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4. 다윗성 지역

★ 다윗성(city of David):

영국신사77 2008. 9. 7. 01:43

 

   2007-03-02 15:24:39 
                                         다윗성(city of David): 번역 최상연
 
                                                                                                                         오택현교수
  

        

워렌스 샤프트

 

 


           

              실로암 연못

 

 



 국립공원 다윗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막 역사의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낸 이스라엘 왕국에 있었던 고대 성서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우리는 다윗성의 벽들과 망대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여부스족들로부터 성을 정복한 다윗왕의 흥분을 상기시킬 것이다.

 

 기혼샘에서 우리는 위대한 솔로몬왕이 기름부음을 받았던 자리와 히스기야가 암석 밖으로 놀랄만한 실로암 터널을 파낸 자리를 보게 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주의를 기울이고 듣는다면, 여러분은 유적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들의 말들을 듣게 될 지도 모른다. 그들의 정의와 도덕의 사상들이 시대를 관통하여 메아리치고 있다.

 

 여러분들이 들어가고 있는 그 지역은 비교적 작지만 기억하라. 성서의 예루살렘이 세계의 어떤 다른 도시들보다 인류에게 더욱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다윗성은 그것이 전부 시작되었던 장소이다.

  다윗성이 지어진 산마루는 성전산의 남쪽에 위치에 있고, 전략적으로 사방이(북쪽을 제외하고) 기드론과 티로푀온(또는 중앙) 골짜기에 의해 둘러쌓여 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풍부하게 흐르고 있는 수원지인 기혼샘 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 산마루는 선사시대의 금석병용시대에 이미 주거지화 되었지만, 그 도시를 요새화한 첫 번째 흔적은 -아브라함의 시대인- 대략 4,000년 전인 중기 청동기 Ⅱ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도시가 비교적 작은 규모였을 동안[12 에이커:여의도 면적의 약6배], 그것은 강하게 요새화되었다. 견고한 성벽들과 망대들 그리고 정교한 워터시스템은 성경이 족장들의 시대에 그 도시를 언급한 것처럼 “살렘-평화로운 or 예루살렘”이 높은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였던 강력한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창세기는 “왕의 계곡”에서 바로 이 성벽들 바깥에서 일어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사이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다(창 14:17-20).

 

 여호수아가 가나안 사람들을 쳐부수었으나, 예루살렘은 다윗이 자신의 백성들을 이끌고 여부스족을 정복하고, 이스라엘민족 정착지의 중심부에 이스라엘 지파 동맹의 첫 번째 수도로 확립하였던 주전 10세기가 되기까지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다.

   다윗은 그의 궁전을 여기에 지었고, 그 성을 요새화하였고, 장소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되어졌다. 언약궤가 성곽 안에 놓여 졌고, 그는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장소로 숭고한 지위를 그의 새로운 수도위에 부여하였다.

 

 이후 정부 소재지는 신성과 더불어 가게 되어졌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전통적으로 이삭을 결박하였던 장소로 알려진 모리아산 위인, 그 성의 북쪽에 커다란 성전을 지음으로 이 정책을 강화하였다.

   일시적으로 통일되었던 왕국은 솔로몬 사후에 분열되어졌다. 다윗의 가문은 거의 400년 동안 유다를 통치하였고, 얼마간은 번영하였다. 그러나 그 도시는 빈번하게 유다 열왕들을 희생하여 자신들의 국경을 확장하기를 열망하는 신흥제국들에 의해 압제 당하였다.

 

 예외적인 지도자가 한 사람 있었다면 주전 8세기 말이 끝나갈 무렵의 히스기야였다. 성경은  강력한 앗시리아 군대의 피할 수 없는 공격에 대한 히스기야의 준비들을 묘사하고 있는, 그 유명한 산헤립으로부터의 기적적인 구출에 대한 생생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

 

 히스기야는 기혼샘으로부터 실로암 연못안으로 직접 연결되는 긴 수로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그 성벽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적들의 포위에 의해 방해 받지 않는 흐름을 제공하는 예루살렘의 생명수가 되었다. 그 물은 바로 오늘도 터널안에서 흐르기를 계속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그 시기를 면하게 되었지만, 100년이 조금 더 지난 후에 새로운 제국, 바빌론이 유다 왕국의 끝을 가져왔다. 주전 586년 아브달에 무서운 포위공격이 있은 후, 느부갓네살은 성전을 파괴하였고, 기근 들린 도시는 전소되었다. 약 70년 후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 수여된 허락과 함께 유대 포로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바로 그것의 폐허위에 제 2 성전의 기초를 쌓고 다윗성을 재건하였다. 그들의 뒤를 이어 학사 에스라가 들어와 널리 퍼진 종교를 재편성하였고, 페르시안 유대총독으로 선출된 느헤미야가 느부갓네살에 의해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다.

 서기 70년 제 2 성전의 파괴와 함께 다윗성은 버려졌고, 잔해물들은 그것의 계곡과 연못들 위로 쌓여졌다. 그것은 올드 시티의 오토만 성벽의 바깥쪽에 성서 예루살렘의 유적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를 이끌어 오펠 언덕에서 제 1 성전의 성채와 비밀 수로 시스템을 발견한 (경의를 표하며 워렌 쉐프트라고 명명하였다.) 영국의 고고학자 찰스 워렌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잃어버릴 뻔하였다.

 

 그 후  6일 전쟁 후 당신이 막 방문하려고 하는 그 장소가 정말로 진짜라는 것을 의심 없이 - 성서 예루살렘의 고대 심장부…그 모든 것은 어디에서 시작하였는지! - 증명하는 현재까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을 포함한 전 세계로부터 훨씬 많은 탐험가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 주요 유적들

                                                          1. 워렌의 샤프트

 예루살렘의 주 수원지는 다윗성의 동쪽 경사면의 하부에서 흐르는 기혼샘이다. 중기 청동기 Ⅱ 시대 동안에, 요새화된 연못으로 통하게 한 비밀 지하 터널은 언덕의 동쪽 경사면 안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우리가 막 들어가려고 하는 수로시설로, 1867년에 그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찰스 워렌의 이름을 따 명명되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스템이 다윗이 그 성을 정복하게 하였던 그 ‘취노어’-수로나 관으로 다양하게 번역하였다-라고 믿었다:

 

  “다윗이 시온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로로 올라가서...”(사무엘하 5:7-8).

 

고 말하였다.

 

 고대 터널 안으로 인도하는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라. 그리고 계속해서 여러분이 깊이 13m 보다 더 내려가는 수직갱도의 꼭대기에 다다를 때까지 다른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라.



  

                                                           2. 기혼샘

  기혼은 층계의 밑바닥에서 지하 동굴로부터 나오는 카르스트샘이다. 과거에 물의 흐름은 썰물과 밀물로 서로 교체하였다.- 성경에서 기혼 (“폭발”)이라는 이름은 이것을 암시할지도 모른다.

 

 그 샘은 성민들의 식수로 사용되어졌고, 또한 남쪽으로 수로를 내어 기드론 계곡의 들판에 물을 댔다.

 

 다윗의 아들 솔로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그 샘에서 (위에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솔로몬을 다윗왕의 노새에 앉혔고, 그를 기혼샘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사독 제사장은 성막 밖으로 기름 뿔병을 취하여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그들은 수양의 나팔을 불었고; 사람들은 모두 ‘솔로몬 왕이여 장수하소서’”(왕상 1:38-39)

 

 라고 말하였다.

 

 그 물은 또한 성전 종교의식을 위해 사용 되어졌으니; 초막절 의식과 정결예식에 제주로 사용되어졌다.  

  

                                                     3. 히스기야 터널

  앗시리아왕 산헤립이 주전 701년에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 성을 방어하기 위한 유다왕 히스기야의 준비는 성을 요새화하였고 성벽으로 그것의 새로운 병영을 둘러쳤다. 그는 또한 기혼으로부터 그가 그 성의 남쪽 성벽 내부에 건축하였던 연못 안으로 물길을 돌렸다.

 

      “히스기야가 기혼샘물의 위쪽을 막았고

      그것을 다윗성 서쪽 아래로 곧장 끌어 왔다.(역대하 32:30)

 

 히스기야의 새로운 시스템은 비범한 공학기법이었다: 533m의 굴은 얇은 암벽 안으로 지하 터널을 판 것이다. 터널이 끝나기 전 작업과정을 기술한 약 6m 정도의 고대 히브리 비문이 1880년에 발견되었다.


 “굴파기가 [완성되었다]. 여기에서 그것은 우연히 일어났다. 갱도들로 각 사람은 자신의 동료쪽으로 도끼를 휘둘렀고 관통이 3규빗[1.35m]쯤 남았을 때, 자신의 동료를 부르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은 오른쪽과 왼쪽 위에 틈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굴이 뚫렸을 때,  갱도들은 각각 다른 사람을 향하여 도끼와 도끼를 내리쳤고, 그리고 물은 샘에서 연못으로 길이 1,200 규빗[540m]을 흘렀고, 바위의 높이는 갱도들의 머리 위로 100규빗[4.5m]이었다.”

 

 도보로 터널을 통과 하기까지는 대략  30분쯤 걸린다. 물은 약 70cm 깊이 이다. 여러분은 손전등을 휴대하고, 물로 걸어갈 수 있는 적당한 신발을 신어라. 양초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4. 실로암 연못

  터널을 출발해서 층계를 올라가고, 제 2 성전 시기 실로암 못까지 새로운 발굴물들을 지나서 왼쪽으로 돌아라.

 

 오늘날 터널로부터 물을 공급받는 작은 실로암 못은 비잔틴 시대(4세기)에 세워진 못의 일부분이다.

 

 고고학자들은 제 2 성전시기 동안 그 물이 남쪽으로 흘러갔고, 다른 커다란 못 즉 2004년 여름의 발굴로 처음 밝혀졌고 존재까지 발굴되어졌던 인상적인 유적인 그 못에 모아졌다고 믿는다.

 

 고고학자들은 이 못이 제 1성전 시기부터 히스기야 왕이 기혼샘으로부터 물의 흐름을 전환하였던 시가까지, 고대 실로암 연못터 위에 지어졌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