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삼호도(三糊塗)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얘기들을 한다. 사실 시대는 속죄양도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중국역사상 가장 억울한 속죄양은 이홍장을 꼽아야 한다고 본다. 대청제국의 매국노는 단 한 명이다. 그것은 바로 청나라의 실제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던 늙은 태후이다. 이것은 권력방면에서 하는 얘기다. 당시의 대청제국은 누구의 것이었느냐? 제발 나에게 이렇게는 말하지 말아달라. 대청제국은 모든 대청백성의 것이라고. 공자진의 아들이 영국프랑스연합군을 이끌고 원명원으로 향했을 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영급우방, 물급가노(寧給友邦, 勿給家奴, 차라리 이웃 국가에게 줄 지언정, 집안의 노비에게 주지는 않는다)", "양외필선안내(壤外必先安內, 외적을 몰아내려면 반드시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개념이 없었다. 그저 집안(家)의 개념만이 있었다. 명나라 영락제가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위를 빼앗았을 때 방효유가 반대하자 영락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짐의 집안 일이다". 강유위양계초의 변법이 실패로 끝난 후 서태후는 광서황제를 폐위시키려고 하였다. 외국의 주북경공사들이 반대하자, 서태후도 화가나서 말했다: "이것은 내 집안 일일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가지도자의 교체는 스스로 집안 일로 생각하는 것이고, 국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상소를 올려봐야 냉대를 받기밖에 더하겠는가. 한마디로, 대청제국을 팔아먹은 사람은 한사람 즉 서태후인 것이다.
현대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필자는 전체 대청제국은 하나의 주식회사로 볼 수 있다. 주주는 모든 만주족과 일부 한족관료로 구성되어 있다. CEO는 광서제이다. 회사회장은 서태후이다. 이홍장은 기껏해야 집행이사정도에 불과하다. 회사의 정상적인 운영으로 본다면 최후로 서명하고 도장을 찍는 것은 서태후가 되어야 한다. 이홍장은 그저 발로 뛰어다니는 심부름만 할 뿐이다.
대청제국은 대청백성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홍장은 비록 매국을 했다고 하더라도, 국민은 관여할 바 없는 것이다. 대청제국은 이홍장의 것이 아니므로, 그래서 그 나라는 그가 팔아먹고 싶다고 팔아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중국사람들은 왜 집정자 본인은 쉽게 용서하면서, 집정자를 도와서 일처리한 사람은 용서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구(趙構)와 진회(秦檜)를 보면, 사람들은 모두 진회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조구를 위하여 도와준 것뿐이지, 진회가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다시 예를 들어, 서태후와 이홍장을 보면, 서태후는 자신을 위하여 대청강산을 자기의 무덤으로 같이 끌고 갔다. 중국역사상 그녀보다 더 매국을 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욕설은 대부분 이홍장을 향해 있다. 이홍장은 그저 서태후가 매국하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했을 뿐인데도. 우리가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상황은 이렇다. 서태후가 똥을 쌌고, 이홍장을 엉덩이를 닦았다. 서태후가 매국을 했고, 이홍장이 욕을 얻어먹었다. 가련한 이홍장.
양계초는 이홍장에 대하여 "재기는 있으나 학식이 없고, 경력은 있으나 혈기는 없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이홍장의 재주에 대하여는 존경하나" "이홍장의 학식에 대하여는 아쉬워하고", "이홍장의 처지에 대하여는 비애를 느낀다"고 하였다. 양계초는 역시 양계초이다. 세마디와 두 문구는 이홍장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필자가 동감이 가는 부분은 이홍장의 처지에 대하여 비애를 느낀다는 내용이다. 필자가 보기에, 역사는 이홍장을 역사의 전면으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명예의 진흙탕으로 몰아넣었다. 청말역사상의 일부 외교조약은 모두 이홍장의 매국에 대한 증거이다. 우리가 한번 헤아려 보자.
1876년 9월, 이홍장은 영국과 <<중영연태조약>>을 체결하였다. 매국 한번.
1895년 이홍장은 일본과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였다. 매국 또 한번
1896년 이홍장은 러시아와 <<중러밀약>>을 체결하였다. 매국 또 한번.
1901년 청나라를 대표하여 열강 11개국과 <<신축조약>>을 체결하였다. 매국 마지막으로 한번 더.
이후에는 팔아먹고 싶어도 팔아먹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첫째는 팔아먹을 것은 다 팔아먹었고, 둘째는 노인이 나라를 팔아먹고 너무 기뻐서(?) 피를 여러 차례 토하고 11월 7일에 죽었기 때문이다.
조약내용에 관하여는 얘기하지 말자. 어쨌든 청나라때 유행하던 민요가 있었다. "이이선생은 매국노이다(李二先生是漢奸, 이홍장은 둘째이므로 李二이다)"라는 것이 당시 인기를 얻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또 하나의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하나의 국가의 국제적인 지위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한 외교관의 자질인가 아니면 전체 국가의 실력인가? 이 문제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이홍장의 매국에 대하여도 명확히 말할 수 없게 된다. 한 탁구선수는 자신의 실력으로 경기에서 랭킹을 취득할 수 있다. 그의 국가가 아무리 약소하더라도: 그러나, 외교관은, 그의 국가가 아주 연약하고, 체제도 안되고, 경제도 안되고, 정치도 안되며, 문화도 안된다면, 싸우기만 하면 일패도지한다면, 그렇다면 개인이 아무리 총명하고 강하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양계초는 그의 이홍장에 대한 평가에서 아주 동정적으로 얘기한 것이다. "이런 시기를 맞이하면, 소진 장의의 언변이 있더라도 그 계책을 써먹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힘이 있더라도 그 용기를 써먹을 수 없을 것이다. 구차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구걸을 하는 것 이외에는 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조약을 빨리 맺은 것이 이홍장의 공로라고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비록 이홍장이 없더라도 일본은 역시 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모든 책임을 이홍장에게 지우고 있고, 진회니, 장창방이니라고까지 욕하고 있는데, 그 자가 이홍장의 지위에 처해 있었다면 그 결과는 또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한마디로 해서, 모두 이홍장이 매국노라고 욕하고 있는데, 스스로 대청제국의 외교대신이 되어서 매국의 맛을 보라고 한다면, 욕하는 목소리는 아마도 적어지게 될 것이다.
이홍장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나라를 팔아먹고 있을 때, 하마터면 매국열사가 될 뻔했었다. 일본과 담판할 때, 일본인 소분청의 암살을 당했다. 그러나 죽지는 않고, 병을 얻은 상태로 매국을 했다. 양계초의 말에 따르면, "일황이 어의 군의를 파견하여 살펴보게 하였고, 여러 의사들은 모두 총알을 뽑아내야만 치료될 수 있다고 하며, 며칠간 정양하고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홍장은 분연히 '국가의 지경이 어려운데 평화조약을 맺는 것은 한시도 늦출 수가 없다 내가 어찌 이런 일로 국가의 일을 그르칠 수 있겠는가. 죽어도 수술받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피가 옷을 적시는 것을 보고서도 '이 피는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나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내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의 강개하고 충정에 찬 기운에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보라. 이 사람의 매국이 어느 수준인지를. 팔아먹으면서도 장렬하고 격렬하다. 마치 민족영웅이 된 듯하다. 이홍장은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후에, 시모노세키를 떠나면서 "평생 일본땅을 다시 밟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1년후 미국여행을 마치고 미국선박을 타고 귀국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배를 갈아타게 되었다. 이 늙은이는 자기의 정신과 육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일본과는 연결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무슨 말을 해도 상륙하려고 하지 않았다. 시종은 어쩔 수 없이, 그저 미국배를 대청제국의 배인 "광리호(廣利號)"에 직접 대어서 갑판을 연결시킨 후에 바다로 떨어질 위험을 감수하면서, 배를 갈아타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이홍장의 정부내에서의 지위를 구해내지 못했다. 일단 돌아오자, 이홍장은 정부의 냉대를 받았다. 정부가 그에게 준 새로운 직위는 "총리아문대신상행주"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반식재상"이다. 서태후가 팔국연합군에 죄를 지어서 그들이 중국으로 들어올 때야 다시금 이홍장의 매국특기를 생각해내고, 그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했다. "이 상황을 되돌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너 이홍장 뿐이다"
1901년 11월 7일 이홍장이 죽었다. 역사책에서는 대청제국이 마치 동량이 무너지고, 의지할 곳을 잃은 것과 같다고 적었다. 태후와 황제가 대성통곡했다고 적었다. 이후에는 아무도 나서서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라는 아직 다 팔리지 않았는데, 이후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무도 대신 엉덩이를 닦아주지 않는다. 아무도 대신 나서서 욕을 얻어먹어주지 않는다. 당연히 살아가기가 힘들어진다. 당연히 오만했던 이홍장은 자신의 일생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도 어쨌든 일찌감치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의 일생을 "그저 풀칠하는 장인으로서, 낡은 집을 보고서 그저 수리만 할 뿐 개축할 능력은 없다"고 표현했다. 이홍장이 이렇게 말한 것은 아마도 사마광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적었는데, 이것은 중국역사상 흥망득실을 연구한 전문서적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예로 들면 집(어쨌든 유가이므로 도가에서와 같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생선을 굽는 것과 같다'는 말과는 다르다)은 낡아지면 수리하고 보완해야 한다. 크게 무너지지 않았으면 새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중국의 봉건체제가 그럭저럭 수천년을 유지해 온 것은 모두 중국의 정치가가 일반백성들의 옷을 입는 원칙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새옷으로 삼년, 헌옷으로 삼년. 기워서 다시 삼년. 이홍장의 고충은 대청제곡은 이미 낡은 집 한칸과 낡은 옷 한벌이었다는 것이다. 서태후가 이 낡은 집안에서 어떻게 싸우든 말든, 이 낡은 옷에다가 용이나 봉황을 수놓았건 말건간에. 이홍장의 그 종이호랑이 북양군대를 그녀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홍장. 내가 60세 생일을 지내야 하고, 이화원을 수리해야 하니, 해군경비를 나에게 내놓아라."
만일 네가 이홍장이라면, 반마디라도 안된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 안된다. 왜냐하면 이홍장의 직접 상사는 총리아문대신인 광서제의 부친 혁환이었는데, 혁환이라고 해서 서태후에게 아부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아들이 남의 손안에 들어 이쓴데. 당연히 아부를 하더라도 괜히 한 것이 되었다. 어쨌든 아들이 마지막에는 그녀의 손에 망쳐졌으니까.
만일 네가 이홍장이라면, 일본을 이길 수 있었겠는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전제는 소련이 중국동북에 출병하고, 미국이 태평양을 점령하고, 일본국토에 대하여 두 개의 원자탄을 떨어뜨린다면. 이홍장은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화위귀(和爲貴, 화합하는 것이 귀하다)"의 원칙을 따랐고, 대청제국이 전쟁을 하려고 할 때면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패배한다면 당연히 좋지 않다. 그러나 승리하더라도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라는 왕정위와 같은 화풀이의 말을 했었다.(이것은 왕정위가 중프전쟁때 광서순포에게 지시한 내용이다). 사실 이홍장은 조금은 멍청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대학사 서동(徐桐)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는 서양인을 보자마자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조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양공사관을 지나갈 때, 그는 견디지를 못해서, 길을 돌아서 갔다. 서선생과 같은 애국적인 인사라면 절대 서양인과 얼굴을 맞대고 싸우지 않았을 것이니, 더더구나 서양인과 얼굴을 맞대고 조약에 서명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전체를 통틀어 중국인들이 당한 굴욕과 원한은 어쨌든 풀어야 했다. 서태후를 겨냥할 수는 없었고, 그저 서태후의 심부름꾼을 겨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홍장은 애국주의자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당신에게 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에 가장 유행하였던 욕은 "이이선생은 매국노이다"라는 것이다. 가장 재미있는 욕은 이홍장과 이홍장의 사위를 함께 묶어서 하는 욕이었다. 이홍장의 큰사위는 당시 유명한 청류파의 인물인 장패륜(張佩倫, 자는 幼樵)이었다. 장패륜은 모두 알다시피 입으로는 애국을 떠든 사람이다. 그러나, 마미전투에서 해군대신인 그는 한번도 배에 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엉뚱한 아이디어를 내서 10척의 주력함을 하나로 모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크다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미전투에 패한 후, 그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충군(充軍,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나중에 이홍장의 사위가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욕하는 대련(對聯)을 지었다.
노녀자유초, 무분노유(老女字幼樵, 無分老幼)
동상배서석, 불시동시(東床配西席, 不是東西)
늙은이의 딸의 사위가 자가 유초이니, 늙은이와 어린이가구분되지 않고
동쪽 침대에 서쪽 방석을 놓으니, 물건도 아니로구나
정말 물건도 아니다(불시동서는 욕임). 장패륜은 바로 장애령(張愛玲)의 할아버지이다. 이홍장은 바로 장애령의 고조외할아버지가 된다. 이홍장의 일행에서 매국노라는 모자를 썼던 것이 가장 유감스러운데, 그의 후손인 일대의 재녀 장애령도 역시 매국노와 어울렸다. 왕정위정부의 선전부장을 지냈던 호란성과 연애를 하여 한 사람의 매국으로만으로도 모자라, 후대에서도 매국노와 연결되었으니, 하늘의 조화일 수도 있다.
현대에도 아직 이홍장을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눈이 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그저 이홍장이라는 이 과녁만을 본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다. 손을 들어 이 과녁이 숨겨주고 있는 그 늙은 여자를 찾지 못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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