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Music)/♪♪ 성악곡·성악가

[스크랩] 테너 하만택

영국신사77 2011. 2. 4. 13:40

 

 

 

 

 

 

 



만나고 싶은 얼굴


음악은 나를 기쁘게 하고 남을 행복하게 해준다

세계 속의 한국성악가, 테너 하만택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날 내가 소원하던 꿈들이 꿈틀대고 있는 것을 느껴요. 예술이란 재미있고 살아있고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자신 스스로 성실하게 다져갈 때 느낄 수 있는 것이겠죠?”


경희대 음대 성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태리 푸치니 국립음악원 수석 졸업, 독일 쾰른 국립음대에서 최고연주자(Konzetexamen)과정과 쾰른 극장에서 오페라 스튜디오 과정을 마쳤다. 뿐 만 아니라 경희 음대 시절, 동아 콩쿠르 1위 입상을 시작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페인, 벨기에 등 각종 세계의 콩쿠르 대회를 석권한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에는 유럽 여러 나라에 두루 초청을 받으면서 오페라 공연과 콘서트를 하고 있는 말 그대로 세계 속에 우뚝 선 한국 성악가. 하지만 이처럼 유럽 현지 무대에서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받고 있는 성악가이지만 고국의 작은 홀에서 독창회를 열고 크고 작은 음악회에 참여할 줄 아는 겸허함을 가지고 있는 남자. 바로 테너 하만택 씨이다. 그는 장소를 불문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원하는 청중이 있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무대에 서고 또 무대를 만든다.


글 사진 일멋


이탈리아는 배고픔과 추억의 무대

하만택 테너를 보고 있으면 아이 같은 천진한 미소에 따라 웃게 된다. 사람 좋아 보인다는 소리를 절로 하게 만든다.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했으니 벌써 24년째다. 한없이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오늘을 위해 그가 걸어온 길에는 힘겨움도 존재했을 것이다. 가족 모두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레 찬송가를 부르며 노래와 친숙했고, 전주 영생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전주 합창단에 들어가 중창, 독창으로 입상하면서 성악으로 첫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경희대 음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 수석 졸업 한 직후 이태리와 독일로 유학길에 오르며 뛰어난 음악성과 재능을 인정받으며 화려하게 승승장구한 삶을 살았으리라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힘들었고 가난했던 시설이 분명 있었다. 대학시절을 뒤로 하고 96년 결혼과 동시에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다. 문제가 생겼다. 유학 생활에 도움이 되기로 했던 모 선생과의 연락이 모호했던 것. 연고하나 없이 타국에 떨어진 젊은 부부는 이탈리아에 정착한 지 1년 만에 경제적인 시련을 겪게 된다. 첫 딸이 태어났다. 당시는 97년, 혹독했던 IMF바람이 불어 닥쳤던 불황의 시기였다.

“마땅하게 경제적인 수입이 없었을 때니까 겨울에는 난방도 못했고 아내가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죠. 그 때는 정말로 막막하고 죽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국에 돌아간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죠. 이 악물고 다시 일어나게 된 건 바로 딸아이 때문이었습니다. 주인의 소개로 정부에서 지원하는 아이의 우유와 기저귀를 6개월치를 받던 날 가난의 서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희망’이라는 명료한 답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답니다.”

그 후 98년도부터 각종 콩쿠르 대회를 다니면서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거의 1년 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안 다닌 곳이 없었다. 자동차 계기판이 안 보일 정도로 열심히 다녔다. 독일로 떠나는 전날까지 연주했다. 2000년, 드디어 독일 쾰른 극장에 스카우트 되어 정착하게 되었지만 1, 2년 동안은 부자연스러웠던 언어와 발성 문제, 극장 시스템과 무대연기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회가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고 다시 시작하는 기회라 믿으며 지난 8년 동안 높고 어려운 이 자리를 꿋꿋이 지켜냈고 지금 그는 독일을 중심으로 전 유럽과 아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갓난아기 나영이는 12세가 되었고 아내 송은주씨는 독일에서 작은 여행사를 운영하며 한글학교 교장과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문화는 씨앗과도 같다

돌이켜보면 24년간의 음악 인생 중 화려하고 좋았던 시절보다는 배고프고 힘들었던 시절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그가 한결같이 성악을 사랑하며 음악을 놓지 않았던 밑바탕에는 바로 가족들의 지지와 사랑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부모님의 근면 성실함이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저희 집은 대가족입니다. 저는 8남2녀 중의 막내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스스로 자립을 해야 했어요. 워낙 식구가 많아서 어머니께서 정하신 집안의 철칙입니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시절에는 단벌신사로 캠퍼스를 돌아다녔고 자취비도 수개월 밀린 적도 많았었죠. 하지만 언제나 저는 화목한 가정 안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려움속에서도 교회를 5곳이나 세우셨고 정말 부지런히 일하셨습니다. 언제나 새벽에 나가셔서 밤늦게 별을 보고 들어오셨죠. 넉넉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늘 신앙인으로서 최선을 다하셨고 정직과 사랑으로 저희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도 제 남은 인생동안 예술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부모님의 삶을 따라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러한 그의 신념대로 지금 하만택 테너는 성악인으로서 누구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내며 국내 음악을 위해 아낌없는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 1년 365일을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숨 가쁘게 활동하면서도 2008년부터는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반드시 1년의 반을 한국에 서 각종 크고 작은 음악회에 오르고 또한 손수 음악회를 열기도 하며 성악 꿈나무를 키우기도 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관객들과 꾸준히 소통 해오고 있다.  자신을 부르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간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그의 팬카페 (cafe.daum.net/hamantaek) 4천여명이 넘는 팬들이 그를 성원하고 있다.

“저는 멀리서, 큰 것을 통해 문화를 만들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문화는 씨앗과도 같아서 어디에 심든지 간에 시작하면 주변을 문화의 현장으로 변화시켜 문화지역을 만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점차 확대되면서 거대한 문화권이 되고 새로운 문화운동이 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시작한 것이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클래식 살롱 음악회이고, 성악 꿈나무들을 위해 여러 해 째 실시하고 있는 ‘한 모금 성악 마스트클래스’이다. 이 뿐 만 아니라 실제로 그는 후배 성악가들을 위해 모금 콘서트 활동을 펼치기도 하고 카페를 만들어 성악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그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음악은 청중 가까이에

앞서 말했듯이 하만택 테너는 현재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성악가이다. 수많은 나라의 큰 극장과 무대에서 노래를 하며 루치아노 파바로티, 알프레도 크라우스, 카를로 베르곤지 등 세계적인 테너들로부터 “흠을 찾기 힘들 정도로 기본기가 잘 다져진 테너’ 라는 극찬을 받으며 말 그대로 세계 속의 한국 성악가로서의 위상을 드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세계 속의 한국 성악가라는 말이 결코 부끄럽지 않은 그임에도 불구하고, 하만택 테너는 일종의 장소에 대한 권위의식이나 허세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천성적으로 성악을 사랑하고 음악이 청중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는 예술관을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작은 것의 소중함이 격식이나 형식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유학시절의 혹독한 배고픔 속에서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연주 뿐 만 아니라 학생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 성가대 세미나와 찬양 그리고 간증을 하며 봉사를 하고 있으며 연주회가 끝나면 성악 꿈나무 기금을 이야기 하며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을 전달하는 하만택 테너의 정성스런 마음이 이미 무대와 사람들과 진실하게 소통하고 나누고 싶어하는 음악인의 삶 그 자체를 대변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만택 테너는 무대를 가리며 연주하기 보다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최선을 다하는 성악가이다. 매일 먹어도 지겹지 않고 꼭 끼니 때마다 생각나는 밥처럼 언제 들어도 좋은 그런 음악을 오랫동안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무대에 존재하는 한 한국의 성악계가 더욱 더 풍부하고 깊은 음색으로 채워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의 가을 무대에 고운 단풍이 진하게 물들어가고 있다. 




 

출처 : 문화교양지 일하는멋
글쓴이 : 일멋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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