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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 교회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를 찾아서1-4 (국민일보)

영국신사77 2011. 4. 11. 23:00

    섬 교회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를 찾아서1(국민일보)

 

                                                       2008-09-27 

 

                           중도의 중동리교회

 복음의 씨앗이 곳곳에 뿌려질 때, 자칫하면 소외되기 쉬운 곳 중에 하나가 섬 지역이다. 섬은 여건상 미신이 강할 뿐 아니라, 교통이 불편해서 선교활동을 하는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섬마을에 복음전파를 위해 생명을 다해 헌신한 분이 있다.

 

 

 1933년 9월 설립된 중동리교회. 성결교의 대표적인 여성 순교자인 문준경 전도사가 세웠다.

 문준경 전도사. 여인의 몸으로 그가 설립한 교회만도 신안군의 섬 일대에 10여 곳이나 되고,

 그 교회에서 김준곤, 이만신 목사 등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성결교의 대표적인 여성 순교자이도 한 그녀는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섬 교회의 어머니'라 불릴 만큼 큰 위치를 차지한다.

 

 문준경 전도사가 사역을 하던 증도에 가기 위해서는, 무안반도 남단에 있는 지도읍 송도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 한다. 차를 세워놓고, 배를 기다리는 동안 바다를 바라본다. 저 바다 너머 한 섬에서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던 눈물의 전도자가 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아골 골짜기 빈들에도 나아가기 두려워하지 않았던 우리네 영적 어머니와 같은 분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가슴은 이내 뛴다. 바다 내음을 맡으며, 잠시라도 머리를 식힐 때쯤이면, 배는 벌써 증동리 선착장에 도착한다. 차를 부려 다시 십 리 정도 마을로 들어가면, 첫 번째 목적지인 증동리 교회에 도착하게 된다.

 

 

                               증동리교회 1933년 9월 창립

 증동리교회는 1933년 9월에 세워졌다. 처음 문 전도사가 이 마을을 전도할 때쯤에는 예배 처소가 없어서 성도들의 집을 오고가며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예배 장소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결국 성도들은 예배당을 짓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게 되었고, 문 전도사의 시숙 정영범이 먼저 발벗고 나서, 육지에서 중고 건축자재를 구해 증동리 선착장까지 운반하였다. 교인들은 기뻐했으나, 정작 문제는 교회를 지을 터가 없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가운데, 정영범의 손녀인 옥순이 정영범에게 찾아가 말했다.

 

 "할아버지,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도 멀지 않았는데, 우리 집이 먼저 본을 보여서 성전터를 바쳐요. 우리 집의 텃밭이 교회가 세워지는 성전터가 된다면 이런 영광스런 일이 어디 있어요?"

 

 손녀의 뜻밖의 제안. 정영범은 그 의견을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땅을 바치게 된다. 교회를 지을 자재를 구하기 위해 육지까지 나아가 동분서주했던 그가, 이제는 예배당을 위한 터까지 바친 것이다.

 

 터가 생기자, 교회를 짓는 일이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 교인들은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다가도, 날이 저물면 선착장에 가서 건축자재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새벽빛이 마을에 비출 때까지 기왓장과 나무들을 나르고 또 날랐다. 여인들은 기왓장을 머리에 이고, 아이들도 손에 나무 한두 점씩 들고 십리길을 걸었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1개월 남짓한 기간동안 여인네들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굳은살이 박힐 정도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있는 고생, 없는 고생 다한 폭이었다.

 

 하지만, 증동리 한가운데 우뚝 솟은 십자가만 바라보면 이런 고생쯤은 충분히 잊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 때 일을 기억하는 성도들은 교회를 지날 때마다 입가에 도는 미소를 참지 못한다고 한다. 아름다운 기억이 아름다운 미소를 만들었던 것이다.

 

 

        섬 교회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를 찾아서2(국민일보)

 2008-09-27 
 

                          박복한 인생의 나날들

 증동리교회 정원 오른쪽으로 문준경 전도사의 기념비가 보인다. 사실 문준경 전도사는 증동리교회에서만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섬마을 전체가 존경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녀는 6ㆍ25때 아무런 두려움 없이 공산군에 맞선 순교자일 뿐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섬마을 사람들을 위한 친구요,의사요, 위로자였다. 지금도 나이든 사람들은 문준경 전도사를 잊지 못한다.

 

 몇 년 전 월드컵 기독교시민운동을 주도했던 전 CCC 총재 김준곤 목사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시작했는가라는 질문에, 문준경 전도사가 8살의 소년인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다 말하면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곤 인터뷰를 잊었는지, 마치 문준경 전도사의 일생을 소개하는 듯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치매노인들을 친부모처럼 보살폈으며, 부잣집에서 음식을 얻어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문 전도사. 그 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섬에 흉년이 들어도 굶어 죽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한 여인의 헌신이 섬 전체를 완전히 복음화 시켰듯이, 월드컵을 계기로 이런 크리스찬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며 김 목사는 문준경 전도사의 영향력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문준경 전도사를 대하면서 복음으로 낳은 믿음의 자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교회당 오른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5분쯤 가면, 문 전도사의 묘소에 도착할 수 있다. 원래 이곳은 정씨 가문의 선산으로 그녀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지만, 문 전도사의 아름다운 생을 기념하여 온 가문이 찬성하여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주었다고 한다. 마치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듯, 묘소에는 무덤을 중심으로 널찍한 터가 준비되어 있다. 가을에는 낙엽으로 인해 묘소 전체가 소파마냥 푹신하다. 무덤 옆으로 문준경 전도사의 비석이 서 있고 그녀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 문구가 적혀있다.

 

  "여기 도서의 영혼을 사랑하시던 문준경 전도사 잠들다"

 

 문준경 전도사는 1891년 2월 2일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비록 작은 섬일지라도, 양반 가문에서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격도 밝고 명랑해서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그녀는 시집가기 전까지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17세의 꽃다운 나이, 여러 혼담이 오고가는 가운데 문준경은 정근택이란 청년과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의 박복한 삶의 시작이었다. 꿈같은 신혼생활을 보내야 할 때 남편 정근택은 집안을 돌보지 않았다. 외박을 밥 먹듯이 하였고, 부인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거기에 동서의 시집살이까지 겹쳐서 문준경은 눈물로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다. 우물가에 물이라도 뜨러갈 참이면 이곳저곳에서 '소박맞은 여인'이라고 숙덕대는 소리가 났다.

 

 그래도 문준경이 이를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며느리를 안쓰럽게 생각하고 계시던 시아버지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며느리를 위해 해주리라 생각하시던 시아버지는 평소 총명함이 빛나는 문준경에게 글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얼마나 배우고 싶었던 글인가! 어린시절 글을 가르쳐달라고 아버지께 간청했지만 여자가 글을 배워서 무엇 하느냐 핀잔만 들었던 상처가 이제 시아버지를 통해 치유되는 듯했다.

 

 하지만, 버림받은 아내로서의 고통은 끝내 치유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문준경은 너무나 반갑고 고마워 마당까지 달려 나갔으나 남편의 옆에는 만삭의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육지로 가서 첩을 데리고 온 것이다.

 

 너무나 큰 상처. 그러나 이러한 상처도 참고 견디면 남편이 돌아오리라는 희망으로 첩의 아이까지 받아주고, 몸조리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남편의 싸늘한 눈초리와 첩의 핀잔 뿐. 문준경은 다시 외로운 길을 걸어야 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를 만날 일이 있다며 잠시 집에 들른 것이다. 남편을 본 문준경은 그 동안의 설움이 복받쳐 눈물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남남도 아닌데 너무합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까닭이나 알려주세요."

 그러나 남편 정근택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대답하길, "임금이 개하고도 말을 하느냐!"고 말했다.

개가 되어버린 문준경의 인생. 박복한 인생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있어서 그녀는 그것까지도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소망의 끈,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녀는 이제 증동리에 있어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을 잃어버린 2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그녀는 목포로 나오게 되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나날을 고된 삯바느질로 달래며 살기 시작한 그녀의 인생에 어느 날 새로운 희망이 찾아왔다.

 

 

                 섬 교회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를 찾아서3(국민일보)

 2008-09-27 
 

 

{사진삽입:09.06.09 // 목숨으로 일군 ‘천국의 섬’… 무덤가 작은 비석은 흐릿[국민일보 2009.06.03]}

                  

 

                                                   문준경 전도사의 초상화

 

 1927년 3월 5일, 한창 삯바느질에 바쁜 그녀에게 어떤 점잖은 부인이 찾아왔다. 온화한 미소를 지닌 부인은 자리에 앉자, 가방에서 까만 두 권의 책을 꺼냈다. 성경과 찬송가였다. 부인은 성경을 펴보이며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간곡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처음듣는 이야기라 그녀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홀로 서럽게 살아왔던 그녀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또 사랑으로 대하던 사람이 있었던가. 그녀와 이야기하는 동안 문준경은 설움이 복받쳐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복음사역에 열정을 품던 문준경은 좀더 구체적으로 사역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경성 성서학원에 입학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결혼한 여자는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학교의 규칙으로 처음에는 청강생으로 시작해야했지만, 이성봉 목사의 도움으로 후에는 정규 학생으로 인정받게 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학업에 임하게 되었다.

 

 당시 학교는 한 학기를 마치면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 한 학기는 개척사역을 해야했다. 문준경은 생각했다. 어느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할까. 그리고 결정한 곳이 당시 남편이 살고 있었던 임자도였다. 그녀는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소망도 있었지만, 남편에게 이제 자신은 더 이상 남편에게 매여 있지 않음을 선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가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듯, 문준경 전도사의 길도 평탄치만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런 그녀를 손가락질했고, 남편은 손찌검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문준경 전도사가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독특했다고 한다. 평소 노래를 무척이나 잘했던 그녀는 마을 입구에서 당시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희망사'를 부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노래를 잘했던지,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넋이 빠질 정도였다.

 

                                                           최초의 교회인 임자 진리교회 창립

 노래를 10절까지 부르고 나서, 그녀는 이윽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욕도 많이 받았지만, 섬마을에는 점점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문준경 전도사는 최초의 교회인 임자진리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증동리에서 대초리로 들어가는 길 사이는 뚝방길로 이어져있다. 길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한 지역 같지만 지도상으로 보면, 증동리는 '후증도', 대초리는 '전증도'로 표기되어 있듯이 각기 다른 섬이다. 서로 약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은 예전에는 바닷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돌 징검다리를 통해 사람들이 오고 갔다고 한다.

 

 문준경 전도사는 이 곳을 통해 오고가면서 복음을 전했고, 대초리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녀는 이 길을 걷다가 풍랑에 직면하기도 했고, 온몸이 젖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직 복음을 전하리라는 심정으로 위험에 맞선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는 이처럼 교회 개척과 복음전도에 최선을 다했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너무나 전도를 열심히 해서 일년에 고무신 9켤레를 새로 사 신어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차피 속은 인생, 한 번 더 속는 셈치고 교회를 가보리라는 생각에, 당시 이성봉목사가 처음 개척한 북교동 초가교회를 가게 되었다. 당시 37세의 나이, 문준경은 그곳에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첫 믿음이었지만, 누구보다도 열심있는 신앙인이 되었다. 일이 끝나면 언제나 길거리를 누비며 복음을 전파했으며, 언제나 말씀 읽기과 기도에 힘쓰는 주님의 사람이었다.

 

 

                            섬 교회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를 찾아서 4 (국민일보)

 

                                                   순교자의 대열에 서다

 증도 선착장에서 증동리교회로 오다 보면, 해안도로를 만나게 된다. 그 도로를 타고 조금만 가다보면, 문준경 전도사 순교비를 만나게 된다. 순교비 앞에서 차를 세워 잠시 그분의 마지막 길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순교비 앞쪽의 갯벌이 문 전도사가 순교한 장소라고 한다.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마지막 길은 순교자로서 떳떳한 길을 걸은 것이다.

 

 6ㆍ25 당시 문전도사는 이미 섬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언제나 섬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는 이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공산군에게는 달랐다. 복음을 전하는 그녀는 그들에게는 반동일 뿐이었다.

 

    순교 현장에 세워진 문준경 전도사 순교 기념비.

 

 1950년 8월, 공산군을 중심으로 한 폭도들이 이웃 섬까지 양민을 학살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문 전도사는 자신과 함께 사역하던 백정희 전도사와 양도천 전도사를 피신시키기 위해 범선을 준비하였다.

 

 두 전도사는 함께 가자고 했으나, 문 전도사는 교회를 지킨다는 마음으로 이를 거절했다. 배가 출발할 쯤, 공산군 추종 일당이 배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피가 터지고, 살이 찢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믿는 이들의 정신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은 섬에 영향을 주는 문준경 전도사를 우선적으로 처단해야겠다는 일념에 그녀를 목포로 이송하였다. 9월 28일 새벽, 목포에 도착한 이들은 전혀 다른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 국군이 상륙하면서, 공산군이 다 후퇴한 것이다. 그들을 잡아온 자들도 겁이 나서 도망을 가버렸다. 문 전도사는 목포에서 이성봉 목사를 만났다.

 

 이성봉 목사는 이는 다 하나님의 은혜라며, 공산군이 완전히 토벌될 때까지 이곳에 있으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문준경전도사는 두고 온 백 전도사를 잊을 수 없었다. 내가 이곳에 있으면 공산군이 악에 바쳐 백 전도사를 그냥 둘리 없다. 문준경 전도사는 조금도 쉴 수 없었다.

 

 한편, 증도에서는 국군이 목포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공산군들이 후퇴를 서둘렀다. 우선적으로 반동에 속하는 양민들을 모두 처형하기로 했다. 단지, 반동의 원조, 문준경을 죽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빨리 일을 마치고 떠날냥에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바다에서 배 한척이 오는데, 거기에 문준경 전도사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공산당들은 기뻐 날뛰며 그녀를 체포했다. 이제 그녀도 사형장으로 떠나는 대열과 합류하게 되었다.

 

 바닷가로 양민들을 끌고 온 폭도들은 사람들을 하나 둘씩 죽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준경전도사의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구만……." 라고 말한 뒤, 죽창과 단도로 그녀를 찌르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문 전도사는 그 상황에서도 자신의 믿음의 딸, 백 전도사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죽어갔다.

 

 그 때문이었을까, 백정희 전도사의 차례가 왔을 때 그들은 총알 값만 아깝다며 그녀를 놔주었다. 섬 교회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그녀는 이렇게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1951년 8월 1일 증동리교회 앞뜰에 순교기념비가 세워졌고, 병풍도에는 '순교기념 예배당'이 세워지기도 했다.

 

 지금도 증도에서는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생명 하나하나를 너무나 소중히 생각하여,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나가길 두려워하지 않았던 복음 전도자. 아무도 몰라주는 외로운 섬에서 끝까지 복음의 횃불을 놓지 않았던 그녀.

 

 문준경전도사의 외손주 뻘이 되는 이만신 목사. 그가 기억하는 문준경 할머니는 한 영혼을 위해 가슴 아파하는 선한 목자였다고 한다. 한번은 어느 교인 하나가 배교하였는데, 그때 이만신 목사의 어머니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맏아들을 잃어버렸을 때 마음이 이렇게 아팠더냐?"

 

 지금도 문준경 전도사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녀를 통해 영향 받은 목회자들이 대한민국 곳곳에서 주의 복음을 외치고 있다. 마치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녀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오늘 순례자의 가슴에 커다란 도전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