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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 염산교회 77인의 순교 기념관,순교체험관

영국신사77 2011. 9. 27. 00:12

                                             전남 영광 염산교회 77인의 순교 기념관,순교체험관 

 

 1939년에 세워진 염산교회는 6·25동란 때인 1950년 9월 29일 국군이 영광에 진군해 들어왔을 때 미처 퇴각하지 못한 공산주의자들이 10월 7일 교회당을 불 지르고 교인을 바닷가 수문통에서 새끼줄로 묶고 돌멩이를 달아서 수장시키는 참상이 벌어졌다. 이때 전교인의 4분의 3인 77명이 순교했다.

 

 염산교회는 일제 치하인 1939년에 세워져 계량학교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예배당 종을 빼앗기는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그처럼 의연하고 당당한 역사를 지닌 교회였다. 염산교회에는 이런 순교 장면이 있었다. 공산군은 담임이었던 김방호 목사와 7명의 가족을 한 줄로 세워놓고 몽둥이를 주면서 아들이 아버지를 치라고 협박하였다. 당연히 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자 그들은 군화발로 차고 짓누르면서 가족들이 보는 눈앞에서 김목사를 창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말았다. 이어서 김목사 사모를 그리고 또 다섯 아들과 8세와 5세 손자를 차례로 죽였다.

 

 1997년부터 순교기념 사업을 추진하여 2,000여평의 종교 용지를 마련하고 순교 공원을 조성, 순교자료 전시관과 순교 교육관을 개관하여 200여점의 자료 및 유물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77인의 순교비를 완공하여 교회 앞에 세워 두었다. 또한 ‘77인의 순교사’ 책자와 DVD를 제작해 이들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해 두고 있다.

 

 

  

                   영광 야월교회 / 순교기념탑 / 순교자 기념관

 

 배유지(유진벨)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주, 군산, 나주로 하여 목포에 선교센터를 만들고 전라지방에 복음을 전하던 중 당시 육상도로가 열악하여 선박을 이용하여 서해안으로 북상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법성포 인줄 알고 들어온 것이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게 되었다.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1908년에 염산리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후에 이 교회를 야월교회로 개칭하게 된다.

 

일제시대에는 야월리에 일본의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일진회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지방유지 들을 매수하여 친일 세력을 형성하는데, 이를 저항하는 뜻있는 세력이 전국적으로 퍼져서 소위 상록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며 농촌 잘 살기 운동, 애국사상 고취운동, 생활개선운동, 한글 가르치기 운동 등을 펴기 시작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중앙과 연락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극심하여 잘 연락이 되지 않으므로 YMCA에 몸을 담게 되고 여기에서 이들은 복음을 듣게 되어 이들이 주축이 되어 야월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950년 6.25 동란이 지나가고 9.28 수복이 될 때 기독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국군과 UN군을 환영했다 하여 공산군 잔당인 공비들이 마지막 철수 직전 교인들을 잡아 처형했다.  김성종,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최판원 집사는 염산 설도 수문 앞에서 개별적으로 끌어다 물에 빠뜨려 처형하였고 그의 가족들과 수많은 교인들은 두우리 쪽 큰 북재 넘어 공동묘지에 직경 6m 넓이의 구덩이를 파서 밤에 손과 몸뚱이를 묶어서 구덩이에 수장시키어 죽이기도 했다. 후에 한 구덩이에서 80구의 사체를 발굴하기도 했다.  이어서 그 해 10월 어느 날 그들은 교회당 건물까지 소각해 버려서 그 곳은 몇 년 동안 교회 없는 마을이 되었었다. 야월 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값진 신앙을 지키다가 한 분도 남김없이 살해되어 순교제물이 되어진 것이다.  교회가 불타고 교인이 한 명도 남김없이 순교하였고 교인 대다수가 생매장 되어 순교를 한 점이 한국 교회사에서 유일한 교회이다.

  

 

 

출처:http://cafe.daum.net/PilgrimsWay   기독교 성지순례자 모임

 

 

 

 거룩한 땅을 향한 발돋움은 순례자들을 겸허하게 만든다. 순교의 피가 생명의 젖줄이 되었다는 생각에 그 감사함이란 이루말할 수 없다. 이곳 영광군 염산면에 이르면 이러한 마음은 최고조에 이른다. 주님을 위해서 한 사람도 아닌 성도 77인이 한꺼번에 순교를 마다하지 않은 이 거룩한 땅에 나는 모세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 있다.

   
순교자 명단이 적혀있는 순교비 뒤로 염산교회가 보인다.
순례 여정 상 언제나 염산은 저녁 나절에 도착하게 된다. 이 시간의 염산의 하늘은 가히 환상적이다. 붉은 노을이 설도 포구에 비치어 마치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가을녘에는 대지를 뒤덮은 벼들이 바람에 넘실대며 춤을 춘다. 이러한 아름다움 속에서라면 어떠한 소란도 없었을 것 같지만,
 
 1950년 가을의 염산은 순교의 바람으로 마을 전체가 들썩거렸다. 한 명도 아닌 77인, 당시 염산교회 교인의 3분의 2가 순교의 길을 걸은 것이다.

지금도 설도 포구 앞에서 서면 그 때의 그 장면이 그려지는 듯하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로 나가기 원합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그들을 지켜준 순교 정신. 이는 이 거룩한 땅에선 순례자의 가슴에 뜨거운 감격을 일깨우고 있다.

 염산교회는 1939년에 세워져 염광 지역에 복음의 등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광은 종교적으로 영적 전쟁터와 같은 곳이다. 오래 전에 법성 포구를 통해 불교가 유입되었을 뿐 아니라, 백수읍 길용리에서는 원불교의 교조가 태어났으니 가히 종교적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원불교는 이곳을 성지로 여기고 있고, 그래서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오간다고 한다. 기독교인의 비율이 57.5퍼센트인데 비하여, 원불교가 11.3퍼센트로 그 비율이 낮기는 하지만 교조의 탄생지라 하여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어 그 세력이 대단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영광 염산교회는 기독교 순교자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순교 기념 사역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현재 2천여 평의 종교용지를 마련하고, 최근에는 기독교인 순교탑을 영광군의 지원을 받아 완공하기도 하였다.

 이 기독교인 순교탑 앞에 서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오늘날 작은 시험에도 쓰러지는 크리스찬들에게 이렇게 담대한 믿음의 선조가 있다는 사실이 실로 자랑스럽다. 기독교 순교탑이 서 있는 설도 포구는 지금도 고기잡이 배들이 정박하는 곳이다. 그 앞으로 젓갈 판매점들이 즐비하다. 아마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광장에 서 있는 이 탑의 의미를 모르겠지만, 이곳을 찾은 순례객들에게 있어서는 그 옛날 복음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선배들의 순교 정신을 마음 속에 되새기는 성지인 것이다.

 설도 포구를 지나, 길을 따라 걷다보면 염산교회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최근에 세워진 안내문을 통해 순교기념관 가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언덕을 타고 오르면 눈 앞에 아름다운 염산교회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교회 앞으로 순교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기념관 옆으로 큰 비석이 하나 보이는데, 바로 순교기념비이다. 이 비에는 순교자 77인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다.

 염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태균 목사는 최근 순례객들을 위하여 염산교회의 역사를 영상으로 제작하여 대형 화면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생존자들의 증언과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화면을 통해 염산교회의 순교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다. 비록 큰 예산이 들어가는 작업이었지만 순교 정신을 누구에게나 쉽게 전달하고자 하는 염산교회의 노력이 빛나는 부분이다.


http://blog.daum.net/hywkim9/10858266

 

 

염산 순교기념관(국민일보)

 

순교기념관에 들어가면,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터툴리안의 명언이 크게 적혀 있다. 그리고 벽에는 당시 순교 상황을 재현한 그림들이 차례로 걸려 있고, 그 아래로 순교당할 때 목에 매던 돌, 찔렀던 죽창, 당시 자료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염산교회 앞에 세워져 있는 순교 기념비.

 

순교기념관에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당시 상황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순교의 길을 택한 이들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사실 영광지역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지역 중에 하나라고 한다. 그 이유는 6ㆍ25 당시 영광군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 당시 영광은 전쟁에 대해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1950년 6ㆍ25 이후 7월 23일까지도 라디오 방송에서는 남한이 전쟁에서 우세하다고 오보를 하고 있던 터라 마을 사람들은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다 7월 23일 갑작스럽게 몰려든 공산군들로부터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군수마저도 피난치 못하고 피살되었다고 하니 참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염산에 진을 친 공산군들은 우선적으로 교회를 폐쇄하였다. 기독교인들은 공산군의 숙청 대상 1호였기에 기독교인들의 모임 자체를 없앤 것이다. 당시 오전 예배를 마치고 밤 집회를 알리는 종을 치러간 사모님은 끝내 종을 치지 못하고 울며 돌아갔다고 한다. 결국 교인들은 가정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피난을 거부한 김방호 목사가 성도들 집을 오고가며 비밀 예배를 집례하였다.

 

 그러던 중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과 UN군이 영광 읍내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다. 이 소식은 숨어서 예배를 드려야 함을 탄식하고 있던 기독청년들에게는 커다란 희소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익청년들과 더불어 만세 환영대회를 준비하고 이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 미처 후퇴하지 못했던 공산군들이 이를 분하게 여겨, 이를 철저하게 보복하게 되면서 염산교회의 순교가 시작된 것이다.

 

 우선적으로 10월 7일 만세 환영대회를 주도했던 청년들이 붙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주동자였던 염산교회 청년 기삼도가 교회당 앞에서 죽창에 찔려 첫 번째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 당시 목포 고등성경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기삼도는 목사가 되기를 소망하며 신앙생활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부끄러움 없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을 바라본 교인들은 오히려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다음날부터 공산군은 악에 받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붙잡힌 사람은 노병재 집사였다. 그들은 노 집사를 바닷가 수문 뚝방까지 끌고 가 수장시키려 했으나, 노 집사는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찬송을 부르며 순교하였다. 이후 노병재 집사의 부인 장일영 집사와 그 어머니 김식산 집사, 그리고 네 살 박이 막내 아들까지 9명이 순교를 당했다.

 

 10월 13일에는 염산교회의 1대 교역자였던 허상 장로와 그 부인이 순교를 당했다. 공산군은 허 장로 부부를 봉덕산 골짜기로 끌고 와 매를 때리고 죽창으로 찔러 죽였지만, 순교를 당하는 허상 장로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염산교회 교인들은 수문통 앞에서 무참히 살해되어 순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당시 살아남았던 백성규 씨는 이렇게 당시를 증언한다.

 

 이 증언은 염산교회에서 제작한 영상에 나오는 장면이다.

 

 "사람을 1미터 씩 거리를 두고 묶었는데 엄지손가락을 십자가 모양으로 해서 가슴에 꽉 조여 매고, 돌도 사람 머리만한 것으로 가슴에 묶어서 그 여러 사람 되는 인원을 뒤에서도 20명이 동원돼 한꺼번에 빠뜨렸어요. 이날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남자는 엎어져서 뜨고 여자는 뒤집어져서 떠다니고 온 바다에 시체들이 떠다녔습니다."

 

순교 현장인 포구 앞에서 순례자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당시에 바닷물이 모두 핏빛으로 바뀌어 한참동안 지속되었다하니 그 잔인함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만하다. 이후 장병태집사 집에 거했던 김방호목사 가족 여덟 식구가 모두 순교를 당함으로써, 영광 염산교회 77인이 모두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

 

성지순례 여행을 인도하면서 이곳 염산에서 결단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그래서 순례를 온 성도들에게 가방을 목에 매고 이곳 포구까지 걸어오게 했다. 그리고 뚝방에 일렬로 서서 함께 찬송을 불렀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비록 지금 우리는 순교의 현장에 처해 있진 않지만 당신들의 순교의 정신을 배우게 하소서. 소망하기는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이 주님을 위한 헌신을 결단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처음에 이곳 염산에 들어선 포구는 젓갈시장이었다. 그러나 순교의 역사를 몸소 깨달은 뒤 다시 나온 포구는 거룩한 땅이었다. 이곳에 서서 기도하는 순례자들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오늘날 믿음의 축복 안에 거하게 된 것을 감사하며,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이었다.

 

 1951년 2월 24일 교인의 3분의 2가 순교를 당한 염산교회에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 모였다. 그들은 땅 속에 묻어두었던 성경책을 꺼내고, 마루 광 항아리 속에 숨겨두었던 찬송가를 꺼내었다. 그들은 찬송을 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온 성도가 눈물로 찬송하며 그들은 결단했을 것이다. 이후 어떤 상황에도 절대로 주님을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오늘 포구에서 바라본 염산교회는 무지 높아 보인다. 햇빛이 십자가에 걸려 마치 주님의 신호를 보내는 듯한 광경이다. 십자가만 바라보라! 십자가만 바라보라! 순례의 길에 선 오늘, 이 거룩한 땅 염산에 서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나 무엇과도 주님과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