공을 세운 보부상 조합이 그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교회가 그 땅을 사들인 것이다. 1천 5백 평되는 넓은 대지를 확보한 교회는 1백 석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방흥근의 집에서 모이던 청남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고, 여학교인 청신학교(淸信學校)도 설립하였다. 후에 소민병원(蘇民病院)으로 발전하는 시약소(施藥所)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상당유치원과 청주남녀 성경학원도 이곳에서 설립되었다.
이곳 청주읍교회에는 구국의 정열을 가진 애국청년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또한 이 교회 출신들이 일제시대 민족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일제치하의 탄압가운데에서 구국 의식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그나마 모일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청주읍교회는 전도·교육·사회운동, 그리고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었다.
청주읍교회(淸州邑敎會)는 1909년 평양 남문 밖 교회에서 이사온 장로 박정찬(朴禎燦)을 장로로 위임하여 당회를 조직하므로 충북 최초의 자립교회가 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민노아 선교사였다. 같은 해 청주 기독청년회가 조직되었는데 초대 회장인 김태희(金泰熙)씨가 본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청년 운동을 일으켰다.
청주읍교회는 1910년 박정찬 장로가 신학교를 졸업하자 민노아 선교사와 동사목사(同事牧師)로 청빙하여 첫 한국인 목사로서 청주읍교회 제1대 목사가 되었다. 그 후 이원민(李元敏), 황준국(黃濬國), 최영택(崔榮澤), 함태영(咸台永) 등이 이어서 시무 하였고, 이동순(李東舜), 최영택(崔榮澤), 곽경한(郭京漢), 김정현(金正賢), 김종원(金鐘元), 김태희(金泰熙), 최원진(崔元珍), 이호재(李鎬宰), 서상필(徐相珌) 등이 장로로 봉사하면서 교회가 크게 발전되었다.
청주읍교회가 성장하여 천주교인의 순교 터를 매입 대지를 확장하고 1909년에는 신도수가 200명을 상회하고 당회가 조직되었고, 1910년에는 초대 박정찬 목사가 부임하여 다음해 교회당을 신축하였으며, 1913년에 200석 규모의 함석지붕 목조 단층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그 후 25년 간 8대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탄압과 간섭은 날로 극심하여 교회는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였다. 1938년 구연직(具然直) 목사가 취임한 후 활기를 찾고 다음해 1939년 비상한 각오로 교회당 신축을 착공하여 1940년 벽돌 2층의 아름다운 교회당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공사 도중에 일제 당국의 간섭과 방해로 종탑을 설계보다 9척이나 낮추어 시공했고 종(鐘)도 강제로 빼앗아 갔으며 교인 3명이 부여 신궁 공사장에 강제로 징발되었다. 영남(英南) 구연직(具然直) 목사는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목회에 전심 전력을 기울였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한 일제의 동화정책으로 수탈과 억압이 막바지에 이르던 시절, 영남은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가지가지의 수모와 시련을 겪어 야만 했다.
청주제일교회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던 날 청주제일교회에서는 구연직 목사의 고증(考證)을 받아 청년들이 철야하면서 태극기를 바르게 그려 게양하게 하였고, 8월17일 청주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정치범 및 사상범 72명들을 제일교회가 신원을 인수하여 식사와 의복을 제공해주고 병든 자는 치료하여 귀향의 편의를 돌보아 주고 환영회를 열었다. 구연직 목사는 해방 후 충북의 미군정 장관 고문으로 추대를 받아 혼란기에 사회안정에 힘쓰고 대한독립 촉성국민회 충북지부장을 맡고 국가건설에 공헌하였다. 청주제일교회는 부흥하여 1949년 기존 교회당이 협소하여 증축공사를 하다 다음해 6·25 동란으로 중단했다가 9.28 수복 후에 공사를 계속하여 마침내 1951년에 완공하였다. 대지 면적 1,638평에 총 건평 260평으로 당시에는 충북노회에서 제일가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해방 후 충청노회가 충남·북으로 나뉘자 그는 충북노회장으로 피선되어 교회 발전을 위하여 진력하였으며, 교회 개척에도 힘을 써 1952년 북문교회를, 1956년에는 남산교회를 개척하였다. 1957년에는 청주제일교회에서 모인 대한기독교 장로회 제42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구연직 목사의 가장 큰 업적은 세광중·고등학교의 설립 운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중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위하여 1948년 9월 노회 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이 되어 1949년 세광중학교를 청주제일교회에서 개교하고, 1953년에는 세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개교하였다. 1953년에 청주YMCA가 경영하던 청신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여 교회청년사업으로 운영케 하는 등 그의 교육에 대한 열의는 오늘의 세광학원의 초석을 놓는데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렇듯 영남은 전형적인 목회자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장래를 내다본 교육자였으며, 동양사상과 학문에 조예가 깊은 한학자로서 교계와 사회의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1938년 청주제일교회에 취임하여 1961년까지 23년 간 장기 목회로 전도와 교육, 사회 참여 등 교회 발전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은퇴하여 청주제일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출처- http://cafe.daum.net/cjpcr)
청주제일교회(기장)
청주제일교회(기장) , 뒤 건물이 창립100주년기념 밀러관이다.
밀러관, 설립자 민로아 선교사를 기념하였다.
청주제일교회(기장)
청주제일교회(기장), 1939년 정초
청주제일교회(기장)
청주제일교회(기장), 뒤는 밀러관
1950년 준공
청주제일교회(기장) 내부, 리모델링을 하였다.
충북지역 요람 청주제일교회(기장)
청주제일교회(기장) 창립100주년기념비
청주제일교회(기장) 창립100주년기념비 (1904-2004)
청주제일교회(기장) 창립100주년기념비와 로간부인기념비
메리 리 로간(Logan, Mary Lee) 선교사
메리 리 로간(Logan, Mary Lee,1856-1919)은 1856년 9월 17일 미국 켄터키 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성장하여 J. V. 로간(Logan, Mrs. J. V.)의 부인이 되었으며, 남편은 켄터키 센트럴대학 학장으로 재직한바 있다. 이 때 그는 같은 대학에서 기독청년회(YMCA)와 여자기독청년회(YWCA)를 육성하였고 사회봉사 활동에도 힘을 썼다. 1908년 남편과 사별한 뒤 한국에 협력선교사로 자원하여 1909년 3월 5일 53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 무렵 선교사들은 대부분 정규선교사(Regular Members)로 임명되어 보수(報酬)와 재정 지원을 받고 활동하였다. 1884년 9월 20일 내한한 알렌(Allen)부터 1962년 9월 12일 내한한 포(Poe) 선교사에 이르기까지 386명의 선교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로간 선교사의 경우 해외선교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모든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며 활동한 한국 최초의 자비량(Affiliated Members)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에서 별세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주일학교, 성경학교, 주일학교 교사반, 여성 전도반, 여성지도자반 등을 육성하면서 충북지역의 선교와 여성교육에 커다란 공을 세운 여성 선교사였다. 자기 집에서도 매주 15시간 씩 여러 성경 공부 반을 인도했으며, 여기에 참여한 여성들은 5-60여명에 이른다. 이 무렵 그가 살던 청주시 상당구 탑동 185-1번지에 있는 집(1911년 건립)은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3-5호로 지정되어 “로위(Lowe)기념관”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그는 한국말도 잘 구사하고 충북과 청주를 사랑했으며, 언제나 찾아가 만날 수 있는 “준비된 자애로운 어머니”로 밀러(Miller)의 부인 도티(Doty)여사와 함께 청주지역 여성교육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며, 여성의 근대화 의식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신병으로 1919년 12월 7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마포구 합정동 145-3번지 양화진 제2묘역(가-6)에 안장되었다. 한편 1921년 6월 청주에서는 그를 추모하여 청주시 남문로 1가 154번지(청주제일교회)에 화강석으로 가로 0.4m, 세로 0.4m, 높이 1m 규격의 기념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에 대하여 <충북기독교100년사>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첫째, 충북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기념비라는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 둘째, 한문을 많이 사용하던 시절에 봉승(奉承) 진출갈력(盡忠竭力) 등 한문 용어까지도 한글로 기록하여, 일제 강점기에도 교회가 앞장서 우리글과 말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기독교와 한글운동-민족운동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귀중한 사료이다. 셋째, 이 비석은 여전도회 중심으로 건립되고 여성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에 노력한 흔적을 보여준다. 1920년 청주제일교회에서 남·여석을 구분했던 휘장을 제거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그러나 이 한글 기념비에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기독교 역사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장로교 선교사를 천주교 신부(神父)로 잘못 소개한 사례도 있었다. 비문 첫 줄의 “아메리가나신부인” 부분을 천주교 순교지와 유적지를 소개하기 위하여 간행된 <한국의 성지, 순교자의 발자취> 책에서 “아메리카 나 신부”로 해석하여 미국의 나씨 성을 가진 신부의 선교비로 전해진 사실이 있다. 결국 한글에 띄어쓰기를 하지 아니하여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를 사실과 다르게 천주교 신부로 오인한 사연의 한 토막이다. 역사는 반드시 기록되어야하지만 정확하게 전해져야 한다. 문장의 작성에 띄어쓰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이다. 로간 선교사는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며 충북지역 여성교육에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순직하여 양화진에 외롭게 묻혔다. 앞으로 그의 위대한 선교정신과 삶을 뒤돌아보며 기억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글 출처-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1921년6월1일 화강석으로 세워짐
청주제일교회 로간부인기념비
이 한글 기념비에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기독교 역사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장로교 선교사를 천주교 신부(神父)로 잘못 소개한 사례도 있었다. 비문 첫 줄의 “아메리가나신부인” 부분을 천주교 순교지와 유적지를 소개하기 위하여 간행된 <한국의 성지, 순교자의 발자취> 책에서 “아메리카 나 신부”로 해석하여 미국의 나씨 성을 가진 신부의 선교비로 전해진 사실이 있다. 결국 한글에 띄어쓰기를 하지 아니하여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를 사실과 다르게 천주교 신부로 오인한 사연의 한 토막이다. 역사는 반드시 기록되어야하지만 정확하게 전해져야 한다. 문장의 작성에 띄어쓰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이다.
망선루 터
<청주제일교회 옛 사진>
역대 담임목사
역대 담임목사
프레드릭 S. 밀러 (민로아) 선교사
프레드릭 S. 밀러는 186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출생하여, 피츠버그대학과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한 후 1892년 11월 15일 부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1893년 서울에서 예수교학당(경신학교) 책임자가 되어 교명을 민로아 학당으로 고치고 자신의 교육 방침대로 발전시켰다. 안창호선생을 길러내는 등 기독교 교육에 힘썼다. 1895년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청주지역에서 44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2년에는 장로회·감리회의 연합찬송가 제정을 위한‘통합공의회 찬송가위원회’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5년에는 찬송가 307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를 작곡하였다. 이밖에도 94, 294, 379 516장 등이 현재 찬송가에 실려 있다. 191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기·충청 노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894년 밀러는 현재의 양화진 묘역 주변에 언더우드 선교사, 에비슨 선교사 등과 공동으로 별장용지를 구입하여 각기 방갈로를 짓고 여름철에는 이곳에서 지낸 일이 있어 양화진과는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첫 부인 안나 밀러가 별세한 후 F. S. 밀러는 1904년 제3대 정동여학당장 도티와 재혼하였으며, 1931년 도티와 사별한 뒤 딘과 다시 재혼하였다. 그는 충북지역에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하던 중 1936년 은퇴하여, 개인적인 선교여행을 하였으며, 1937년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초대 박정찬 목사(1910-1912)
1926년 청남학교
1931년 청남학교
1932년
1933년 상당유치원
1934년 청남학교
1934년 예배당
1935년 성경학교
1935년 청년면려회
1936년 충청면려회
1936년 성탄절
1937년 여름성경학교
1938년 여자 청년면려회
1938년 부흥성회
1942년 헌당예배
1942년 헌당예배
1944년 성가대
1945년 성가대
1964년 창립60주년대회
<망선루>
망선루 (중앙공원)
망선루 (중앙공원)
망선루 (중앙공원)
망선루 (중앙공원)
망선루 (중앙공원)
망선루(望仙樓)
망선루는 현재 옛 청남학교의 자리인 청주시 남문로 1가 청주제일교회 내에 있다가 중앙공원 내로 복원되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유서 깊은 문화재이다.
망선루에 대해서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잘 소개되어 있다. 이 건물은 주지하다시피 원래 고려 때 세워진 관아의 건물로, 청주 客館의 동쪽에 위치한 누각이며 옛 이름은 聚景樓였다. 옆에 맑은 연못이 있고 사방이 훤히 트였다고 하니 이러한 곳에 세워진 2층 누각은 주변의 정취가 수려하게 보였으리라 상상이 되며, 그렇기에 聚景樓란 이름이 붙여졌으리라 짐작이 간다.
14세기 후반,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까지 피난 갔다가 홍건적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이 곳 청주에서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1361년(공민왕 10년) 청주에서 文科와 監試를 치루고 방(榜)을 이 취경루에 내 걸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후 조선시대 1461년 목사 李伯常이 중수했을 때 이 지역 출신 세도가인 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고쳐 望仙樓라 하였으며, 그후 李暹(이섬)이 중수하였고 다시 牧使 李修得이 보수한 바 있는 2층 누각이었다. 그런데 일제 시대 성안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성벽과 그 안에 있던 여러 건물이 헐리고 대신 일본식 건물이 들어섰다. 1921년, 현 도청 서문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도로 확장공사와 일본 경찰서내 일본인의 검도와 유도를 연마하는 武德殿 신축으로 역사적인 망선루가 헐리게 되었다. 그 당시 망선루는 청주 여자공립 보통학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 역사적인 건물이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당시 청주 청년회 회장이요, 교회 장로인 김태희는 우리 문화 유산인 망선루가 일본인의 손에 의해 그냥 그대로 헐리어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목격하고 이 건물을 옮겨 민족문화 유산을 잘 보존함과 동시에 유용하게 사용할 방안을 세웠다. 그는 金種元·金正賢·李鎬宰 등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교회 청년들은 망선루를 살리기로 결심하였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대금은 유지들이 조달하고 이전 작업은 청년회가 책임을 지며 그 건물은 제일교회구내에 복원하여 학교 건물로서 활용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전 장소와 복원을 위한 구체적인 내용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일단 인수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망선루의 철거가 임박하였기 때문이었다.
청주 청년회에서는 이 민족문화의 유산을 보전하기 위하여 뜻이 있는 시내 청년들과 일반 유지들에게 모금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고적 보존을 명분으로 하여 충청북도경찰국으로부터 수의 계약으로 2천 원에 망선루를 인수하고 조심스럽게 건물을 철거하였다. 헐린 건물에서 나온 목재며 기와들을 모아 옆 골목 공터에 쌓아 두었다. 일단 인수는 맡았으나 이전 장소와 복원 건축비가 마련되지 않아 2년간이나 복원사업이 추진되지 못한 체, 자재들은 공터에 방치되고 말았다. 그 사이에 보관된 일부 목재는 인근 사람들에 의해 땔감으로 이용되어 망실되기도 하고 남아 있는 목재도 그 기둥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김태희 회장은 청년회원들과 함께 복원 문제에 대해서 청주읍교회와 본격적으로 협의에 나섰다. 그 내용은 방 한 칸은 청년회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청남학교 교실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청주읍교회로부터 동의를 얻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교회는 민족문화 보존과 교육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고, 또한 청년회의 회원 가운데 그 교회 출신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 당시 김태희 회장은 청남학교 학감이라는 직분을 맡고 있었고, 때마침 청남학교는 청신여학교를 합병하여 교실부족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선교부 및 교회와의 교섭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마침내 교회로부터 동의를 얻고, 장소가 물색되었다. 교회 내 청남학교 운동장 북편에 있는 복숭아 밭이 부지로 선정되었으며, 그곳에 망선루를 복원하여 그 건물을 학교 교실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거액의 복원건축비를 마련하는 재정적인 문제이었다. 총 공사비 1천 7백만 원 정도의 거액을 어떻게 충당하느냐 하는 것이다. 청주 청년회(회장 김태희 장로)에서는 망선루 이전 장소와 복원 건축비가 마련되지 않아 2년간이나 방치하여 두니 일부 기둥이 썩기 시작함으로 교회에 의뢰하였습니다. 그 합의 사항은 방 한 칸은 청년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청신여학교가 통합되어 교실부족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청남학교에서 사용토록 교회와 합의하였습니다. 건축비는 소열도 선교사 및 함(태영)목사와 상의하여 총 이전 건축비 일천칠백만 원 중 칠 백만 원은 소열도 목사가 부담하기로 하고, 5백만 원은 모금으로 충당하며, 나머지 부족액은 함 목사님이 서울에 가서 모금하여 오도록 합의하였습니다. 함 목사님은 서울서 모금 활동을 하던 중 넘어져 부상을 입기도 하였습니다. 망선루 이전 공사할 때에 재목을 운반하는데 마차를 연결시키고 소 두 마리가 끌도록 하였는데, 재목을 운반하는 데에만도 수일이 걸렸습니다. 라고 그 당시의 기억을 생생히 증언하였다. 이 증언에 의하면, 소열도 선교사와 합의하여 총 공사비 1천 7백 만원 중 7백 만원은 선교부에서 부담하기로 하고, 5백 만원은 모금하여 충당하고 나머지는 함태영 목사가 서울에 가서 모금 해 오도록 하였다. 이 당시 봉급 생활자 한달 급여가 10원에서 20원이었는데 청년회원들은 1인당 150원씩 내어 모금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그 열의가 대단하였으며, 이 민족문화보존 운동에 교인·학생·시민들이 열렬히 후원하고 참여하여 마침내 1923년 복원 공사가 추진되었다.
이 당시 벌였던 망선루 복원을 통한 민족 문화 보존 운동은 청주의 민간단체가 처음으로 벌인 중요한 시민운동이며, 나라 잃은 민중이 벌인 자발적이고도 합법적인 애국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전공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교회청년, 청남학교 학생, 교인들이 자재를 학교 구내로 옮겨 날랐다. 운반거리는 약 700∼800m인데, 기와, 석가래, 기둥, 자갈, 큰 돌 등을 마차에 실어 나르기도 하고 또는 손수 운반하기도 하면서 보람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마차를 연결하여 목재를 그득 싣고 소 두 마리로 끌도록 하였는데, 목재를 운반하는 데만도 수일이 걸렸다고 한다. 복원 건축은 도목수인 덕촌교회 임호연의 주관 하에 경상도 사람 최목수 등이 맡아 수고를 하였다. 그러나 건축 자재가 그 때 그때 공급이 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철거되어 방치 된지 2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많은 자재들이 없어졌고 남아 있는 기둥도 일부가 부식되어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총 공사를 책임지고 진두 지휘하던 김태희 장로는 시내 '仁川木材商'에 의뢰하여 신의주에서 목재를 주문하여 사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금도 부족하고 그 자재도 그렇게 여의치 못하였다. 그래서 원 자재의 썩은 부분은 잘라 내고 새로 가져온 목재를 잇대어서 기둥으로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현재 망선루 기둥이 대체로 많이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복원 공사가 진행될 때 청남학교 학생들은 방과후에 노력 봉사활동에 나섰다. 민족 문화 보존이라는 차원과 자신들이 사용할 교실을 짓는 일에 손수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이 교실 신축공사에 직접 참여하였다. 복숭아나무를 베어 내고 동서 길이로 망선루를 세웠다. 주춧돌 세울 장소를 목수가 치수를 재어 표시하자 인부들이 안에 들어가 넓이 1m, 길이 1.5m 정도로 파 놓았다. 그러면 하교하는 학생들이 달려들어 여기에 굵은 돌과 잔돌을 갖다 부어 넣었다. 그리고 비계나무틀을 차려 놓고 큰돌에 밧줄을 걸어서 비계목에 달아 놓은 도르래에 걸고, 그 줄에 여러 갈래의 잔줄을 붙여 놓는다. 우리 학생들이 잔줄을 잡으며 사방으로 고루 퍼져 서 있으면, 선소리 매기는 사람이 들어서서 다지는 큰돌의 방향을 잡으며 선소리를 매긴다. 선소리꾼이 "어이어 젖차 -하! "하면, 잔줄을 사방에서 잡은 우리들은 "지게미호"하고 줄을 잡아당긴다. 그러면 큰 돌은 공중으로 따라 올라 갔다가 줄을 일제히 놓는 바람에 그 돌은 곧 바로 아래 구덩이 안으로 내려 떨어지면서 깔아 논 돌을 다져 준다. 이렇게 다져서 잔돌이 밑으로 들어가면 또 돌을 넣고 다지는데, 일정한 한도에 다다르도록 다져 놓는다. 무려 20여 개 구덩이를 여러 날에 걸쳐 오후부터 저녁 9시까지 다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기와 옮길 때 손 다친 학생, 구덩이를 다지는데 손바닥이 부르튼 학생들이 많았다. 고 한 것을 보면 이 공사는 단순히 공사 인부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학생들의 수고와 땀방울이 초석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마침내 1923년 상량식이 이루어졌다. 그때에 金泰熙, 李東鉉, 李明求, 鄭圭澤, 金喆煥, 朴敬學, 金 澤 및 청년회원 및 다수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상량식이 거행되었다. 복원된 망선루는 길이 64자, 폭 28자,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에 약 50여평 면적을 차지한 2층 건물이다. 이 망선루는 본래 위층 아래층이 툭 트인 2층 누각이었으나 이 건물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학교 교실로 사용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1, 2층의 사면 공간을 벽돌로 막고 창문을 내었다. 그리고 목재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만들었다. 그러므로 외견상으로는 조선식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내부 구조는 2층 양옥집과 별다름이 없게 되었다. 마침내 1924년 전교가 이 망선루로 이사하여 온전한 학교 건물(청남학교)로 사용하였다. 아래층 중앙에 교무실을 두고 양쪽 동서로 교실을 배치하였으며, 2층에 3개 교실을 마련하였다. 이곳으로 모든 시설을 옮김으로서 학교 면모를 일신하였다. 다만 청년회의실은 아래 층 북편으로 별도로 입구를 내어 사용하였다. 이곳은 당시 유일한 청주 남녀 공학의 사립 초등학교로서, 근대적인 초등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이리하여 청남학교는 민족의식 고양과 사회계몽을 도모함으로써 일제기 근대 교육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주지역의 계몽과 구국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이 청남학교와 망선루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내었다. 남녀 졸업생들 가운데에는 후일 목사나 장로가 되어 한국 기독교에 많은 공을 쌓은 인사들이 나왔음은 물론, 교사와 교장으로서 교육계에서, 의약계에서, 군수 및 공무원으로서 공직에서, 적십자 등 각종 사회단체에서, 육상선수 야구선수 등 체육계에서, 그리고 財界와 實業界에서 크게 활약하기도 하면서, 초등학교시절 몸에 익힌 기독교 정신과 애국애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국가와 사회에 크게 공헌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또한 그후 많은 교육기관이 이곳을 이용하였으니 이 건물은 충북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청남학교는 물론 청신여학교, 청주성경학원, 세광중학교, 세광고등학교, 청신고등공민학교, 상당유치원 등의 교사로 사용되었고, 한때 YMCA회관, YWCA회관으로도 이용되었으며, 각종 집회와 강연 장소로 활용되는 등, 실로 이곳은 충북 교육·문화의 요람지였다. 망선루는 노후로 붕괴 위험이 있어 원래의 자리에 옛모습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아쉽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99년 10월 이 건물을 해체하여 청주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중앙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출처- http://blog.empas.com/aswater1/3672793)
청남학교(淸南學校)의 설립, 전순동 (忠北大 歷史敎育科 敎授)
19세기 말 복잡한 국내 정세와 외부 열강의 패권 쟁탈이 중첩된 가운데, 조선정부는 甲午更張(1894)으로 봉건적인 전통사회를 타파하고 정치·경제·사회·교육면에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여 나갔다. 정치적 개혁으로, 우선 자주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開國 年號를 사용하였다. 그동안 구별이 분명하지 않던 行政府와 宮內府를 분리하여 행정부는 議政府와 8개 衙門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지방은 과거의 8도를 23부로 나누었다가 2년 뒤에 13도를 두었으며, 도의 지방장관으로부터 사법권·군사권을 독립시키고 경찰권도 일원화하였다. 경제면에서의 개혁으로는 재정의 일원화, 은본위제의 실시, 조세의 금납제 실시, 도량형의 개정과 통일 등을 가져왔으며, 사회적으로는 과거제의 폐지, 신분제도의 타파, 고문 및 연좌제 폐지, 조혼의 금지, 재혼의 혀용, 적서 차별의 철폐 등 정부가 일대 혁신을 가하고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때 무엇보다 특기할 만한 일은, 교육부문에 있어서 일대 개혁이 이루어진 사실이다. 종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禮曺'를 '學務衙門(후에 學部로 개칭)'으로 개칭하고, '學務衙門告示'(1894. 7)를 발표하여, 정부는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설치하고 반상의 구별 없이 교육을 보급하겠다는 이른바 기회 균등의 원칙을 밝혔다. 이어 1895년 2월, 고종황제는 일종의 敎育立國詔書인 '敎育詔書'를 전국에 내려, 근대 교육을 통하여 근대국가로 중흥하겠다는 의지를 국민에게 널리 알렸다. 이에 의하여 한성사범학교관제, 외국어학교관제, 소학교령 등을 공포하여 신 학제에 따른 학교를 설립하여 나갔는데, 이 소학교령에 의해 1895년, 서울에는 한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와 壯洞·桂洞·貞洞·紬洞 등의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충북지방에는 建陽 元年(1896) 9월에, 경기 관찰부를 비롯한 13개 관찰부와 한성부를 비롯한 3개부, 인천항을 비롯한 4개항, 濟州牧과 楊州郡을 비롯한 17개군 등 38개소에 소학교를 설치하도록 규정한 학부령 제 5호에 의해, 당시 관찰사가 소재한 충주에 최초로 소학교가 설치되었다. 그후 황간, 청주로 공립학교가 확대되어 황간보통학교(1905), 청주보통학교(1907) 등이 설립되었다. 그러므로 청주에서 제일 처음 설립된 관립 초등학교는 융희 원년(1907)에 건립된 청주보통학교이다. 이 학교는 구 한국 학부령에 의해 청주 군청 부속건물에서 개교한 후 12월에 새로운 교사를 지어 이전하였으며 1937년에 榮町公立普通學校로 개칭되었고 1943년에 淸州舟城國民學校로 그 교명이 바뀌어 오늘의 주성초등학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청주보통학교보다 앞서 이미 淸南學校(廣南學校)가 존재하고 있었다. 본래 청남학교는 민족적 기운이 팽배하던 1904년, 金泰熙, 方興根, 金元培 등 교육구국의 이념을 가진 청년들에 의해 방홍근의 사저에서 "널리 인재를 모아 교육한다"는 뜻에서 廣南學校로 출발하였다. 방흥근의 사저가 학교 교사로 사용되었으며, 대표격인 학교장은 김태희가 맡아 학교를 운영하여 나갔다. 이 학교는 개화사상에 의해 새로운 학문을 교육하는 청주지역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으로서 근대 학교의 嚆矢이다. 그후 이 학교는 1908년에 교명을 淸南學校로 바꾸어 청주지역 민족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청남학교는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의 문제로 1936년에 일시 휴교처분을 당하였고, 시세의 질곡으로 학교명이 1945년 잠시 成南學校로 개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공립학교가 되면서 민족 교육의 보루로서의 역사와 전통을 되살리기 위하여 '청남'이라는 학교명을 다시 환원하여 되찾게 되었고, 그것이 현재 청주시 영운동에 위치한 청남초등학교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지금도 청남초등학교는 해방 전 청남학교의 일부 학적부와 졸업대장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어쩌면 공백으로 돌아갈 뻔한 일제기 청주지역에서의 민족적이고 근대적인 학교교육의 면모와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청남학교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청남학교 연혁지에는 해방 전까지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904년 11월 1일:淸州郡 南州內面( 現 南門路 1街) 瓮城里에 私立 廣南學校
創設. 設立者 方興根 金泰熙(代表) 金元培 氏等
1908년 8월 1일:舊韓國學部大臣 設立許可 設立者兼校長으로 閔老雅氏(美人)就任
1910년 4월 1일:設立者變更 桂君(美國人)氏 引受經營
1921년 4월 1일:學制變更 六년制로 昇格(四年制에서)
1922년 10월 5일:校舍新築"淸州靑年會資材寄贈"(現 望仙樓 第一敎會內 建物)
1935년 4월 15일:開校 三十周年 記念行事 擧行
1936년 10월 12일:神社參拜 不應으로 休校處分
1936년 10월 20일:當局에 順應하여 다시 開校하다
1936년 12월 4일:設立者 兼 校長 變更 崔東善氏 引受
1938년 4월 1일:校舍移轉"淸州市永雲洞127番地 現校地로"
1942년 7월 1일:設立者 兼 校長 變更 金龍泰氏 引受經營(土地七十斗落喜捨) 校舍 新築
1945년 4월 1일:公立학교로 昇格 成南國民學校로 改稱
1945년 8월 15일:光復 "八·一五 解放"
1945년 9월 24일:淸南國民學校로 校名 還元開校
1945년 9월 24일:初代校長 朴鼎植 氏 就任
(이하 생략)
라 하여 그 역사적 변천 내용이 비교적 요령 있게 個條式으로 정리되어 있어 학교의 변천과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논할 점은 청남학교의 설립 연대에 관한 것이다. 청남 학교의 연대는 1903년 설과 1904년 설이 있다. 1987년에 간행된 {淸州市誌}는 1903년의 설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국에 보고한 선교사들의 활동 보고에 따라 역산하여 산출한 것이라 추측된다. 그것은 [밀러(민노아)씨와 김홍경씨가 1904년 청주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은 그 도시의 매우 훌륭한 청년들이 이미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하나 시작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라는 기사에 입각하여 1904년에 이미 학교가 있었으니 그보다 빠른 전 해인 1903년 4월 1일을 잡은 듯하다. 그러나 그 학교의 성격 및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조직과 체계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는지 현재 상태로서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한편, 桂君(Edwin Kagin)선교사의 보고서를 보면, 1904년에 청남학교가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는 기사가 보이고 있다. 약 5년 전에 교회 옆에 한 오래된 건물에서 학교가 시작되었는데 벽은 금이 가고 마루 바닥에 구멍이 나고 지붕도 새는 낡은 건물이었다. 하나뿐인 조명도 한지 바른 격자 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매일 한 명 또는 어쩌다 두 명의 선생들이 배움에 목마른 20내지 30명의 남자아이들을 가르쳤다.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 기사는 1909년에 작성한 것으로 여기에서 "약 5년전"이란 1904년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오랜 동안 청남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헌신적으로 교육을 담당하여 오던 최창남도 본 학교 沿革誌를 확인한 적이 있는데, 학교 설립 연도가 1904년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는 연혁지의 학교 설립 일자가 1903년 4월 1일로 기재된 것을 발견하고 "1903년 4월 1일이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1903년 4월 1일"의 기록을 "1904년 11월 1일"로 수정하여 바로 잡아 놓고 있다. 물론 이 단계에서는 아직 등록이나 공식인가를 받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학교의 시작 단계를 어디에 두고 기점을 잡을 것이냐에 따라 그 설립연도가 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학교의 구성요소인 교사와 학생과 건물, 그리고 체계적인 운영체제를 고려한다면, 현재의 상태에서 여러 기록과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1904년으로 봄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다음, 학교의 설립과정을 보면, 제일 교회 청년인 방흥근, 김태희 김원배 등에 의해서 廣南學校가 설립되었다. 당시 양봉으로 비교적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있던 방흥근은 제 1차 한일 협약, 러일전쟁 등으로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어 가고 있던 당시, 김태희 김원배 등 우국지사들과 함께 구국의 길은 교육에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방흥근은 자신의 사저를 학교로 사용하도록 제공하였으며 대표격인 학교장은 김태희가 맡아 학교를 운영하여 나갔다. 처음 설립당시 15명의 학생이 모였으며 이들을 두 개 반으로 나누어 2개의 방(교실)에서 교육하였다. 교회 및 서양 선교사의 청주 활동으로 새로운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서당에서 유교 경전 중심으로 공부하던 사람들이 새 학문과 개화사상을 지향하는 근대적인 학교에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1904년 제일 처음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한 졸업대장을 보면, 졸업생은 2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 7명은 1907년에, 13명은 1909년에, 각각 두 차례에 걸쳐 20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1907년의 졸업생은 "고등과", 1909년의 졸업생 "보통과"로 표기하여, 다 같이 제1회 졸업생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제1회 때부터 보통과와 고등과로 나누어 교육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두 개의 과로 나누어 학생을 모집하였는지 아니면 능력의 우열에 따라 고등과와 보통과 두 개 과로 나누어 운영하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직 학교가 체계적으로 정착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판단한다면, 일단 학생들을 모집하여 두 개의 방에 나누어 교육하되, 연령도 많고 기초 실력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는 학생은 속성반으로서 고등과 반에 넣어 2년여 교육을 시킨 후, 1907년에 졸업을 시켰고, 그렇지 않은 학생은 4 년 교육 후 졸업하게 한 제도를 채택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개설 초창기 학교 운영이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았다. 교육구국의 일념을 가지고 방흥근의 재정적 후원 하에 선뜻 학교를 개설하기는 하였으나 학교 운영에 있어서 차츰 재정적으로 어렵게 되어 갔다. 더욱이 통감부는 1908년 8월에 [私立學校令]을 공포하고, 모든 사립학교는 설립 요건을 갖추어 인가를 받은 후 학교를 운영하도록 지시하였다. 이것은 민족교육의 온상지가 되어 있는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과 신규성립을 억제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 때에 청주교회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펴고 있던 민노아(閔老雅 : F. S. Miller) 선교사가 그들을 도와주었다. 당시 우국지사와 청년들은 왜경의 감시를 벗어나 회합하는 유일한 장소로 청주읍교회를 이용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밀러 선교사는 학교 운영자 및 젊은 청년들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으며, 학교의 사정도 자연히 익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서울의 경신학교를 운영한 경험이 있어 교육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민노아 선교사는 교회 청년들이 건전한 뜻을 가지고 운영하는 학교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도우며 협력하여 주었던 것이다. 마침내 1908년, 평소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있던 민노아 선교사는 선교부의 후원을 받아 보부상 조합으로부터 기와집으로 된 학교건물을 매입하여 학교 운영권을 인수받았다. 이 당시의 상황을 선교사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약 5년 전에 교회 옆에 한 오래된 건물에서 학교가 시작되었는데 벽은 금이 가고 마루 바닥에 구멍이 나고 지붕도 새는 낡은 건물이었다. 하나뿐인 조명도 한지 바른 격자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매일 한 명 또는 어쩌다 두 명의 선생들이 배움에 목마른 20내지 30명의 남자아이들을 가르쳤다. 작년에 마을에서 건물 한 채를 구입하였는데, 200달라를 지불하였고 교회에서 50달러를 보탰다. 흙벽이지만 4개의 방이 있고 높은 건물에 유리창문이어서 빛도 잘 들어온다. 이 기사는 1909년에 작성한 것으로 여기서 "작년"은 1908년을 의미하고 있다. 처음 교실로 사용하뎐 방흥근 집은 낡아 벽에 금이 가고 마루 바닥과 지붕도 남루해지는 등, 교육 환경이 극도로 열악한 상태에 처하였기에 때문에, 200달러의 선교부 후원과 50달러의 교회의 헌금으로 1908년 4개의 교실을 갖춘 커다란 건물을 새로 매입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동년(1908)에 구 한국 학부대신으로부터 정식으로 사립학교 설립허가를 받게 되었다. 학교 이름을 淸南學校로 개명하고 장로교회인 청주읍교회에서 인수하고 민노아 선교사가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 떼부터 청남학교는 기독교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청주지역 민족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청남학교가 구한국 학부대신으로부터 쉽게 설립허가를 얻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들이 관계하는 학교라는 점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 선교사들은 중앙 정부로부터 여러 가지 우대조치를 받고 있었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당시 청주 선교부의 책임자로 와 있던 桂君(Edwin Kagin) 선교사의 보고문에 목사가 도지사를 방문하여 우리 학교에 대한 보고를 조속히 정부의 學部에 전달하여 인가를 받게 해 달라고 촉구했을 때 학교 일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결과에 이르기 위해 지혜를 짜내어 도지사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도지사는 한국 예절과 경어를 모르는 점을 너그럽게 보아 넘기면서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목사는 면담 후 나와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다시 한번 용기를 갖게 해주었다. 라고 하여 민노아 목사가 도지사를 직접 방문하여 학교인가를 촉구한 사실과 민노아 목사의 요청에 대한 도지사의 호의적인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통감부 시대에 사립학교령을 발표하여 사립학교를 철저히 탄압하면서도 기독교계 학교에 대해서는 온건한 정책을 썼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이 병합을 앞두고 구태여 외국인들의 반감을 사 지 않으려는 底意와 반일 세력의 힘을 분열시키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종교계 사립학교로서 정식 인가도 얻고, 또한 종래 2개밖에 없던 교실을 4개로 확대하여 학교 면모를 갖춘 청남학교는 1909년에 정식으로 보통과와 고등과를 설치하여 교육하였다. 1910년에는 이미 1907년부터 부임하여 민노아 선교사와 함께 선교사업을 펼치고 있던 桂君 목사가 교장직을 맡고 민노아 선교사는 농촌지역 복음사업에 나섰다. 1920년에는 계군 목사가 건강문제로 선교사직을 임하고 본국으로 귀국하자 그 뒤를 이어 蘇悅道(T.S Soltou) 목사가 그 후임으로써 교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운영에 있어서, 민노아 계군 소열도 등 선교사들이 교장직을 맡고 있었으나, 이것은 형식상이었고 실제로는 한국인 교사가 교감직을 맡아 실제 운영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감직은 김태희, 최창남 등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 교육의 방향은 한결같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이었다. 일제시대에는 교육이란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기가 어려웠다. 입학시험을 치르고 월사금도 내어야 했기 때문에 가난한 자녀들은 입학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공립학교는 그 수가 적었으므로 일제가 경영하던 공립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사립학교나 야학 또는 사설강습소에 학생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특히 서양 선교사들이 관계하고 있던 청남학교는 지역민들로부터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 계통의 사립학교가 몇 개 더 있었다. 청주지역 초기 선교사들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교육과 의료를 중요한 포교수단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 결과 몇 개의 교회에 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이러한 학교로서 청남학교 외에 묵방교회에 청북학교, 청천교회에 청동학교, 신대교회에 청서학교, 여학교로서 청주읍교회에 청신학교 등이 설립되어 농촌사회를 계몽하는데 앞장섰다. 청남학교는 1921년에 학제가 바뀌어 4년제에서 6년제가 되었고, 1923년에는 여자 학교인 청신학교와 합쳐 남녀 공학의 학교가 되었으며 1924년에는 망선루로 교사를 이전하는 등 그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청남학교의 입학생의 수는 일정하지가 않으나 대개 매년 약 20여명씩 입학하여 100명 내외의 학생수를 가지고 있었고, 교사는 3∼4명이 모든 학생들을 담당하였다.
(출처- http://blog.empas.com/aswater1/3672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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