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1898)]

영국신사77 2012. 10. 26. 19:34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1898)]

 

 

 

 

프로이센 쇤하우젠 출생. 프로이센의 재상. 일명 "철혈재상"으로 지금의 독일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으로, 독일이 통일되면서 초대 총리가 되었다.

 융커(Junker:'지방호족'이라는 뜻. 프로이센과 동부 독일의 지주계층으로 프로이센, 독일제국(1871-1918)과 바이마르 공화국(1919-33) 시대에 상당한 정치권력을 행사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함께 소멸되었다. 이름 가운데 'von'이라는 글자가 있는 사람들이 이들이다.)의 아들로 태어나, 괴팅겐과 베를린 두 대학에서 공부한 후 프로이센의 관리가 되었다.

 베를린의 3월혁명(1848) 때는 반 혁명파로 활약했고, 보수당 창립멤버의 한 사람이었다.

 혁명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1851-1859)로 임명되어, 프랑크푸르트에 부임하였다. 그는 독일의 통일방식에 대해 오스트리아와의 협조를 주장하였지만, 결국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오스트리아를 독일통일에 방해국가로 간주, 대게르만주의에서 소게르만주의로 정책을 변경하여, 독일통일에서 오스트리아를 제외시키기 위해서 전쟁까지 하였다.

 

  보수적이며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주재대사(1859), 프랑스 주재대사(1862)가 되면서 안목이 넓어졌고, 1862년 국왕 빌헬름 1세가 군비확장 문제로 의회와 충돌하였을 때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되었다.

 취임 첫 연설에서 이른바 ‘철혈정책(鐵血政策)’ 즉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여, 의회와 대립한 채 군비확장을 강행하였다.

 결국 1864년, 1866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독일연방을 결성하였고, 나아가 1870-1871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독일 통일을 이룩하였다.

 1871년 독일제국 총리가 되어, 1890년까지 19년간 이 지위를 독점하였다.

 1888년 빌헤름1세 이후 황제에 오른 빌헤름2세와의 의견차이로, 1890년 비스마르크는 재상에서 물러났다.

 

 비스마르크가 물러 난 후 독일은 제국주의 경쟁에 돌입하고, 비스마르크가 만든 비스마르크 제체는 붕괴되어 갔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패배하게 된다.


[주요 사건]

 

독일연방의회

  1815년 빈 회의 이후, 독일 통일을 위하여 구성된 전독일적 조직으로, 오스트리아·프로이센·바이에른·작센·하노버 등 35개의 군주국과 4개의 자유도시를 통합하여 조직된 연방이다. 각국 대표로 구성된 연방의회를 프랑크푸르트에 설치하였으며, 오스트리아가 의장국으로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목적은 침략에 대한 상호원조, 연방군의 설치 등을 규정한 연합규약을 제정하는 것이었으며, 각국은 독립국으로서의 권한을 가졌다.

  1848년의 3월혁명으로 통일의 주도권이 한때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로 옮겨져 무력해졌으나, 혁명 후 부활하였다. 모든 독일어권 국가들의 통일을 목표로 하였으나, 당시 유럽의 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비협조적이며 독일어권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과 연방의회에 대한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태도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어권의 통일을 구상하게 된다. 이를 이룩하기 위하여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치루게된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 이후 체결한 1866년의 프라하조약으로 해체되었다.

 

베를린 3월 혁명

 나폴레옹전쟁 이후 유럽을 휩쓴 혁명의 열기 속에서, 구시대의 전근대적인 체제로 복귀하려는 귀족세력에 반대하여, 독일내에서 일어난 독일 민중혁명.

 이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혁명이 실패하자 국왕은 자유주의적인 독일통일운동도 억압하였으며, 국왕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의 황제(입헌군주제)추대를 사퇴하였다(1849).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나타나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독일통일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정책]

 1. 철혈정책

 1862년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수상에 임명되자, 최초의 하원(下院)에서의 의회연설에서 "현하의 대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철(鐵)과 피(血), 곧 병기(兵器)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 데서 유래한 말.

 이 연설은 프로이센 의회의 자유주의자에 대항하여 군비를 확장하고 무력을 통한 독일 통일을 수행한 비스마르크의 정책을 특징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탈리아의 카부르 수상이 이와 비슷한 표현을 이미 사용한 바 있다. 이 연설로 인하여 비스마르크를 철혈재상이라고 불렀다.
 

2. 소(小) 게르만 주의

 독일어권 국가들 가운데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국가들을 통일하자는 주장. 다민족 국가에서 지배계급이 게르만족인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 및 다수의 독일어 국가들과의 통일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통일 보다는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추구하자, 모든 독일어권 국가의 통일론인 대게르만주의가 축소된 독일통일 방식.

 대게르만주의를 주장하던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해야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전쟁을 통하여 이를 구체화 시킨다.
 

3. 보호관세정책

  자국의 유치산업(幼稚産業)의 보호 ·육성, 기존산업의 유지 ·발전을 목적으로, 이들 여러 산업의 생산품과 동일한 외국수입품에 대하여 고율의 관세를 부과시키는 제도.

  비스마르크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하여 뒤떨어진 공업화를 촉진하고 군비확충을 위하여, 자국의 자본주의를 발전시키 위하여 이 정책을 실시하였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산업혁명의 물결을 탈 수 있었으며, 산업혁명의 원조국가인 영국 보다 강한 산업국가가 된다.
 

4. 3제동맹

 1873년 10월 비스마르크 중재로 체결한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3제국의 동맹.

 프랑스-프로이센전쟁 후 비스마르크는 유럽 평화유지라는 명목하에 신(新) 독일제국의 안정과 프랑스 고립을 목적으로, 1872년 9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가 베를린회의 참석을 위해 방문한 것을 기회로, 독일의 빌헬름 1세와의 3국 황제회담을 주선하였다. 이듬해 10월 3국이 다른 나라의 침공을 받을 경우, 상호 협조한다는 내용의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후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관계가 악화되자 붕괴되었다.

 1881년 6월 비스마르크의 노력으로 발칸반도에서의 3국 이해를 상호 존중한다는 내용으로 신(新) 3제동맹이 결성되어, 1884년 동맹 체계가 다시 3년간 연장되었다.

 그러나 1885년 발칸반도의 불가리아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다시 대립하게 되어, 1887년 3월에 붕괴되었다.
 

5.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187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맺은 방위동맹.

1878년의 베를린회의로 러시아와 독일의 관계가 멀어지고, 러시아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과 반독일 동맹의 체결을 꾀하였으므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교섭, 79년 10월 7일 빈에서 독일 ·오스트리아 동맹을 체결하였다.

 양국 중에서 일국이 러시아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에 양국은 전력을 다하여 협력하며, 러시아 이외의 국가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에는 다른 일국은 호의적인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다. 조약기간이 5년인 비밀조약이었으나, 조약기간이 갱신되어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존속하였다.
 

6. 삼국동맹

 1882년부터 1915년까지의 독일·오스트리 ·이탈리아 3국간에 체결된 방어비밀동맹.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1879년 2국동맹을 체결하였는데,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하여 보호국화하자, 일찍부터 이곳에 야심을 품고 있던 이탈리아가 프랑스의 튀니지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1882년 5월 20일, 5년 기한으로 독일·오스트리아와 함께 이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 삼국동맹은, 1890년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은퇴하기 전까지는, 비스마르크 안전보장체제의 일환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3국협상과의 대립이 격화함에 따라, 지중해에서 영국과 대항할 힘이 없으며 오스트리아와는 미수복지 문제로 대립했던 관계로, 이탈리아는 점차 소극적이 되어, 이탈리아-터키전쟁, 발칸전쟁 이래 영국·프랑스에 접근하고 프랑스와는 비밀동맹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동맹국 원조 의무는 방어전쟁에만 국한된다는 구실로 중립을 선언하고, 결국 1915년 5월 3국동맹의 폐기를 선언한 뒤, 협상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였다.
 

7. 2중보호조약

 독일과 러시아가 1887년 6월 18일에 체결한 비밀조약. 비스마르크의 보장체제의 중요한 테두리를 형성한다.

 이 해에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의 3제동맹(三帝同盟)이 만기가 될 예정이었으나, 발칸 문제를 둘러싸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고. 러시아는 프랑스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어, 3제동맹의 지속은 바랄 수 없게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러시아를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1887년 1월 이후 러시아를 독일에 결부시키려고 교섭을 벌여, 6월에 양국은 본조약 및 추가의정서를 조인하였다.

 이로써 독일은 러시아의 불가리아·동루마니아에서의 우월권을 인정하고, 러시아의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양해협 점령시 이를 외교적으로 지지하고, 체결국의 한쪽이 제3국과 전쟁을 벌였을 때 다른 한쪽은 호의적 중립을 지키며, 체결국의 한쪽이 오스트리아나 프랑스에 대해 공격했을 경우에는 이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중 보호 조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따라, 동쪽에 대한 보장에 추가하여 서쪽의 프랑스에 대한 보장을 얻고, 거기에 서로 대립하고 있는 러시아·오스트리아를 함께 독일 쪽에 묶어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90년 이 조약의 만기에 즈음하여 러시아측에서는 경신을 희망했으나,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직후의 재상 카프리비가 거절하여,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게 되고, 비스마르크가 구축한 체제는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에 대한 러시아의 불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일 발발하자, 러시아는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8. 문화투쟁

  1872년 이래 독일 가톨릭교회와 국가 사이의 투쟁.

  제국통일(帝國統一) 이후 유력한 반정부당(反政府黨)인 중앙당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중앙당은 가톨릭정당이었기 때문에 의회에서의 정쟁(政爭)은, 마침내 교회와 국가의 다툼으로 발전하였다.

  비스마르크는 1871년의 교단조항(敎壇條項)에 이어, 1872년 1월 학교감독법안을 성립시키고, 교육을 교회로부터 국가에 넘기도록 하였다. 교회측에서는 이에 분노하여 양자의 싸움이 격화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73년 유명한 ‘5월법’을 공포하고 세속적인 일에 대한 교회의 간섭을 금지하고, 성직자의 임면(任免)감독권을 국가에 이양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탄압이 가하여짐에 따라 교회의 저항도 격렬해져, 드디어 사회민주당 세력의 확대와 더불어 비스마르크도 타협할 수밖에 없게 되어, 1880년 문화투쟁은 종식하였다.
 

9. 사회주의자 진압법

 독일에서의 사회주의운동의 급속한 발전을 보고, 1878년 비스마르크가 실시한 사회주의적 경향의 모든 결사(結社) ·집회 ·출판을 금지한 법률.

 독일의 사회주의운동은 한때 타격을 받았으나, 이 법률은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SPD)은 오히려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 법률이 계속된 12년간을 통해 금지된 출판물은 1,200종, 추방된 자 900명, 구금된 자 1,500명 이었다.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 (7주전쟁)

 1866년 여름, 독일의 통일을 놓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벌인 전쟁.

 독일통일에서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통일을 이룩하려는 의도에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결심한다. 독일제국의 대부분은 프로이센측에 가담을 하였으나, 몰트케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쾨니히그래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격파하여 독일통일의 1번째 방해국가를 제거하게 된다.

 그 결과로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을 탈퇴함으로써, 프로이센을 맹주로 하는 북독일연방이 성립되고, 독일통일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중립화시킬 목적으로 전쟁을 하였으며,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전국토의 점령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셉황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이 일어나자, 중립을 지켜 독일통일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보불전쟁)

 1871년 프로이센의 지도하에 독일통일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이 충돌해 일어난 전쟁.

 오스트리아를 독일통일에서 제외시킨 후 독일통일을 반대해온 프랑스를 무찔러 독일통일을 완성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의도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통일을 이룩하게되고, 근대 독일의 모체를 형성하게 된다.

  상세한 내용은 [독일의 역사]-[프로이센]-[프로이센 프랑스전쟁]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비스마르크의 일화]

 어느 날, 친구와 사냥을 나갔는데 그만 친구가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늪에 빠진 친구는 움직일 때마다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 있고, 비스마르크가 총대를 내밀어도 닿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친구는 더 이상 빠져나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포기하려 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비스마르크가 총알을 장전한 총구를 친구에게 들이대더니 방아쇠를 잡아당기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란 친구는 자신을 조준한 비스마르크의 총대를 피해 허우적거리며 몸을 이리 저리 움직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 친구는 늪 가장자리까지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비스마르크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오해하지 마. 난 자네에게 총을 겨눈 게 아니었어. 바로 좌절하고 체념하는 자네의 나약함에 총을 겨눈 거라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필요한 건 그것을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지 않았다면, 비스마르크의 친구는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비스마르크의 서명

 

 

                                                                                     출처 http://www.nobelmann.com/old/peoples/politician/bismarck.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