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십자가의 길(Via Dolorosa)

◆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 성당 (1) <성화>

영국신사77 2010. 11. 11. 00:26

오늘날 순례자들은 무덤성당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지만, 이슬람이 통치하던 1187-1832년까지는 항상 닫혀 있었다.

 

 현재 광장에서 볼 때 오른쪽에 있는 문은 아예 봉해져 있는데, 1187년 예루살렘을 접수한 살라딘은 성당에 들어가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수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모든 문들을 폐쇄하고 하나의 문만을 남겨 놓고 순례자들로부터 성지순례 세금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246년부터는 두 이슬람 가정에 무덤 성당 열쇠를 맡겼는데, 한 집은 성전 문을 열고 닫는 권한을 그리고 다른 한 집은 성전 문의 열쇠를 보관하는 권한을 주었다. 이것은 현재도 유효하게 적용되고 있다.

 

 기독교 종파들이 내부 성전의 소유권과 관할권을 놓고 다툼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열쇠를 가지고 있는 이슬람 신자가 실질적인 무덤 성당의 주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금은 일정하게 정해지지는 않았고, 기간에 따라 달랐다고 한다.

 

 이때 이미 무덤 성당 안에 프란치스칸들은 수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프란치스칸들이 순례자들을 인솔할 땐 세금이 면제 되었다고 한다. 무덤 성당 안의 수도원에 살고 있는 형제들은 연중 몇 달씩은 성당 문이 닫힌 상태에서 갇혀 살아야 했다. 성당 출입문에 있는 작은 문은 형제들의 음식을 공급받거나, 외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문이었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1217년, 순례자들이 무덤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이슬람에 세금을 내는 것을 금지하며, 이것을 어길 경우 파면하겠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세금은 폐지되지 않았고, 순례자들은 파면의 위험을 무릅쓰고 순례를 감행(?) 하였다.

 

 무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금만 내면 되는 것이 아니었고, 시간을 엄수해야만 했다. 오후 3시 이후에는 무덤 성당에 들어갈 수 없었고, 다음날 아침 9시경까지는 나올 수도 없었다. 이들은 잠긴 성당 안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성당에 들어가는 세금이 면제되는 것은 연중 두 번이었는데, 한번은 성금요일부터 부활절 월요일까지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 발견 축일 전야이다. 순례자들이 내야 했던 순례 세금은 1832년에 폐지되었다. 현재 그리스 정교회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그리고 아르메니안 정교회에서는 20쉐켈(4달러 정도)을 성당 문을 열고 닫고 보관하는 가정에, 매월 또는 특별한 장엄 전례가 있을 경우 상징적인 액수인 세금을 내고 있다. 1년 중 딱 하루!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세족례 및 성유 축성 미사)부터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 예식이 끝나는 오전 9시경까지는 무덤성당이 프란치스칸들(라틴 카톨릭)에게만 유보된 시간이다.

 

 다른 364일은 성당 대문 바깥쪽 열쇠는 이슬람 신자가 그리고 성당 안쪽 열쇠는(성당 문을 2중으로 잠금) 그리스 정교회에서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덤성당 안에 수도원을 가지고 있는 프란치스칸들은 이들 덕분에(?) 관상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열쇠의 권리를 작은형제회(프란치코회)에서 행사하는 날이다. 이날은 주님 만찬 미사(아침 8:30 시작)가 끝나고 나서 12시경(정오)에 문을 닫고, 이후에는 공식적인 전례를 위해 형제들이(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형제들) 행렬해 들어올 때와 떠나갈 때(14:45, 18:00, 20:00) 잠시 열었다가 다시 바로 닫게 된다. 이 날은 특별히 허락 받은 신자들은 성당 내에 남아서 함께 기도 할 수 있다.

 

 성당 문을 열 수 있는 권한은 성금요일, 골고타에서 십자가 경배 예식(07:15-09:00)이 끝날 때까지 유보되고, 경배 예식이 끝나면 원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이날 하루는 오직 전례만을 위해서 성당 문을 여는 날이기에, 그 외의 모든 날 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하루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날 타 종파는 무덤 성당 안에서 예식을 거행하지 못한다. 오직 라틴 전례만이 거행되며, 허락받은 몇 명의 신자들과 형제들이 무덤에 남아 전례를 거행하게 된다.

 

 무덤성당에서는 수난 감실을 예수님 무덤 안에 만들었다. 성체가 모셔져 있는 무덤 안은 빈 무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있는 무덤이었다.

 

                               (글, 사진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 성당

 

 예수님 무덤성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신 골고타와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신 곳, 그리고 후에 헬레나 성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한 곳 등을 아울러 기념성전으로 지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곳은 시내 근처(요한 19,20) 곧 골고타라고 불리는 곳이었다.(마르 15,22; 마태 27,33; 요한 19,17) 골고타는 '해골' 또는 '머리털이 없는 두개골'을 의미하는 아라메아어 '골골타'나 히브리어 '골골레트'가 희랍어 식으로 발음된 것이며 라틴어로는 갈바리아라고 부른다.  골고타는 예수님 당시에 성벽 밖의 불모지였고, 주로 무덤들이 즐비해 있었다고 한다. 골고타와 예수님 무덤의 원래 모습이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골고타와 예수님 무덤의 원래 모습은 사라졌지만 현재의 기념 성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골고타와 무덤이라는 역사적인 신빙성은 확실하다고 한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골고타 언덕은 깎여지고 메꾸어져(135년) 그 위에 로마 신전과 쥬피터와 비너스 상이 세워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는 324년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왔고, 쥬피터와 비너스 신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골고타와 예수님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황제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 후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신전은 헐리고, 예수님의 무덤이 발굴하여 기념 성전을 세웠다.

 

 그 후 614년 사라센왕조 페르시아[Sassanian Persia, AD 226~651년] <의 호스2세[Khosrau II, 591년 - 628년:재위 37년] 때의 장군 샤흐르바라즈의해 기념성전은 파손되었다가 629년 보수되었지만, 1009년 카이로 출신 칼리프 엘 하킴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것은 십자군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십자군에 의해 성전은 보수 및 개조되어(1149-1180년) 오늘날 성전의 모체가 되었으며 이후 예수님 부활성당에서 무덤성당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1545년 지진으로 인해 종탑을 비롯하여 상당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고, 1717년과 1728년 두 차례에 걸쳐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였으나 1808년 화재로 인해 많은 부분이 타버렸다. 이때 유럽은 나폴레옹의 전쟁시기라 라틴교회는 성전을 보수하기 위한 여건이 좋지 않았던 반면, 그리이스 정교회 측에서는 러시아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받고 오스만 터키의 외교정책을 힘입어 성전을 보수하고 보수한 부분을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었다. 이 당시가 성전의 소유권을 놓고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그 후 1834년 지진으로 성전은 다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라틴교회와 정교회가 공동으로 성전을 보수하였으나 1927년 지진으로 다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다. 그 후 1959년 라틴,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합의하여 1961년부터 재건 및 보수가 되었다.

   

                                                                                                (글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 성당 

 

 현재의 예루살렘에 이스라엘의 도성이 자리잡게 된 것은 기원전 1000년경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오벨 산 언덕에 도시를 세워 “다윗의 도성“이라 칭했고(2사무 5,9) 키럇여라림에 있던 법궤를 도시 안으로 옮겨와(2사무 6장) 정치적·종교적으로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솔로몬 시대(기원전 960-926년 재위)에는 도시 중심지가 오벨 산보다 좀더 북쪽인 모리아산 언덕(창세 22,1-19, 현재의 황금돔 사원이 있는 곳)으로 옮겨지고 법궤를 모실 성전과 화려한 궁전, 그리고 튼튼한 성벽을 세웠다(1열왕 5-8장).

 

 그 후 예루살렘은 주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파괴와 복구의 과정을 겪게 되고, 기원전 63년경에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머물게 된다. 이때 로마황제의 총애를 받아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7년)가 왕으로 등극하고 이후 기원후 30/31년경에 예수님이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형에 처형된다. 그리고 난 후 44년경에 이스라엘 전역은 로마의 직속령이 된다.

 

 1차 유다 독립항쟁(66-70년)의 결과로 유다는 로마의 속주가 되고 모든 특권이 박탈당하게 된다. 그리고 2차 유다 항쟁(132-135년) 후 예루살렘에서 모든 유다인들은 추방되게 된다. 유다의 항쟁이 일어나는 시기에 로마 제국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117-138년)가 등극하여 제국을 순시하면서 아테네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을 짓게 하였고, 130년에는 예루살렘을 순시하여 예루살렘을 로마인의 도시로 재건하고 이름을 “엘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성전터에는 제우스 신전을 세울 것을 명했다. 이것이 제2차 유다 항쟁을 불러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2차 항쟁을 진압 한 후 루푸스 총독은 예루살렘에 엘리아 카피톨리나를 건설했고, 골고다(갈바리아)에는 로마의 최고 신 제우스와 그의 아내 헤라 여신 및 미의 여신 비너스를 섬기는 신전을 세우고, 옛 성전도 제우스 신과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섬기는 신전으로 개축하였다. 이 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요르단과 시리아 등지로 피신하게 된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306-337년 재위)에 의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팔레스티나 전 지역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325년).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324년에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왔는데, 당시 예루살렘의 주교로부터 쥬피터와 비너스 신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골고타와 예수님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황제에게 알려 도움을 청한다.

 

 그 후 326년에 황제의 명에 의해 그 신전이 헐리게 되고 골고타와 예수님의 무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발견된 주요 장소를 아울러 그 위에, 그 후 10년 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대성전이 세워졌다(335년).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가 담긴 유서깊은 곳에 기념 성전들이 세워짐으로 인해 순례의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글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예수님 무덤 위의 쿠폴라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 성당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 성당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 성당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 성당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 성당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 성당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 성당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 성당, 십자가의 길 순례시 사용되는 십자가이다.

 

                                                                                   성묘교회, 예수님 무덤 성당

 

오늘날 순례자들은 무덤성당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지만, 이슬람이 통치하던 1187-1832년까지는 항상 닫혀 있었다.

 

 현재 광장에서 볼 때 오른쪽에 있는 문은 아예 봉해져 있는데, 1187년 예루살렘을 접수한 살라딘은 성당에 들어가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수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모든 문들을 폐쇄하고 하나의 문만을 남겨 놓고 순례자들로부터 성지순례 세금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246년부터는 두 이슬람 가정에 무덤 성당 열쇠를 맡겼는데, 한 집은 성전 문을 열고 닫는 권한을 그리고 다른 한 집은 성전 문의 열쇠를 보관하는 권한을 주었다. 이것은 현재도 유효하게 적용되고 있다.

 

 기독교 종파들이 내부 성전의 소유권과 관할권을 놓고 다툼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열쇠를 가지고 있는 이슬람 신자가 실질적인 무덤 성당의 주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금은 일정하게 정해지지는 않았고, 기간에 따라 달랐다고 한다.

 

 이때 이미 무덤 성당 안에 프란치스칸들은 수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프란치스칸들이 순례자들을 인솔할 땐 세금이 면제 되었다고 한다. 무덤 성당 안의 수도원에 살고 있는 형제들은 연중 몇 달씩은 성당 문이 닫힌 상태에서 갇혀 살아야 했다. 성당 출입문에 있는 작은 문은 형제들의 음식을 공급받거나, 외부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문이었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1217년, 순례자들이 무덤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이슬람에 세금을 내는 것을 금지하며, 이것을 어길 경우 파면하겠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세금은 폐지되지 않았고, 순례자들은 파면의 위험을 무릅쓰고 순례를 감행(?) 하였다.

 

 무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금만 내면 되는 것이 아니었고, 시간을 엄수해야만 했다. 오후 3시 이후에는 무덤 성당에 들어갈 수 없었고, 다음날 아침 9시경까지는 나올 수도 없었다. 이들은 잠긴 성당 안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성당에 들어가는 세금이 면제되는 것은 연중 두 번이었는데, 한번은 성금요일부터 부활절 월요일까지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 발견 축일 전야이다. 순례자들이 내야 했던 순례 세금은 1832년에 폐지되었다. 현재 그리스 정교회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그리고 아르메니안 정교회에서는 20쉐켈(4달러 정도)을 성당 문을 열고 닫고 보관하는 가정에, 매월 또는 특별한 장엄 전례가 있을 경우 상징적인 액수인 세금을 내고 있다. 1년 중 딱 하루!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세족례 및 성유 축성 미사)부터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 예식이 끝나는 오전 9시경까지는 무덤성당이 프란치스칸들(라틴 카톨릭)에게만 유보된 시간이다.

 

 다른 364일은 성당 대문 바깥쪽 열쇠는 이슬람 신자가 그리고 성당 안쪽 열쇠는(성당 문을 2중으로 잠금) 그리스 정교회에서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덤성당 안에 수도원을 가지고 있는 프란치스칸들은 이들 덕분에(?) 관상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열쇠의 권리를 작은형제회(프란치코회)에서 행사하는 날이다. 이날은 주님 만찬 미사(아침 8:30 시작)가 끝나고 나서 12시경(정오)에 문을 닫고, 이후에는 공식적인 전례를 위해 형제들이(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형제들) 행렬해 들어올 때와 떠나갈 때(14:45, 18:00, 20:00) 잠시 열었다가 다시 바로 닫게 된다. 이 날은 특별히 허락 받은 신자들은 성당 내에 남아서 함께 기도 할 수 있다.

 

 성당 문을 열 수 있는 권한은 성금요일, 골고타에서 십자가 경배 예식(07:15-09:00)이 끝날 때까지 유보되고, 경배 예식이 끝나면 원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이날 하루는 오직 전례만을 위해서 성당 문을 여는 날이기에, 그 외의 모든 날 보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하루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날 타 종파는 무덤 성당 안에서 예식을 거행하지 못한다. 오직 라틴 전례만이 거행되며, 허락받은 몇 명의 신자들과 형제들이 무덤에 남아 전례를 거행하게 된다.

 

 무덤성당에서는 수난 감실을 예수님 무덤 안에 만들었다. 성체가 모셔져 있는 무덤 안은 빈 무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있는 무덤이었다.

 

                                                                                                    (글, 사진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무덤 성당 열쇠(글, 사진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성당 문 열기전 마당 

 

                                                       무덤성당 자물통

 

이슬람이 통치하던 시기에 무덤 성당 안의 수도원에 갇혀 살던 형제들이 외부와 연락하기 위한 창구 문(구멍)

 

                  네모난 구멍은 무덤 성당 안에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음식물을 공급받기 위한 문

 

현재는 성당 문을 열기 위한 사다리를 안쪽으로부터 받는 곳이다.

사다리를 받은 후 밖에서 사다리를 놓고 문을 연 다음 다시 사다리는 성당 안에 보관된다.

 

                                           성당 안에서 사다리를 받고

 

사다리에 올라가 문을 열기 전의 모습, 이 사람이 성당 문을 열고 닫는 권한을 가진 이슬람 신자

 

                                                     성당문을 여는 모습

 

            문을 열고 난 다음엔 열쇠를 보관할 권한을 가진 이에게 열쇠를 준다.

 

                                      무덤성당 문을 연 후 전례를 위해 행렬하고 있는 순례자들


                                                         출처:성화사랑 2010.04.02 16:19  http://blog.daum.net/sunghwa/15853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