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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의 호남 선교과정을 지나서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반 선교업무와 병원 설립, 의료선교, 학교교육을 통한 선교사업이 차츰 구체화되면서, 전도를 받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전주와 군산에 자리를 정하고 차분히 활동하던 선교사로는 테이트 남매(崔義德과 玖德) 선교사와 레이널즈(李訥瑞) 선교사 내외, 약방을 설치하고 의료선교사역을 겸했던 해리슨(河緯廉) 선교사, 잉골드 여의사 등의 활약이 현저했다.
목포를 거쳐서 이곳 전주로 파송되어 온 매큐첸(Luther Oliver McCutchen, 馬路德) 선교사와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된 요세핀(Mrs L.O.Josephine Hounsell) 여선교사, 군산에 파송되어 온 불 선교사와 그의 부인이 된 앨비 선교사 등이 일반선교와 학원선교 또는 의료선교 등을 담당했다. | ||||||||||||||||||||||||||||||||||||||||||||||||||||||||||||||||||||||||||||||||||||||||||||||||||||||||||
매큐첸(마로덕) 선교사, 마로독 선교사의 부인 요세핀 여사, 전킨 선교사 | ||||||||||||||||||||||||||||||||||||||||||||||||||||||||||||||||||||||||||||||||||||||||||||||||||||||||||
전킨 선교사는 군산 시내에서 3㎞나 떨어져 있는 궁말(현 구암동)의 습지대에 살면서, 잦은 풍토병으로 고생하다 어린 세 아들(Sidney, Francis, George)을 병으로 인해 잃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도 건강이 쇠약해졌다. 선교사회에서는 그의 사역지를 기후가 나은 전주로 옮기게 했고, 활동 반경을 20리 이내로 제한했다.
1904년부터 전킨 선교사가 전주에 옮겨와서 전주교회를 담임했을 때, 남장로회 파송 한국 선교사 중 리더격인 레이널즈 선교사는 그의 능력과 인격이 뛰어나 다른 선교회인 북장로회 선교회의 청빙을 받아 서울의 다른 곳에 가서 목회를 담당하기도 했다.
『朝鮮長老敎會史典彙集』『全羅老會第1會議錄』『來韓宣敎師名簿』참조. [표5] 1910년대 전라노회 지방 시찰 구분(6개지방,9개 시찰)
[표6]1920년대 전북노회 지방
[표7]1920년대 각 지방 담당 선교사
[표8]1903~1910년 호남지방 교세 통계
G. T. Brown, 『Mission to Korea』 참조. | ||||||||||||||||||||||||||||||||||||||||||||||||||||||||||||||||||||||||||||||||||||||||||||||||||||||||||
② 전주교회의 성장과 예배당 신축 | |
1900년에 이르자 전주교회는 그 동안의 부진에서 벗어나 성장을 바라보는 희망적 단계에 들어섰다. 그해 봄에는 교회에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세례 받기를 원하므로, 레이널즈 목사는 그들을 모아 놓고 먼저 믿음의 기본 도리에 대해 일정기간 교육 시킨 후 52명의 지원자를 문답해, 제대로 대답한 10명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청교도 신앙이 투철했으므로, 양적인 증가만을 위해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지원자의 문답이 완벽하지 않아도 바른 신앙으로 확신을 고백하는 진정한 세례교인을 얻고자 꾸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육 후에도 엄격하게 심사하여 바른 대답과 분명한 신앙고백이 일정한 수준에 올라야만 세례를 허락하였고, 그렇지 못하면 낙제시켰다. 문답고시에 낙제한 교인들은 더욱 열심히 복음 진리 배우기를 노력하며 다음번 문답고시에 대비하였다. 오늘의 교회들이 형식적 세례문답과 수 불리기에 치중하여 적당히 치르는 것과는 달랐다.
전주교회는 양적인 성장을 계속하여 1900년 가을에는 113명이나 되었고, 당시 해리슨(하위렴) 선교사는 이 많은 사람들을 일시에 교육시킬 수 없어, 여섯 반으로 나누어 시차를 두고 성경공부를 시켰다. 한번은 54명의 세례지원자들을 교육시킨 후 사흘에 걸쳐 문답고시한 결과 6명만이 합격되어 세례를 허락한 일도 있었다. 그 나머지 인원 48명은 원입교인으로 하고 계속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이렇듯 전주에서의 전도가 착실하게 계속되었고, 교육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비단 전주 사람들만이 아니고 인근 동리 사람들까지도 있었으므로, 선교사들과 전도인들은 전주성 밖의 여러 마을에도 나가 전도운동을 확장하였다.
특히 해리슨 목사는 닷새만에 열리는 전주 장날에는 반드시 장터에 나가서 각지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장꾼)을 상대로 열심히 장터전도를 하였다. 이때 매서인(성경 전도지를 반포하는 전도인)의 도움을 받아 큰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당시 전주교회의 선교 상황에 대한 글이다(가급적 원문을 살려 옮긴다).
교회통신 젼쥬 하목사
이를 보면 장터 전도를 할 때는 단순히 성경의 내용만 전한 것이 아니고 동서의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또 매서인들의 도움을 받아 이에 관한 서책도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 |
린니 데이비스 여선교사 장례식 | |
레이널즈 선교사는 1893년부터 성서번역위원회 상임 실행위원(위원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레이널즈 등 14명이다)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목포 주재 벨(Bell, 裵裕址) 선교사의 부인이 1901년 4월 심장병으로 갑자기 별세하자, 벨 선교사는 두 아이를 이끌고 급히 귀국하였고, 또한 목포에 있던 오웬 의사 부부도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돌아가자 목포선교부는 한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1902년 8월에 벨 선교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목포선교부와 양동교회는 레이널즈 선교사가 임시 담임하였다.
레이널즈는 1902년 9월부터 1906년 3월까지는 서울 구리개(銅峴)교회(일명 서울중앙교회, Central Church) 담임 목사로 서울선교부의 청빙을 받고 만 3년 5개월 동안 목회사역을 담당하였다. 당시 미북장로회 선교부는 어려운 상태에 처한 구리개교회를 원만하게 목회할 분으로 남장로회 소속의 레이널즈 선교사를 지목하고, 미국 북장로회선교부에서 그를 청빙하였던 것이다. 그는 1906년 3월 이후는 평양에 있는 장로회 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로, 한국 선교사역 말년까지 계속 시무하였다.
1908년 2월 전주의 전킨 선교사가 폐렴으로 별세하자, 다시 전주로 와서 서문밖교회를 맡는 한편, 또 성경 번역 업무도 담당하면서 호남지방 선교사역에 진력하였다.
레이널즈 선교사가 서울 등에서 일해야 할 때 이곳 전주선교부는 테이트(최의덕) 선교사가 주도하였다. 이때 테이트 선교사는 서문밖교회와 전주 주변의 여러 교회들을 돌보며 여러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선교 업무를 진행하였다.
매큐첸(마로덕) 선교사는 전북의 동북지방을 순회·전도하였고, 전주에서 활동하다가 부인이 별세하자 군산으로 옮긴 해리슨은 불(부위렴) 선교사와 더불어 군산·익산 등지와 충남 서천·부여 지방을 순회·전도하였다. | |
전주시장의 모습(1900년대 전후) | |
선교기지가 완산(完山)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전한 뒤였으므로, 선교기지에서 쉽게 바라볼 수 있는 전주의 4대문 중 하나인 서문과 아주 가까우며 전주내를 건너 부중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들어서는 곳(현재의 터)에 예배당 기지 780평을 마련하였다.
1905년 이른 봄부터 터를 닦고 건평 57평의 새 예배당 건축을 착공하여 그해 9월 15일에 낙성하였다. 예배당 건축공사는 담임목사 전킨 선교사의 진두지휘와 장정 교인들의 노력봉사와 여러 선교사들의 협력이 있었다. 특히 육중한 들보를 어깨에 올리는 테이트 선교사의 강한 어깨 힘에 모든 사람들이 경탄의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예배당 건축양식은 한양(韓洋) 절충식으로, 주황색 벽돌벽에다 백회로 눈금을 넣고 간격에 맞추어 유리창문을 여러 곳에 내었으며, 지붕은 두꺼운 한식기와로 덮었으므로 매우 우람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천장은 굵직한 들보와 서까래를 높게 받쳐서 시원하게 보였다. 바닥에는 판자를 깔았으며 내부 전면에 한층 높여서 강단을 설치하였다.
새로 지은 예배당 안에는 남자반과 여자반으로 좌석을 구분하고, 가운데에 휘장을 전후로 길게 쳐서 남녀반이 서로 마주볼 수 없게 하였다. 예배당 안 가운데 휘장을 치는 것은 당시 남녀내외법을 지키는 모든 예배당의 공통적 방식이었다.
예배당 기지 780평과 건평 57평(30칸)의 건축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른 자립·자영 정신을 교육받은 교인들이 솔선하여 힘에 겨운 연보를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총공사비는 3,500냥이 들었는데, 총액의 2/3가 되는 2,300냥은 교인들이 연보하였고, 부족한 부분은 선교사들이 협력하여 완산의 선교사 사택 한 채를 헐어서 자재를 보충하여 소요경비를 충당하였다.
이같이 정성을 기울여 전주 도성의 주요 관문 중 하나인 서문 바로 옆에 예배당을 크게 건립한 일은 국운(國運)이 기울어져가는 당시 우리 민족에게 자긍심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이었으며, 장차 호남선교의 중심을 이룬 점에서도 그 의의(意義)가 큰 것이었다. | |
서문 밖에 새로 터잡은 예배당.1905. | |
이때 새로운 사상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전도를 듣고 소망을 품고 하나님께 기도로 호소할 수 있는 예배당에 모여드니 교세는 점점 증가되었다. 이때부터 그 동안 전주교회로 불려오던 예배당 이름을 전주서문밖예배당, 혹은 전주서문밖교회, 전주부중(府中)교회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 |
1893년 1월 미국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사이에 장로회 정치형태를 보유하는 선교부끼리 ‘선교사공의회’라는 협의기구를 구성하고,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선교부와 캐나다장로회 선교부 등이 참여했고, 1901년 9월에는 장로회 공의회로 개칭하여, 외국 선교사들 외에 한국 교인들도 참석하는 합동공의회 시대를 이루었다.
하부기관으로서 공의회 지방위원회를 구성하여 ‘소회(小會)’라고 부르는 지역 대리회를 조직해서 지교회를 관리했다. 1901년에 공의회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회의 헌의로 ‘조선자유장로회’의 설립을 의정할 위원을 선출하였고, 이어서 1905년 6월 25일 회의에서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레이널즈는 이제 때가 성숙하였으니 대한국장로회노회를 조직하자고 제의하여 결의되었다.
이 결의안을 캐나다장로회 선교본부와 미국북장로회 선교본부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본부에서 그 해에 인허하였고, 미국남장로회 선교본부에서는 다른 선교부보다 뒤늦게 허락했다. 그리하여 합동공의회에서는 한국에 노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 ||||||||||||||||||||||||||||||||||||||||||||||||||||||||||||||||||||||||||||||||||||||||||||||||||||||||||||||||||||||||||||||||||||||||||||||||||||||||||||||||||||||||||||||||||||||||||||||||||||||||||||||||||||||||||||||||||||||||||||||||||||||||||||||||||||||||||||||||||||||||||||||||||||||||||||||||||||||||||||||||||||||||||||||||||||||||||||||||||||||||||||||||||||||||||||||||||||||||||||||||||||||||||||||||||||||||||||
최초의 독노회 조직,1907 | ||||||||||||||||||||||||||||||||||||||||||||||||||||||||||||||||||||||||||||||||||||||||||||||||||||||||||||||||||||||||||||||||||||||||||||||||||||||||||||||||||||||||||||||||||||||||||||||||||||||||||||||||||||||||||||||||||||||||||||||||||||||||||||||||||||||||||||||||||||||||||||||||||||||||||||||||||||||||||||||||||||||||||||||||||||||||||||||||||||||||||||||||||||||||||||||||||||||||||||||||||||||||||||||||||||||||||||
이 해를 전후하여 그 당시 한국 안에서는 심각한 정세변동이 일어났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적 조치에 의해 국제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다음해에는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뜻있는 사람들은 허탈감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길을 찾고 또 위안과 소망을 얻기 위해 교회로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한국 교인들을 차분하게 바른 신앙으로 이끌며 교회조직의 사명을 인식하도록 인도하였다. 곳곳에 세워지는 교회들로 하여금 합심하여 연합하게 하고 힘있는 선교를 펼치도록 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자기들이 신봉하는 장로회 정치로 교회 질서를 유지하도록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민족주의적 열정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드디어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댓재(章臺峴)예배당에서 선교사 38인과 한국인 장로 40인(36처 조직교회의 대표들), 도합 78인(남전라지방 총대는 선교사 배유지와 장로 임성옥-목포, 북전라지방 총대로는 선교사 이눌서·최의덕·전위렴·마로덕과 장로 최흥서-임피, 최중진-태인이었다)이 총회로 회집하여 ‘대한국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회장에는 선교사 마포삼열, 부회장에는 방기창 목사, 서기에 한석진 목사, 부서기에 송인서 목사, 회계에 선교사 이길함이 선출되었다. 1907년 9월 17일 정오를 기하여 회장 마포삼열 목사는 역사적인 노회 설립 선언을 다음과 같은 요지로 피력하였다.
'이 노회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십자가를 든든히 의지하고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고 세상사람 앞에 영화로운 빛이 되며,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한 노회를 이루어야 하겠다. 이 대한국장로회 노회는 실로 독립노회로다. 할렐루야 찬송으로 성부·성자·성신님께 세세토록 영광 돌리세. 아멘'
이 노회의 중요한 첫 결정은 7인의 목사(徐景祚·韓錫晋·宋麟瑞·邦基昌·吉善宙·李基豊·梁甸伯)를 장립하여 한국인 목사가 탄생한 일이었다.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하고 집계된 교세의 통계는 목사 47, 장로 53, 조사 131, 예배처소 984, 세례교인 17,890, 원입교인 21,482, 소속 전교인 69,098, 학교수 402, 학생수 8,611이었다.
다음의 표에서 제시되는 통계는 당시 한국 교회 성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 | ||||||||||||||||||||||||||||||||||||||||||||||||||||||||||||||||||||||||||||||||||||||||||||||||||||||||||||||||||||||||||||||||||||||||||||||||||||||||||||||||||||||||||||||||||||||||||||||||||||||||||||||||||||||||||||||||||||||||||||||||||||||||||||||||||||||||||||||||||||||||||||||||||||||||||||||||||||||||||||||||||||||||||||||||||||||||||||||||||||||||||||||||||||||||||||||||||||||||||||||||||||||||||||||||||||||||||||
한국교회가 낳은 최초의 7인목사 | ||||||||||||||||||||||||||||||||||||||||||||||||||||||||||||||||||||||||||||||||||||||||||||||||||||||||||||||||||||||||||||||||||||||||||||||||||||||||||||||||||||||||||||||||||||||||||||||||||||||||||||||||||||||||||||||||||||||||||||||||||||||||||||||||||||||||||||||||||||||||||||||||||||||||||||||||||||||||||||||||||||||||||||||||||||||||||||||||||||||||||||||||||||||||||||||||||||||||||||||||||||||||||||||||||||||||||||
[표9]독노회 임원 일람(1907~1911)
獨老會錄 및 第1回總會錄} 1907∼1912 참조 [표10]언더우드의 개신교 전체 교세 증가 통계(1901~1907)
[표11] 예수장로회 독노회 총계(전라남북도 통계를 중심으로)(1907~1910)
『독노회록 및 제1회총회록』 참조 [표12]인도별(1896~1907)교인수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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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교회의 성장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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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밖예배당(현 남문교회) | |||||||||||||||||||||||||||||||||
서문밖교회에서 연합사경회가 모이게 될 때는 숙식까지 자진해서 지원했다. 1909년 8월 제직회에서는 남문 밖에 또 하나의 예배당을 짓기로 하고 건축자재를 벌목해 준비하기로 하였다. 서문밖교회는 전주의 복음 확장을 위해 기쁨으로 교회 분립을 추진했다. 1910년 1월에 전주 남문 밖 지대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서문밖교회 교인들 일부로 하여금 남문밖교회에 출석하게 하였다. 전주 남문밖예배처는 최국현 장로가 담당하게 하고 회계는 이성옥 씨가 맡았다. 개인전도에 능력이 있는 강태화 씨도 서문밖교회의 회계일을 사면하고 새 교회를 도왔다. 1년 동안 남문밖 제직원들이 서문밖교회 제직회에 참석하였고 2월 제직회 이후 매월 제직회에서는 최국현 장로와 회계 이성옥 씨의 경과 보고가 있었다. 두 교회의 관할구역을 정할 위원으로 정경환, 강태화 2인을 선정하고, 레이널즈 목사와 마로덕 목사가 협조해 구역을 획정하기로 하고 앞으로 두 교회 교인들의 원입 문답과 세례 문답은 각기 따로 실시하기로 했다.
전주남문밖교회 설립 초기의 상황을 보면 매주일 회집인원은 120명이고 재정 형편은 1, 2월 두 달 동안의 수입이 12원이고 지출은 7원 55전으로 잔금은 4원 55전이었다. 남문밖교회는 점차로 교인수가 증가되자 예배당을 신축하게 되었다. 그때 서문밖교회에서는 교회 매장지 임야에서 재목을 벌목했다. 1905년의 예배당 신축 때 남겨둔 주춧돌과 장보로 쓰일 재목 등을 남문밖예배당 건축에 쓰도록 하고 인도인 최국현·강태화와 서문밖교회의 전도인 전영칠이 건축공사 간역(看役)을 맡는 등 주요제직원들이 협력해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물론 남문밖교회를 담당한 마로덕 선교사의 협조도 있었다. 이렇게 예배당을 건립한 남문밖교회는 1910년 1월부터 최국현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0년 12월까지도 소제직회를 서문밖교회와 함께 했으며 1910년 12월 11일 주일에는 최국현(崔國鉉)을 남문밖교회 장로로 장립 시무케 하고 1911년부터는 교정(敎政)까지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청일(淸日)전쟁(1894)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하였고 우리 정부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인 ‘제1차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우리 나라의 재정, 외교, 교육 등에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시행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인 소위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해 한국을 통감(統監)정치로 묶어버렸다. 1907년 ‘정미조약(丁未條約)’, 소위 ‘한일신협약’ 이후에는 한국 군대를 해산시켰고 1909년에는 사법권마저 빼앗아버렸다. 친일파 집단인 ‘일진회(一進會)’의 송병준(宋秉畯), 이용구(李容九) 등은 일본과 미리 내통하여 우리 정부에 한일합방의견서(韓日合邦意見書)를 건의하는 등 망국을 재촉하는 반역 행위를 자행했다. 더욱이 1910년 새 통감 데라우치(寺內政毅)가 부임하면서 경찰권마저도 통감부에 위양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대한일보 발행을 정지시키고 또 대한매일신보도 발매를 금지시켜 언론까지 봉쇄하였다. 일제는 8월 22일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고 친일내각의 우두머리인 이완용(李完用) 총리대신을 통해 각부 대신을 협박해 대한제국의 일본 예속을 뜻하는 합방안에 조인(調印)하게 했고 이를 8월 29일 공포했다. 민족 최대의 치욕(恥辱)적인 일이라 하겠다. 이로써 민족은 망국(亡國)의 한을 품고 통곡했으며 목숨을 끊고 자진하는 이도 있었다. 나아가 각처에서 의병들이 궐기하였다. | ||||||||||||||||||||||||||||||||||
언론까지 봉쇄되었던 당시의 대한일보/대한매일신보 | ||||||||||||||||||||||||||||||||||
허탈함 가운데서 새로운 소망에 접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선뜻 동의하며 점차로 깊은 신앙심을 갖는 한편 애국 충정을 무력으로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중심에 구국의 뜨거운 정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뜻을 지닌 젊은 지사(志士)들이 모인 교회에서는 일본의 계속적인 압력에 그저 무기력하게 침묵을 유지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 당시 민족의 일원이라면 일본의 강제적 침략 위기 속에서 자주 독립을 수호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 독립을 목표로 하는 애국청년들 중에는 국가의 전망이 흐리고 답답하므로 당시 새로운 사상과 신흥세력으로 보여지는 교회에 민족독립운동의 기대를 걸고 운집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자 일제는 교회를 주목하게 되었고 한국 침략의 일차적인 걸림돌로 교회를 지목했다. 일제는 여러가지 형태로 교회를 감시하며 탄압과 박해를 가해왔다. 이같은 방침은 일제 36년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가 일본에 대결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노출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본국(미국) 정부의 은근한 종용과 일본 당국의 눈치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교인들의 무고한 희생을 원치 않아서 교회와 정치의 분리를 강조하게 되었다. 민족독립운동에만 집착했던 유지들은 이 상황을 보고 하나둘씩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이때 교회는 선각자들의 모임답게 구국운동은 먼저 신앙과 국민적 자각에 있음을 깨닫고 먼저 배워야 하며 또 의식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전국 각 교회에서는 학당과 학교를 설치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한편 우리 글과 애국 사상을 가르쳤다. 이들은 신앙이 깊어질수록 진정한 구국이념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귀의(歸依)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같은 신앙은 선교사들의 사상적 지도와 영향에 힘입은 바가 참으로 컸다. 초대 선교사 중 장로회 선교사들은 대부분 철저한 칼빈주의자들로서 원래 영국 청교도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은 개혁주의 신앙가들이었다. 청교도주의 신앙의 공통된 특징은 엄격한 신앙 의식과 성수 주일, 신앙과 삶의 표준으로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절제생활의 강조 등이었는데 칼빈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선교사들은 신앙 규범 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경제, 정치, 예술 등 생활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왕권을 나타낸다는 사상을 지녔고 현실 정치문제에서는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견지(堅持)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가 애국운동을 하더라도 순수 복음과 경건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무력(武力) 대결로 신자들이 희생되지 않기를 바랐기에 교회의 비정치화(非政治化)를 도모하는 방침을 세우려 했다. 그들은 민족운동을 세상 밖으로 끌고 나가기보다 교회 안에서 신앙운동으로 승화(昇華)시키려고 했다. 대부흥의 불길은 남도 뿐만 아니라 북쪽에 위치한 전라북도 지방에까지 점점 퍼져갔다. 전북지방에서는 남도에서 전해오는 소식과 북쪽지방인 서울, 평양 등지에서 이루어진 성령의 역사에 의한 부흥운동의 감동적 소식이 점차로 파급되어 왔다. 전주의 서문밖교회를 필두로 북대리회 산하의 여러 지교회에서는 1907년 9월 독노회를 다녀 온 총대들이 전하는 소식에 깊은 감명을 받고 개인적 신앙생활과 교회적 신앙운동에 변화를 가져왔다. 서문밖교회의 유능한 청년 제직원들은 남장로회 선교회의 리더이며 조직신학 교수인 레이널즈 담임목사로부터 신학적인 교육과 지도를 받으면서 조직적으로 교회 내부 업무 처리와 개인 전도운동을 계획적으로 벌였다. 또한 성경 공과교육인 월보공부에 매우 열성적으로 임했으므로 서문밖교회를 중심으로 주변 각 교회와 개척 교회들에도 나가서 인도를 담당했으며, 특별히 초대 교회의 특징이었던 성경교육을 위한 지교회의 소사경회와 지역 교회들이 연합해 실시하는 중사경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당시 서문밖교회에서 활동한 일꾼은 김필수 씨를 필두로 전영칠, 전병직, 최국현, 김권준, 김영헌, 강태화, 김영식, 이승두, 이성옥, 박은섭, 양경현, 김성배, 안백선, 유경선, 정사규, 박영순, 엄경찬, 김진상, 함덕조, 정경환, 송치백, 김우열, 정덕명, 정귀서, 유경옥, 한우성, 정 근 등이었다.27)
당시의 교회 부흥운동은 성경교육을 위한 사경회가 발화점이 되었고 기도에 대한 열심이 동인(動因)이 되었다. 성경공부로 기초를 든든히 세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연히 기도를 게을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는 나라 형편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국이었기에 한국 교인들은 두세 사람만 모이면 간절히 합심기도를 드렸다. 때로는 새벽부터 밤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열성이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더욱 고양(高揚)되었다. 선교사 데이비스(G. T. Davis)는 한국 교인들의 기도 모습이 너무 진지하고 열심이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었다. 결국 이같은 열성은 교세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1907년 대부흥운동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열기가 식어가자 일부 선교사들은 부흥의 열풍을 되살리는 모임을 갖기에 이르렀다. 1909년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3인이 개성에서 일주일간의 산상기도회를 마치고 내려왔다. 그 중 스톡스(M. B. Stokes, 都瑪蓮) 목사는 다시 지방 전도 여행에 나서면서 전 교인에게 앞으로 1년 안에 5만 명의 새신자를 얻을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 일이 백만명구령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이후 날짜와 집회수가 늘어나면서 ‘5만 명’을 ‘20만 명’으로 불려서 목표를 잡았다. 1909년 9월 남감리회 제13차 선교연회에서는 대회 표어를 “20만 명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 정했던 것을 서울의 선교연회에서 열린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the Evanglical Missions)에서는 “백만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로 부흥 전도 목표를 재책정했다. 참으로 대담한 표어가 아닐 수 없다. 이때 한국의 장·감(長老敎·監理敎)을 통합한 교인 총수는 공식집계로 불과 ‘8천 명’선이었다. 선교사들이 어림잡아 집계한 것에 따르면 교인 총수는 약 20만 명 선이었다. 선교사들은 왜 이러한 비현실적인 목표책정으로 대규모 전도운동을 꾀했을까? 당시 급변하는 한국의 역사적 정황과 함수(函數)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게일(J. S. Gale, 奇一) 목사는 다음과 같이 격한 어조로 선언했다.
'이 큰 전도운동은 한국에서의 특별한 노력을 요청하는 것이다. 백만명구령이라는 표어는 민족의 실망이 절정에 다다른 이 때에 모든 사람에게 널리 울려퍼지고 있다. 자기의 잘못으로 파멸과 굴욕의 구덩이에 빠져 자위(自衛)와 자치가 불가능하게 된 이 나라는 만국민의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이 나라는 구세주를 찾아야 했다. 오늘은 절정의 날이다. 우리는 내일을 기다릴 수도 없고 예언도 할 수 없다. 오늘이 전도해야 할 그 날이요, 이 곳이 전도할 곳이다! 활짝 열린 전도의 문 앞에 겸손하게 서 있는 수많은 백성과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선교사들은 이때가 한국의 중대한 고비인 것을 확신하고 있다.'
여기서 선교사들이 백만명구령운동을 제창하고 추진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당시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전도운동 전개에 절호의 기회로 파악했던 것이다. 이 기간 중 사경회에 참석했던 지방의 한 감사(監司)는 소감을 묻자 “지금 우리는 예수교(耶魚禾敎)의 하나님을 믿는 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기독교에 대한 귀의(歸依)는 영적 욕구였다기보다는 절망적인 정치 상황에서 갖는 기독교에의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 같다. 때를 맞추어 1910년 9월 18일 평북 선천(宣川)에서 개최된 제4회 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는 회무의 모든 안건을 다루기에 앞서 백만명구령운동에 관한 결의안을 길선주 목사가 제의하고 부위렴 목사가 찬성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각 대리회 별로 특별위원을 선출해 이 전도운동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이 일은 우리 나라가 일본에 합방당한 지 꼭 20일만의 일이었다.
이때 독노회에 참석했던 총대 중 북전라대리회의 목사는 부위렴, 어아력, 마로덕, 김필수였고 장로는 김규배, 오인묵, 신경운, 최치국이었다. 남전라대리회의 목사는 배유지, 변요한, 고라복, 로라복, 맹현리, 윤식명, 이기풍이었고 장로는 임성옥이었다. 전라대리회 여러 총대들은 독노회의 결의에 따라 자기 지방으로 돌아와 백만명 구령 전도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유감스럽게도 전라대리회는 최중진 목사의 자유교회사건으로 진통을 겪고 있던 때라, 대리회 자체가 구령운동 계획안을 세워 지교회에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에 앞서 서문밖교회는 개별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전도운동을 실시했는데 특별 강사를 초청해서 대집회를 갖기로 했다. 강사의 형편에 따라 좀 늦추어서 1910년 6월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전도집회를 효과있게 실시하기 위해 제직회는 이승두, 전병직 두 사람을 기획위원으로 선정하고 계획을 세웠다. 1910년 6월 12일 주일부터 한 주간을 백만명구령운동을 위한 특별기도주간으로 정하고 “전주 부중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자!”라는 표어를 제정하고 전교인으로 하여금 먼저 간절히 기도하게 하고 6월 20일(월요일)부터 30일까지 11일간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吉善宙) 목사를 강사로 청빙하여 매일 밤 특별집회를 열었다. 6월 19일(주일)부터 특별전도집회 기간에 전주지역을 십자로 갈라놓고 동서남북 4구역으로 나누어서 전교인들이 마가복음서 단편복음과 전도지를 손에 들고 각 구역별로 분대를 편성해 축호(逐戶) 전도하는 한편 집회기간 동안 매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모두 나와서 전도하였다. 밤집회에는 예배당 밖에까지 가득 모여 길 목사의 설교에 많은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서 새로 믿기로 서약한 사람이 남녀 350명에 달했다. 교회는 부흥회에서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각 구역 권찰들에게 일일이 맡기고 그들을 심방해 일주일에 한 차례씩 구역단위로 모여서 기도의 방법을 가르치게 했다. 권찰들이 기능적으로 임무를 감당하도록 직무수행 요령을 속쇄판(速刷板)에 적어 각 권찰에게 나누어 주고 교육했다. 또, 각 동네별로 담당자를 택정하고 최국현, 이승두, 전영칠, 김성배 제씨에게 위임하여 전도운동을 실시했다. 이 운동은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시기에 암울했던 마음속에 한 줄기의 광명의 빛을 전한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기대를 가지고 교회로 찾아오게 되었다.
(3) 교회의 급성장과 예배당 증축 서문밖교회에서 1909년 8월에 발의해 1910년에 남문밖교회를 세울 때 교회 하나를 새로이 설립한다는 흐뭇함과 여유를 가지고 유능한 제직과 교인까지도 분할했다. 이미 1909년 7월 11일에 교회가 피택했던 장로 두 사람(이승두, 최국현) 중 최국현을 분립된 남문밖교회의 장로로 임직하도록 했다. 원래 서문밖교회의 초대 장로로 시무하던 김필수 씨는 1909년 9월 6일 독노회 석상에서 목사로 장립되어 전라대리회에서 마로덕 목사가 담당하던 선교 지역인 진안, 장수, 무주 등지에서 마 목사와 동사목사(同事牧師)로 시무하게 되었다. 서문밖교회의 장로로서의 시무는 완료되었지만 교회의 초대 장로였던 만큼 때때로 서문밖교회에 출석해 제직회에도 참여하고 회원으로 또는 임시회장 등으로 격의 없이 교회일에 적극 협력했다. 그러나 법적으로 서문밖교회는 시무장로가 없어 허위(虛位)당회가 되므로 1911년 1월 1일 첫 주일 예배 후에 인도인으로 계속 수고하던 이승두(李承斗) 씨를 시무장로로 임직했다. 그때 담임목사였던 이눌서 선교사는 안식년 관계로 1910년 5월부터 1년 5개월간 미국에 귀국해 있던 중이었으므로 이승두 장로의 장립식은 최의덕 목사가 집행자(회장)로서 이승두 씨와 교회 교인들에게 서약문답을 실시했고, 세 명의 목사(최의덕, 류서백, 마로덕)가 안수하고 마로덕 목사가 기도함으로써 예식을 마쳤다. 이로써 서문밖교회는 조직교회로 복구되었다. 당시 이눌서 목사는 1910년 4월 26일 제직회에서 신중한 태도로 자기가 일시 떠나 있을지라도 교회는 특별히 ‘합심(合心)’ ‘용력(用力)’ ‘기도(祈禱)’ 하며 일할 것을 부탁했었다. 서문밖교회에 담임목사가 없는 동안 마로덕 목사가 1910년 5월부터 8월까지, 류서백 목사가 1910년 9월부터 1911년 10월까지 각각 임시로 맡아서 시무했다. 그 동안에 서문밖교회 제직원들은 남문밖교회의 건축·분립하는 일과 이승두 장로 장립식을 거행했을 뿐 아니라 때를 따라 소사경회와 대사경회, 대대적인 부흥전도운동 등 굵직굵직한 일들을 차질없이 실시했고 특히 교인들의 증가로 예배당을 증축하는 큰 역사(役事)도 실책(失策)없이 거행했다. 서문밖교회는 남문밖교회를 분립시키고도 교인들이 계속해 증가되고 있으므로 현재 57평(32칸)의 예배당에 32평(18칸)을 증축하기로 1911년 3월 6일 제직회에서 결의했다. 다음 3월 12일 주일에는 교인들 앞에 예배당 증축의 필연성을 설명하고 건축할 연보에 관해 이승두 장로로 광고하게 하고 약속헌금 등 정리를 위해 서기로 집사 네 명(전영칠, 전병직, 김권준, 박은섭)을 선출해 이를 담당하게 했다. 이어서 3월 18일(토요일)에 임시제직회를 열고 증축위원회 담당 부서를 정했는데 조사위원으로 이승두 장로, 자재위원 중 회(灰), 개와(蓋瓦) 등은 전병직 집사, 재목위원은 전영칠, 최광진 집사로 분담시켜 3월부터 각 부서별로 일을 착수했다. 4월 제직회에서는 증축공사 감독위원으로 이승두, 윤창호를 지정했다. 제직회 때마다 김권준 회계는 교회 일반회계와 분리해 증축연보 출납상황을 일일이 보고했으며 각 위원들도 업무진행 상황을 보고하며 차질없이 업무처리를 했다. 특히 재목위원 최광진29) 집사는 그 직업이 도편수(대목 중 우두머리)인 관계로 목수일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 업무과정을 일일이 보고했다. | ||||||||||||||||||||||||||||||||||
ㄱ자집 예배당 |
중인교회 | |||||||||||||||||||||||||||||||||
한편 1908년 12월 28일 서문밖교회에서는 지방전도인으로, 류경선(柳景仙), 안백선(安伯善) 씨를 정하고 완주군 우전면 중인리 새잡이 마을에 류경선 씨를 파송하여 예배를 인도케 하였다. 당시 신흥학교 교장이었던 류서백(柳瑞伯) 목사가 심방하여 교인을 가르치고, 다음에 예배 처소도 구입하여 교회를 시작한 것이 오늘의 중인교회가 설립되었다.
(4) 교육사업 실시와 교회 발전 1910년대의 교회 부흥은 외형적으로 예배당을 넓히고 교인이 많이 모인 현상으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민족적인 일대 시련기를 맞아 외부적인 자극과 내부적인 각성에서 기인된 점도 있었다. 그러나 부흥 발전의 가능성은 성경교육을 중심으로 열심히 모여 월보강론과 소사경회, 중사경회 등을 자주 열고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이 꾸준히 나와서 열성적으로 공부한 데에 있었다. 또 한 가지는 교회에서 야학교와 여자 소학교를 운영하여 교육열을 고취시킨 점이다. 그 당시 지각있는 국민이라면 “배워야 산다.”는 생각을 누구나 갖고 있었다. 교인들은 예배당 건축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교육하는 일에도 꾸준하게 뜻을 모았다. 당시 전국 각 지방 교회들과 선교 기관들은 한국에 근대 교육을 실시할 뿐 아니라 한국인을 자주인과 자유인으로 양육하였으며 안으로는 봉건질서를 개혁하고 밖으로는 침략 세력에 저항하는 근대 시민을 양성하였다. 즉 기독교계 기관의 교육은 한말에는 개화, 반봉건 운동의 주역을 양성하고 일제하에서는 항일, 자주독립운동의 주역을 양성한 것이다. 한국의 역사를 교육하고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하는 등 기독교계의 교육은 민족 의지를 지탱하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 ||||||||||||||||||||||||||||||||||
③ 전라노회조직과 한국인 목사 청빙 | |||||||||||||||||||||||||||||||||||||||||||||||||||||||||||||||||||||||||||||||||||
당시 기독교계에서 대대적으로 일으킨 백만 명 구령운동은 곧 일제 당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일제는 한국 침략에 가장 큰 걸림돌로 ‘기독교’를 지목하게 되었다. 그들의 눈에는 “백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전도운동이 마치 ‘백만 명 기독교십자군병’의 양성운동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결국 일제는 기독교 탄압 계획을 서둘러 세웠고 1911년 1월에 소위 ‘105인 사건’을 조작하고 ‘일본총독 데라우치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명목을 붙여 같은 해 9월에는 서북지방인 안악, 선천, 정주, 철산, 의주 지방에서 일대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 |||||||||||||||||||||||||||||||||||||||||||||||||||||||||||||||||||||||||||||||||||
날조된 '105인 사건'피의자들이 공판정으로 끌려가는 모습 | |||||||||||||||||||||||||||||||||||||||||||||||||||||||||||||||||||||||||||||||||||
이와 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련 속에서 장로교회는 그 동안 하나의 독노회로서 전국 일원을 관리하던 것을 지역별로 노회를 설립하고 1912년 9월에는 총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앞서 1911년 9월 18∼22일 전국 각 대리회의 목사 총대 92명과(내국인 46, 외국인 46) 장로 총대 105명(외국인 1명 포함), 도합 197명이 경상북도 대구 남문안예배당에 모였다. 제5회 독노회에서는 회장 이눌서, 부회장 양전백,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필수, 회계 사락수, 부회계 김석창 제씨를 선출했고 마지막 독노회로서 통상적인 회무를 처리하는 중 그 동안의 9개 대리회(경기, 북평안, 남평안, 북경상, 남경상, 북전라, 남전라, 황해, 함경)였던 것을 7개 노회(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남평안, 북평안, 황해)로 편성, 설립도록 하였다. 따라서 1912년부터는 독노회가 아닌 ‘총회’로 모이기로 했다. 총회 설립을 위해 7노회를 조직할 책임자(회장)를 임명하게 되었는데 북평안노회에 로세영, 남평안노회에 주공삼, 황해노회에 이원민, 경기·충청을 합한 노회에 원두우, 전라노회에 김필수, 경상노회에 왕길지, 함경노회에 부두일 제씨로 정했다. 위의 결정에 따라서 종전의 북전라대리회와 남전라대리회 회원들이 모여서 전라노회를 창립하게 되었는데 그때 상황을 전라노회의 회의록 서문에 이렇게 써 놓았다. 조선로회는 내년부터 총회로 모이기로 작정했으니 실로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의 만고 전부터 예정하신 경영 속에 된 것인 줄로 알고 감사하나이다. 대구에 모였던 조선로회에서 전라로회 조직하라는 승인권을 가지고 전라남북 대리회 회원들이 잠시 대구에 모여서 어느날 어느 곳으로 모여서 로회 조직할 것을 작정했으니 그곳은 전주요, 그날은 10월 15일이라. 이날 하오 2시에 전라남북대리회원들이 전주서문밖예배당에서 성찬례를 거행하므로 전라로회를 조직하고 2일동안 계속해 사무를 정리했으니 우리 전라로회가 반석으로 터를 삼고 참 이치로 기둥을 삼아 영원무궁토록 견고해 천국 복음 사업이 확장하게 도와주시기를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 비옵나이다. 아멘. 서문위원 김필수, 리승두. 당시 전라노회 창립회원 명단을 보면, 목사는 배유지, 이눌서, 류서백, 부위렴, 강운림, 최의덕, 마로덕, 고라복, 타마자, 하위렴, 이기풍, 김필수, 윤식명 등 13명이고 장로는 양성률, 최흥서, 서영선, 신경운, 이승두, 최국현, 조덕삼, 이원필, 유기택, 최학삼, 이자익, 위위렴, 오인묵, 김응규(유고로 불참) 등 14명으로서 총대는 모두 27명이었다. 임시회장인 김필수 목사의 사회로 전라노회 창립 회무를 처리하는데 우선 노회를 이끌어갈 임원과 각부 위원을 선출하니 제1회 전라노회 회장에 김필수, 부회장은 배유지, 서기에 이승두, 회계는 최국현과 최의덕 제씨였다. 또 공천부를 구성해 각부 위원을 선출했다. ① 정사(定事)위원-배유지, 이기풍, 최흥서 전라노회의 지역은 북으로는 서천(舒川), 비인(庇仁), 한산(韓山) 등의 충남 남부로부터 남으로는 제주도까지인데, 이 회의에서 전라노회 산하의 모든 교회의 교정을 위한 당회권리 담당자와 선교사들의 담당지역 등을 확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눌서 목사는 서문밖교회와 김제군 동편과 금구, 고부, 흥덕교회의 당회권리를 맡게 되었다. 전라노회 제1회 노회장이 된 서문밖교회 출신 김필수 목사는 군산과 궁말 두 교회의 당회권리를 맡게 되었다. 본 노회기간 중 광주북문안교회에서는 전라노회 창립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뜻으로 ‘성신 충만’이라는 내용의 축전을 보내오기도 하고, 특히 군산교회의 믿음의 형제 염자환 씨는 회의에서 의장이 사용할 고퇴(叩槌-의장의 사회봉)를 만들어 기증하기도 했다. 당시에 결정된 선교사들의 담당지역은 아래와 같다. 전주지방 목포지방 광주지방 [표14]조선예수교장로회 1912년 총계
『全羅老會會議錄』 참조. | |||||||||||||||||||||||||||||||||||||||||||||||||||||||||||||||||||||||||||||||||||
그동안 일제의 침략으로 울분과 긴장을 지속하고 있던 중에 서문밖교회는 1911년 10월 15일부터 전라남북도의 지도자들이 모여 전라노회를 창립하고 새로운 책임감과 각오로 교회 정치를 펴나가고자 했다. 당시 서문밖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이눌서 선교사는 서문밖교회의 젊은 일꾼들의 활동상을 보고 교회의 자율적인 성장을 위해 한국인 목사로 하여금 직접 교회를 담당하게 한다는 방침을 굳히고 1912년 7월 8일 교회의 통상제직회에서 앞으로 서문밖교회는 한국인 목사가 담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을 제직원들에게 설명하고, 즉시 한국인 목사를 청빙할 것을 제의하니 김진상 집사가 동의했고 일동이 가결했다. 그리하여 일주일 후 제직회에서 앞으로 청빙할 담임목사의 매월 사례에 관한 예산을 세우기로 하여 오는 주일(7월 14일)에 교회 앞에 이를 광고하고 그 다음 주일(7월 21일)에는 교인들에게 이를 위한 연보를 각기 적어 내도록 했다. |
서문밖교회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사 김병롱 | ||||||||||||||||||||||||||||||||||||||||||||||||||||||||||||||||||||||||||||||||||
그 결과 매월 15원 가량의 예산이 세워졌다. 이로써 재정 충당을 위한 일을 준비하고 교회는 전체 회의를 열고 한국인 목사를 청빙할 것과 청빙위원으로 이눌서, 이승두, 전병직을 선정해 목사 청빙하는 일을 맡겼다. 1912년 8월 19일, 제직회에서는 청빙할 목사가 거주할 주택을 예배당 구내에 건축하기로 하고 그 위원으로 전영칠, 최광진, 이승두를 선정했다. 8월 25일 궁말예배당에서 모인 제2회 전라노회에서 서문밖교회의 한국인 목사 청빙에 대해 승낙을 얻고 물색한 결과 평북 의주지방에서 목회하고 있는 김병롱(金炳禾農) 목사를 청빙하기로 하고 다음달 9월 2일 평양에서 개최된 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에 참석한 교회의 청빙위원들은 다른 노회에 속한 목사를 서문밖교회가 청빙하는 것에 대한 허락을 받았다. 9월 15일 주일예배 후 목사청빙위원과 다른 제직원이 모여 정황을 교회에 보고하니 제직회에서는 목사를 청빙하기로 가결했다. 이에 청빙서를 작성하기로 하고 그 대표로 이승두, 김진상(金鎭相)을 선정해 청빙에 관련된 일을 추진하게 했다. 한편 교회는 목사의 사택 건축 위원으로 전영칠, 최광진, 이승두 제씨를 선정하고 예배당 대지 안 동편 터에 건축을 착수했다. 11월 4일 제직회에서 주택건축의 완공을 보고하니 경비는 800냥 1푼이었다. 이어서 사택의 울타리와 담장 쌓는 일과 주택 내부 도벽 등의 일로 계속 소요되는 경비를 보고하니 동제직회에서 제직원들이 23원을 선뜻 연보해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교회 전체가 한국인 목사를 모신다는 자부심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병롱 목사는 평북노회로부터 서문밖교회가 보낸 청빙에 관해 수락한다는 회답을 받았다. 부임 절차는 서문밖교회와 협의해 1912년 11월 24일(주일) 위임 예식을 하기로 정하였다. 교회에서는 김 목사 부임을 앞두고 환영위원으로 최광진, 김진상을 선정하고 이리(裡里)역까지 출영하기로 했다. 그 당시의 철도교통망은 서울-이리-목포로 철로가 부설되어 있어 철도역이 없는 전주에서는 이리로 나가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밖교회는 처음으로 담임목사를 청빙하므로 기쁨이 충만했고 서문밖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지교회들과 신흥·기전학교의 교직원과 학생들, 선교기관의 직원들까지 온통 축하 분위기에 휩싸였다. 당시 서문밖교회의 첫 한국인 목회자는 단순히 한 교회만의 목회자가 아니고 모든 교회와 일반 사회의 지도자로서 환영과 기대를 한몸에 받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때의 상황은 직접 청빙을 받은 김병롱 목사의 글과 환영하는 서문밖교회의 이석원(李錫源) 집사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전주교회가 사랑으로 환영함-김병롱
목사 환영-전주교회(이석원) 위의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이 열성적으로 환영하는 가운데 감격스럽게 부임했고 순조롭게 목회를 펼치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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