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입, 복음의 불모지 경남 진주에도
신앙의 싹이 돋기 시작했다.
역시 그랬다.
부산 마산 진주에서도 학교와 병원을 짓고
교회를 세웠다. 시대는 암울했지만
인재를 길렀고 생명을 살렸다.
호주의 데이비스 선교사가
1884년 부산에서 천연두에 걸려
짧은 선교 인생을 마감한 사연이
촉매가 됐다.
데이비스의 선교 여정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거대했다.
당시 진주 인구는 4만여명.
병원은 한 곳도 없었다.
진주시 봉래동 진주교회(송영의 목사)가
십자가를 밝힌 지 100여년이 지난 지금은
인구 34만여명에 종합병원만 6개인
교육과 의료 도시로 발전했다.
◇교육도시의 밑거름은 복음=104년 전 겨울의 문턱, 이곳에 한 톨의 밀알이 떨어졌다. 겨자씨 같은 희망을 뿌린 이는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장로교회 청년회 후원으로 파송된 의료 선교사 커를(Dr. Hugh Currell·한국명 거열휴)이다. 그는 1902년 5월 부산에 도착, 2년간 의료선교 활동을 폈다. 커를은 부산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고 복음의 불모지 경남 서부지역을 선택한다. 진주교회(1933년 이전에는 옥봉리교회) 송영의 목사는 "그동안 진주 지역에 와서 교회를 세운 커를 선교사에 대한 기록과 날짜 등이 정확하지 않았는데 최근 당시 호주 선교사 후손들이 간직한 자료를 통해 구체적인 기록을 확인했다"면서 "1905년 10월20일(금요일)에 커를 부부와 두 딸, 동역자 박성애 부부와 가족 3명 등 9명이 진주에 도착해 11월5일 처음 주일예배를 드렸다"고 밝혔다.
◇인재를 키워 신학문 전파=진주교회는 신학문을 전파했다. 선교사들의 교육열로 남녀 사립학교인 '광림학교' '정숙여학교' 그리고 '기독유치원'을 설립했다. 진주가 교육도시로 발전하는데 초석이 됐다. 교육도시답게 진주교회는 교육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문교부(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한 이규호씨가 진주교회 출신이다. 총신대 김의환 전 총장도 진주교회에서 고등부 학생 시절을 보냈다. 조헌국 장로는 진주교육장에 이어 진주여고 교장을 지냈고 별세한 강용성 장로(2대 교육장)와 그의 아들 강남규 장로도 교육자였다.
◇병원 복지가 잘된 도시로=서양식 병원 설립은 의료 선교사였던 커를이 주도했다. 어렵게 진주에 발을 들여놓은 커를은 내면4동(북문안)에 있는 초가집 방 한칸을 시약소로 사용했다. 이것이 이 지방에서 의료 활동의 모태가 됐다. 병원이 설립되기 전까지 약 7000명의 환자들이 치료받았다. 당시 이 지방에서 가장 흔한 질병은 피부병과 종양, 폐결핵, 눈병 등이었다. 커를은 이러한 질병이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발병한다고 보고 환경개선 위생교육 검역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마침내 1913년 11월 경남 지방 최초의 병원이 개원된다. 호주 장로교회의 유능한 선교사였던 페이튼 선교사의 이름을 따서 배돈병원(培敦病院)이라 불렀다. 배돈병원은 진주교회 교인인 김중기 의사가 한국전쟁 이전까지 맡았고, 이주섭 의사가 근무했다가 이후 문을 닫았다. 한규상 집사가 복음병원을 세웠고, 그 이후에 황영갑 장로가 복음의원을 열었다. 지금 복음병원 원장은 김석기 장로, 부원장은 강태욱 장로가 맡고 있다. 두 장로 모두 진주교회 교인으로 의료 선교에 앞장서고 있다.
◇백정해방운동에도 앞장=1907년에는 선교회에서 경영하는 책사 서점이 생겼다. 이듬해에는 교회에서 커를 선교사 주례로 서양식 결혼이 있었다. 주인공은 작곡가 손목인씨의 부친인 손세영씨였다. 진주교회는 미신 타파를 내세우고 술 담배 아편을 금하고 축첩을 인정하지 않는 등 생활 전반을 개혁하는 일을 주도했다. 1909년에 일어난 백정예배 동석 사건으로 양반이 아닌 백정들도 일반 예배에 참석하게 됐다. 진주교회는 또 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한규상 집사는 부산과 경남 지방 항일운동에 불을 붙였으며 기미년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3월18일 오전 11시 진주장날에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진주교회 교인들과 학생들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광림학교 악대 출신들이 타종과 함께 시위행렬 선두에서 나팔을 불었다.
◇참 제자를 훈련하는 교회=104년 된 진주교회의 슬로건이다. 제자훈련의 전례는 '선지생도'에서 비롯된다. 선지자들이 제자들을 길러 하나님의 뜻을 전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곧 제자훈련이다. 지난해 시작한 노인대학인 은빛대학에 120명 정도 출석하고 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의료봉사와 쌀 나누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결식아동을 돕고 있는데 학교당 20∼30명 지원하고 있다. 결식아동을 위해 연 2600만원 정도의 장학금이 지출된다. 내년엔 교육관도 지을 예정이다. 교육관에 독서실과 도서관, 선교 기념실도 만든다. 김동권 원로목사 후임으로 부임한 지 2년이 넘은 송 목사는 요즘 제자훈련과 105년사 편찬 준비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진주=글·사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한국의 역사교회―(19) 경남 진주교회] 송영의 담임목사의 목회 철학 |
“한국교회 침체 원인은 교육부실 제자훈련 열중하면 저절로 부흥”
"대나무과인 한 식물의 싹을 땅에 심었는데 4, 5년 지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었지만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불과 24시간 만에 90㎝나 자랐습니다. 성도와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부흥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일어납니다. 그러나 충분한 역량을 비축한 후에 비로소 폭발적인 질적, 양적 성장이 일어난다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송영의(46·사진) 진주교회 담임목사의 '대나무 성장론'이다. 송 목사는 대나무 싹을 심는 정신으로 제자양육에 나서고 있다.
한때 한국의 기독교는 '성도 1200만명 시대'를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난 요즘은 어떤가. 한국교회의 침체 원인으로 송 목사는 교육부실론을 제기했다. 그는 부정확한 통계 결과나 저출산 영향 때문에 성도 수가 줄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교회가 영아에서 청년까지의 교육에는 그나마 신경을 좀 썼지만 장년들 교육훈련은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알아서 크겠거니 하고 내버려 둡니다. 어렵사리 교회 문을 열고 들어왔던 초신자들은 마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내 교회 문밖으로 나가버립니다. 그들의 발걸음을 다시 돌리기는 무척 힘듭니다."
송 목사는 한국교회의 사활은 성도들을 성도답게 무장시키는 제자훈련에 달렸다고 강조한다. 한국교회가 제자훈련에 적극 매달리지 않으면 머잖아 독일이나 영국 미국 호주처럼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위기일수록 한국교회는 본질과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복음을 전하고 제자훈련에 열중하면 교회는 절로 부흥한다고 강조했다.
송 목사는 "교회의 본질은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면서 "이 말씀을 제대로 지키려면 먼저 모든 민족을 전도하겠다는 사명을 감당하는 그리스도 제자로 만들고, 다시 흩어져 믿지 않는 백성들을 예수 제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송 목사는 중학교 때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했다. "목회자로서 최고의 교양을 쌓기 위해 서울대 국문학과에 들어갔어요." 세상의 명예와 명성을 얻고 싶은 유혹이 없지 않았지만 초심을 잃지 않았다. 약속대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됐다. 3년 전 옥한흠 목사의 소개로 진주교회 동사목사(인수인계를 받고 있는 차기 위임목사)로 와서 이듬해 2월 위임목사가 됐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 송 목사의 목회 철학을 보여주는 성경 말씀이다.
진주=윤중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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