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 한국 기독교박물관 전경
박물관 실내, 경교 부분 전시물, 돌십자가, 경교성서, 십자무늬장식, 금강산 경교유행중국비 탁본, 마리아상등이 진열되어 있다.
경교 돌 십자가(nestorian stone cross), 24.5x 24.0x 9.0cm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주후8-9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물은 경교(중국 당나라)가 신라를 통해 한국에 전래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 이론을 뒷밭침하고 있다. 평면은 십자가형이고, 단면은 사다리꼴로 앞면보다 뒷면의 폭이 넓은 점이 특징이다.
마리아상 (통일신라시대, 경주, 기원후 8-9세기, 7.2x 3.8x 2.8cm)
통일신라시대 경주에서 출토된 불보살상(佛菩薩像) 모양의 마리아상이다.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교와 불교문화의 교류와 경교의 한반도 유입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화형보관(花形寶冠)으로 머리를 장식한 여인이 손을 입에 물고 있는 어린 아이를 무릎 위로 안고 있는 형상이다. 전체적인 신상의 양식은 당시의 불보살상을 따르고 있으나,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기존의 불보살상 양식과 차이가 있다.
십자 무늬 장식
경주에서 발견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8-9세기)로 추정된다. 역시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십자무늬장식 (통일신라시대, 경주, 기원후 8-9세기, 5.8x 5.6cm)
경교(景敎)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제(銅製) 십자무늬 장식이다. 얇은 청동판을 원형으로 둥글게 가공한 후에 맞새김[透彫]하여 남은 부위가 십자모양을 형성하였다. 표면에는 작은 돌기를 연속적으로 돋을새겨[浮彫] 십자무늬를 장식하였다.
십자무늬장식 (통일신라시대, 경주, 기원후 8-9세기, 2.4x 3.2cm)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비금속제의 십자무늬 장식이다. 화살촉 모양의 장식 표면 위에 5개의 원을 상-하-좌-우 및 중앙에 찍어 놓아 십자모양을 형성하였고 그 주위로는 작은 점을 연속적으로 눌러찍어[押印] 십자무늬를 장식하였다.
십자무늬장식
경교발해삼존불
금강산경교유행중국비 탁본 (1930년경, 177.5×85.4cm)
중국 당나라 때 경교가 성행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경교비를 탁본한 것이다. 경교의 동양전래설을 주장했던 고든(E.A.Gordon) 여사가 우리 나라 경교 전래를 밝히기 위한 연구기념으로 1916년 금강산 장안사 입구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모조한 경교비를 건립하였는데, 김양선 선생이 이를 탁본하였다. 원래의 비[781년 건립]는 1625년 중국 서안부(西安府)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경교의 선교내력과 당시의 선교현황이 736자 정도로 소개되어 있다. 비문 내용 중 “법도가 전국에 퍼지고 국가는 부유하며 백성은 선미해졌고 교당이 각 성읍에 충만하여 집집마다 큰 복이 번성하였다”(法流十道 國富元休 寺滿百城 家殷景福)라는 기록에서 당시 경교가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경교유행중국비 탁본 (금강산)
이 탁본은 경교의 동양 전래설을 주장한 고든(E.A.Gordon) 여사가 금강산 입구에 세운 모조비를 1930년에 탁본한 것이다. 영국 여류 고고학자인 고든(E. A. Gordon)은 기독교의 동양전래(東洋傳來) 및 기독교와 불교의 교류에 대한 연구를 전념하였는데 수년간 우리나라에서 머물면서 경교의 전래 가능을 연구하고 나서 고든 (E. A. Gordon) ‘ 경주의 불국사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상과 나한상(羅漢像)들의 불상에서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통일 신라시대의 능이나 문 앞에 세운 무인상(武人像)들에서도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고 주장하였다.
경교성서(The Chinese Nestorian Scriptures), 35.4×24.3cm
기독교 일파인 경교(Nestorianism)가 635년 중국에 유입된 후 곧 성서가 번역되었다. 경교성서는 알로펜(아라본 선교사- 아브라함의 중국명)에 의해 당에 전해진 경교성서로 송나라 초기 돈황불동에서 발견된 경교 성서(7세기 중엽) 중 하나를 1931년 영인한 것이다. 신의 명칭을 ‘일신(一神)’으로 표기하였으며, 성서의 어구(語句)를 인용하여 일신(一神)이 천지를 창조하였음을 강조하는 등 경교 교리가 잘 나타나있다.
1907년 덴마크 사람 홀이 라는 사람이 매입하여 반출하려다고 발각이 되는 바람에 보존될 수 있었다. 원본은 비림에 보관되어 있고 이것은 경교비가 발견된 장소에 세워진 모조품이다.
중국 시안 비림에 있는 대진경교류행중국비 모조품, 출처 주님사랑(네이버 블로그 sp0207)
경교(景敎)는 7세기경 페르시아로부터 중국에 전해진 기독교의 일파로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를 말한다. 네스토리우스파는 431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유럽에서는 교세를 잃었지만 동방으로 옮겨가 기독교를 전래하였다. 중국의 경교 역사는 선교사 알로펜(Alopen, 阿羅本)이 635년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 西安)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며, 원대(元代)에는 ‘야리가온(也里可溫)’이란 이름으로 다시 유행하기도 하였다. 경교가 중국사회에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토착종교나 불교와 습합되면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경교가 유행하던 시기에 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신라가 당에 수많은 사신과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당시 빈번한 문화교류를 행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한반도에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주로 초기 기독교사가들에 의해 주장된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은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십자가, 동제십자무늬장식, 마리아상 등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대진경교류행중국비 진품, 비림박물관, 1625 (출처- http://blog.empas.com/jh41kim/19218563)
교(敎)자 위에 희미하게 보통 십자가와 다른 특유의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70명 이상의 경교 사제의 이름과 더불어 교리의 내용과 역사적인 결과 비석 건립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와 중국 불교와 도교적 개념이 혼합된 혼합주의 기독교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제들은 하루에 일곱번 평신도 들은 네번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경교비를 설명하는 현판에 분명히 기독교로 말하고 있고, 경교비의 머리 부분에 연꽃과 용과 어울어진 이상한 모양의 십자가 형상을 볼 수 있다.
경교 (景敎, Nestorianism) 의 한국전래
1. 경교 (景敎, Nestorianism- 광명의 종교)와 한국 전래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고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주창한 그리스도교 일파의 중국 명칭이다. 대진경교(大秦景敎)라고도 한다. 431년에 추방된 네스토리우스 일파는 시리아를 거쳐 이란 지방에 정착하였다. 그 뒤 페르시아 사산 왕조 때 조로아스터교의 핍박을 받았으나 국왕의 비호를 받아 존속하면서 교세를 넓혔다. 중국에는 635년(태종 9)에 대진국(大秦國:로마, 페르시아) 사람 아라본(阿羅本) 일행이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선교한 데서 비롯된다. 당 태종은 21명의 선교단에게 의전 재상인 방현령(房玄齡)을 보내어 환영을 하게 된다. 주후 638에는 태종은 이들에게 토지를 주고 국비를 드려 파사사(波斯寺; 당시 교회를 寺로 표시하였음)라는 이름의 교회를 세워주고 경전(經典)을 번역하게 함으로 당나라에 선교의 길이 크게 열리게 된다. 처음에는 서역에서 색다른 종교가 페르시아에서 왔음으로 파사교(波斯敎)라고 하였는데 이 종교의 본거지가 로마인 것을 알고는 로마라는 한자인 대진(大秦)이라는 말에 교(敎자)를 부쳐서 대진교(大秦敎)라고 부르게 된다. 그 후에는 광명한 종교라는 의미로 경교(景敎)라는 이름을 얻게 됨으로 당나라에서 경교, 또는 대진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태종의 대를 이은 고종은 알로펜에게 진국대법주(秦國大法主) 라는 관직을 주고 10 도와 385주(州)에 경교 사원을 세우도록 하였다. 태종때는 성탄절이 되면 향과 음식을 주고 축하하기도 하였으며 경교는 당나라에서 주후 635-845년 동안의 210년간 국민들의 호응과 황실의 보호 속에서 선교를 활발하게 전개 하였다. 숙종(肅宗:757-763)) 때 안록산의 난을 토벌할 때 경교도인 이사(伊斯)가 큰 공을 세웠고, 대종(代宗)시대에 토번(土蕃: 티베트)의 침공을 물리치는데도 이사가 혁혁한 공을 세워서 경교가 권력의 후대를 받았다. 대종의 뒤를 이은 덕종(德宗:763-779)도 경교를 숭상하였다. 이때가 당대 경교의 절정기로 경교의 선교역사와 그 상황을 요약한 대진경교류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덕종 2년에 건립하였다. 당나라 초기에 들어와 국왕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하였던 경교는 당 말기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845년 무종회창(武宗會昌)5년에 실시된 회창금교(會昌禁敎)이다. 도교(道敎;Taoism; 유고중의 노자(老子) 중심의 도덕 종교의 한 형태) 신자인 무종(武宗 840-846)은 외래 종교가 지나치게 번창하는 것과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 불교의 사원들은 많은 농토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며 승려들이 일하지 않으면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종교탄압 정책을 칙령으로 내리면서 재산을 몰수하게 된다. 경교와 회교,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의 사제들까지 성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의 사정을 보면 문을 닫은 불교가 4,600개, 환속되어 간 승려가 무려 26만 5천명이었다고 한다. 경교에 대한 탄압이 있게 되자 더 존속할 수 가 없게 되었다. 회창금교로 경교 사원이 파괴되고 토지와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많은 경교승들이 환속되었다. 경교승들은 약 600 내지 700명이 환속되었다고 보여지고, 경교도는 40,000내지 70,000명이 환속하였다고 추정된다. 이 박해로 경교는 크게 타격을 입었고 궁벽한 곳으로 도피하였다. 무종이 죽고 선종(宣宗)이 즉위하여 박해가 완화되자 불교에서는 사원을 새로 중건하는 등 차츰 원상태로 회복이 쉽게 되었으나 경교는 회복의 기회를 얻고도 재기를 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879년에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 때 경교도 30,000명이 학살당하였다. 그후 경교는 중국에서 끊어졌고 살아남은 경교 선교사와 신자들은 거란, 몽고, 신강,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쫓겨갔고 나머지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고 불교나 도교로 개종하였다. 200,000명을 헤아리던 경교도들은 다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당 이후 중국의 변두리에 있던 경교도들은 한(漢)민족의 문화에 동화 흡수되어 경교는 소멸되고 유적으로만 남게 되었다. 후에 원(元)나라 때에 경교도들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원의 멸망과 더불어 중국에서 소멸되었다. 한편 칭기즈 칸 시대에 주변의 유민족에는 경교가 들어와 있었는데 이는 9C 후반 이후 중국의 경교는 쇠퇴했지만 실크로드 주변국인 북중국에서는 명맥을 유지 하였다. 이유는 현지주민들의 개종에 성공 하였고 소그드인들의 노력 때문이다. 경교는 몽골 제국이 출현하기 전 초원 여로곳에 기반을 확보 하였는데 케레이트, 나이만, 웅구트 족 같은 유민족들의 집단 개종이 있었다. (자세한 연구는 元代의 宗敎政策과 基督敎 참조)
경교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781년에 건립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진상(眞常)의 도(道)는 현묘(玄妙)하여 이름짓기 어려우나 그 공용(功用)이 소창(昭彰)함을 보아 감히 경교(景敎)라고 칭한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는 언제 경교가 전래 되었을까? 경교가 중국에 들어온 때는 당 태종의 치세였다. 이때는 신라가 삼국 통일의 대 성업을 수행하려고 당과의 외교를 공고히 하던 때였다. 이 당시 김춘추가 당을 여러번 방문했었기에 경교에 대해 알았을 것이다. 또한 신라는 해마다 학승(學僧)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냈고, 귀국할 때는 불교관계의 문물과 함께 새로이 생겨난 학문과 문물 그리고 사상들을 가지고 왔다. 여기에 경교의 신라 전래의 개연성이 있다. 이를 증명해주는 것이 191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발견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모조품이다. 이 비는1625년에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서쪽에 있는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의 대진사(大秦寺)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이 석비는 당대(唐代)인 781년에 경교도 사즈드보제드가 건립한 것으로, 845년의 ‘박해령(迫害令)’ 후에 매몰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 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에서 발견된 것이다. 또 하나 증거가 될 수 있는 경교 유물이 경주 불국사 경내와 안압지에서 발견 되었는데 바로 “돌 십자가”와 마리아상이다. 현재 숭실대 한국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돌 십자가는 아직 학계의 논란이 있으나 불교 사찰에서 경교의 십자가가 발견 되었다는 점이 경교의 한국 전래를 말해주고 있다. 또 주후 1928년에는 고구려의 옛 영토인 압록강 주변 만주의 안산(鞍山)지역에서는 경교도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무덤에서는 와제(瓦製) 십자가가 나왔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에서는 구리로 만든 십자가 등이 발견 되었다. 한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는데 1595년에 천주실의를 쓴 마태오 리치가 명나라에 처음 왔을 때 기독교의 흔적을 찾는 중 당나라 때 경교가 성행 하였다는 문구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이 책이 한국의 책 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 이 한국 책이 언제 어디서 쓰여졌고 이같은 경교에 관한 지식을 수집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설명 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신라시대에 경교의 전래 가능성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2. 네스토리우스 (Nestorius)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大主敎)이며 신학자이다. 시리아의 게르마니키아 출생으로 428년 대주교가 되었다. 안티오키아학파에 속하여 스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하고 이른바 신인설(神人說) ·신모설(神母說)에 반대하여 성모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지만 신(神)의 어머니는 아니라는, 즉 비성모설(非聖母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로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신인격(神人格)에 있어서 신성과 인성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하며, 이는 다만 윤리적 굴레로 결합되어 있음에 불과하다며 그리스도 이성설(二性說)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유일한 위격(位格)밖에 인정하지 않는 설과 대립하였다. 결국 키릴로스의 제소로 교황 게레스티누스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자기 학설을 철회하고 현직에서 사임할 것을 요구했고, 431 A.D 에는 동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 서 로마 발렌티니아누스가 교황의 특사를 맞이하여 에페소스 공의회(Council of Ephesos) 를 개최 하였다. 에페소스 회의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을 추종하는 시리아의 주교들과 교황 첼레스티노 1세측의 대표자들의 참석을 기다리지 않고, 에페소스의 주교 멤논의 지지를 받는, 네스토리우스의 적수인 키릴로스가 그들의 도착 전에 개회를 하였다. 그 결과 네스토리우스의 교설은 이단으로 단정되고 그의 해임과 추방이 결정되었다. 에베소 회의는 “태초이전부터 계시던 성자 하나님이 성모마리아를 통해서 사람이신 예수님으로 오셨는데, 이 사람이신 예수님은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모마리아는 예수님의 인성면에서 하느님의 어머니 즉 데오토코스이시다”라는 사도신앙을 거듭 확인하였으며 “니케아 신경”의 그리스도의 양성론을 재 확인 하였다. 추방당한 네스토리우스와 그 일파는 페르샤(이란)의 에뎃사 시에 작은 신학교를 세우고 동방에 복음을 전할 선교사들을 양성했다. 훈련받은 선교사들은 인도나 중국을 찾아 전파 하였다. 중국에 들어온 이 기독교는 경교(景敎- 광명의 종교)라고 불렀다. 참고로 가톨릭교회에서 파문된 네스토리우스 교회일파는 시리아 교회로 존속하기도 하고 미국으로 가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네스토리우스교회의 전례와 교리를 신봉하는 시리아 교회는 오늘날에는 에페소 공의회의 결의를 받아들여 가톨릭교회와 일치를 이루고 있다.
3. 아라본 (阿羅本, Araham, 아브라함의 중국명)
페르시아 네스토리우스파(派)의 사제(司祭)로 경교(景敎)를 중국에 전하였다. 아라본은 중국식 이름이다. 635년 당나라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태종(太宗)의 보호하에 의령방(義寧坊)에 대진사(大秦寺)를 건립, 대진경교라 호칭하였다. 후에 경교라고 불렀으며, 뒤를 이은 고종(高宗)의 보호도 받아 한때 번성하였는데, 그는 중국 정부로부터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의 칭호를 받았다. 그의 아라함이라는 이름은 아브라함에서인지, 또는 시리아 교회의 장로를 뜻하는 라한(Rahhan)에서 유래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4. 아라본의 경교성서와 불교의 영향
당시 경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에서 무엇보다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요소는 불교의 영향이다.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는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발전을 거듭하였고, 중국의 기존 종교 사상 속에 융화되어 당대에 이르면 도교와 더불어 중국의 주된 종교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굳히게 된다. 당 고조 때에는 승려들의 문란으로 일시적인 탄압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7세기 중반 현장(玄奘) 등에 의해 새로운 부흥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인도로부터 각종 경로를 통해 전해져 오는 불교 경전에 대한 번역 사업은 대단히 활발하였는데, 이는 당시『개원록(開元錄)』이나『정원록(貞元錄)』 등으로 대별되는 경록(經錄) 편찬의 회수나 규모만 보더라도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러한 학술적 수준의 일대 도약과 함께 691년 측천무후(測天武后)에 의해 반포된, 도교보다 불교에 우선권을 주는 새로운 조칙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이르는 불교계의 번영을 가져왔다. 이후 예종(睿宗), 현종대를 거치면서 우선권은 다시 도교로 넘어가고 불교는 몇 번에 걸친 규제 조치를 받아야 했지만, 그러나 불교는 이미 중국인들 사이에서 너무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정착해 있었기 때문에 9세기 무종(武宗)에 의한 이른바 ‘회창폐불(會昌廢佛)’ 이전까지는 별다른 심각한 영향을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당시 경교 선교사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표현하는 방식에서나 그 전교 방법에 있어서나 불교를 적극적으로 모방하고 차용하고 있었음을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러한 점은 이 당시 번역된 것으로 일부 전해지고 있는 경교계 경전이나 집필된 문건들을 통해서 확인된다. 경정의 비문에는 “經留卄七部”라 하여 신약 27권을 언급하고 있기도 한데, 돈황 석실에서 발견된『경교삼위몽도찬(景敎三威蒙度讚)』말미에 기록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대진본교(大秦本敎, 즉 경교)의 경전은 모두 530부로서 패엽범음(貝葉梵音)”, 즉 타라수잎에 범자로 기록된 형태를 하고 있었다고 하며, 태종 년간에 아로펜이 원서를 증정하였지만 제대로 번역되지 않고 있다가, 이후 경정이 황제의 명을 받아 30여부를 번역하였으나 나머지는 번역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경교 문헌중『지현안락경』과『선원지본경』은『경교삼위몽도찬』의 「존경(尊經)」 부분 목록에서도 언급되고 있음이 확인되는데, 이들은 경정이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번역된 문건들은 그 내용으로 보아 기독교의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 경전들을 중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용된 주요 개념들은, “阿羅訶”(여호아), “彌施訶”(메시아), “摩薩吉思”(모세), “賀薩耶”(이사야) 등과 같이 음사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불교의 것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음이 현저하게 드러난다. 예컨대『경교삼위몽도찬』에서는 “三身同歸一體”(즉, 三位一體)를 말하면서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를 “妙身皇父阿羅訶 應身皇子彌施訶 證身盧訶寧俱沙”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는 불교의 삼신(法·報·應身)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17세기 초에 마테오 리치는『천주실의』에서 예수의 강생 사건을 설명하며 “於是 大發慈悲 親來救世 普覺群品 於一千六百有三年前 … 擇貞女爲母 無所交感 託胎降生 名號爲耶穌 耶穌卽謂救世也.”라고 하였는데, 비슷하게 이『경교삼위몽도찬』에서도 “我今一切念慈恩 歎彼妙樂照此國 彌施訶普尊大聖子 廣度苦界救無億 常活命王慈喜恙 大普耽苦不辭勞 願捨群生積重罪 善護眞性得無繇 聖子端任父右座.” 라고 하여, 대자비심을 내어 세상을 구원하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독특한 방식으로 태어난 부처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이것말고도 하느님을 “천존(天尊)”으로 옮기고 예수를 “세존(世尊)”이라 번역한 것을 비롯하여, “중생(衆生)”, “법왕(法王)”, “법당(法堂)”, “공덕(功德)”, “대시주(大施主)”, “승가(僧伽)”, “고계(苦界)”, “색신(色身)”, “광자구중고(廣慈救衆苦)” 등등의 불교식 용어는 현존하는 경교 문헌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경교비에 십자가와 함께 새겨진 연꽃 역시 불교의 상징을 경교도들이 차용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 이외에도 경교계 승려들 모두가 당시 “승(僧)”으로 지칭되어 기록되고 있으며, 선교사들을 대덕(大德)이라 부르고 있고, 그 사원 역시 불교와 마찬가지로 “사(寺)”로 불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찍이 경교비의 비문을 쓴 경정 자신도 “대진사의 승려 경정(大秦寺 僧 景淨)”이라 하였고, 당시 비문을 세울 때 그 일을 주관했던 선교사도 “법주인 승려 영서(法主 僧 寧恕)”라 하였으며, 비 옆에 열거된 60여명의 선교사의 명단 또한 승자로 시작하여 다수가 불교 승려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대진경교유행중국비 [大秦景敎流行中國碑]
중국에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가 전래한 635년부터 약 150년간 있었던 선교활동 및 교세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석비이다. 높이 2.76m, 하부의 너비 1m, 두께 0.27m이다.
경교의 존재는 중국 내에서도 오래도록 잊혀져 있다가 명(明)나라 말기 1625년에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서쪽에 있는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의 대진사(大秦寺) 유적에서 당대(唐代) 경교와 관련된 돌비석이 출토되고 그 비문[大秦景敎流行中國碑] 해독이 이루어짐으로써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20세기에 들어 백희화(伯希和)에 의해 감숙(甘肅)성의 돈황(燉煌) 명사산(鳴沙山) 석실에서『경교삼위몽도찬(景敎三威蒙度讚)』,『서청미시소경(序聽迷詩所經)』,『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일신론(一神論)』,『선원지본경(宣元至本經)』 등의 경교 관련 문헌들이 발견됨으로써 경교의 실체는 새롭게 인식되었다. 대진사에서 출토된 돌비석에는 측면에 65명의 경교 승(僧) 이름이 시리아 문자로 적혀 있고, 비 상단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연꽃과 구름, 그리고 무지개가 그려져 있는데, 총32행 1780자로 된 비문을 통해 당대 경교의 역사와 교세 및 교리의 대체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비문 기록으로 보아 당시 페르시아[波斯]인으로 대진사(大秦寺)의 승려였던 경정(景淨, Adam)이 비문을 작성하고 덕종(德宗, 779~805) 건중(建中)2년(781년) 1월 4일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아로펜 일행이 장안에 들어왔을 때 태종은 재상 방현령(房玄齡)에게 영접토록 하고 경서를 번역케 하여 교의를 알아본 연후 전도를 허락하는 칙령을 내렸으며 경사(京師)에 있는 의녕방(義寧坊)에 경교 사찰을 짓게 하여 포교를 지원하였다 한다. 또한 이후 고종(高宗, 650~683재위), 현종(玄宗, 712~756재위), 숙종(肅宗, 757~761재위), 대종(代宗, 762~779재위), 덕종 등의 몇몇 황제들의 후원 아래 상당한 번창을 누렸으며, 주(州)마다 경교 사찰을 세우고 나름대로 교세를 가지고 포교 활동을 벌여, 그 결과 7~8세기에는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중국에 있었음을 비문은 전하고 있다. 이 석비는 당대(唐代)인 781년에 경교도 사즈드보제드가 건립한 것으로, 845년의 ‘박해령(迫害令)’ 후에 매몰된 것으로 추측된다. ‘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9자를 3행으로 새긴 전액(篆額)을 포함한 이수(촬首) 부분과 비문을 새긴 부분으로 되어 있다. 1800여 자의 한자와 50여 어의 시리아 문자로 되어 있고, 한자는 대진사의 승려 경정(景淨)의 찬(撰)에 여수암(呂秀巖)의 서(書)이다. 또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진상(眞常)의 도(道)는 현묘(玄妙)하여 이름짓기 어려우나 그 공용(功用)이 소창(昭彰)함을 보아 감히 경교(景敎)라고 칭한다” 는 경교 이름의 어원이 나타나있다. 이 비는 현재 시안의 비림에 전시되어 있다. 시안(장안)은 실크로드 동쪽 끝, 혹은 출발지이다. 개원문(開遠門)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데 개원문이란 ‘먼 길 떠나는 시작을 알리는 문’이란 뜻이다. 문에 들어서면 낙타 등에 짐을 가득 싣고 서쪽으로 길 떠나는 대상을 형상화한 ‘실크로드 기점 군상’이란 석조물이 있다. 시안은 동서문명의 접합지라는 입지조건 외에, 실크로드 개척과 얽힌 숱한 연고를 지니고 있다. 동서문명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여러 유물들 가운데 중국 최대의 ‘석조문고’라는 비림(碑林)은 비석으로 숲을 이루고 있는 박물관이다. 이곳에는 역대 명필들의 글을 새긴 석비 1095기가 소장되어 있다. 그 중 2호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있다. 781년 세운 이 비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관련 유물로 경교를 포함한 고대 동방 기독교의 전파상을 알려주는 보물이다.
6. 중국 천불동(막고굴)과 경교 경전
막고굴은 둔황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명사산에 있다. 일명 천불동이라고도 한다. 막고굴은 4세기 중엽 전진 시대에 악준이란 승려가 처음 뚫기 시작했다. 이후 원대까지 1천여 년간 각 왕조에 걸쳐 계속 뚫고 지은 것이다. 지금 남은 석굴은 550여 개이며, 소상과 벽화가 있는 굴은 474개다. 전체 석굴 안에는 4400여 구의 소상과 연면적 약 4,500㎡에 달하는 벽화가 있다. 이 벽화들을 1m 폭으로 나열하면 무려 45㎞(약 112리)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소상이나 벽화에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것이 이른바 ‘둔황문서’다. 한문,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쿠처어, 호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문서는 모두 합쳐 3만여 점이나 된다. 문서의 내용을 보면, 불교 관련 내용이 중심이지만, 동서 교류 관계를 전해주는 <왕오천축국전>이나 <인도제당법> 같은 진서, 마니교와 경교의 경전도 있으며, 지어 사원의 경영기록이나 호적, 토지문서 같은 공사(公私)문서도 있다. 그 보물들은 근 백년 동안 명맥을 이어오는 ‘둔황학’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고 있다.
7. 중국 연산의 경교 십자사
북경 동남쪽의 도시, 燕山에서 5분쯤 더 차를 타고 들어 간 후 三盆山을 올라가면, 오솔길을 따라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북경에서 가장 오래 전에 기독교를 접한 나무에 해당한다. 바로 北京 房山區 周口店 車廠村 三盆山에 있는 唐代 景敎 寺院, 十字寺의 은행나무인 것이다. 현재 敎堂은 없고, 舊地와 碑文, 龜趺石 등만 남아 있다. 元代에는 也里可溫의 발전에 힙 입어 많은 十字碑가 세워졌는데, 북경 十字寺 안에 있는 두 개의 碑文에는 元代에 이 十字寺가 重修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元의 멸망과 함께 기독교 유적 또한 모두 훼손되고 말았지만, 이 十字寺는 郊外에 위치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75년경에 十字寺의 수도사였던 列班 掃馬와 東勝州 사람 馬忽思가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오늘날의 이라크 바그다드에 간 적이 있는데, 당시 景敎의 總主敎인 아브라함 3세가 馬忽思를 북경 주교로 임명하고, 列班 掃馬를 순회 감독으로 동방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아브라함 3세의 急死로 인해 새로운 總主敎 선출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馬忽思가 總主敎로 피선되어 雅八 阿羅河 3世로 봉해지고 말았다. 한편, 1287년 掃馬는 영국, 프랑스, 교황을 방문하여 기독교 국가인 元을 소개하였고, 1289년 교황 니콜라이 4세는 프랜시스칸 수도사인, 이탈리아 사람 요한 몬테코르비노(約翰 蒙特 科維諾)을 교황청 사절로 임명하여 중국에 보냈다. 1294년 코르비노는 북경(大都)에 도착하여 元 정부의 접대를 받았으며 성종(成宗)은 직접 그를 접견하고 중국에서 자유롭게 전교활동을 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천주교당을 열게 해 주었다고 한다.
(김병태 / 중국사회과학원연구생,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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