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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토만 투르크

영국신사77 2010. 7. 16. 09:55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알 안달루스, 호라산의 권력은 오래전에 사라져서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과 문명의 쇠퇴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한 무슬림 집단이 적극적으로 마지막 노력을 시도한다.

 

그들은 오토만 투르크이다. 세계의 상당수가 오토만 투르크의 힘에 떨게 될 것이다. 아랍 군대가 처음으로 세계를 정복한 지 천 년이 지난 후 오토만 투르크는 그것을 능가한다. 바그다드와 코르도바의 몰락 후에 투르크족은 완전한 아랍 제국을 재건한다. 알 안달루스는 빼고 말이다. 대신 발칸과 폴란드 남쪽 경계선의 루마니아를 차지해 스페인의 손실을 보상받는다. 수도는 바그다드가 아니라 이스탄불이다. 그들은 한때 자부심 넘치던 비잔틴 제국을 지도상에서 영구히 제거한다.

 

투르크들은 수도 보스포루스에서 세 개 대륙을 포용하면서 먼 시베리아 유역에서 출발해 터키에 도착한다. 그동안 고대 중국의 관문에서 시작해 한 세기 동안 원정과 약탈을 거쳤다. 중국에서는 중국식 이름 투쿠로 알려졌다. 이 명칭은 시대, 장소, 언어가 변해도 그대로다.

 

투르크들은 단지 권력만을 쟁취한 것이 아니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600년에 달하는 제국을 만들었다는 점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의 특징으로는 종교적 관용성, 포용성, 특권 대신 공적을 우선하는 태도, 공정함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에 점령된 지 불과 40년이 지나 1492년이 되었다. 이스탄불의 항구 부두로 작은 외국 선박이 들어오고 있다.

 

술탄 바예지드 2세의 대표단이 환영하기 위해 부두에 나가 있다. 수상이 이끄는 대표단에는 술탄 궁전의 다른 대표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동맹국이나 우호국 또는 중요한 국가에서 파견된 외국 사절단이 오는 것 같다. 도대체 이 방문객들은 누구일까?

 

그러나 배가 시야에 나타나고 곧 배에 탄 사람들이 부둣가에 내려서자 좀 더 정체가 명확히 보인다. 외국 대사들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들은 테두리 없는 모자를 쓰고 짙은 수염에다 고대 현자들임을 보여주는 성경에 따른 옷차림을 하고 있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지만 슬픈 표정은 확연히 드러난다. 다시는 되찾지 못할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도착한 이들은 피난민들로 많은 걸 잃은 사람들이다. 나라를 잃고 역사 전체를 잃어버렸다. 그러곤 보호해주겠다는 터키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알 안달루스의 세파르디 유대인들이다. 세 종교가 어우러진 국가의 심장부이자 마음이었던 그라나다, 코르도바, 세빌, 톨레도, 마드리드에서 이사벨라 여왕의 배신으로 쫓겨난 마지막 유대인들이다. 사라져가는 세파르디 유대인의 마지막 일원들인 것이다.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거나 죽음을 택하는 대신에 새론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술탄의 초대를 받아들여 이리로 왔다.

유대인들의 새로운 터전인 이스탄불은 비록 무슬림 치하이지만 정통 기독교인들이 수만 명이나 살고 있었다. 사실 정통 기독교의 창시자들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스탄불은 일찍부터 유대인 이민을 받아들였고 이슬람의 많은 분파들도 계속 유지되었다. 오토만 터키는 무슬림 세계에서 번영했던 많은 신앙들이 행복하게 공존하는 마지막 실질적 모습을 보여준다.

 

터키는 무슬림에게만 관용의 땅인 것은 아니다. 15-16세기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역시 무슬림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대규모 기독교인 집단 거주지가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인도에 남아 있다. 대규모 유대인 지역사회는 이집트와 이란에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모로코의 도시들에서 번성했다.

 

오토만 터키의 관용과 공존은 조용한 비공식적 정책이 아니라 명확히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술탄의 명에 따라 터키의 통치 관리들은 "유대인의 입국을 거부하거나 어려움을 부과해서는 안 되며 친절하게 받아주어야 한다."

 

---이스탄불에 유대인들이 온 지 불과 육십 년이 지날 때쯤 오토만 제국은 정치군사적 전성기를 누린다. 투르크인들과 관료 집단은 오백만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관할한다. 그리고 근처의 종속 영토도 상당한 규모다. 투르크들은 먼 서남아시아의 인도양과 오만에서부터 북아프리카를 지나 모로코까지 펼쳐지는 땅과 사람들의 집합체를 갖고 있었다. 투르크의 선박들은 주기적으로 지중해를 장악하고 이탈리아 도시 연합의 선박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오트란토의 해군 기지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투르크의 지도 제작자들은 경쟁 상대인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찾고 있는 것과 같은 세계적 모험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이 제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였다. 스페인에서 모든 걸 뺏긴 유대인들을 왜 환영하지 않겠는가? 터키 영토 내에는 아랍인, 비잔틴인, 그리스인,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크로아티아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헝가리인, 오스트리아인, 루마니아인, 페르시아인, 카프카스에서 온 사람, 베르베르인, 아제르바이잔인, 아르메니아인, 그루지야 사람, 소말리아인, 에티오피아인이 있다. 언어와 방언은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다.

 

투르크 영토에는 종교 또한 다양하게 많다. 알 안달루스와 바그다드 칼리프 제국의 관례를 따라 무슬림이 우세하기는 해도 타 종교 신도들의 협력과 지원에 많이 의지했다. 오토만 술탄의 엘리트 친위대인 예니체리 군단과 데브쉬르메 요원들은 모두 발칸 출신의 기독교 소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종교 때문에 뽑힌 것이었다. 친위대는 결혼도 할 수 없고 가정을 꾸릴 수도 없다. 그래서 전 생애와 에너지를 술탄과 나라에 바친다. 결과적으로 일부 기독교인들은 대륙 간 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위인 수상이 될 정도로 세력이 커진다. 보스니아 세르비아 출신 메메트 소콜루 파샤는 슐레이만과 그의 아들과 손자 때까지 수상이었다.

 

놀랍게도 이 거대한 제국은 혈연적인 왕족 가문에 의해 지배되는 많은 제국들과는 달랐다. 가장 강력한 이 제국은 직업적 고위 관료들이 운영했다. 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시험을 거쳐 실습훈련을 받고 뽑힌 젊은 관료들로서 제국의 고위 관료가 되기 위해 채용된 것이다. 기이한 반전이기는 하나 이런 공무원들의 대부분은 비무슬림이었다.

오직 오스만의 궁궐만이 유전적으로 술탄의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이 다스린다.

 

사회적 관용을 베풀면서 오토만 술탄은 남쪽으로 2400킬로미터 떨어진 메카와 메디나 성지들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이기도 하다. '지구상의 신의 그림자'인 그는 이슬람 법 샤리아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투르크는 왕족으로 무슬림들이었다. 하지만 샤리아, 해당 공동체를 다스리는 유대교와 정통 기독교 법, 기타 종교 집단 거주지에 관한 법 등 다양하고 관용적인 법 체계를 만들었다. 술탄에 의해 관장되는 시민법도 있었다. 이는 다른 법 체계가 확대되지 않는 비즈니스 영역에 적용되었다.

 

이런 상대주의적 다양성과 관용은 여러 원천에서 나온다. 부분적으로는 투르크의 유목민 기원도 있다. 유라시아의 평원지대를 이동하던 생활에 익숙한 무슬림 이전의 투르크들은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아들이곤 했다. 이런 자유주의적 관점은 또한 예언자의 관용적 가르침과 초기 이슬람 시절의 훌륭한 칼리프들 같은 사상가들에게서도 나왔다. 공정함과 다양성이 잘 섞인 독특한 권력의 융합은 투르크를 더 위대하게 만들었다. 투르크의 위대한 특징들을 모두 실현한 사람은 술탄 술레이만 1세이다. 1526-1566년 동안 통치했다.

 

 술탄 술레이만 1세

출처 : 푸른 무화과나무의 집
글쓴이 : 월광천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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