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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 비평에 대한 역사적 반증, 역사적 배경 및 개요

영국신사77 2009. 1. 10. 15:38

다니엘서 비평에 대한 역사적 반증, 역사적 배경 및 개요 

                다니엘서 비평에 대한 역사적 반증

 

 다니엘서는 그 중요성 못지 않게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혹독한 비평을 받아 온 책이기도 하다. 다음의 진술은 인상적이다.


  "아무 다른 책도 이 위대한 책(다니엘서)만큼 그렇게 많은 공격을 받아오지 않았다. 거의 2000년 간이나 악한 사람들, 이교의 철학자들과 불신자들이 이 책의 권위를 분쇄하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이 책은 바로 그 위에서 비평자들의 망치가 산산조각이 난 모루(*망치의 밑받침)임이 증명되어 왔다. 다니엘서는 이 모든 공격을 물리치고 살아 남은 책이다."

 

 


                         가.저자와 연대에 관한 비평


  1. 고대의 히브리인들은 다니엘서가 정당한 성경임(正經性)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다니엘서의 기자(記者)와 연대 및 권위에 대하여, 최초로 비평을 시작한 것은 서기 3세기 시리아 사람으로 헬라 철학자가된 포르피리(Porphyry)였다.

 

 

  2. 그는 서기 233년 시리아의 두로에서 태어나 잠시 가이사라에서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敎父)였던 오리겐(Origen) 문하에서 공부하여, 한 때 명목적인 그리스도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로마에 가서 신플라톤주의 대표 철학자인 플로티누스(Plotinus)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아, 그의 철학사상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데 생애를 바쳤다.

 

  그는 이 철학사상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격렬한 증오심을 가지고 그 뿌리까지 뽑겠다는 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항하여] (Against the Christians)라는 제목으로 15권의 책을 썼다.

 

  다니엘서가 그리스도교의 기초 가운데 하나임을 발견한 그는, 그의 책 제 12권에서 아래와 같이 비평을 가했다.

 

 

  3.[공격 촛점] 즉 다니엘서는 다니엘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라, 기원전 2세기 시리아의 왕이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4세 시대에, 유다에 산 어떤 유대인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다니엘서는 장차 올 사건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일을 미래 시제(時制)를 써서 예언인 것처럼 썼을 뿐이며, 저자가 알 수 없는 장래 일을 추측으로 그럴싸하게 쓴 것이라고 했다.

 

 

  4. 포르피리의 공격의 촛점은 다니엘서의 예언 부분인데, 반그리스도교적인 불신자요, 이교 철학자인 그는 예언의 기능과 가능성을 전혀 불신하고, 성경이 영감(靈感)으로 쓰여졌음을 부인하는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취한 태도인 것이다.

 

 

  5. 포르피리의 이와 같은 반그리스도교적이고 불경건한 태도는 응징을 당하여, 서기 448년 로마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 (Theodosius Ⅱ)는 그의 모든 저서들을 불태우게 함으로써 그 폐해를 없애게 했고,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Ⅰ세는 529년 이교 금지령을 내려, 이러한 파멸적인 철학을 가르치지 못하게 했다.

 

 

 

  6. 그후 포르피리의 가르침은 수세기 동안 기척이 없더니, 18·19세기를 직후해서 일어난 유럽에서, 반 성서적이고 반 그리스도교적인 합리주의가 신학에 침투하여 고등비평이 일어나면서, 다시 대대적으로 나타났다.

 

 

  7. 즉, 합리주의적인 고등비평 신학자들은 포르피리의 말을 이어 받아, 다니엘서가 바벨론의 포로기간 동안에 다니엘에 의해 쓰여졌음을 부인하고, 기원전 2세기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에 대항하여 일어난 유대의 마카비 왕조 독립운동 기간 동안, 어떤 경건하고 애국적인 유대인이 광복투쟁을 북돋기 위해 쓴 것인데,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다니엘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참으로 수 세기 전 포르피리의 주장이 그대로 현대에 되살아난 것이다.

 

 

  8. 이처럼 다니엘서의 예언을 기원전 2세기의 작품으로 돌리고, 그 내용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175~164 BC) 때에 쓰여진 역사로 돌리는 비평적 해석을 과거주의(Preterism) 라고 부르며,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여기에 속해 있다.

 

 

  9. 이렇게 다니엘서의 저자와 연대가 비평자들의 주장대로라면, 다니엘서의 예언은 무의미해지고 다니엘은 선지자가 아니며, 다니엘서는 위서(僞書)가 되고 만다.

 

  따라서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 15절에서 말씀하신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의 문구는, "속임수를 쓴 자칭 다니엘이라는 거짓 선지자의 말한 바"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다니엘서를 직접 인용한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들 및 요한계시록도 모두 위서가 되고 말아,구약은 물론 신약성서 전체가 붕괴되고 만다.

 

  특히 마지막 때를 가리켜 예언한 모든 예언이 상실됨으로써, 성도들은 말세를 위한 노정(路程)을 상실하게 되고 만다...

 

 

  10. 다니엘서의 이러한 의미심장한 중요성 때문에, 다니엘의 생전에 다니엘의 선지자적인 역할을 방해하고 그를 사자굴에 던져 넣고 그 친구들을 풀무불에 던진 사단이, 이제도 그의 기별인 다니엘서를, 같은 방법으로 비평의 사자굴과 증오의 풀무불에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요, 신학자인 뉴턴(Isaac Newton)경은 아래와 같이 적절히 말했다.


  "다니엘의 예언들을 부인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붕괴시키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그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세 친구를 풀무불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는 비평과 의심의 사자굴과 풀무불에 던져진 다니엘서를 옹호하시기에도 능하셨음을 지나간 역사에서 확증하게 된다.

 

 

   아래에 다니엘서의 정경성(正經性)과 역사성(歷史性)입증하는 몇가지 반증을 든다.

 


                            1.역사가 요세푸스의 증언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서기 37년 경(로마 황제 Caligula 원년)에 태어난 유대인 역사가로, 사도 요한과 바울의 동 시대 사람이다. 그는 유대 제사장 명문가의 태생인데, 특히 그의 어머니는 기원전 2세기 유다의 독립을 쟁취한 마카비 왕조의 대제사장 요나단의 자손으로 전해진다.

 

 그는 다양한 경력과 뛰어난 지적인 배경을 가지고, 고대 문헌에 기초하여 아담의 때로부터 서기 70년 자신이 목격한 바 예루살렘이 멸망 당하기까지의 역사를 신빙성 있게 저술했다.

 

  그의 저서 [유대인들의 고사(古史)](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서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샤와 그 동맹국들을 치기 위하여 팔레스틴을 정벌하던중 두로를 포위하고 유대인들에게 군수(軍需)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시의 대제사장 얏두아(Jaddua)는 자신들은 페르샤와 동맹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이를 거절하여 알렉산더 대왕을 격노하게 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두로와 가자시를 함락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군하는 동안, 겁에 질린 대제사장 얏두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대제사장의 찬란한 복장을 하고 흰 예복을 입은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시온의 노래를 부르며 성 밖까지 나아가 대왕을 영접했다.

 

  대왕은 이 광경을 보자 그들은 자신이 출정 전 본국에 있을 때 꿈에 본 무리들임을 기억하고, 오히려 엎드려 유대인들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유대인과 예루살렘을 조금도 해하지 않고 대단한 호의를 베풀었다.

 

  때에 대제사장 얏두아는 구약성서를 들고 나가, 다니엘서를 대왕에게 펼쳐 보이며, 그가 승승장구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예언되었음을 지적하여, 더욱 깊은 환심을 샀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의 팔레스틴 정복은 기원전 332년경의 사건이다.

 

  만약 비평가들의 주장대로 다니엘서가 기원전 165년까지는 쓰여지지 않았다면 이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며, 인정받는 역사가 요세푸스는 대단한 거짓말장이가 된다. 요세푸스가 자기 때로부터 300년 이내인 마카비 독립시대의 사건에 무지(無知)했을 리도 없을 뿐더러, 알렉산더 대왕이 팔레스틴 일대의 친 페르샤적인 모든 도시들을 파멸시켰으면서도, 예루살렘만은 호의를 베푼 사실에 어떠한 이유가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이와 함께 다음의 방증을 연관시켜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

 

 


                            2. 마카비서(Maccabes)의 증언

 

                              (1).다니엘서가 인용됨

 

 그런데 바로 기원전 2세기 후반에 기록된 당대의 역사 기록으로, 외경(外經)에 속하는 마카비서에 이미 다니엘서가 인용돼 있다는 사실이다.

 

 즉 마카비1서(공동번역:마카베오 상) 1장 54절은 다니엘서 9장 27절, 11장 31절, 12장 11절의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한 같은 책 2장 49~79절에는, 애국애족의 경건한 제사장 마타디아스(Mattathias)가, 임종시 아들들에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의 본을 받으라고 교훈하는 감격적인 유언이 적혀있다.

 

 다니엘서가 그 훨씬 이전에 기록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기원전 2세기의 역사책에 인용될 수 있겠는가?


                           (2). 당시에는 선지자가 없었음

 

 또한 마카비1서 4장 44~46절에는, 기원전 165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하게 하려 할 때, 그들에게는 당장 아무 선지자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썼다.

 

 그 뒤 22년 후인 기원전 143년에도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없기 때문에, 마타디아스 제사장의 생존한 아들인 시몬을 그들의 지도자와 대제사장으로 추대한다고 했다(마카비1서 14장 41절). 같은 언급이 같은 책 9장 27절에도 기록돼 있다.

 

 만약 이러한 마카비 시대에 다니엘서와 같이 명백한 예언과 기별에 가득찬 예언의 선물을 지닌 선지자적인 인물이 있었더면, 그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당대에 그러한 기록을 쓴 사람도 알지 못했고, 그러한 선물도 갖지 못했음을 확증한 것이다.

 

 

 


                             3. 구약성서 정경(正經) 목록의 증언

 

   다니엘서는 엄연히 고대 히브리성경의 정경 목록(目錄)에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었다.

 

  히브리 구약성경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처음 부분은 모세 오경을 가리키는 율법서(토라 Torah),

 

  (2).두번째 부분은 선지서(네비임 Neviim)인데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서·열왕기등 네 책을

    초기 선지서로 불렀고, 후기 선지서로는 예레미야·에스겔·이사야 그리고 나머지

    12 소선지서를 한 책으로 간주하여 포함시켰다.

 

  (3).세번째 부분은 케투빔(Kethuvim)이라고 부르는 성문서(聖文書)로, 여기에는 룻기·시편·

      욥기·  잠언·전도서·아가·예레미야 애가·다니엘·에스더·에스라(느헤미야와 한 책)

      , 그리고 역대서 등 11개의 책이 포함되어 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구약성경은 기원전 5세기말 이전에 기록이 완료되었고, 에스라와 느헤미야 선지자에 의해 수집이 끝났음이 분명하다. 기원전 400년 이후에는 어떠한 책도 그 이상 구약의 정경 목록에 들어가지 못했다.

 

  기원전 2세기의 기록인 마카비1서가, 그렇게 탁월하여 루터까지도 성경에 포함시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정도였으나, 정경에 포함될만큼 연대가 오래지 못하고 권위가 뒷받침되지 못하여 외경(外經)으로 남게 되었다.

 

  기원전 180년경에 편집된 집회서(Ecclesiasticus)도 당시의 유대인들의 지배적인 사상을 훌륭히 표현하고 있는 훌륭한 문헌이면서도, 위와 같은 이유로 외경으로 밀려났다.

 

  잠언이나 전도서·에스더서 등은 과거에 정경성을 의심받은 적도 있지만, "정경성에 대한 다니엘서의 권리는, 고대 유대인 회당들에서라고 결코 의문시된 적이 없었다"고 보증받고 있다.

 

  다니엘서가 기원전 2세기에 쓰여졌다면, 어떻게 그 엄격히 통제된 구약 히브리 성경의 정경 목록에 일찍부터 포함될 수 있었겠는가?

 

  기원전 5세기 끝무렵의 말라기 선지자[느혜미야의 예루살렘 직전인 BC 460년경이나 또는 느혜미야의 두번째 총독 부임 직전인 BC 432년경에 말라기서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됨.]를 마지막으로, 그 후에는 세례요한의 때까지 아무 선지자도 없었고, 동시에 아무 책도 덧붙여질 수 없었다.

 

 "모든 민족들 가운데 유대인들이야말로 그들의 거룩한 책들에 관하여 가장 세심한 배려를 한 민족이다. 그들의 역사 초기에 서로 맞서는 두 분파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일어났으며, 바로 그들의 견해의 성질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대적하기 위해 각성했던 차제에, 진실하고 정당한 것임이 보편적으로 인정되지 않고서는 거룩한 정경에 포함된다는 것이 불가능했었다."

 

 다니엘서가 왜 선지서 구분에 들지 못하고 성문서(聖文書) 구분에 들어갔는가는, 다니엘서의 권위나 역사의 문제 때문이 아니다. 그 까닭은, 다니엘 자신이 소년 시절 고국 유다를 떠나 평생을 이국 바벨론에서 정치가로 지냈기 때문에, 비록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 해도, 동족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자(Nabhi)로 불리우기보다, 오히려 선견자(先見者 hozeh)나 현인(賢人 hakam)으로 여겨졌다.

 

 고로, 오직 선지자로 불리운 사람들만의 기록인 선지서 구분에 들지 못하고, 솔로몬이나 다윗등 현인이나 비선지자들의 영감된 기록인 성문서에 적절히 포함된 것이다.

 

 

                       4. 다니엘서에 쓰여진 아람어의 증언

 

   아람어(the Aramaic language)의 근원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아람어는 노아의 아들 셈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아람(Aram)의 자손들의 언어로, 주로 메소포타미아 북부지방과 시리아 지방에 살고 있던 아람인에 의해서만 사용되었었다. 그후 앗시리아가 아람인들을 정복하고 제국 여러 곳으로 추방하면서 널리 보급되어, 앗시리아의 관리들과 상인들의 공용어(公用語)가 되었다.

 

 

  2. 아람어가 성경에 최초로 쓰여진 기록은 기원전 17세기 라반에 의하여서인데, 그는 야곱과 언약을 맺은 후 세운 돌을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인 "여갈사하두다"(Yegar Sahadutha)로 불렀고, 야곱은 같은 의미의 히브리어 "갈르엣"(Galeed)이라고 칭하였다(창 31:47).

 

 

  3. 히브리어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아람어는, 기원전 701년 유다왕 히스기야의 관리들도 이해하고 있었는데, 앗시리아 사절들에게 아람어로 말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다(왕하 18:26).

 

 

  4. 신바벨론 시대, 즉 다니엘 당시에 아람인들에 밀접했던 야긴(Yakin) 가계에 속한 갈대아(Chaldean)인들이 지배 계급으로 등장하면서, 아람어는 바벨론 제국에 두루 펴졌다.

 

  다니엘의 경우처럼, 느브갓네살의 조신(朝臣)들이 왕에게 아람어로 말했음은 당연한 일이다(단 2:4).

 

 

  5. 그 후 페르샤가 근동지방을 다스리게되자, 아람어가 세계적 언어임을 알고서 이를 페르샤의 공용어(公用語)로 채택하여, 조서도 아람어로 공포했기 때문에, 에스라도 이를 그대로 인용했고, 관리들도 공문에서 아람어를 썼음을 엘리판틴 파피러스(Elephantine Papyri) 문서의 발견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6.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뒤에도, 아람어는 팔레스틴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되어, 예수께서도 아람어를 구어(口語)로 사용하신 것이다.

 

 

 신구약 성경 여러 곳에 아람어가 인용돼 있는데, 특히 다니엘서의 1/2에 해당하는 부분인 2장 4절~7장 28절까지와 에스라서의 1/3에 상당하는 4장 8절~6장 18절 7장 12절~-26절이 아람어로 쓰여 있다.

 

 다니엘은 소년 시절 바벨론으로 잡혀가, 거기서 정통적인 아람어를 배웠고 공식적인 용어로 썼다. 에스라 역시 바벨론에서 자라나 페르샤 시대까지 아람어를 공용어(公用語)로 쓰며 살았다. 에스라서에 쓰여진 아람어 부분은 예루살렘 중건(重建)에 관한 페르샤 제국의 조서인데, 그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부분은 고레스 원년에 내린 조서로 기원전 537년경의 아람어이고, 마지막 부분은 아닥사스다왕 20년 즉 기원전 444년경의 아람어이다.

 

 다니엘서의 아람어는 뒷 부분의 경우, 벨사살 원년, 즉 기원전 553년경이 된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아람어와 에스라서의 아람어 사이에, 빠르게는 16년(553~537), 멀게는 96년(553~457)의 상거 밖에 없는 셈이 된다.

 

 그런데 다니엘서에 쓰여진 히브리어는, 에스겔서의 히브리어와 같은 기원전 6세기의 문체(文體)이고, 다니엘서에 쓰여진 아람어는 에스라서의 아람어와 꼭 같은 기원전 6세기의 공용어(公用語) 문체인 것이다.

 

  에스라서가 기원전 6세기의 문서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다니엘서가 바로 기원전 6세기의 다니엘에 의해 쓰여진 문체임에 틀림 없는 것이다.

 

 


                        5. 사해(死海) 사본의 증언

 

  아시는 바와같이, 2차대전 직후인 1947년 봄 사해의 서북방 해안 가까이의 유대광야에서, 잃어버린 염소를 찾던 아랍인 목동(Muhammad ed Dib)에 의해, 쿰란(Qumran)으로 불리우는 황량한 산비탈 일대의 동굴들에서, 최선의 상태로 보존된 최고(最古)의 구약성경 사본(寫本)을 대량으로 발견해 내는 20세기의 기적을 보게 되었다.

 

  감정 결과, 적어도 11개의 동굴들에서 나온 이 사본들은, 대부분 기원전 2세기에 필사(筆寫)한 것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바로 쿰란 제1 동굴에서 발견된 수백개의 사본 단편들 가운데, 다니엘서의 22개 절이 쓰여진 세 개의 단편(1:10~17, 2:2~6, 3:22~30)이 나왔다.

 

  특히 2장 2~6절 부분, 즉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바뀌는 부분인 4절부터는, 역시 아람어로 쓰여 있었다. 그후 제4 동굴에서 나온 90여개의 구약성경 사본 가운데 다니엘서의 사본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제11 동굴에서도 또 다시 다니엘서 사본 2개가 다시 발견되어, 다니엘서가 이미 기원전 2세기 훨씬 이전 틀림없이 기원전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밖에 없는, 정통적인 구약 정경임이 고고학으로도 확증된 것이다.

 

 

                         6. 동 시대의 선지자 에스겔의 증언

 

 에스겔 선지자는 제사장 출신으로, 유다의 국운(國運)이 기울던 기원전 597년 여호야긴왕을 비롯한 일만명의 유대인과 함께, 제 2차로 바벨론에 포로돼 갔다(왕하 24:10~16, 대하 36:9,10, 겔1:1~3). 포로 당시의 그의 나이가 25세쯤이었을 것인데...

 

  그는 바벨론 땅에서 22년 간(593~571BC) 선지자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즉, 예레미야가 유다와 예루살렘 고토(故土)에 남아 있는 동족을 위하여, 다니엘이 바벨론의 궁전에서 봉사하고 있는 동안, 에스겔은 바벨론에 잡혀 온 유대인 동족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에스겔이, 같은 시대에 같은 나라 바벨론에서, 함께 평생을 살아 온 동료 포로 정치가-선지자인 다니엘에 대하여, 3회나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에스겔 14:14, 20, 28:3절 등, 이상의 세 귀절에서 에스겔은 구약의 의인 노아와 욥과 함께 다니엘을 꼽고 있다. 다니엘은 이미 생전에 살아 있는 의인으로 간주된 것이다.

 

  에스겔이 그의 책을 그의 선지자 직분을 끝낼 무렵인 기원전 571년경에 썼다고 한다면, 그 때의 다니엘의 나이는 대략 52세쯤이 되었을 것이다. 대제국의 총리를 역임하며, 그 흠 없는 생애를 통해서 동족을 위해 그토록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다니엘을, 에스겔이 그의 책에서 언급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확실한 방증이 되는 것이다.

 


                          7. 사도 요한과 바울의 증언

 

  요한은 계시록에서, 10회 이상 다니엘서의 예언과 표상을 인용하고 있다. 만약 다니엘서를 구약 정경으로 확신하지 않는다면, 계시록은 물론 그 밖의 요한의 기록도 의심할만 할 뿐더러, 요한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해서도 결함(缺陷)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도, 적어도 그의 세 편지서에서 다니엘서를 인용하고 있어, 다니엘서의 정경성 여부는, 사도 바울 서신의 정경성과도 불가분한 것이다.

 

 

☆ 요한계시록에 인용된 다니엘서

         (요한계시록)

    1:7, 17:14

    1:13-16, 2:18

    1:17

    10:5, 6

    13:5-7

    20:1

    20:5, 6, 15

 

 

☆ 바울 서신에 인용된 다니엘서

   히 11:13, 14 .....단 3:25, 6:22

    살후  2:3, 4.......단 7:20, 25

    고전 6:2............단 7:22

(다니엘서)

7:13, 14, 27, 2:45, 8:25

10:5, 6

10:8-11

12:6, 7

7:8, 11, 21, 25

2:35

12:1

 

 

                       8. 예수 그리스도의 결론적인 증언

 

 이상의 여러 증언 외에, 우리는 다니엘서의 선지자적 직분과 다니엘서의 정경성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결론적인 확증을 가지고 있다.

 

 감람산 위에서의 마지막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세상 끝을 예언하시면서, 다니엘서의 예언을 인용하시고 강조하여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마 24:15, 막 13:14참조)의 말씀을 전제로, 다니엘서 9:27, 11:31, 12:11의 예언을 직접 인용하셨다.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서의 기자가 다니엘임을 확인하셨고, 다니엘을 선지자로, 다니엘서를 정경(正經)으로 확증하신 것이다.

 

 그 밖에도 아래와 같이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서를 인용, 또는 배경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정경성을 의심하거나 비평하는 사람은, 신분과 이유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불신은 물론, 복음서에 대한 권위도 부인하는 바가 되어, 결국 불신자요 반 성서적인 입장임을 자인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아래에, 복음서에 인용된 다니엘서의 사례를 살펴보면,

 

       ☆ 복음서에 인용된 다니엘서

 마 24:15, 막 13:14 .....단 9:27, 11:31, 12:11

 마 24:30, 26:64.....단 7;13, 27

 마 16:27, 28, 25:31....단 7:13, 14, 27

 마 24:21.....단 12:1

 요 5:28, 29,....단 12:2

 마 13:43.....단 12:3

 

 

 

                       나. 헬라어 사용에 대한 비평과 반증


  다니엘서의 아람어 부분(2:4-7:28)인 3장 5절에는, 세 마디의 헬라어가 사용되었다. 이 사실을 들어, 비평자들은 다니엘서가 기원전 6세기 기록이 아니라, 헬라 문명이 보급된 이후인 기원전 2세기쯤에 쓰인 증거라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이 세 마디 헬라어는 모두 악기 이름으로, 바벨론의 여러 관현악기(管絃樂器) 가운데 포함돼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어떻게 바벨론 사람들이 헬라어 악기를 쓸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비평은 고고학의 증거로 반증되었을 뿐더러, 오히려 다니엘서의 진실성을 드높이는 결과가 됐다. 즉, 바벨론의 문서 보관소에서 발굴된 느브갓네살 당시의 설형문자 점토문서에서는, 소아시아의 서안 지방의 그리스 식민지로 헬라 문화권에 들어간 이오니아인(Ionian) 들과 리디아 사람들이, 바벨론의 건축사업을 위해 고용돼온 여러 외국인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 건축 기사나 공예인들이 필경 저들의 악기를 휴대하였음에 틀림 없다. 당시 동쪽과 서쪽 간에 폭 넓은 문화교류와 인적(人的) 교류가 있어, 병정들과 장인(匠人)들 및 건축기사들이 왕래했음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더구나 악기 이름은, 대개 어느 나라에서나 본래의 이름을 그대로 써서, 이탈리아의 악기 이름인 피아노(Piano)나 비올라(Viola)를 어디서나 그대로 부르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세개의 헬라 악기도 본이름 그대로 불리운 것이다.

 

  만약 비평가들의 말대로 다니엘서가 기원전 2세기 기록이라면, 저자가 왜 헬라어를 세 마디만 썼겠는가 ? 그 당시에 쓰여진 마카비 1서와 2서에서처럼, 헬라의 문물(文物)과 제도(制度)가 짙게 풍겼어야 했을 것이다.

 

 


                 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에 관한 시비와 반증


  다니엘서 5장에 소개되어 있는 바벨론 함락 당시 죽임을 당한 마지막 왕인 벨사살의 존재와 신원은, 20세기 초엽까지도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었다. 이러한 사실은 비평가들에게,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불신하는 유력한 논증이 되었었다. 당시까지 밝혀진 연대기에 의하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더스(Nabonidus)였지, 벨사살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고학의 공헌으로, 마침내 결정적인 빛이 이르렀다. 즉 1924년 시드니 스미스(Sidney Smith)가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돼 있던 자료를 확인하여, [나보니더스에 관한 이야기]( Verse Account of Nabonidus)를 출판했는데, 그 내용에서 나보니더스가 자기의 맏아들 벨사살에게 "왕권을 위임하였다"는 분명한 진술이 나타남으로써 말끔이 해결되었다. 이러한 다니엘서의 승리는 너무나 극적인 것이어서, 비평자들에게 거의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에 이르렀다.

 

 


                   라. 바벨론의 건설자에 대한 시비와 반증


  20세기 초인 1889년부터 1917년에 걸치는 장장 18년동안, 독일의 고고학자 로버트 콜더베이(Robert Koldewey)가 고대 바벨론성을 발굴하기까지, 바벨론성의 크기와 규모 및 건설자에 대하여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고, 당시에 그리스의 역사가를 통해 알려졌던 사실들은 다니엘서의 기록과 어긋나는 것이 많았다.

 

  특히 그리스의 역사가에 의하면, 느브갓네살은 고대 역사에서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고, 바벨론성의 대건설자는 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삼무라마트(Sammuramat)로 불리우는 앗시리아의 모후(母后)로, 그의 어린 아들 아다드니라리 3세(Adad-nirari Ⅲ)를 위해 섭정했던 세미라미스(Semiramis)가 바벨론성을 건설했고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백년 동안 계속된 고고학의 발굴을 통하여, 느브갓네살은 명실공히 대왕으로 다니엘서의 진술처럼 "이 큰 바벨론"(단 4:30)을 건설했음이 여러 비문과 건축물들, 그리고 심지어는 느브갓네살의 이름이 설형문자로 찍혀진 벽돌까지 발굴해냄으로써,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해졌다.

 

 재위 43년 동안 느브갓네살은 적어도 세 개의 화려한 궁전을 건축했는데, 동쪽 새 시가지에 위치한 하기 별궁 (夏期 別宮), 내성 북부 성벽 밖에 있던 중앙궁, 그리고 내성 서북쪽 모퉁이의 남궁(南宮)등이었다.

 

 주신(主神)인 마르둑(Marduk)의 신전인 에사길라(Esagila)는, 고대 동양의 모든 신전 가운데 가장 장대한 복합 신전이었으며, 신전고탑(神殿高塔)인 에테메난키(Etemenanki)는 칠 층으로, 그 높이가 300피트를 초과했다.

 

  그밖에 고대 세계의 칠대경이(七大驚異) 가운데 하나인 가공원(架公園 Hanging Garden)은, 느브갓네살이 왕후인 메대왕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공주 아미티스(Amytis)가 고국 메디아의 산과 숲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 평평한 바벨론 평지에 인조(人造) 동산을 만들어 펌프로 물을 끌어 올려 관개(灌漑)한 경이의 공원이다.

 

  이 밖에도 아직까지 폐허 위에 40피트나 솟아있는 바벨론성의 주문(主門)인 화려하고 장대한 이슈타 게이트(Ishtar Gate)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건물들이, 바로 다니엘서의 진술처럼 느브갓네살이 건설한 것이었으며, 전설적인 세미라미스 모후(母后)는 그리스의 역사가의 고전 기록과는 달리, 바벨론 건축과 하등의 상관이 없음이 밝혀진 것이다.

 

  지금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느브갓네살 당시의 비문 하나에서만도 이 사실은 아주 분명하여지는데, 아래에 적힌 비문의 내용과, 다니엘서 4장 29, 30절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느브갓네살의 건축에 관한 다니엘서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고증(考證)하여 보자.


  "나는 거룩한 도시요 위대한 도시들의 영광인 바벨론을 전보다 탁월하게 만들었고 그 재건을 장려하였다. 나는 신들과 여신들의 신전을 낮과 같이 환하게 불을 켜게 하였다. 모든 왕 가운데 내가 마르둑을 위하여 대대적으로 건축한 것 같이 신축한 왕은 하나도 없었으니 곧 전에 있던 왕은 건축한 일이 없었다.

 

  나는 또 에사길라 신전의 시설을 더욱 늘렸고 바벨론을 일찌기 한 적이 없으리만큼 쇄신하였다. 나의 모든 가치있는 사업들, 곧 나의 선왕들보다 더 많이 한 위대한 신들의 성전을 미화하는 사업은, 문헌에 기록하고 오는 세대를 위해 그 것을 써 두었다. 나의 명이 길고 내가 자손에 대해 즐거워 하기를 바라며 나의 후손의 검은 머리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리며 나의 이름이 장래에 영구히 선양되기를 바란다."


  "열 두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궁(宮) 지붕에서 거닐새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도성을 삼고 이 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단 4:29, 30)".


  이렇듯 피할 수 없도록 완전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앞장서서 비평해 온 하버드 대학교의 파이퍼(R. H. Pfeiffer) 교수는 이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대신 아래와 같은 말로 비켜나가고 있다.


[우리는 추축컨데 우리 저자가 발굴이 증거한대로 느브갓네살이 신바빌로니아를 건설한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참으로 이들 고등비평자들이야말로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 같아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마.다니엘 1:1절과 예레미야 25:1의 연대 차이에 대한 비평과 반증


 단 1:1  "유다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3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성을 에워쌌더니 "


 렘 25:1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 곧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원년에 "


  이상의 두 성경 귀절에서, 예레미야서에는 여호야김 4년이, 다니엘서에는 여호야김 3년이 느브갓네살의 원년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명백히 시대 착오(錯誤)라고 비평가들이 주장해 왔다. 이런 경우, 역사성에 있어서 인정받는 예레미야보다, 다니엘서가 비평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당시의 바벨론에서는, 유다에서와 같이 왕들의 재위년(在位年)을 계산함에 있어서, 소위 [즉위년(卽位年) 계산법] (the accession-year method)을 썼음이 밝혀짐으로써, 적절한 해답을 찾았다.

 

 즉위년 계산법이란 만약 "갑"이란 왕이 그의 재위 35년째 죽었다면, 그가 죽기 전까지는 그의 이름으로 연대를 쓰지만, 뒤를 잇는 "을"이란 왕은 그 35년째 해의 마지막 부분을 자신의 이름으로 문서의 연대를 표기하기는 하나, 다음 해 정월이 되기까지의 여분의 기간을 단순히 "통치가 시작된 해"(year of beginning of reign) 곧 "을"왕의 즉위년(卽位年)이라 부른다.

 

 그리고 다음 해 정월 초하루(Nisan 1)부터 "을"왕의 원년(元年)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같은 해가 중복으로 계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계산 방법이었으나, 이집트에서는 자주 선왕(先王)이 죽은 해가 곧 다음 왕의 원년이 되어 중복이 되는 "비 즉위년 계산법"(non -accession-year method)을 썼다.

 

 느브갓네살의 경우, 기원전 3세기의 바빌로니아의 제사장이요 역사가인 베로수스(Berosus)의 고대 역사를 인용한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느브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포랏살은 팔레스틴 지방의 국가들이 친 이집트 정책으로 기울어 반역을 도모한다는 소식에 접하자, 즉시 그의 젊은 아들 느브갓네살에게 병력을 주어 이를 평정하도록 했다. 그가 유다를 포함한 팔레스틴의 여러 반역한 국가들을 정복하고, 남하하여 이집트 국경에서 전역(戰役)에 종사하고 있던 때, 본국으로부터 부왕이 서거했다는 부음(訃音)이 왔다.

 

 느브갓네살은 황망히 유다와 페니키아와 시리아의 포로들을 동료 장군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소수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아라비아 북부의 사막길을 가로질러 본국에 돌아가서 안전하게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발굴된 당시 바빌로니아의 점토문서에 의하면 나보포랏살 제5년에 월식(月飾)이 있었는데, 천문학적으로 확인해 보면 그때가 기원전 621년 4월 22일이 된다. 나보포랏살은 21년 간 재위했으므로, 그의 죽음은 기원전 605년경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실제로 바벨론에서 발굴된 점토 공문서의 날짜를 종합해 보면, 나보포랏살의 죽음은 기원전 605년 7월이나 8월 상순에 있었다. 그리하여 느브갓네살은, 다음 해 기원전 604년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의 주신 벨(Bel 마르둑)의 손들을 잡은 후 원년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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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의 역사적 배경

 

 역사적 배경


   다니엘서의 기별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니엘 당시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 다니엘서에 등장하고 있는 나라들의 역사적 배경을 소상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본 총론에서는, 우선 기원전 722년에 북방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기원전 701년에는 히스기야왕과 이사야 선지자 당시의 남방 유다를 거의 넘어 뜨릴 뻔 했으며, 바로 다니엘 당시의 국제 정세를 초래케 한 앗시리아와, 다니엘서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신바빌로니아(바벨론)의 역사적 배경을 왕조 중심으로 약술하고, 이를 다니엘서의 상황과 연결시키고자 한다.

 

  그 밖에 메디아(메대), 페르샤(바사), 그리스(헬라), 로마등은 그 상황이 나타날 때마다 약술하고자 한다. 

 

 

                                가.앗시리아(Assyria)

 성경에는 앗수르(Asshur)로 불리운 앗시리아는, 노아의 아들 셈의 한 아들인 앗수르(Asshur)를 조상으로 하고 있다(창 10:22). 창세기 10장 11,12절에는 이들 앗시리아의 도시들이, 함의 손자인 니므롯의 영향 아래 존재했음을 밝히고 있다(미 5:6).

 

  지리학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하면서, 기원전 19세기까지 남부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지배를 받았으나, 독립과 세계 제패(制覇)를 위해 끈질기게 투쟁하여, 사르곤 1세(SargonⅠ c.1780 BC)와 삼시-아다드 1세(Shamshi-AdadⅠ c.1749-1717BC) 때에는 소아시아와 시리아까지 세력을 뻗었다.


  그 후 호리족(the Hurrians)의 나라인 미타니(Mitanni)와 헷족속의 나라인 히타이트(the Hittites) 제국과 생존을 위해 각축하면서, 마침내 아다드-니라리 1세(Adad-nirari Ⅰ. c.1306-1274 BC), 투쿨티-니누르타 1세 (Tukulti-NinurtaⅠ c.1244-1207 BC)등의 위세로, 대제국의 기틀이 놓였다.

 

  아래에 대표적인 왕들을 열거하고, 성경의 역사와 연관시키고자 한다.



  ▷티글랏-필레셀 1세(Tiglath-PileserⅠ 1113-1074 BC): 페르샤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룩한 위대한 전사(戰士)로, 앗시리아를 중동(中東)의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티그랏 필레셀이 죽은 뒤, 몇 명의 허약한 왕들이 뒤를 이었으나, 약 150년 이후부터는 고대 세계의 최강국이 되어, 거의 3세기 동안(933-612 BC) 세계 역사를 주름 잡았다.

 

 전성기의 앗시리아 영토는, 메소포타미아 전역과 소아시아의 대부분, 시리아와 팔레스틴 일대, 때로는 이집트까지 미치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히 히브리인들과도 접촉되어 성경의 여러 왕들, 즉 오므리, 아합, 예후, 므나헴, 호세야등 북방 이스라엘의 왕들과 접촉했고, 아사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등 남방 유다의 왕들과도 맞서게 된 것이다.



  ▷아수르-단 2세(Ashur-dan Ⅱ 993-910 BC): 전성시대를 개막한 위대한 전사로, 거의 매년 정복에 나서 피를 강 같이 흘렸고 시체를 산 같이 쌓았다고 전한다.



  ▷살만에셀 3세(Shalmaneser Ⅲ 859-824 BC): 북방 이스라엘의 아합과 예후의 동시대 왕으로, 서부 원정시인 기원전 853년에는 시리아의 연합군들과도 접전했는데, 이 때 아합은 병거 2천승과 보병 1만으로 연합군을 도와, 싸워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12년 후에는 예후가 싸움을 포기하고 살만에셀에게 조공을 바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디어 있는 모습이, 살만에셀의 흑색 방첨비(方尖碑)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아다드-니라리 3세(Adad-nirari Ⅲ 810-782 BC): 서부 원정에 나서 히타이트, 페니키아, 다메섹등을 복종시켰고, 북방 이스라엘의 요아스(798-782 BC)에게서 조공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 때에 요나 선지자가 요나서의 기별을 가지고 수도 니느웨에 가서 경고한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그 후 국세가 전만 못하여 어느 정도 기울고 있었는데, 이 틈에 북방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793-753 BC)는 강력한 국방 정책과 경제 부흥을 꾀하여 국력을 회복하기도 했다.



  ▷티글랏필레셀 3세(Tiglath-Pileser Ⅲ 745-727 BC): 구약성경에 불(Pul)로 불리우는 앗시리아 최대의 왕 가운데 하나로, 전성기를 이룩했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의 므나헴(752-742 BC)에게서 조공을 받았으며(왕하 15:19), 베가(742-740 BC)때에는 북방 이스라엘을 다시 침략하여 북방 영토를 점유한 후, 앗시리아의 므깃도 도(道)에 예속시켜 버리고 백성들을 이산(離散)시켰다(대상 5:26).

 

  유다왕 아하스의 긴급 요청으로, 기원전 732년 다메섹을 치고 왕 르신을 죽이기도 했으며(왕하 16:7-9), 북방 이스라엘의 베가를 물리치고 호세아(732-722 BC)를 왕으로 올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이사야 7장 16절과 8장 4절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다.



  ▷살만에셀 5세 (Shalmaneser Ⅴ·727-722 BC): 이 때  이집트는 북방 이스라엘의 호세아를 꼬득여서 앗시리아에 반역하도록 조장하자, 사마리아를 3년 간 포위한 끝에, 기원전 722년 그가 죽기 직전 이를 함락하여 이스라엘을 멸망 시켰다(왕하 17:1-6).



  ▷사르곤 2세(Sargon Ⅱ 722-705 BC): 그는 아마 찬탈자로 왕위에 올랐는데, 북방 이스라엘 민족을 멀리 국외로 추방 식민(植民)했으며, 코르사밧에 새로운 궁전을 세우는 한편, 반역한 국가들은 가차없이 징벌했다(사20:1).



  ▷산헤립(Sennacherib 705-681 BC): 사르곤 2세의 아들로, 각처의 반역을 무자비하게 대처하여, 기원전 689년에는 바벨론성을 짓밟았다. 기원전 701년에는 서부 원정에 나서서, 시리아와 팔레스틴의 왕들을 징벌하고, 반역을 주도한 유다왕 히스기야를 징치하기 위해, 우선 요새인 라기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다의 도시들을 유린했다. 후에 재침한 산헤립은 유다를 멸망 시키려 예루살렘까지 접근했으나, 이사야의 권면으로 힘을 얻은 히스기야의 신앙과 하나님의 개입으로, 18만 5천의 군사를 잃고 퇴각하고 말았다(왕하 19장, 대하 32장, 사 37장). 후에 본국에서 아들들에게 살해되었다.



  ▷에살핫돈(Esarhaddon 681-669 BC): 그는 아버지를 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은 산헤립의 아들로, 왕위에 올라(사37:38) 기원전 675년 이집트까지 정복하여 최대의 영토를 확장했으나, 주변 국가들의 끊임없는 반역으로 보전이 용이하지 않게 되었다.



  ▷아수르바니팔(Ashurbanipal 669-627 BC): 앗시리아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최후의 위대한 왕으로, 이집트를 재차 정복하여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테베를 노략하는등 외정(外征)에 대성했다.

 

  특히 고대 세계 최대의 왕립도서관을 세워, 고대의 각종 문헌을 수집하여 소장한 것으로 더욱 유명한데, 1853년 12월 22일밤 영국 사람 랏삼(Hormuzd Rassam)등에 의해 니느웨가 확인되고 이 도서관이 발굴되었다. 이곳에 소장된 고대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 문서 가운데, 성경 창세기의 창조와 홍수 이야기와 흡사한 점토판들이 발견되었음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1. 아수르바니팔 대왕 이후 그의 두 아들이 몇 년동안 다스렸으나, 이미 대대적인 반역을 시작한 주변의 국가들을 제압할만한 역량을 잃은 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특히 기원전 626년 바벨론은, 느브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포랏살의 영도 아래 독립을 선언하고 도전했으며, 메대도 시악사레스(Cyaxares)의 영도 아래 기원전 614년 앗수르(Ashur)성을 함락시키고, 612년에는 수도 니느웨가 바벨론과 메대와 스키디아(Scythians) 연합군에 의해 3개월 간 포위된 끝에, 스바냐와(습 2:13-15) 나훔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나 3:1-3) 처절하게 함락되었으며,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버티려던 신-사르-이슈쿤(Sin-shar-ishkun . 626?-612)왕도 함께 죽었다.


   2. 니느웨가 함락된 뒤 앗시리아의 유민(遺民)들은 앗시리아의 최후의 통치자인 아수르-우발릿 2세(Ashur-uballit Ⅱ 612-609? BC)의 지도 아래, 유프라테스를 건너 하란(Harran)을 수도로 정하고, 이집트의 지원을 받으며 재기(再起)를 꿈꾸었다. 그러나 610년 나보포랏살은, 동맹국 스키디아의 지원을 받으며 또다시 하란을 점령했다.


   3. 때마침 이집트에서 삼틱 1세(PsamtikⅠ663-609 BC)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느고 2세(Necho Ⅱ, 609-594 BC)가 왕위에 오른 즉시, 앗시리아의 진군(殄軍)을 도와 하란을 탈환하기 위해 지원군을 이끌고 서둘러 북상(北上)했다(왕하 23:29, 대하 35:21).

 

  때에 재위 31년을 맞이한 유다의 요시아 왕은, 국제정세가 신흥 바빌로니아에 유리하게 돌아감을 느끼고, 친바벨론 정책을 취하여 느고 2세의 이집트 군사를 므깃도 평지에서 맞아 북상을 저지하다가, 전사하는 비운을 맞았다(왕하 23:29 이하, 대하 35:20-24).


   4. 앗시리아의 왕 아수르-우발릿 2세를 부추겨 하란을 탈환하려던 느고 2세의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퇴각하면서 시리아를 비롯한 팔레스틴 일대를 공략하였으며, 특히 하란 서쪽의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강변의 요충 도시인 칼케미슈에 앗시리아의 진군과 함께 기지를 구축하였다.


   5. 그러나 기원전 605년 나이 많고 병약해진 나보포랏살은, 아들 느브갓네살을 보내어 칼케미슈에서 이집트와 역사적인 대격전을 벌였는데, 이 전쟁에서 이집트는 대패하여 팔레스틴에서의 기반을 잃고 본국으로 철수하여, 그 후 다시는 이전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세를 영원히 회복하지 못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렘 46:2). 그리고 앗시리아의 마지막 명맥도 영원히 끊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북상하던 느고 2세의 손에 요시아가 죽음으로써 야기된 이후의 사태가, 바로 유다의 최후의 역사였으며, 그것이 또한 다니엘서의 역사적 배경으로 전개된 것이다.

 

 

나. 신바빌로니아(Neo-Babylonia)

1. 세계 역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바빌로니아를 구분하고 있다. 즉, 기원전 1830년부터 1531년까지 3세기 동안 존속한 바벨론 제 1왕조인 구 바빌로니아(the Old Babylonia)와, 그 뒤 천년 후에 같은 자리에서 1세기를 못 넘긴(605-539 BC)느브갓네살의 신(新)바빌로니아(The Neo-Babylonia)로 구분된다. 성경에는 이런 구분이 없이 바벨론(Babylon)으로 불리워져 있다.


  노아의 아들인 함의 손자인 니므롯이, 홍수 후에 중부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강변에 세운 도시인 바벨론(창 10:10, 11:9에는 바벨)은, 그의 권좌가 되었다고 여겨진다(창10:10).


  그후 아라비아 사막 쪽에서 밀려온 아모리(Amorites) 족속이,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고 남하하면서, 유프라테스 강변의 도시 바벨론을 수도로 정하고, 거기서 제1왕조를 시작하여 약 3세기(1830-1531 BC)에 걸친 강력한 대제국을 이룩했다.

 

  제1왕조의 11번째 왕인 하무라비(Hammurabi)는, 하무라비 법전으로도 유명하거니와 제국의 전성기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그전까지는 미미했던 바벨론시를 고대 세계 최고의 도시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음이, 고고학 발굴에서도 확인되었다. 또한 바벨론의 신 마르둑(Marduk)을 여러 신 위에 뛰어나게 했으며, 그를 위한 신전 에테메난키(Etemenanki)를 고대 세계의 경이가 될 만큼 웅장하게 건립했다.


   2. 제1왕조가 망한 뒤에도 바벨론은 계속 고대 세계의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다가, 앗시리아 제국 당시에는 봉신(封臣)왕국이 되었다. 그러나 계속적인 반역으로,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기원전 689년 바벨론을 한 때 완전히 파멸시켜 끝장을 내려고까지 했으나, 그 중요성 때문에 곧 다시 재건되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626년에 이르러 바벨론의 봉신왕인 나보포랏살은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고 종주국(宗主國) 앗시리아와 전쟁을 시작했으며, 종내에는 메디아와 동맹을 맺고 스키디아의 지원을 얻어, 기원전 612년 니느웨를 함락함으로써 앗시리아를 넘어뜨리는데 성공했다.


   3. 기원전 605년 칼케미슈에서, 이집트 대군과 앗시리아 잔군의 연합 세력을 격파함으로써 명실공히 근동(近東)의 패자(覇者)가 되었으며, 같은 해 서거한 부왕 나보포랏살을 이어 느브갓네살이 등극함으로써, 대제국 신바빌로니아(바벨론)의 찬란한 출범이 있게 된다.

 

  이 신바빌로니아가 곧 다니엘서의 주요 배경인 바벨론인 것이다.


   4. 성경에 이 바벨론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유다왕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서 회복된 후 위문사절을 보냈던 므르닥발라단(Merodach-baladan)의 경우였다(사 39:1-8, 대하 32:31, 왕하 20:12-19).

 

  당시 바벨론에서는 갈대아(Chaldean)족의 추장인 므르닥발라단이, 바벨론의 왕으로 나서서 앗시리아에 대항하다가 곤경을 당하던 때였기 때문에, 팔레스틴의 강력한 반 앗시리아 국가인 유다와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고자 사절을 파견한 것이었다.


   5. 그 후 므르닥발라단은,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와 그 아들 산헤립에게 대패하여, 독립 항쟁은 좌절되고 말았다.


   6. 기원전 626년 므르닥발라단의 자손으로, 같은 갈대아족인 나보포랏살이 또 다시 바벨론의 왕이 되어 독립을 선언하였고, 마침내 성공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대제국 신바빌로니아의 기초를 놓았다.


   7. 기원전 605년 칼케미슈에서의 결전에, 아들 느브갓네살을 출전시켜 승리를 거둔지 얼마 후인 그해  8월, 나보포랏살은 재위 21년(626-605 BC)만에 서거함으로써, 같은 해 9월 이집트 접경의 전역(戰役)에서 급히 돌아 온 아들 느브갓네살에 의해 왕위가 계승된다.

 

 

    느브갓네살 이후의 바벨론 왕들과 역사 아래에 도표와 함께 요약한다.



  느브갓네살(Nebuchadnezzar Ⅱ· 605~562 BC, 43년간)

 

  신바빌로니아를 대제국으로 만든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칼케미슈 전투에서 느고 2세의 이집트를 이기고, 시리아와 유다를 포함한 팔레스틴을 정복하고 이집트 접경까지 이른 기원전 605년 8월에, 서거한 부왕을 이어 왕위를 계승한 후 43년 간을 재위했다.

 

  기원전 605년의 팔레스틴 제1차 정복시에, 다니엘을 비롯한 세 친구들을 볼모로 잡아갔고, 기원전 597년에는 반역한 여호야긴과 에스겔 선지자 등 일만명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기원전 586년에는 눈먼 시드기야와 수많은 포로들을 잡아가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파괴했다(왕하 25:8-11).


  다니엘서 1장부터 4장까지는, 실제로 느브갓네살 치세 하의 다니엘의 선지자적 경험이 그 내용이 되고 있으며, 예레미야, 에스겔등 동시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수십번 언급되어 있다.

 

  그의 이름의 뜻은 "나부(Nabu 신)는 경계(境界)를 지키소서"(May Nabu protect the boundary)이다.



  ▷ 아멜 마르둑(Amel-Marduk 562-560 BC, 2년간):

 

  느브갓네살의 약하고 무능한 아들로, 성경에는 에윌 므로닥(Evil-Merodach)으로 나온다(왕하 25:27-30). 부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후, 잡혀온 유다 왕 여호야긴을 포로생활 37년 만에 석방시켰고 후대했음을 본다(렘 52:31-34). 그러나 그의 매형 가운데 하나인 네르갈 샤르우스르에 의해, 재위 2년 만에 살해당하였다.



  ▷네르갈 샤르우스르(Nergal-sharusur 560~556 BC, 4년간):

 

    느브갓네살의 사위 가운데, 하나로 전왕 아멜마르둑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라바쉬 마르둑(Labashi-Marduk 556 BC, 2개월) 전왕

 

    네르갈 샤르우스르의 어린 아들로, 재위 2개월도 못되어 나보니더스를 추대한 모반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나보니더스(Nabonidus 556~539 BC, 17년간):

 

  느브갓네살의 사위 가운데 하나로, 아들 벨사살과 함께 신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이다. 밝혀진 고증(考證)에 의하면, 나보니더스는 본래 하란의 영주(領主) 나부발라쑤 이크비(Nabubalatsu-iqbi)와, 그곳의 월신전(月神殿)의 여제사장 수무아담카(Shumuadamqa) 사이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610년, 메대와 바벨론에 의해 하란이 점령당할 때, 그의 어머니가 느브갓네살의 처첩으로 잡혀 와, 왕의 사랑받는 후궁이 되자, 그의 아들인 나보니더스도 함께 느브갓네살의 신임과 총애를 받아 국사를 맡는 한편, 아마도 느브갓네살의 딸 니토크리스(Nitocris)와 결혼함으로써 사위가 되었다.

 

  이렇다면 그러한 관계를 통하여, 나보니더스의 아들인 벨사살은 느브갓네살의 외손자가 되어, 다니엘서 5장 11절의 "왕의 부친"이란 표현이 설명될 수도 있다. 즉 성경상의 히브리어 의미에서, "아버지"는 동시에, "조상" 혹은 "할아버지"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나보니더스의 어머니가 느브갓네살의 후궁이었으므로, 나보니더스는 의붓 아들이기도 하니까 앞서의 관계가 성립된다.


  나보니더스는 기원전 553년 동부 팔레스틴의 원정에 참여하고 있던 중, 신병(身病)으로 레바논에서 요양하게 되어, 같은 해 그의 맏 아들 벨사살에게 왕권을 주어, 동위왕(同位王)이 되게 했다.

 

  기원전 552년 바벨론성에 귀임한 벨사살은, 그의 아버지의 연호(年號)와 이름으로 본토를 다스렸지만, 맹세에 있어서는 부자(父子)의 이름을 함께 써서 그가 동위의 섭정왕(攝政王)임을 분명히 했다.


  나보니더스가 병에서 회복된 후, 서북 아라비아를 원정(遠征)하여 오아시스 테마(Tema)를 빼앗아, 거기서 기원전 545년까지 여러 해를 살았다.

 

  기원전 539년, 페르샤에 의해 바벨론이 함락될 때 남쪽으로 피신했던 나보니더스는, 후에 바벨론에 돌아와 고레스에게 투항(投降)하였으며, 이어 저 멀리 카르마니아(Carmania)의 봉신(封臣)으로 보내졌다고 전한다.

 

  나보니더스는 정치와 군사에는 무관심하였으며 ,오히려 종교와 문화 특히 고고학에 깊은 흥미를 가져, 많은 노력과 시간을 바쳐, 왕위까지 아들에게 물리는 나약한 치세를 했다고 여겨진다.



   벨사살(Belshazzar 553-539 BC, 14년간 재위)

 

  신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으로서의 그의 신원이 어떻게 밝혀졌는지는, 전술한 바와 같다.

 

  신병으로 요양중인 부왕의 섭정으로 기원전 553년경에 즉위하여, 14년 후인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밤 다니엘서 5장의 주연(酒宴) 후에, 침입한 페르샤 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보다 상세한 역사적 배경은 5장에서 다루고자 한다.

 

 

 

 

 

다.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

                          1.통일 왕국 시대(1050-931 BC)


  기원전 1405년경,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사울이 초대 왕으로 취임할 때까지, 약 400년 간은 무질서와 배도(背道)가 특징이 된 사사(士師)시대를 경과한다(삿 17:6, 21:25).

 

 구약 성경에는 초대 왕인 사울이 몇 년 간 재위(在位)했는지를 확실히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누가가 기록한 사도 바울의 설교에는 약 40년 간으로 기록되었다.(행13:21)


  그 후 다윗이 40년 간을 다스리면서(대상 29:27) 왕국의 확고한 기초가 놓이고, 역시 40년 간 다스린 솔로몬에 이르러(왕상 11:42)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솔로몬의 하나님께 대한 배도와,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20년 간이나 계속된 무리한 건축공사는, 마침내 하나님의 징계와 민심의 분열, 그리고 안팎의 반역을 초래하여 통일왕국의 기초가 무너지고 만다.


  솔로몬이 죽자마자 이스라엘은 둘로 쪼개져서, 남쪽은 솔로몬의 어리석고 지모(智謨) 없는 아들 르호보암에 의해 다윗의 혈통이 이어지는 유다 왕국이 섰으며(왕상 12:1-19), 북쪽에는 솔로몬 때에 그의 폭정에 항거하다가 이집트에 망명했던 신하 여로보암이 돌아와 왕이 된 북방 이스라엘 왕국이 섰다(왕상 11:26-40, 12:25-33).

 

  이리하여 사울 때로부터 솔로몬 때까지 계속된 통일 왕국시대는 120년 만에 무너지고, 기원전 931년 남북왕조로 나뉘게 된 것이다.

 



                                2. 북방 이스라엘 (931-722 BC)


 그 후 북방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와 사르곤 2세에 의해 망하기까지 약 209년 간 20명의 왕이 재위했으나, 한결 같이 모두 악한 왕이었다.

 

 북방 이스라엘을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노력은 계속되어, 엘리야·엘리사·요나·아모스·호세아 등 쟁쟁한 선지자들이 부르심을 받아, 회개와 개혁의 기별을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한 번의 진정한 부흥이나 개혁도 없이, 결국 인내와 자비의 선지자 호세야의 부르짖음을 마지막으로, 그 패역은 죄악의 잔을 채워, 결국 기원전 722년 수도 사마리아가 포위 3년 만에 앗시리아 군에 함락되고, 백성들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 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북방 이스라엘은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왕하 17:3-18)



  북방 왕조에게 내린 멸망은 직접 하늘에서 내린 형벌이었다. 앗수르 사람은 다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려고 사용하신 도구에 불과하였다.

 

  사마리아가 함락되기 전, 짧은 기간 동안 예언하기 시작한 이사야를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앗수르 대군을 '나의 진노의 막대기 '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사 10:5)고 하셨다.

 



                                  3. 남방유다(931-586 BC)


  남방 유다도 345년 동안 20여명의 왕이 뒤를 이으면서, 패역할 때마다 개혁과 부흥의 기별을 가진 선지자들, 즉 미가·이사야·나훔·하박국·스바냐·요엘·예레미야 등이 때 맞춰 보내졌고, 이따금 아사·여호사밧·웃시야·요담·히스기야·요시야 등 비교적 선한 왕들도 나왔으나, 결국은 패역과 불순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눈물의 선지자 예례미야의 호소도 아랑곳 없이, 바벨론에 의하여 세 차례나 포로된 끝에, 기원전 586년 8월 마침내 예루살렘이 느브갓네살에게 함락됨으로써, 폐허가 된 채 예언한 대로 70년의 포로생활을 계속하게 된다(렘 25:11).


   바로 이러한 막바지에 접어든 남방 유다의 역사가, 곧 다니엘서 직접적인 배경이 되기 때문에, 이를 다음의 남북 왕조의 일람과 함께 약술하여, 다니엘서 이해에 도움을 삼고자 한다.

 


   1. 기원전 722년 머리맡의 형제국 북방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는 끔찍한 사실을 목도한 유다는, 이제 앗시리아 침략의 다음 차례가 될 것임을 깨닫고 위기가 감돌았으며, 각성의 기운이 놓아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패역한 아버지 아하스를 도와, 왕위에 오르기 전 14년 동안 섭정했던 경험많고 경건하고 현명한 히스기야가, 715년 경 정식으로 즉위한 것이다.


   그는 국가의 번영과 독립은 오로지 전국민의 헌신과 신앙개혁에 있음을 확신하고, 그의 통치 초기에 성전을 개축하여 정결하게 하고, 가나안의 잡다한 퇴폐 종교의 의식과 우상을 말끔히 쓸어버렸다(왕하 18:3-6).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까지 포함한 거국적인 대 유월절을 지켜, 백성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호소했다(대하 29:1-31:21).

 

 


   2. 이에 따른 하나님의 축복으로 국력이 신장되어 블레셋 평정 작업이 이루어지고(왕하 18:8), 산업이 크게 부흥되었으며, 전국적인 방어망을 구축하여 유사시에 대비했다. 특별히 예루살렘의 포위를 예상하고, 서둘러 굴착한 비상 급수로(給水路)인 실로암 터널의 대수로(大水路)공사는 너무나 유명하다(대하 32:4,30, 왕하 20:20).

 

 


   3. 드디어 기원전 701년 사르곤왕 2세의 아들 산헤립은, 특별히 유다의 반역을 다스리고 팔레스틴의 여러 다른 나라들의 탈선을 징치(懲治)하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쳐내려 와서 예루살렘을 제외한 거의 전국을 유린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다급해진 히스기야는, 상당한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왕하 18:13-19:8, 사 36:1-37:8).


  산헤립의 1차 원정에 따른 앗시리아의 위협 앞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예루살렘은, 이사야 선지자의 격려와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룻 밤 사이에 18만 5천명의 앗시리아 군사가 진멸됨으로써, 극적인 구원이 이르러 파멸에서 벗어났다(왕하 19:9-36, 대하 32:21, 사 37:9-37).

 

 


   4. 이렇듯 히스기야의 철두철미한 신앙과 성실로 파멸의 고비를 가까스로 넘긴 남방 유다는, 오히려 숙적 앗시리아가 먼저 망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행운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히스기야 이후의 왕들인 므낫세(696-641 BC)와 아몬(641-639 BC)은, 또 다시 퇴폐한 우상숭배에 깊숙히 되돌아감으로써, 될성싶던 나라의 운명은 파국(破局)을 향해 치달았다.


 특히 히스기야와의 섭정 연수를 합하여 55년 간을 재위한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의 모든 개혁을 말끔히 뒤엎고, 자신의 아들까지 불에 사루어 제사하는 등, 최선(最善)의 아버지를 가진 최악(最惡)의 아들이 되고 말았다(왕하 21:1-16, 대하 33:1-10). 그가 구국(救國)의 선지자 이사야를 톱으로 썰어 죽였다는 전설은, 넉넉히 있음직한 일이기도 하다(히11:37).

 

 


   5. 유다 운명의 최후가 다가온 즈음에, 악한 아버지 아몬왕에게서 또 다시 어리지만 선한 왕 요시아(639-608 BC)가 나타났다. 그는 유다의 마지막 희망의 등불이었다.

 

 요시아(639-608 BC)는 6세 때, 55년 간을 사악하게 다스린 할아버지 므낫세가 죽고, 8세 때에는 역시 악으로 치닫던 아버지 아몬왕이 궁중의 신복(臣僕)들에게 재위 2년 만에 살해당한 뒤, 8세의 어린 나이로 유다의 16대 왕으로 취임했다(대하 33:21-24,34:1).

 

 


   6. 재위 12년 즉 20세쯤 되던 해, 요시야는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을 다짐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여, 이전에 세운 모든 산당(山堂)과 우상들을 일소(一掃)했으며, 이전 북방 이스라엘의 영토까지 미치는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대하 34:3-7).

 

 


   7. 재위 18년째 즉 요시야의 나이 26세 때, 성전을 보수(補修)하려던 때에, 망각되었던 모세의 율법책이 성전에서 발견되어 왕의 귀에 읽혀져, 깊은 감명을 끼치면서 새로운 개혁과 부흥의 봉화가 올랐다(왕하 22:8-11,대하 34:14-19).

 

  율법서에 기록된 엄숙한 기별을 들으며, 그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옷을 찢고 하나님의 언약을 백성들에게 강독(講讀)하여,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시켰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유월절이 거행되었고, 오랫만에 백성들의 마음이 그들의 하나님께 돌아갔다(왕하 23:2, 21-23, 대하 35:1-19). 진정한 부흥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준 표본이라 하겠다.

 

 


   8. 유다를 마지막으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의는, 대개혁이 있기 5년 전 쯤에 때 맞춰 대선지자 예레미야를 일으키셨다. 요시야왕 재위 13년째인 기원전 626년 쯤에 부름받은 예레미야는, 유다의 최후 40년 간을 불붙는 열성과 애소(哀訴)와 눈물로 기별을 전했다(렘1:1-3).

 

 동시에 기원전 626년은 바벨론의 나보포랏살이 앗시리아에 대항하여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바야흐로 세계 정세의 격변이 일게 되는 역사적인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3년 후 쯤인 기원전 623년에, 다니엘이 태어난 것이다.

 

 


   9. 예레미야 외에도 여선지자 훌다가 일어나 개혁을 뒷받침했으며(왕하 22:14-20), 스바냐와 나훔 선지자까지 합세하여 개혁을 불붙이고 배도를 경고했다.

 

 


   10. 때에 앗시리아의 세력이 기울고, 바벨론의 세력이 욱일승천하는 것을 본 요시야는 친 바벨론 정책을 취하는 한편, 북방 이스라엘의 실지(失地)회복을 꿈꾸며, 힘의 공백(空白)을 이용하여 므깃도 등 전략 요충지를 장악했다.

 

 


   11. 이 때쯤, 그 전까지는 적(敵)이었으나, 신흥의 공동의 적인 신바빌로니아(바벨론)를 막기 위해 앗시리아의 동맹국이 된 이집트의 느고 2세는, 왕위에 오르자 마자 이미 수도 니느웨를 뻬앗기고(612 BC) 두 번째의 천도(遷都)인 하란마저 빼앗긴 (610 BC) 앗시리아의 잔군(殘軍)을 도와, 이를 탈환하고자 기원전 609년 대군을 이끌고, 이스르엘 골짜기를 지나 북상(北上)하고 있었다(왕하 23:29,대하 35:21).

 

 


   12. 때에 친바빌로니아 정책을 표방한 요시야는, 이집트의 앗시리아 지원을 저지하여, 승리와 수고의 댓가를 얻기 위해 므깃도에 나가 접전하다가, 끝내 치명상을 입고, 재위 31년 만에 값 없이 전사하고 말았다(왕하 23:29, 대하 35:20-25). 개혁이 절정에 달한 순간에, 유다의 마지막 희망의 등불이 꺼져버린 것이다.

 

  요시야왕 13년에 부름받아, 18년간 왕을 격려하며 개혁을 마무리 지으려던 예레미야는 독자를 잃은 부모처럼 슬퍼했으며, 온 백성은 애가(哀歌)를 지어 부르며 통곡했다(대하 35:25). 이 애통이 얼마나 컸던지, 1세기 이후의 선지자 스가랴는, "그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요시야가 전사한 곳인 "므깃도 골짜기의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다"라고 상기(相起)하고 있다(슥 12:10-14).

 

 


   13.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전사하자, 백성들은 23세된 요시야의 네째 아들 여호아하스(608 BC)를 17대 왕으로 추대했다(대상 3:15).

 

 그러나 원정(遠征)에서 돌아오던 귀국 길에, 느고 2세는 아버지 요시야의 친바빌로니아 정책을 답습하는 여호아하스를 재위 3개월 만에 폐위시켜 포로로  이집트에 잡아가고, 그 대신 요시야의 둘째 아들 여호야김을 즉위시켰다(왕하 23:29-34).

 

 


   14. 이집트 왕 느고 2세에 의하여 엘리야김, 즉 "나의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뜻의 이름에서, 여호야김 즉, "여호와가 세우신다"는 뜻의 이름으로 개명(改名)까지 한 18대왕 여호야김(608-597 BC)은, 재위 11년 간 아버지 요시야 같지 못하고, 패역과 우상숭배에 선지자까지 살해하는 중대한 악을 저질렀다(왕하 23:37, 렘 26:20-23). 또 다시 최선(最善)의 아버지에게서 최악(最惡)의 아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금 1달란트(미화 27,636불)와 은 100달란트(미화 63,491불)등 엄청난 조공을 바치면서도 친이집트 정책을 고수하여, 바벨론의 미움을 크게 샀다(왕하 23:32-35).

 

 


   15. 기원전 605년, 그 때까지 팔레스타인을 장악하고 있던 이집트와 앗시리아의 잔군은, 바벨론왕 나보포랏살의 아들 느브갓네살의 대군과 하맛 가까운 칼케미슈(갈그미스)에서 대격전을 벌여, 세계 역사의 분수령을 만들었다.

 

  전술한 대로, 이 전쟁에서 이집트가 패배함으로써 앗시리아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신바빌로니아는 명실공히 근동의 최강국으로 부상(浮上)했으며, 이집트는 영원히 강대국의 위치에서 탈락(脫落)하고 만 것이다.


   칼케미슈에서 대승한 느브갓네살 장군은, 패주(敗走)하는 느고 2세의 이집트군을 추격하면서 남하하여 예루살렘을 공략(攻略)한 뒤, 재위 3년째의 여호야김을 굴복시켜 바벨론의 봉신(封臣)이 될 것을 다짐받고, 이를 담보하기 위해 당시 18세 된 왕족 다니엘과 다른 세 친구를 포함한 일단의 왕족과 귀인들을 볼모로 잡아가고, 상당량의 성전 보화와 기구를 바벨론으로 가져 갔다(단 1:1-7). 이것이 바로 다니엘서 1장의 배경이며, 기원전 605년에 있은 제 1차 포로였다(대하 36:6-7).


   같은 해 이집트 접경까지 이르렀던 느브갓네살은, 본국에서 부왕이 서거했다는 부음(訃音)을 듣고, 서둘러 귀국하여 605년 9월 7일 왕위에 즉위한다. 그 후 여호야김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그토록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친이집트 정책으로 전환하고 동맹을 맺자, 느브갓네살은 군대를 파견하여 기원전 598년 12월의 예루살렘 침략으로 그를 잡아갔는데, 아마도 도중에서 거친 취급으로 객사(客死)하여,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문 밖에 던지우고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였다(렘 22:18, 19, 36:30, 왕하 24:6, 대하 36:6).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18세 된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라(598/597 BC) 3개월 동안 다스렸으나, 또 다시 서부 원정에 나서서 예루살렘에 재침(再侵)한 느브갓네살에 의해, 18세 된 왕과 왕후, 태후를 비롯하여 모든 방백, 신복 각종 장인(匠人)등을 포함한 약 1만명의 포로와 함께, 다량의 성전 금기명(金器皿)과 왕궁의 보화가 약탈 당했다. 이들 가운데 에스겔도 포함되어 잡혀갔는데, 이것이 기원전 597년 3월 16일 경에 있은 제2차 포로 였다(왕하 24:10-16, 대하 36:9,10, 겔 1:1-3).

 


   여호야긴이 잡혀간 뒤, 그의 숙부이자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시드기야(597-586 BC)가 유다의 최후의 왕으로 즉위했다. 처음 몇 년 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충성하여 느브갓네살에게 사절(使節)도 파견하고(렘 29:3-7), 그 자신도 바벨론을 친히 방문하기도 했다(렘 51:59).


   그러나 그는 의지가 약하여 자기의 판단에 확고하지 못하고 대중의 요구나 신하들의 주장에 좌우되어, 예레미야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집트와의 동맹관계에 휩쓸리고 말았다(렘 37:6-10, 38:14-28).


   시드기야의 반역이 분명해지자, 느브갓네살은 유다 정복에 나서, 1세기 전에 앗시리아왕 산헤립의 전략(戰略)을 따라, 먼저 예루살렘 이외의 유다 전국을 깡그리 유린하고 도시들을 파괴했다(렘 3:7).

 

  기원전 588년 1월 15일, 마침내 예루살렘의 포위가 시작되어(왕하 25:1) 30개월에 걸친 포위 동안, 잠시 이집트의 도움이 있었으나 곧 물러가고(렘37:5), 586년 7월 19일 성벽이 무너지면서 기근으로 처참해진 예루살렘 성은 분노한 바벨론 군사들에게 짓밟히고, 성전과 궁전, 가옥들은 완전히 훼파된 후 불태워져, 삼일간 (586년 8월 15-18일)이나 불꽃에 휩싸였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포로로 잡혀가고, 극빈(極貧)한 사람들은 뒤에 남도록 허용되어, 그달랴가 다스리도록 위임되었다(왕하 25:22, 대하 36:20).


   한편 성벽이 무너지는 혼란한 틈을 타서 탈출에 성공한 시드기야는 여리고 쪽으로 도주했으나, 추격해 온 바벨론 군사들에게 잡혀서 느브갓네살의 야전 사령부가 주재한 리블라에 끌려 와, 그의 목전에서 아들들이 죽임당하는 참상을 겪는다. 아마도 이 끔직한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린 왕의 눈을 뜨라고 명령을 받았을 것이며, 화가 치민 느브갓네살의 명령에 따라 그의 두 눈마저 뽑혀졌다.(왕하 25:4-7, 19-21, 렘 52:10).

 

  눈을 감은 시드기야 왕 앞에 무엇이 아른거렸을까? 아마도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모습이 아니었을까?(렘 38:17-21). 반역을 선동한 방백들도 함께 처형되고, 시드기야 왕은 눈이 뽑힌 채 죽기까지 옥살이를 했다(왕하 25:1-7, 렘 52:1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 20:20).



   기원전 626년에 부르심을 받아, 40년 간을 침몰당하는 조국과 함께 민족의 고뇌 속에서 비탄에 젖은 외로운 모습으로, 왕과 백성들에게 회개하면 살 것이라고 호소하고 애곡한 예레미야의 노력도 효혐이 없었다. 그는 바로 1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을 도와 나라와 민족을 앗시리아의 손에서 건졌음을 상기하면서, 그도 거룩한 성과 동족을 바벨론의 파멸로부터 건져 보려고 안간 힘을 다했으나, 그는 그러한 히스기야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동족과 함께 끝까지 운명을 함께 하기로 택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도 그대로 남아서 백성을 권면하다가, 또 다시 배역의 길로 나서 이집트로 망명한 무리들에게 끌려 이집트 땅 다바네스로 가서, 거기서도 회개의 권면을 계속하다가(렘 41:17-43:13), 전설에 의하면 거기서 동족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를 끝까지 저버린 유다 백성에게, 남은 길이란 미리 예고된 대로(렘 29:10) 70년 간 계속될 포로살이를 위해 떠나는 길 뿐이었고, 눈동자 같이 아끼시던 예루살렘성은 잿더미가 된 채 중건(重建)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슬픔이 바로 예레미야 애가에 쓰여진 탄식이요, 애원이었다.


  "다니엘은 이 다사다난한 시기에, 바빌로니아에 있었다. 그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자기 고국 땅을 치기 위해 몇 차례의 전역(戰役)을 위해 떠나는 것을 보았음에 틀림 없으며, 그들이 이기고 돌아오는 것과, 포로된 유대인들이 도착하는것도 목격했음에 틀림 없다. 이들 포로들 가운데는 그의 가족을 동반한 여호야긴도 있었으며(왕하 24:10-16), 후에는 눈먼 왕 시드기야도 있었다(왕하 25:7). 이러한 시기에 다니엘은 또한 유배(流配)되어 온 유대인들 가운데, 진전된 정치적 소동의 결과로 주모자들 가운데 몇 사람들을 느브갓네살이 불태워 죽인 사실도 알았음에 틀림 없다. 예레미야로 하여금, 포로된 동족들에게 편지하여 바빌로니아에서 조용히 평화롭게 지내라고 권면하게 한 것도, 이 소동이었다"(렘 29장).


 느브갓네살이 즉위하던 해(605 BC)에 포로돼 간 다니엘은, 이역 만리 바벨론 성에서 향수를 달래가며 신앙과 학문에 정진(精進)하여, 마침내 3년 만에 느브갓네살의 신임을 독차지한 측근(側近)의 고위 보좌관(고문)이 되어, 하나님과 동족을 위해 힘 있게 역사했음이 틀림 없다.

 

 아마도 다니엘의 그러한 영향력 때문에, 반역을 거듭한 유다가 처음 반역(605 BC)이후 멸망당하기까지(586 BC), 거의 20년 간이나 거듭된 반역에도 불구하고, 전제 군주에 의해서라도 그 최후가 유보(留保)되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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