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5월 기공예배 모습 (출처- 기독교타입즈/ 김세환 기자)
이날 기공예배를 드리게 된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는, 아펜젤러의 발자취를 따라 군산앞바다까지 왔던 교역자들의 예배처소를 아쉬워 한 온누리교회 임춘희 목사와 성도들이 8년 전 기금을 모집하며 시작됐고, 이후 이 소식을 들은 군산지방이 지난 2005년 5월 실행부 모임을 통해 만장일치로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 건축을 지방차원에서 후원하기로 결정하고,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길식 감리사)를 조직해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교회가 위치할 내초도동의 1백40여 가구 4백50여 명의 주민들이, 1억원 가량의 기금을 마련해 교회건축을 돕고 있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2006년5월 기공예배 모습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 교인들
2007년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 봉헌 (임춘희 담임목사)
아펜젤러 순교 기념교회 (군산시 내초동)
그것은 105년 만의 보은(報恩)이었다. 여명기 조선땅에 들어와 신식학교(배재학교 이화학당)를 세우고, 교회(정동교회)를 지어 어린 양들을 돌보다, 해상사고로 지난 1902년 고군산 열도 어청도에서 희생된 아펜젤러 선교사를 기리는 추모비나 예배 처소는, 그동안 인근 어디에도 없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를 파견한 감리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일으킨 이준 열사를 포함한 수많은 민족지사를 배출한 교단으로, 일제 치하 민족운동에도 적지않은 힘을 실어주었는 데도 우리는 무심하였다. 은혜를 모른척하면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했던가?
그러나 이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게 되었다. 바로 지난 2007년 6월 11일 아펜젤러 선교사 순교 105주년을 맞이하여, 전북 군산시 내초동에 아펜젤러 선교사 순교 기념교회가 들어선 것이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해상성지
2007년 6월 19일 오전 7시, 대구에서 경부고속국도를 타고 서대전까지 가서, 서대전에서 호남고속국도로 전주 나들목까지, 다시 군산으로 이어지는 군장산업도로를 거의 끝까지 달려가서, 새만금 방조제 한쪽에 자리잡은 아펜젤러 선교사 순교기념교회를 찾았다.
환경운동가들의 큰 저항을 불러일으킨 새만금 방조제로 물길이 막혀버린 서해 갯벌은, 폐사한 조개무덤으로 허옇게 바랬다. 새만금 방조제를 오른쪽으로 멀리 내려다보며, 간척지에 들어선 갈대밭을 보며 아펜젤러 선교사 순교기념교회는 들어섰다.
만난을 무릅쓰고 고요한 동방의 나라에 복음을 전하려고 온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수한 영혼을, 항해하는 배 모습에 담아 교회건축에 활용했다. 이 교회 2층 아펜젤러 선교사 기념관에 올라보면, 저 멀리, 아득히 고군산 열도의 섬들이 내려다보인다.
쾌청한 날씨 덕에, 저 너머 보이는 바다가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어청도 앞바다이다. 어청도 앞바다는 2년 전 2005년 6월11일 감리교단에 의해 해상 성지로 선포되었다.
◈감리교의 뿌리가 순교한 어청도 앞바다
그동안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난당한 군산 앞바다를 찾아오는 순례객들은 꾸준하게 있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현장에는 아무런 안내판도, 기념물도 없었다.
장로교 통합 합동교파 다음으로 국내 3대 교단을 형성하고 있는 감리교를 국내에 첫 도입한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해상성지’는 1백 년간의 고독에 묻혀 있었다.
도시의 대형교회들은 저마다 외형적인 성장이라는 허울에 빠져 본질을 잊고 있을 때, 군산 내초도(지금은 육지로 바뀌어 내초동) 바닷가 한 작은 교회에서 기도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타국에서 이방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모르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개화기 조선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순교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숭고한 넋을 후세들에게 전하도록 기념관을 세우겠습니다.”
◈선교사의 죽음 헛되이 할 수 없어
과거 내초교회로 불리던 온누리교회 임춘희 목사와 불과 1백여 명 신도들은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지만,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곳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이기에 이런 사명감을 느꼈다. 더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되던 어느날, 저마다 가슴 저린 기도를 올리면서 한마음으로 뭉쳤다.
“우리가 해야돼. 큰 교회 믿을 것 없어.” 갯벌가 언덕교회에서 소박하게 살던 신도들은 그때부터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하였다. “벽안의 선교사가 바로 저기서 숨졌다.”는 어청도 앞바다 전설을, 더이상 속절없이 떠돌지 않도록 해야할 의무가 그들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여 끝을 알 수는 없는 역사가 시작된 게 불과 십여 년 전이었다. 바닷가의 초라한 개교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기념관이라도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선한 일을 열정을 갖고 추진하려는데, 하나님이 동참하심일까? 군산지방 감리교단에서, 아펜젤러 선교사 순교기념교회 추진위를 구성하며 든든한 울타리를 쳐주었다. 사업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셈이다.
물론 일부 재정지원도 있었지만, 거의 전부 온누리 교인들의 헌금이 놀라운 힘을 발휘, 애당초 기념관을 세우려던 소박한 구상이 순교기념교회 헌당으로까지 커졌다.
◈겨자씨만한 보은의 마음이 큰 열매 맺어
환경운동을 하는 임춘희 담임목사의 지향에 맞춰, 교회는 친환경적으로 지어졌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과 교회 곳곳에 예배당과 기도실, 수련시설, 기념관, 영사 시설까지 갖췄다. 겨자씨만한 보은의 마음이 순교기념교회라는 큰 열매를 맺은 것이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배를 찾기 위한 작업은 다각도로 진행되었다. 미국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고, 학자들도 여러 갈래로 검증에 나섰다. 그러나 아직 아펜젤러 선교사가 타고 있던 조난배와 유해 탐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비용 부담이 큰 탓이다. 지금 서울 마포구 양화진에 있는 선교사 묘역은 가묘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 젊은 신학생이던 아펜젤러 선교사는, 지금 조선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해 날마다 영적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는 한 목사님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자발적으로 조선행을 택하였다.
지금부터 123년 전인 1885년 4월 5일 제물포(현재의 인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한 아펜젤러 선교사는, 저멀리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에서부터 남쪽의 벼농사꾼에게까지 골고루 복음을 선포하였다.
입국 초기에 선교활동이 자유롭지 못할 때는, 교육사업에 주력하여 왕실의 큰 신뢰를 받았다. 어느 정도 선교활동이 보장되자, 전도여행을 자주 떠났던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8년 한해만 무려 1천830마일이나 지방을 찾아다녔다. 1889년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을 방문한 것으로 그의 일기에 나오지만, 정확히 대구의 어디에서 묵었고,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성서번역자 대회에 참가하려다 조난당해
고종으로부터 교명을 하사받아 배재학교를 세우기도 한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글성서편찬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실제로 당시 마태오 복음, 마르코복음, 고린도 전후서를 번역한 장본인이다.
‘저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습니다.’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 아펜젤러 선교사 가묘의 추모비에 서있는 이 글처럼, 아펜젤러 선교사는 죽음의 철창을 산산이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옭아맨 결박을 끊고, 조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복된 삶과 자유를 허락하시라고 기도하였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복음의 꿈을 접고, 급히 하나님 나라로 떠나게 된 것은 사고 때문이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어 조수(조한규)와 친지의 부탁을 받은 이화학당 여학생을 데리고, 목포에서 열린 성서번역자 대회에 참석하러 배를 타고 가다가, 다른 배와 해상 충돌 당하였다.
조난당한 배에서 살아남은 광산업자 보울비에 따르면, 아펜젤러 선교사는 충분히 탈출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 아래칸 3등 선실에 있던 한국인 조수와 이화학당 여학생을 구하려 아래로 내려갔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쓰고 있다.
혼자만의 탈출 대신, 조선인 친구를 구하려다 희생된 아펜젤러 선교사야말로, 친구를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다고 한 요한복음의 말씀을 실천한 인물이다. 하지만 한국 교계의 충격은 컸다. 해야할 엄청난 일들을 두고, 급작스레 떠난 것이다.
◈이름없는 바닷가 교회가 이룬 기적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해상 성지는 지난 105년간 방치되고 있었다. ‘한국을 자유와 그리스도의 빛으로’ 덮고 싶었던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수한 꿈이, 일백여 년 만에 교회로 다시 피어난 것은 은총이었다. 도시의 대형 교회들이 지교회의 성장만을 외치면서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해상성지를 복원할 꿈도 꾸지 못하고 있을 때, 고군산 열도에 속한 내초도의 한 이름없는 교회(온누리교회)가 기적을 만든 것이다.
아펜젤러 선교사 일가는 한국을 위한 봉사를 대물림한 집안이다. 아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한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방황하던 시절까지 겪었다.
그러나 고통 뒤에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가? 철이든 헨리 다지 아펜젤러 2세는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던 조선사람, 매일같이 영적 장례식을 치르는 조선인들을 위한 헌신의 바다에 뛰어 들었다. 조선을 위한 헌신의 자세를 물려받았다.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아버지가 세운 배재중고교의 교장으로 자신의 삶 전부를 우리 민족을 위해 내놓았고, 아펜젤러 선교사의 첫 딸로 한국에서 태어난 첫 서양아기인 엘리스 또한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땅을 밟은 뒤, 이화학당을 맡아 헌신한 후, 1950년 이대에서 설교하다가 강단에서 순교하였다.
바다에 수장된 아펜젤러 선교사와, 신병 치료차 건너간 미국에서 숨졌지만 조선땅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그 유해가 이장되어온 헨리 다지 아펜젤러, 그리고 강단에서 숨진 아펜젤러의 선교사 맏딸 엘리사의 죽음, 잊어서는 안되리라.
(글·최미화기자, 사진·정우용 기자, 2007.06)
(출처- http://blog.daum.net/ledk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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