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만군(程萬軍)
고대 중국의 당파싸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자기편'만 따지지 '재능'은 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패의 극을 달린 청나라말기에는 이것이 더욱 두드러졌다. 북양수군의 전멸 내지 청일전쟁의 완패는 모두 당쟁과 관련이 있다.
청나라말기에 가장 두드러진 당쟁은 상회(湘淮) 당쟁이었다.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을 우두머리로 하는 상회의 양당은 외적이 몰려오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내부투쟁에 모든 역량을 쏟았다. 그리하여 정여창(丁汝昌), 섭지초(葉志超)와 같은 무능한 자들이 대들보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도 망하고 나라도 망했다.
상회당쟁은 좌종당과 이홍장의 유한한 재능을 모두 소진했을 뿐아니라, 동시에 그들은 인재선발에 있어서도 서로 기싸움을 벌였다. 그러다보니, 내편이 아니면 쓰지를 않았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 백락(伯樂)이 있은 다음에 천리마가 있다.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부적절한 사람이 부적절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은 부하의 잘못이 아니라, 상사의 잘못이다.
청일전쟁에서, 이홍장은 두 명의 총사령관을 기용한다. 해군총사령관 정여창, 육군총사령관 섭지초이다. 이들은 모두 무능한 자들이다. 정여창은 수군제독의 위치에 있으면서 단지 한가지 원칙만을 지켰다: 이홍장의 뜻에 따라 시키는대로 한다는 것이다. 북양수군을 '이가군(李家軍)'으로 만들었다. 정여창이 이것은 잘 해냈다. 그러나, 해전을 지휘하는 것은 전혀 할 줄을 몰랐다.
정여창은 비록 이홍장이 중용한 장군이지만, 경천위지의 재주를 지닌 것은 아니었고, 세계의 흐름에 맞추어가는 일대장군도 아니었다. 그저 구식봉건관리일 뿐이었다. 그는 일찌기 태평군에 참가했고, 태평군의 대세가 기울자, 어쩔 수 없이 배신하고 상군(湘軍)에 투항했다. 얼마후 회군(淮軍)에 배속된다. 그리고 태평군 및 염군과의 전투에 참전한다. 그러는 과정에 관직이 제독에 오르고, 1879년(광서5년)에 이홍장에 의하여 북양수군으로 전속된다.
정규해군출신도 아니고, 정규해상훈련을 해본 적도 없이 그저 '이홍장의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회계(淮係)인 정여창은 육군에서 해군으로 변신하여 직접 해군을 지휘하게 된다. 정여창은 이홍장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었다. 너무나 의존하여 자신의 주관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해군총사령관으로서의 자신감은 전혀 없었고, 이홍장의 집안노비와 같았다. 해군총사령관이 전공을 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 의탁하여 승진하는 길을 걷다보니, 북양해군은 정여창의 지휘하에 사실 '이가군'으로 변모하여버린다.
이홍장에 의하여 북양수군으로 옮기기 전의 이십여년동안, 정여창은 장강수군에 있었기는 했다. 그러나 신식해군의 훈련에 대하여는 전혀 무지했다. 기본적으로 수전경험은 전무했다. 하물며 해전은 말할 것도 없다.
북양수군으로 옮겨온 후, 청일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기간동안, 청나라해군의 최고지휘관으로서 정여창은 무엇을 했는가?
노비철학으로 무장된 북양수군의 주요목적은 대외방어가 아니라 대내용이었다. 정여창은 평소에 훈련하면서, 상사의 눈에 들게 하는데만 신경썼고, 형식적인데 치우치고, 실전적인 면은 전혀 추구하지 않았다. 훈련장에서는 괜찮지만 실전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양수군의 사격훈련은 군함이 사격할 때, 목표선박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군함이 거리를 다 재고나서 그 부표를 향하여 포를 쏜다. 당연히 백발백중이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도 그러한가? 다음으로 진형문제인데, 전쟁터에서는 천변만화한다. 평소에야 미리 얘끼를 해주면서 오늘은 어떤 진형이라고 해주니까, 모두 미리 준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깃발을 흔들면 바로 진형을 바꾸어야 한다. 어떤 진형으로 바꿀 것인가는 전쟁터의 상황을 보고 정한다. 평소에 그저 미리 계획된 대로만 진형을 만들다가 전쟁터에서 어떻게 적응하겠는가? 그래서 정여창이 지휘한 북양수군은 평소훈련에서도 실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훈련을 위한 훈련을 했다.
정여창이 북양수군을 지휘한 것은 비전문가가 전문가를 지휘한 꼴이다. 등세창(鄧世昌)등 소장파가 이렇게 한탄한 것도 이해가 된다: 영국에도 해전을 모르는 해군사령관이 있을까?
이런 해군사령관은 해군을 망칠뿐아니라, 그 자신도 망친다. 결국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일을 하다가 자기 목숨까지 빼앗기고 만다.
무능한 것과 기개는 별개이다. 비록 정여창은 청일전쟁의 막바지에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무능한 자라는 본질을 감출 수는 없다. 해군에 필요했던 것은 위기를 수습해줄 수 있는 총사령관이었지, 한번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무능한 자는 아니었다.
정여창을 선택함으로써 해군의 패배를 가져왔다. 그리고 섭지초를 선택함으로 인하여, 조선과 동북지방을 철저히 빼앗기게 된다.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이홍장은 육군사령관을 정하면서 고심을 거듭했다. 그때의 육군장군들 중에서, 전쟁에 능한 노장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홍장은 결국 섭지초를 선택한다.
'말솜씨'로 승리하고, 거짓말을 잘하고, 주인에 절대복종한다. 이것이 섭지초의 재주이다. 섭지초는 관료중 전형적인 인물이다. 담은 쥐처럼 작고, 돈을 목숨처럼 아낀다. 명망도 없다. 다만 '회계'출신이므로, 이홍장이 자신의 적계로 보았고, 계속하여 이런 '작은 재목(小材)'를 '크게 쓴(大用)' 것이다.
섭지초가 육군총사령관의 자리에 앉았다. 관직은 수직상승할 수 있지만, 재능이 순간적으로 제고되지는 않는다. 섭지초가 이끄는 부하들은 모조리 관료배였다. 아편을 흡입할 줄 아는 외에, 전쟁시에는 매일 술자리를 벌이고 연회를 벌였다. 사병들을 아낄 줄도 몰랐고, 쳐들어오는 적군을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는 '배는 다리에 도착하면 자연히 곧게 선다'는 관료사회의 철학에 익숙해져 있었다.
평양전투이전에 섭지초의 첩은 그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에게 집안의 처첩을 많이 생각해달라고 권한다. 그래서 원래 인걸도 아니었던 그는 평양전투의 긴급한 순간에 성을 버리고 도주하고 만다.
정여창, 섭지초는 범재라기보다는 무능한 자들이다. 이 점은 이홍장의 사위인 장패륜(張佩倫)도 일찌감치 알아보고, 이홍장에게 일깨워준 바 있다. 그러나, 이홍장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서도 역시 그들을 중용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적계'부하이기때문이다. 자기사람인 것이다.
정여창 본인은 해군을 몰랐지만, 그의 부하들 중에는 좌종당, 심보정이 만든 마미선정학당 졸업생들이 많았다. 일부 인맥에 의지하여 승지한 해군장군들 은 비록 정여창의 말을 잘 들었지만, 시세를 따라 움직이든 그들이 생각한 것은 '줄서기'였지, '전투'가 아니었다. 이들이 어찌 흉흉한 일본의 침입에 대적할 수 있었겠는가?
당쟁, 내부투쟁, 견제, 부패. 큰 돈을 들여 구입한 전함이 아깝고, 이들 해군장군들이 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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