쿰란은 1947년 사해근방에서 발견된 '에세네파' 공동체의 유적으로서 이곳에서 유명한 성경 문헌들인 두루마리 사본들과 또한 그것들과 함께 발견된 단편들은 성경과 유대교, 기독교의 초기 사건들을 담고 있는 사본들중 가장 중요한 발견 물이며 20세기 최대의 발견되어진 곳입니다.
일명 사해 사본이라고 하는 성경 사본은 1947년 2월 혹은 3월에 타아미레(Ta-amireh)족의 베두인 젊은이 마호멧 엣딥(Muhammad ed-Dib)이 사해의 서안 절벽에 뚫려 있는 동굴들 가운데 하나에 들어갔습니다.(여리고 남방 14㎞ 정도의 지점) 거기에서 그는 높이 약 75㎝, 너비 25㎝ 가량의 항아리들을 발견했는데, 그 항아리 속에는 아마포로 쌓인 두루마리들이 담겨 있었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해사본입니다.
현재는 그 두루마리 전부가 이스라엘 소유로 되어 있습니다.(8개) 이 두루마리들이 아주 오래된 것이고 가치가 많은 것들임을 인정받게 된 시기인 1948년 초에는 아랍제국들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나 그 동굴의 과학적 조사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 후 1949년 2월 15일부터 3월 5일까지 다시 동굴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요르단 고적 탐사국 랑케스터 하딩과 성서학교(Ecole Biblique)의 드 보(R. de Vaux)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이때에 수백 개의 성서문헌들과 외경 그리고 그때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문헌 등의 단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항아리 파편들의 양으로 보아 이 동굴은 약 200개 두루마리들로 이루어진 장서의 은닉처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장서들은 이미 오래 전에 발견되었던 것 같았습니다. 유세비우스는 오리게네스(A.D 185-254)가 여리고 근방에 있는 한 항아리에서 발견된 희랍어역 시편을 사용하였었다고 보도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전쟁 때문에 대주교 아타나시우스는 자기 소유의 5개 두루마리를 미국으로 옮겼습니다.(1948) 그것들은 트레버와 브라운리의 도움을 받아 버로우즈에 의해 출판되었습니다.
제1권(1950)은 여러 플레이트들과 두 개의 두루마리의 필사본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필사본 가운데 하나는 이사야서 전권을 담고 있으며 또 하나는 하박국 처음 장에 대한 주석(1QpHab)을 담고 있습니다.
제2권(1951)은 「훈련교본」을 형성하고 있는 보다 작은 두루마리 두개(1QS)를 수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라멕의 한 묵시록이라고 믿어지고 있는 것으로서, 5개 두루마리들 가운데 마지막 것은 그 당시로는 손상시키지 않고 펼 수가 없었습니다. 1948년 9월 수케닉은 이 사본들을 수록한 자신의 첫 번째 책을 출판하였으며 이 책에 뒤이어 1950년에 제 2권이 출판되었습니다. 하지만 두 권은 모두 수케닉이 소유하고 있는 두루마리 속에 잘 보존된 부분들 가운데 일부만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케닉의 사후 그의 아들 야딘은 1954년에 《Osar Hamegilloth Hagenusoth》(감추어져 온 두루마리 보물)라는 제목으로 그 두루마리들을 모두 출판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종말론적 전쟁을 묘사한 한 두루마리(1QM)와 또 다른 이사야서 두루마리와 감사 시편들의 편집 본 가운데 네 부분이 담겨 있습니다. 아비가드(N. Avigad)와 함께 야딘은 소위 「라멕의 묵시록」이라는 문헌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그 동안 히브리 대학교에서 해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창세기 몇 개장들에 관한 미드라쉬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제 1 동굴의 단편들은 1955년 바르텔레미와 밀리크에 의해 《Qumran Cave》라는 제명의 한 책에 게재 출판되었습니다. 1951년 여름이 끝날 무렵 타아미레 부족들 가운데 몇 사람들이 이 유명한 동굴 남방 18㎞, 그리고 사해 서방 3.2㎞ 지점에 있는 와디 무랍바아트의 두 동굴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단편들을 제공하였습니다. 1952년 초 이들 동굴들의 탐사작업이 있었으며 이 동굴들 역시 시대는 다르지만 문헌 은닉처로 사용되었던 곳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때에 거기에는 엄격한 맛소라 양식의 성서사본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들 가운데는 B.C 8세기의 소예언서들과 파피루스 팰림프세스트 하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명한 수도원 마르 사바의 북동쪽 4㎞ 지점에 있는 키르벳 미르드에서 발견된 다른 단편들은 후대에 속한 것들입니다. 희랍어와 팔레스타인 아랍어로 쓰여진 성서문헌들은 A.D 4∼8세기의 것들입니다.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장소에서 나바테야인 파피루스와 유대교 파피루스, 그리고 소예언서들에 대한 희랍어 본문 단편들이 1952년 7월에 발견되었습니다. 와디 무랍바아트와 키르벳 미르드의 문서들은 쿰란 근방의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과 직접 관계가 없지만 쿰란지역에 있는 다른 동굴들에서 베두인족은 새로운 사본들을 발견했습니다.
1952년 3월에 있었던 발굴 작업을 통하여 37개 동굴에서 항아리 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그것들 가운데 일부에도 역시 사본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 1 동굴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 2 동굴(2Q)에는 성서 단편들과 외경 단편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들 가운데는 요벨서 일부와 새 예루살렘을 묘사한 아람어 문서 하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 1 동굴 북방 약 1.6㎞ 지점에 위치한 제 3 동굴(3Q)은 274개의 아람 어와 히브리어로 쓰여 진 단편들 말고도 두개의 동판 두루마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키르벳 쿰란 서편 정반대 편에 위치해 있는 제 4 동굴(4Q)은 1952년 9월에 베두인족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그리고 이 동굴에서는 가장 많은 단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에스더를 제외한 모든 성서문서들, 당시에 알려져 있는 것들과 알려져 있지 않은 것들을 포함한 많은 외경문서들, 이 종파의 주석, 전례본문, 그리고 그 외의 문서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둘 다 쿰란부근에 있는 제 5 동굴(5Q)과 제 6 동굴(6Q)에서도 제 7∼10 동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보다 적은 양의 것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후자의 동굴들은 키르벳 쿰란의 이회토로 된 양편 단구에서 1955년에 발견되었습니다. 이 모든 단편들은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박물관에 수집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그것들은 국제적인 학자 단에 의해 말끔히 손질되고 정리되어 편찬되었습니다.
후일 제 3 동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제 11 동굴이 발견되었는데 이 안에는 상당히 완벽한 수 개의 두루마리들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이 발견 물들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것들로는 두 개의 동판 두루마리 입니다. 원래 이것들은 3개 동판조각 리벳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들로 그 길이는 총 234㎝입니다. 이 구리판은 굉장히 산회되어 풀어지지 않아 작은 조각으로 잘라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작업은 알레그로의 지도 하에 맨체스터 공과대학에서 이루어졌습니다(1956-57). 두개 두루마리는 모두 12개 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쿤(K.G.Kuhn)이 뒷면 양각에 두드러져 있는 글자들을 검사한 후 제시했던 견해와 마찬가지로 이 두루마리들은 보물들의 목록과 그 보물들이 감추어져 있는 장소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서들 대부분의 언어는 고 히브리어입니다. 단지 몇 개의 미쉬나식 히브리어 용어가 사용되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제 4 동굴에서 발견된 네 개의 단편들은 흔한 분사들이나 상관적인 불변화사 sh.와 같은 미쉬나 히브리어 문법의 요소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사본들은 학식 있는 서기관들에 의해 정교하게 필사되었으며 동물 가죽의 겉 표면을 사용하여 필기를 위해 가로 선을 그었으며 난외 공백을 일정하게 하기 위해 세로줄을 그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필체는 나쉬 파피루스(B.C 2세기) 필체와 아주 흡사하거나 예루살렘 근방 납골당의 비문들의 필체와 아주 흡사합니다. 이 두루마리들의 제작연대를 확정하기 위하여 올브라이트, 트레버, 비른바움, 수케닉 등은 고문서학적 증거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증거들에 따르면 이 두루마리들의 제작연대는 B.C 1∼2세기입니다. 그리고 항아리 조각들은 헬레니즘기 말엽에 속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시기는 대강 위의 시대와 동일한 시대입니다. 이 두루마리들의 아마포 외피에 대한 탄소 측정법에 의한 측정 결과로 볼 때 그 연대는 A.D 33년으로 수렴되는데 200년쯤의 오차를 인정할 때 B.C168년에서 A.D233년으로 추정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관찰들이 이 두루마리의 정확한 연대규명에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연대를 보다 정확히 결정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키르벳 쿰란의 발굴 작업들이었습니다. 이런 발굴 작업들을 통하여 이 종파의 중심지로 사용된 대규모의 요새화된 수도원의 폐허들이 파헤쳐졌습니다.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했던 시기들은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습니다. 그 시기를 구분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성경 적으로) - 이 지역은 BC 8∼7세기에는 대단히 큰 도성이었다는 것입니다. 노트는 이곳이 요시야왕 시대에 쓰여 진 한 목록(BC 639-609)에서 언급된, 즉 여호수아 15:62에 기록된 「이르 하멜라」(염성)와 같은 곳이라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구약성서 사본들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필사본은 제 1 동굴에서 발굴된 2개의 아사야 두루마리입니다. 17개 장에 54개 난들을 지닌 것으로서, 이 두루마리들 중 첫 번째 것은 길이가 7.2m, 폭이 25.9㎝입니다. 이것은 모든 두루마리들 가운데 가장 길고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BC 2∼1세기에 필사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훨씬 오래된 것은 레위기 단편들로서 그것들은 다른 사해 두루마리들에서 때때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표현하는데 사용된 고대 히브리어 필체와 동일한 필체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것들 다음으로 오래된 것은 사무엘서 단편들입니다.(BC 3세기) 이 단편들의 분포도로 보아 이 종파가 가장 사랑했던 성서들은 신명기, 시편, 이사야, 창세기 등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단편들도 본문전승에 관한 아주 복잡한 윤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형태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사본들 가운데 몇 개는 1QIsb와 마찬가지로 마소라 사본에 근접한 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반면 사무엘서의 단편들은 70인 역의 히브리어 원본문과 훨씬 근접한 형태를 보이고 있고, 또한 사마리아어역과 혼합된 양식의 본문과 보다 일치된 사본들도 쿰란에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표준형태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눈데 띄며 AD 2세기 전반에 속하는 와디 무랍바아트 사본들은 모두가 마소라 본문을 대표하며 이 시기에 이르러 마소라 형식의 발달이 종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동굴들에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되어 있는 외경 및 위경 단편들도 발견되었습니다. 그것들은 지금까지는 역본들 -라틴어역, 희랍어역, 시리아역, 이디오피아역 등-로 밖에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6Q의 단편들은 옛 카이로 회당에서 60년 전에 발견된 히브리어 전도서 본문과 부합됩니다. 그리고 이 동굴은 또한 히브리어 토비트서와 아람어 토비트서의 단편들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요벨서는 이 종파에 의해 수개의 필사본, 즉 에녹 Ⅰ,Ⅲ-Ⅴ의 부분들, 레위의 유언, 다마스커스의 계약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외경문서들의 다른 단편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다음과 같은 암시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 현재까지 그 어떤 특정 종교단체와 결부시킬 수 없는 외경 가운데 일부는 쿰란의 에세네파 문서로 돌려야 한다.
㉡ 에녹서는 따로따로 사용되었던 문서들의 수집 본이다. 이 종파는 아마도 인자의 환상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의 유명한 제 2부를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 레위의 유언을 제외하고 열두 족장의 유언은 그 어느곳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후일 다른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다.
㉣ 그곳에는 노아, 족장들, 모세 등과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한 많은 다른 외경문헌들이 존재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 종파는 성서의 책들과 구절들에 관한 주석들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것들 가운데는 본문을 의역한 요벨서와 같은 미드라쉼이 있으며 그것들 말고도 이 종파에 독특한 주석의 유형인 페샤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드라쉼 속에는 이사야,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등과 같은 예언서들의 본문이 구절구절 기록되어 있고 그에 따라 각 구절에는 「그 의미」(페사로)라는 설명문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미드라쉼의 특출한 사례는 창세기 외경이며 페샤림의 것은 하박국 주석입니다. 새로운 문학양식의「프로릴레기아」(florilegia)- 성서 본문 수집 본-와 독특한 사상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본문들인 테스티모니아(testmonia)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4Q는 출애굽기, 사무엘 하, 이사야, 아모스, 시편, 다니엘 등을 수집한 프로릴레기움 하나와 메시야 관련 본문들 (신5:28-29;18:18-19;민:24:15-17;신33:8-11)의 테스티모니움 하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4Q에서 발견된 경구함에는 랍비들이 지시한 것보다 더 많은 성서 구절들이 들어있습니다.
쿰란의 위치와 아인 페쉬카에 있는 농업용 부속건물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가 드 보에 의해 그의 1959년 쉬바이흐 강의에서 충분히 논의되었으며, 1961년에 불어로 출판되었고, 1973년 개정 영역으로 재 출판되었습니다. 쿰란 정착의 연대기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많은 발견 물들 가운데 상세한 연대가 적혀 있는 주화들은 이 건물들에 사람들이 살았던 시기가 언제인가를 밝혀주는 가치 있는 지침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 최초로 사람이 거주했던 상황은 11개의 셀류코스 왕조의 주화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데, 이것들 가운데 3개는 안티오쿠스 7세의 통치기간 중의 연 3년 동안에 주조된 것임이 정확하게 밝혀졌습니다. 요안네스 히르카누스 1세의 통치와 아리스토불루스 1세의 통치에 관한 사실들은 각각 한 개의 주화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143개의 주화들은 알렉산더 얀나이우스에 의해 주조된 것들이며, 하나는 알렉산드라 살로메와 히르카누스 2세에 의해, 5개가 히르카누스 2세에 의해, 4개는 안티고누스 마따디아에 의해, 그리고 10개가 헤롯대왕에 의해 주조된 것들입니다. 아켈라오의 분봉 통치기는 6개 주화에 의해 입증되고 있으며 로마의 프라이펙투스들의 통치와 프로쿠라토르들의 통치는 91개의 주화에 의해 그리고 아그립바 1세의 통치는 78개 주화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습니다. 94개 주화들은 제1차 유대전쟁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들 대다수는 이 폭동의 제2차년에 주조된 것들이며, 소수가 제3차년에 주조된 것들이며, 제4차년에 주조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몇 개의 주화들은 쿰란 건물들이 로마 군사기지로 전용되었던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또 다른 것들은 시몬벤 코크바의 지휘 하에 일어난 제2차 유대전쟁에 참여한 유대 혁명가들에 의해 이 건물들의 유적들이 재 점유되었던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고학적 증거는 분명히 쿰란지역이 BC 2세기 후반에 정착지로 사용되어 그후 계속 점유되어 AD 66-70년의 전쟁시까지-혹은 보다 더 가능성이 있는 시기로는 AD 68년까지-전혀 외부의 침입 없이 존재하여 왔을 것이라는 이론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고고학을 통하여 이처럼 확고하게 입증된 상황에 따른다면 이 쿰란지역의 옛 주민들이 남긴 이 두루마리들의 제작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연대기 틀이 확정될 수 있습니다.
11개 쿰란 동굴들은 에스더를 제외한 히브리어 성서전권에 해당하는 두루마리들과 단편들을 제공하여 왔습니다. 그것들은 최고(最古)의 마소라 사본들보다 1000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유대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성서를 기록한 사해문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들이 하나의 전승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수개의 개정된 전승들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몇 개의 사본은 후대의 마소라 학파들이 「전수받은 본문」으로 입증되고 있으며 다른 것들은 성서의 희랍어 역들의 기초가 되는 히브리어 성서를 반영해 주는 최초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쿰란문서들은 성서본문의 전승을 담당한 분야에서도 복수 성이 통일성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던 점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주후1세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무렵 이스라엘 사회는 여러 분파로 갈리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크고 작은 20여 개의 분파들이 있었지만 당시 역사가인 요세프스와 필리니의 기록에 따르면 바리세이파와 사두가이파가 커다란 세력을 지니고 있었고 에쎄네파 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분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요세프스에 따르면 에쎄네파는 약 4000명 정도로 도시와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과 독특한 복장과 행동, 그리고 특별한 행동 수칙을 지키고 있어 당시 역사가나 학자들에게 아주 많은 관심을 끌고 있었습니다. 에쎄네파에 대한 학술적인 기록은 사해문서가 발견되기 50년 전 1896년 기록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캠브리지대 교수가 이집트 방문중 카이로에서 구입한 문서 가운데 벤 에즈라 유대교 회당에서 발견된 문서들 중에 중세시대 씌어 진 “다마스커스 문서”라고 불리 우는 기록을 보면 이 에쎄네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다가 후에 사해 동굴 4번에서 발견된 문서들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1986년 처음 언급된 이 분파의 존재에 대한 가설이 옳았던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사해문서들은 에쎄네파의 공동체 생활이 요세프스, 필로, 그리고 필리니가 기록한 내용과 일치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해 서쪽 해안지대에 엔게디 지역까지 바로 사해문서들이 발견된 동일한 지역이 이들의 활동지역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학자들 간에 다소 이견이 있는 부분도 있는데 사두가이파의 문서들이 섞여 있다든가 로마에 대항하던 독립군들의 문서들이나 또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문서들이 섞여 있다든가 로마가 대항하던 독립군들의 문서들이나 또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문서들이 섞여있다는 주장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쿰란에서 생활한 에쎄네 공동체와 이 지역에서 발견된 사해 문서 간에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조차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학계의 시각은 에쎄네파가 쿰란의 주인이었고 주위에서 발견된 사해문서의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쿰란 공동체는 서기 68년 베스파시안 장군이 로마군을 파견하여 유대인 반란을 진압할 때 함께 파괴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멀리에서 다가오는 로마 군대를 보며 에쎄네 사람들은 주위 동굴에 가장 신성한 성경과 문서들을 황급히 감추고 어디론가 떠나 다시는 쿰란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에쎄네 공동체의 시작과 쿰란 수도원 건설은 발견된 문서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897년 발견된 다마스커스 문서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쿰란에서 발견된 2번째 두루마리 문서는 115줄의 문서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달력을 보여주며 날짜 계산 방식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기원전 2C 중엽 하시모니아 왕국시대를 그 시발점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크로스(Frank Cross)는 에쎄네파의 족보를 마카베오 시대의 유다 마카베오의 동생인 요나탄 마카베오 때의 제사장에서 시작된다고 처음 주장한 학자입니다.
수세기동안의 페르시아와 그리스 통치 아래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은 유대사회의 최고 권력으로 활동했으며 거의 왕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독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으로 그 후손이 세습적으로 대제사장을 승계했는데 기원전 175년 오니야스 3세와 제이손 두 형제가 자리를 이어받으려고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셀류시드 제국 황제였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많은 뇌물을 제공하고 제이손이 승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서 제사장은 외국인인 황제가 임명하는 새로운 전통이 생겼으며 제이손이 대제사장이 된지 4년 후에 유대의 부유한 가문이 안티오쿠스를 설득하여 대제사장 직을 사독 가문이 아닌 사람에게 임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써 메네라우스가 새로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 사회는 소요와 반란으로 뒤덮이게 되었고 제이손의 세력과 메네라우스 세력과의 내분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내분은 외부 세력인 안티오쿠스의 개입을 유발시켰으며 이에 대항한 독립전쟁이 바로 마카베오 독립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마카베오가 정치적인 승리를 쟁취하자 왕과 대제사장직을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바로 에쎄네파의 출현의 무대였으며 새로 확립된 예루살렘 성전 주도 세력으로부터 소외된 세력들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의로운 선생님(Righteous Teacher)”의 지도아래 모여 종파를 이루고 쿰란에 그들만을 위한 장소를 건설한 것으로추정하고 있습니다.
에쎄네파의 공동체 회원들은 엄한 규율과 공동식사, 그리고 재산의 공동소유를 실천했으며 메시아의 임박을 믿는 신앙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문헌에 따르면 이들은 두 종류의 메시지를 기다렸는데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Anointed One)”라고 불리는 정치적인 메시아(다윗의 후손)와 종교적인 메시아(아론의 후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메시아의 도래는 빛의 아들들(에쎄네파)이 어둠의 자식들에 대해 벌이는 40년의 성전을 치른 후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수도원 공동체의 생활은 율법의 엄정한 준수와 정결례의 강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해 동쪽에서 아침 해를 맞는 아침기도를 시작으로 대추야자 재배 등 여러 가지 작업으로 이어졌고 오전에는 종교적인 정결 침례예절과 공동 식사를 한 후 다시 오후 작업을 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밤에는 성경을 공부하고 율법과 지혜문학을 연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쎄네 공동체는 자원자(volunteer)만 받아들여 졌습니다. 자원자들은 감독(overseer)들의 심사에 따라 악의 그림자보다 빛의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이 확인되도록 했으며 선과 악의 이분법에 따라 판단되었을 것입니다. 선한자로 받아들여지는 즉시 모든 재산을 공동체에 의탁하였고, 공동체 생활은 그리 가난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매일매일 식사는 육류와 와인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당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동체는 독특한 태양력을 사용했는데 성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년을 364일로 나누었고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하고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달을 30일씩 12달로 나누었으며 매 4분기마다 하루씩을 더했습니다. 일년은 정확하게 52주로 나뉘게 됩니다. 새해는 언제나 수요일날 시작했으며 태양과 달, 별들이 창조된 날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유대인 절기들은 명확히 표기하고 있는데 유월절은 첫 달에 14번째 날, 칠칠절은 3번째 달에 14번째 날과 같은 방식입니다. 이에 따라서 유대인 절기는 언제나 같은 요일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수요일, 칠칠절은 일요일, 속죄일은 금요일, 장막절은 수요일......
쿰란의 한 해는 29시간 48분 40초만큼 태양 공전주기보다 짧기 때문에 에쎄네파는 매 5-6년 마다 달력에 일주일을 더 삽입해서 태양주기를 맞추었습니다. 이런 달력 시스템 때문에 유대교 절기를 지키는 것이 성전과 달랐습니다. 이로써 사해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악한 사제가 의로운 선생을 가장 신성한 날인 속죄일에 공격했다는 것을 설명할 수가 있게 됩니다.
에쎄네파 사람들은 비교적 젊었으며 예루살렘 사제 집안의 후예들로써 예루살렘 권위를 부정하고 유대인 전반의 지지를 얻기위해 고심한 것으로 보임니다. 이는 요세프스 플라비우스가 기록한 전형적인 에쎄네파 회원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외가쪽으로 하시모니아 왕과 대제사장들의 친척인 16세 소년이 집을 떠나 유대사막에서 떠돌다가 바누스라는 사람을 만나 에쎄네 공동체에 얼마간 머물다가 3년 후에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바리세이파에 합류합니다. 요세프스가 기록한 이 일화는 아마 많은 쿰란 공동체 회원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으로 보입니다.
매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오랜 시간 일하며 공동 식사를 하고 엄격한 규칙을 따르며 밤 시간의 1/3은 도서관에서 보내는 생활은 결코 쉬운 생활이 아닐 것입니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만이 견뎌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아마 좀 덜 엄격한 에쎄네 공동체로 옮겨가기도 했을 것입니다. 쿰란 주위에는 공동묘지 세 개와 1200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똑같은 형태와 비석도 없이 줄줄이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50개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거의 모두가 남자입니다. 한 무덤만 65세로 판명되었고 다른 모든 무덤들은 30세 이하에서 매장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어떻게 긴박한 말세를 기다리는 종파가 200년 이상 계속될 수 있었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회원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하나의 실마리를 제시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후 66년 대반란이 일어났을 때 말세가 온 것으로 여기고 전쟁에 참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란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성전은 파괴됐으며 쿰란의 공동체 본부는 철저하게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파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유대교의 종말이라고 믿었고 “유대 고대사”의 저자인 요세프스 플라비우스는 스스로 유대인의 탄생과 멸망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지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조세프스는 잘못 알았습니다. 얌니아(현재 야브네)는 이스라엘 남부 해안의 자그마한 마을인데 로마의 파괴로부터 생존한 몇몇의 랍비들이 성전이 없는 유대교의 기초를 이곳에서 새로 마련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의 시작인 것입니다. 랍비들은 분파주의와 갈등이 유대인 역사에 가장 큰 아픔인 성전의 상실을 초래했다고 보고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유대인의 일체성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로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분파적 요소를 지닌 종파들은 철저하게 제거되었습니다. 비록 사상의 차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 되었지만 비교적 미미한 것입니다. 성전이 사라지자 에쎄네파의 영향력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상대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에쎄네파의 랍비가 유대이즘에 영향력을 보여주는 예들이 있습니다. 이는 규칙적인 기도인데 에쎄네파는 성전에서 예배하는 대신 하루에 다섯 번 규칙적인 기도를 했고 이는 랍비 유대교에 그대로 전승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끼친 영향은 신약성서에 의로운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통해 또는 산상수훈의 선교 내용과 쿰란의 사상을 비교할 때 이해하게 될 수 있습니다.
사해사본은 구약성경 외에 히브리어와 아람어 단어들을 포함하는데 이러한 단어들이 신약성경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리이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의 “의로운 신(sidqat el)”, “율법의 일들(ma’aseh torah)”, “하나님의 교회(gehal el)”, “빛의 아들들(bene’or)”이라는 표현 등입니다. 또 다른 에쎄네파가 초기 그리스도교에 미친 영향은 초대교회 조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이나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하는 새벽기도 등입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를 뜻하는 그리스어 Episcopus는 감독을 의미하는 overseer라는 에쎄네파 직책을 그대로 번역한 것입니다. 에쎄네파에서 중요한 절기가 일요일이라는 것도 어쩌면 예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에서 더 비약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의로운 선생님을 예수님을 뜻한다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야고보(James)를 칭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또는 세례 요한을 칭한다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이러한 가설들은 아직 대부분의 학자들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지만 에쎄네파의 초기 그리스도교 영향력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쿰란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으며 아마 적어도 한 때는 쿰란에 몸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에쎄네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죽자 그의 제자 중 일부는 갈릴리로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비교 내용이 나타납니다. 유사한 토론들을 통해서 에쎄네 사상이 초기 그리스도교에 유입되었을 것입니다.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었고 지적능력은 입회의 조건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오랜 동안 공부하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바탕을 연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쿰란 사람들은 당시 대부분 유대인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개방주의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 반대로 엄격한 이분법에 따라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사람들로써 2차 성전시대 유대교에서 주 세력이었던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로부터 심한 공격과 체포, 구금 등을 당한 반체제 세력입니다. 쿰란 공동체에 관한 저서들은 그들의 인물들에 대해서 별로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지원자였던 Honio, 감독관이었던 엘리에저르, 그리고 감독관이 규칙 위반자 리스트를 만들면서 적어놓았던 이름들인 요하나, 하나니아, 시게온 등의 이름들만이 파편들을 통해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록입니다. 이들이 바로 사해 북서쪽 해안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수도자 들이었습니다
령천 교회 중동 선교사
데이비드 김 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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