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Mesopota.西南Asia 聖地순례

[스크랩] 고대 근동 비문의 산 역사 다리오 왕 비헤스툰(Bisotun)

영국신사77 2009. 1. 4. 20:59
고대 근동 비문의 산 역사 다리오 왕 비헤스툰(Bisotun)

  케르만샤 타케 보스톤 탐방을 끝내고 이곳에서 약 30여 킬로 떨어진 구약 다리오 왕에 얽힌 비헤스툰 비문이 있는 곳을 찾았다. 비헤스툰 마을 직전의 이슬람 공동묘지가 있는 입구에 차를 주차할 수 있었다.

  비포장도로를 일부 따라 암벽비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 도로가 분명 바그다드로 이어지는 길은 맞는데 지금은 도로가 산에서 상당히 떨어진 남쪽 농경지 중간으로 새로 나 있고 산 밑 도로는 유적지 발굴 및 개발을 위해 현재 보수 중에 있었다.

  그 유적지에 도착해 걷다보니 오른쪽 낮은 곳에는 기원전 2세기의 헤라클레스 조각(culpture of Hercules)이 최근에 보수 공사를 끝내고 근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몹씨 훼손이 된 상태로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단다.

  그 뒤쪽 위로 조금 올라가면 비헤스툰 비문의 하이라이트인 다리우스 대왕(다리우스1세)의 비문이 절벽에 새겨져있다. 이 비문이 여기에 있게 된 동기는 이렇다.

  비문에 다리오 대왕은 자기 아버지 캄비시스를 둘러싼 정치 혼란기를 설명하고 있다. 다리오 대제는 캄비시스가 그의 친동생 바르디야(Bardiya:그리스어로는 스메르디스 Smerdis)를 살해했지만,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말한다.

  그 때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 가우마타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자산이 바르디야라고 속여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 받기에 이른다. 그 때에 캄비시스는 이집트 정벌 중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페르시아로 돌아오다가 자기가 찬 칼에 찔려 실수로 죽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을 감지했던 다리오는 자기가 페르시아 제국의 패권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6명의 경호대원과 함께 신속히 가우마타와 그의 군대에 대한 정벌에 나선다. 그는 곧 가우마타를 죽이고 6명의 경호대원의 추대로 페르시아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페르시아에서의 반란은 불길처럼 번져 페르시아제국의 모든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다리오 대제는 그의 즉위 1년 동안 이런 반란들을 진압하는데 전력투구하였다. 그의 첫해에 9번의 전쟁을 치루고 9명의 반란군 대장들을 처형하였다. 이들 반란군들의 이름과 그들의 나라명이 베히스툰 부조물의 하단에 세 가지 쇄기문자들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가 체포하여 처형한 마지막 반란군 대장은 이 부조물의 맨 뒤에 서 있는 스쿤카이다.

  그는 이란의 북동쪽에 위치한 스키타이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들의 대장이었는데, 그는 비문에서 고깔모자를 쓴 모습을 한 사람으로 판단된다. 비문 부조 왼쪽에 다리오 왕은 뒤를 따르는 2명의 신하가 서 있다. 왼쪽의 신하는 고브리야스(Gobryas)로서 페르시아 창을 들고 서 있고, 오른쪽 신하는 인타페르네스(Intaphernes)로 활을 들고 있다. 다리오 왕은 왼발로 그의 정적 가우마타(Gaumata)를 밟고 있다. 그 뒤로 8명의 포로를 포승줄로 목을 감은 채 연결하고 있다.

  하필이면 이 비문을 왜 여기에 새겼을까 하는 이유는 당시 바빌론 제국, 페르시아 여름 궁전이 있었던 하메단, 겨울궁전이 있었던 수사를 이으면서,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와 통하고 서쪽으로는 터키와 그리스를 잇는‘비단길(Silk Road)’의 원형이 되었던 ‘왕의 대로(Royal Road)' 였기 때문에 누구나 이를 쉽게 발견하고 다리오왕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이유는 즉 비문과 부조석상을 새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평평한 바위가 필요했다. 비헤스툰산은 매우 평평한 절벽을 많이 지닌 산이었다. 산 아래에 메소포타미아나 이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몇 개의 샘터들이 있다. 이 ‘왕의 대로’를 지나간 수많은 행상들과 병사들이 지친 몸을 달래던 쉼터였기에 이곳이 더 각광을 받은 셈이다. 또 ‘신들의 장소’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다리오 대제가 그가 등극할 때 최고의 정적 가우마타(Gaumata)를 잡아 처형한 곳이 바로 이 산 근처이다. 그러므로 비헤스툰산은 다리오 왕이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이처럼 실제적, 종교적,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장소에 다리오 왕은 자기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비헤스툰 석비’를 새기게 되었는데, 후일에 이 비문이 ‘고대 근동 비문의 여왕(Empress of Oriental Inscriptions)'이라 불리우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이 당시 설형문자로 조각된 비문과 부조가 아스라이 보였다. 세계적인 유적인 이 비문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 철조망을 쳐놓았다. 하도 많은 관광이 찾아와 이 비문을 못살게 굴어 별도 경찰관 까지 배치해 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하도 높아 밑에서 쳐다보면 전체적인 윤곽만 보일 뿐 자세한 내용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 필자의 디지털 카메라 줌으로 쭉 당기니 선명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암벽의 비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된 이유는 다름 아닌 당시에 쓰이고 있던 3개 언어로 쓰여 있어 인류 최초의 문자라고 부르는 설형문자(쐐기문자)인 수메르어를 해독하는 단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비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내(다리우스)위 족보로 8명이 왕이었다. 나는 아홉 번째 왕이다. 나는 양쪽으로 왕위를 이어 받았다." 이로써 왕위의 정통성을 내외에 과시하고 더 이상 자신의 등극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 듯 하다.

  비헤스툰 비문은 폭 5.5m, 높이3.0m로서 다리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한지 6년인 기원전 480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이 비문의 페르시아어는 영국의 한 장교에 의해 해독되었단다. 이 페르시아어가 해독되고 다음으로 엘람어가 해독되고 다음으로 아카드어가 해독되어 마침내 인류의 최초 사전인 수메르어-아카드어 사전에 의해 수메르어가 해독되어 수많은 수메르의 점토판으로부터 고대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베일을 벗게 되었다고 하는 기념비적인 유적이다.

  또 비문의 중앙 상단에는 조로아스터교의신 아후라 마즈다가 새겨져 있었다. 그 밑에 다리우스 왕이 오른손을 아후라마즈다 신을 향해 들고 있고 한쪽 발은 반역의 괴수인 가우마타(Gaumata)를 짓밟고 서 있는 모습이 자랑스러워 보였다.

  이 모두는 다리우스 왕의 용감성과 내가 최고의 왕이라는 사실을 이 실크로드를 지나다니는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알리는 비문이다. 다리우스 대왕의 유적은 이란의 다른 곳 즉 페르세폴리스의 벽면 조각과 하메단의 ‘간자네메’절벽에도 이와 비슷한 글귀가 있다.

  이 비헤스툰 비문 바로 옆에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있어 가 보았다. 특별한 유적은 없었으나 이곳 절벽에 빗살 무늬 같은 선이 그어진 암벽들이 많이 보였다. 이것도 무슨 의미가 있는 듯했다.

  현재 이곳은 암벽 등반 매니어들이 많이 찾아 즐기는 곳이기도 했다.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 몇 팀이 등반 밧줄을 몸에 감고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