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앞바다의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기독교 성지순례 탐방열차' 운행
철도공사가 지난 2009년 5월 19일부터 전남 신안군 증도의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와 영광 함평 등 전남·서해안 지역의 기독교 성지와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기독교 성지순례 탐방열차'를 운행하고 있다. 철도공사가 기독교 순교지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한 것도 이색적이지만, 유명한 목회자들의 유적지를 제치고 한 여전도사의 무덤이 선정된 것도 눈길을 끌었다.
지난 5월 28일 문 전도사의 유적지에서 만난 증도 대초리교회 지영태 목사는 "초야에 묻혀 있던 그분의 이야기가 2006년 국민일보에 소개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가면서 순례객들이 끊임 없이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대초리교회도 문 전도사가 세웠다.
문 전도사는 1891년 신안군 암태도에서 태어나 1950년 10월5일 새벽 모래뻘이었던 이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숨진 순교자다. 죄목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 문 전도사에겐 자녀가 한명도 없었지만, 증도 일대의 섬마을을 다니며 수많은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 믿음의 '암탉'이었다.
그의 피가 뿌려진 곳은 2차로 도로로 바뀌었지만, 그가 오갔던 뻘밭과 짱뚱어다리는 그대로 살아있었다. 문 전도사의 묘지는 숨진 곳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세워진 묘비는 바닷바람에 글씨마저 희미해졌다. 지 목사는 묘비를 어루만지면서 "지금도 이곳에선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도 문 전도사를 '선생님'으로 부른다"고 전했다.
문 전도사는 17살에 증도로 시집 왔다. 이미 딴살림을 차린 신랑은 초야도 치르지 않고 떠나버렸다. 남편 없는 시집살이 20년 뒤, 시부모마저 세상을 뜨자 그는 재봉틀 하나를 들고 오빠가 있던 목포로 나갔다. 거기서 이성봉 목사가 개척한 북교동교회 전도대원을 만나 신앙을 갖게 됐다.
남편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을 교회에서 체험한 그는 "내가 받은 예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신안 앞바다의 수많은 섬을 다니면서 전도했다.
문 전도사는 해질녘 동네 어귀 언덕에 올라가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라디오도 없던 시절, 섬마을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언덕에 모여들었다. '천당가' '예수 사랑하심은' 같은 찬송을 들려준 뒤 노랫말을 풀어 설명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문 전도사 순교비는 그를 '병든 자의 의사, 아해 낳는 집의 산파, 문맹퇴치 미신타파의 선봉자, 우리들의 어머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마을과 마을을 다니며 잔칫집에서 음식을 얻어 굶주리는 이에게 나눠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고, 병든 사람을 만나면 가슴 아파하며 기도했다. 학교도 없는 섬마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바닥에 나무로 글씨를 써가면서 한글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녀가 머무는 곳마다 사람이 모여들어 기도처가 되었고 교회가 세워졌다. 증도면 일대 27개 섬에 10개의 교회가 그녀를 통해 설립됐다. 나룻배를 타고 산길을 걸어다니며 복음을 전하느라 고무신 밑창이 닳아 1년에 아홉켤레를 갈아 신었다고 한다.
그 결과 증도 일대 2,000여명 주민의 90%가 예수를 믿게 됐고, 100명에 가까운 목회자가 배출됐다. 김준곤(CCC 총재) 이만신(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목사 등이 문 전도사가 믿음으로 낳은 '자녀'다. 김 목사는 "한번은 장티푸스가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가족조차 환자를 내다버릴 때, 문 전도사가 '난 어차피 홀몸이니 죽어도 괜찮다'며 환자를 돌보고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회상했다.
6·25전쟁이 나자 공산주의자들이 문 전도사를 체포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그를 즉결처분하지 못하고 목포로 보냈다. 그때 목포는 이미 국군이 들어와 인민군이 도망간 뒤였다.
문 전도사는 자유의 몸이 됐지만 "성도들을 지키러 가야 한다"며 증도로 돌아갔다. 그는 결국 새벽녘 바닷가 모래밭에서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죄 많은 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기도를 끝으로 숨졌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장 권석원 목사)는 이곳에 문준경순교기념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신안=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2009.06.03 17:23:56
[미션라이프] 문준경 전도사의 피가 뿌려졌던 전남 신안 증도의 모래밭은 아스팔트로 덮여 있었다. 이따금 차들이 무심하게 오가는 2차선 도로 옆에 그의 묘지와 비석이 조용히 서 있었다.
문 전도사는 1891년 신안군 암태도에서 태어나 1950년 10월 5일 새벽 모래뻘이었던 이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숨진 순교자다. 당시 죄목은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 문 전도사에겐 자녀가 한명도 없었지만, 증도 일대의 섬마을을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 믿음의 ‘암탉’이었다. 그것이 죄가 되어 숨진 것이다.
17살에 증도로 시집 온 그는 신혼 첫날 신랑에게 소박을 맞았다. 이미 딴 여자와 살림을 살고 있던 신랑은 초야도 치르지 않고 떠나버렸다. 남편 없는 시집살이 20년, 시부모마저 세상을 뜨자 그는 재봉틀 하나를 들고 오빠가 있던 목포로 나갔고, 거기서 이성봉 목사가 개척한 북교동교회 전도대원을 만나 신앙을 갖게 됐다.
남편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을 교회에서 체험한 그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내가 받은 예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경성성서신학원에 진학했다.
문 전도사는 신안 앞바다의 수많은 섬들을 다니면서 전도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섬마을은 무속 신앙이 강하게 뿌리내린 곳이다. 문 전도사의 전도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사랑의 나눔, 둘째는 아름다운 찬양.
문 전도사는 해질녘 동네 어귀 언덕에 올라서서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라디오도 없던 그 시절,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언덕에 모여들었다. ‘천당가’ ‘예수 사랑하심은’ 같은 찬송을 들려준 뒤 노랫말을 풀어 설명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문 전도사의 순교비는 그를 “병든 자의 의사, 아해 낳는 집의 산파, 문맹퇴치 미신타파의 선봉자, 우리들의 어머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마을과 마을을 다니며 잔칫집에서 음식을 얻어 굶주리는 이에게 나눠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고, 병든 사람을 만나면 가슴 아파하며 기도했다. 학교도 없는 섬마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바닥에 나무로 글씨를 써가면서 한글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녀가 머무는 곳마다 사람이 모여들어 기도처가 되었고 교회가 세워졌다. 증도면 일대 27개 섬에 10개의 교회가 그녀를 통해 설립됐다. 그 교회 중 하나인 대초리교회 지영태 목사는 “차는 커녕 다리도 없던 그 시절 문 전도사는 나룻배를 타고 산길을 걸어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며 “1년에 고무신 아홉 켤레가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고 전했다.
섬마을 2000여 명 주민의 90%가 예수를 믿게 됐고, 100명에 가까운 목회자가 배출됐다. 김준곤(CCC총재), 이만신(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목사 등이 문 전도사가 믿음으로 낳은 ‘자녀’다. 김 목사는 “문 전도사가 있는 곳에는 귀신들린 여인, 반신불수가 돼 쫓겨난 사람들이 있었고, 그분의 바랑 속에는 감기약이나 연고, 민간비방약이 가득했는데 약을 먹이고 발라주고 기도를 하면 신기하게도 병이 잘 나았다”면서 “한번은 장티푸스가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가족조차 환자를 내다버릴 때 문 전도사가 ‘난 어차피 홀몸이니 죽어도 괜찮다’며 환자를 돌보고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회상했다.
6.25 전쟁이 나자 공산주의자들이 문 전도사를 체포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그를 직결처분하지 못하고 목포로 보냈다. 그때 목포는 이미 국군이 들어와 인민군이 도망간 뒤였다. 가까스로 석방된 문 전도사는 “우리 성도들을 지키러 가야한다”며 증도로 돌아갔다. 그는 결국 새벽녘 바닷가 모래밭에서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죄 많은 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기도를 끝으로 숨졌다.
지 목사는 바닷바람에 글씨마저 희미해진 문 전도사의 묘비를 어루만지면서 “지금도 나이 든 어르신들은 문 전도사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며 “초야에 묻혀있던 그분의 이야기가 2006년 국민일보에 소개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가면서 순례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신안=사진 최종학 기자, 글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