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43.
팔레스타인에 헤로데(헤로드) 왕조를 건설한 이두마이아인(人).
로마를 이용해 유대에서 권력을 잡았다. 안티파트로스의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카이사르는 그를 BC 47년 유대의 프로쿠라토르(행정장관)로 임명했다.
안티파트로스는 4년 뒤 정적에게 암살당했지만, 그의 아들인 대왕 헤로데 1세는 나중에 로마에 의해 유대의 왕이 되었다.
?~BC 30 예루살렘.
유대 민족의 대제사장(BC 76~40).
그의 형제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함께 통치한 마카베오( 하스모니아) 왕조의 마지막 군주이다.
히르카누스의 우유부단한 통치하에서 유다(전통적으로 3개 지역으로 나뉘어온 고대 팔레스타인의 남부지방이며, 지금의 이스라엘에 해당함)는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히르카누스는 BC 76년에 아버지가 죽자 대제사장에 임명되었으며, BC 67년 어머니가 죽었을 때 통치권을 물려받았다. 3개월간 혼란스런 시기가 지난 끝에, 그의 형제 아리스토불루스는 그를 쫓아내고 권좌를 차지했다.
히르카누스는 이두매(히르카누스의 할아버지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정복했던 인접 지역)의 총독 안티파트로스에게 조언을 요청했다. 히르카누스의 유약한 의지를 간파한 안티파트로스는 그를 이용하여 유대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내다보고, 그에게 아리스토불루스와 전쟁을 벌이도록 설득했다.
이 두 형제는 잔인한 전투를 벌인 후에,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중재자가 되어달라고 호소했다. 폼페이우스 역시 히르카누스를 통해서 유대를 손에 넣을 의도로, 그를 대제사장직에 복위시키고 세속적 권한도 주었다.
히르카누스는 나머지 생애 동안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손에 좌우되었다. 그는 군사령관(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직위를 박탈당했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물리칠 때 그를 도운 대가로 복권되었다.
그후 BC 42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안티파트로스의 두 아들 헤로데와 파사엘을 유대의 분봉왕(군주)으로 임명함으로써 그는 무력하게 되었다.
BC 40년에 유대를 침략한 파르티아 사람들(지금의 이란 코라산 지방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주했던 고대 민족)은 히르카누스의 야심만만한 조카 안티고누스의 충동으로, 히르카누스의 귀를 잘라 대제사장의 자격을 잃게 했다.
바빌로니아에 유배당한 히르카누스는 BC 36년에 헤로데에 의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6년 뒤 헤로데는 민중들이 히르카누스를 지지함으로써 일어날지 모르는 위협을 없애버리려고 그를 처형했다.
BC 73~BC 4. 3/4 유대 예리코.
로마 제국이 임명한 유대의 왕(BC 37~4 재위).
그는 많은 성채·수로·극장·공공건축물을 세웠으며, 전반적으로 유대를 번영시켰지만 말년에는 정치적 음모와 골육상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신약성서〉는 그를 전제군주로 묘사하며, 나사렛 예수가 그의 왕국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헤로데는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안티파트로스는 에돔 사람(사해와 아카바 만 중간 지역에 사는 아랍인)이었다. 안티파트로스는 큰 영향력과 부를 지녔고, 당시 부흥하던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요르단 강 남서부) 출신의 귀족 딸과 혼인하여 그 영향력과 부를 더욱 증가시켰다.
그러므로 헤로데는 비록 유대인 행세를 했으나, 부계와 모계 둘 다 아랍 혈통이었다. BC 63년 폼페이우스(BC 106~48)가 팔레스타인을 침공했을 때 안티파트로스는 그의 원정을 지원함으로써 로마와 오랜 관계를 시작했고, 로마로부터 그와 헤로데는 혜택을 받았다.
6년 뒤 헤로데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나 평생 친구가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헤로데 가문을 좋아하여 BC 47년 안티파트로스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는데, 그 신분은 헤로데 및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계승되었다. 같은 해 헤로데는 아버지로부터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받아 정치무대에 나섰다. 6년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를 갈릴리 분봉왕으로 삼았다.
BC 40년 파르티아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침공하고 내전이 일어나자 헤로데는 로마로 도망갔다.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유대 왕으로 임명하고, 그 지역을 충분히 장악할 만한 군대를 주었다.
BC 37년 헤로데는 36세의 나이에 감히 아무도 도전하지 못하는 유대의 통치자가 되어 32년 동안 그 지위를 유지했다. 권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아내 도리스와 이혼하고 그녀를 아들과 함께 궁 밖으로 쫓아낸 뒤, 하스몬 왕가의 공주 마리암과 재혼했다. 그가 재혼한 목적은 유대 민족의 지도자이며 제사장 가문인 하스몬가(家)와의 불화를 끝내려는 것이었지만, 결혼한 뒤 마리암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두 집정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카이사르의 권력을 계승하기 위해 갈등이 생기자, 헤로데는 친구 안토니우스를 지원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정부이며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을 이용해 헤로데의 가장 좋은 영토를 많이 차지했어도 안토니우스를 계속 지원했다.
BC 31년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가 최종적으로 패배한 뒤 헤로데는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자기가 누구 편을 들었는지 솔직히 고백했다. 이전에 로마에서 헤로데를 만난 적이 있던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로마가 원하는 대로 팔레스타인을 다스릴 유일한 인물임을 알고서 그를 다시 왕으로 인정해주었으며, 또한 클레오파트라가 차지했던 땅을 헤로데에게 돌려주었다.
헤로데는 아우구스투스의 대행정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손자와 증손자의 이름을 지었다. 황제와 대행정관은 헤로데에게 국빈으로 로마를 방문할 기회를 주어 그는 다시 이탈리아를 2번 방문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에게 키프로스 구리 광산 감독권을 주고 이익의 절반을 할당해주었다. 그는 BC 22, BC 20년에 헤로데의 영토를 2배로 늘려주었기 때문에 헤로데의 영토는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요르단 강 동편, 즉 오늘날 요르단 왕국의 일부지역과 레바논 남부, 시리아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는 원래 나바테아 왕국도 헤로데에게 줄 뜻이 있었지만, 당시 그 왕국의 권좌가 공석이었을 당시 헤로데가 정신과 육체 모두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로데는 자기 영토에 수많은 요새와 화려한 도시들을 건설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두 도시는 주로 이교적인 새 도시로 하나는 요파(야파)와 하이파 사이의 해안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항구도시 카이사레아로, 훗날 로마령 팔레스타인의 수도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고대 사마리아의 옛 터에 세워진 세바스테였다.
그는 예루살렘에는 안토니우스 요새와 웅장한 왕궁(그 일부가 성채 안에 남아 있음)을 지었다 (→ 예루살렘 성전). 안토니우스 요새는 그 일부가 오늘날 비아 돌로로사(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걸어간 길)에 세워진 수도원들 밑에 남아 있다. 그가 지은 건축물들 가운데 가장 웅장한 것은 성전으로서, 그는 그 전체를 다시 건축했다. 넓이가 14ha에 이르는 성전 바깥 뜰은 오늘날도 '알 하람 아시 샤리프'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는 또한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로도스 등 외국 도시들과 많은 성읍들을 장식했다.
헤로데는 올림픽 경기의 의장이 되어 그것을 후원했다. 자기 왕국에서는 유대교의 주도적인 파벌인 바리사이파를 거스르는 것을 우려하여 마음껏 자기를 과시하지 못했다. 바리사이파는 그를 외국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언제나 그와 대립해 있었다. 헤로데는 자기에게 감사해 마지않는 이교도들의 후원자로서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바깥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의 보호자로도 자임했고,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 군주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불행하게도 헤로데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뚜렷하게 어둡고 잔인한 성격을 드러냈다. 더구나 그의 정서불안은 가정 내부에서 계속된 음모와 술수 때문에 더욱 깊어졌다. 마리암을 깊이 사랑한 그는 질투심이 일어나면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헤로데의 누이 살로메(그녀의 증조카, 즉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는 다른 인물)는 남을 쉽게 의심하는 그의 성격을 교묘하게 이용해, 헤로데가 아내를 미워하게 만들어 두 사람의 관계를 깨뜨렸다. 결국 헤로데는 마리암과 그녀를 통해 낳은 두 아들, 그녀의 오빠와 할아버지, 그녀의 어머니를 모두 살해했는데, 마리암의 어머니 또한 야비한 사람으로서 살로메의 음모를 종종 돕곤 했다. 헤로데는 도리스와 마리암 외에도 8명의 아내가 더 있었으며, 그 가운데 6명의 아내를 통해서 14명의 자녀를 낳았다.
헤로데는 말년에 동맥경화증을 앓았다. 그는 1차례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고 이웃나라인 나바테아와도 분쟁을 겪어야 했으며, 결국 아우구스투스의 신망을 잃고 말았다. 그는 큰 통증에 시달렸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또 3번이나 후계자 문제에 자기의 뜻을 번복하다가, 왕위를 물려주던 맏아들 안티파테르를 살해했다. 그가 죽기 직전에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일은 전적으로 그가 빠져 있던 혼란과 일치한다. 헤로데는 1차례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한 뒤에 죽었다. 그는 마지막 유언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재가를 받는 것을 전제로 한 뒤, 자기 영토를 3명의 아들에게 나누어주어 아르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왕이 되도록 했고, 필립보와 안티파스에게는 분봉왕들로서 나머지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도록 했다.
S.H. Perowne 글
* 마리암네 [Mariamne]
BC 57경~29경.
유대의 왕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전승에 나오는 유명한 여걸(女傑).
유대의 헤로데 왕과 결혼함으로써(BC 37년), 헤로데의 가문을 폐위된 하스몬 왕가(마카베오 가문)와 결합시켜 헤로데의 지위를 합법화시켰다.
그러나 헤로데의 여동생 살로메와 마리암네의 어머니 알렉산드라가 선동하여 헤로데는 그녀를 간음죄로 사형시키고, 뒤에 마리암네가 낳은 2명의 아들, 알렉산데르와 아리스토불루스 역시 사형시켰다.
* 아그리파 [Marcus Vipsanius Agrippa]
BC 63(?)~BC 12 캄파니아.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강력한 부관(副官).
아그리파, 대리석 흉상(BC 1세기초), 파리에 있는 Musee du ... |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무찌르는 데 으뜸 가는 공을 세웠고, 아우구스투스의 재위중에는 여러 반란을 진압했으며, 식민지를 건설하고 로마 제국 여러 지역의 행정을 관할했다.
평범한 가문의 출신이지만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던 아그리파는 로마 귀족계급의 미움을 샀다. 스스로를 위해 그는 아우구스투스와의 관계에서 주의깊게 종속적인 역할을 견지했지만, 그밖에는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의 초기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사실상 전혀 없고 BC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살해당하던 때에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서 옥타비아누스(뒤에 아우구스투스황제)의 동료로 있었다는 것이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와 자신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선포했다. BC 43년에 아그리파는 평민계급을 대변하는 호민관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직책의 권한으로 당시 동방에 나가 있던 카시우스를 고발한 듯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의 핵심적인 군사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BC 41~40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를 상대로 싸웠고, BC 40년에는 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주로 로마의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행정관)를 맡았으며, 브룬디시움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사이의 협상을 타결짓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이후 2년간 그는 로마를 떠나 아퀴타니아와 라인 지방에서 활약했다.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북방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극구 사양했다. 그는 BC 37년 콘술(집정관) 직책을 맡았다. 그해 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타렌툼에서 협정을 맺었으며, 바로 이 시기에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부유한 친구 티투스 아티쿠스의 딸과 아그리파의 결혼을 주선했던 것 같다.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을 지지하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장군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바다에서 저지하려다 실패했으며, 따라서 아그리파가 해상작전의 책임을 맡았다. 아그리파는 나폴리 만에 있는 푸테올리에 훌륭한 항구를 건설하고, BC 36년 밀라이와 나울로쿠스에서 2차례 해전을 벌여 결정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폼페이우스의 위협을 종식시켰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아그리파는 금관을 받았다.
BC 35~34년에 옥타비아누스는 달마치야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도 아그리파가 탁월한 공로를 세웠다. BC 33년에 아그리파는 로마에서 아이딜리스[造營官:공공건축과 토목공사를 담당하는 행정관]를 지냈는데, 이는 앞서의 콘술보다 훨씬 하급 직책이었다. 그는 이 직책을 맡는 동안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해, 목욕탕을 짓고 하수도를 청소하고 수도시설을 개량해 사람들이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마침내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정면으로 충돌했을 때, 아그리파는 함대 지휘관으로서 옥타비아누스의 승전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악티움 해전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를 떠나 있는 동안 아그리파는 시인들의 후원자였던 마이케나스와 함께 도시의 행정을 맡아보았다.
BC 29~28년 아그리파와 옥타비아누스는 공동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원로원의 숙정(肅正)을 단행했다. BC 28~27년에 아그리파는 다시 콘술을 맡았으며, 2차례 모두 옥타비아누스(BC 27년부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와 함께 공동 재임했다.
정치체제의 위기가 닥친 BC 23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병이 들자, 자신의 옥새 반지를 아그리파에게 선물했다. 이로써 아그리파는 황제의 후계자로 지명된 듯했다. 아그리파는 앞서 4~5년 전에 아내(아티쿠스의 딸)와 헤어지고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 대(大)마르켈라와 재혼했으나 다시 이혼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를 아내로 삼았다.
그 직후 아그리파는 레스보스 섬에 있는 미틸리네에 가서 동방의 행정 업무를 관장했다. 그당시 아그리파의 헌법적 권한(임페리움)이 어떤 성격을 띠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원로원이 BC 23년 동방의 속주 총독보다 높은 '임페리움'의 지위(임페리움 마유스)를 그에게 주었다고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다. 로마 역사가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 아그리파가 당시 미틸리네에 머문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조카 마르켈루스를 편들어 아그리파를 추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아그리파는 이내 로마로 돌아왔으며, BC 22년에 황제가 친히 동방으로 떠나자 그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돌아오기 전인 BC 19년에 아그리파는 갈리아와 스페인으로 떠났고, 마침내 스페인에서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던 칸타브리아인들을 진압하는 전과를 올렸다.
BC 18년에 로마로 돌아온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가 보유하고 있었던 호민관의 권한(tribunicia potestas)을 똑같이 받았다. 아마 임페리움 마유스의 지위도 그가 BC 23년에 받은 것이 아니라면 이때 받았을 것이다. 그는 BC 17년에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루디사이쿨라레스(100년제)에 참가한 뒤,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동방으로 돌아갔다.
BC 15년에 그는 대왕 헤로데 1세의 초청을 받아들여 유대를 방문했다. 동방에 머무는 동안, 레바논에 있는 베리투스와 헬리오폴리스에 퇴역병사들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어서 그는 흑해 연안에 있는 보스포루스 왕국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손 폴레모를 왕으로 앉혔다. 헤로데는 보스포루스 사태 때 함대를 이끌고 아그리파를 지원했으며, 그 일이 마무리된 후 두 사람은 소아시아 서부의 해안지방을 함께 둘러보았다.
BC 13년에 아그리파의 호민관 임기는 다시 갱신되었고, 이때는 확실히 임페리움 마유스의 지위를 받았을(또는 갱신) 것이다. 그는 판노니아에 분란이 일어나자 출정을 해야 했으나, BC 13~12년 혹독한 겨울 추위로 치명적인 병에 걸려 BC 12년 3월에 죽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동료였던 그를 기리는 장례연설을 몸소 했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그 연설의 일부분이 최근에 발견되었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가 그에게 내린 온갖 영예로운 찬사를 당연히 받을 만했다. 아그리파가 없었더라면 옥타비아누스는 황제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로마는 그가 수도·하수도·목욕탕을 돌보는 데 쏟았던 아낌없는 노력을 기억했다.
BC 20년대 중엽에 그는 유명한 판테온을 완성했다. 아그리파와 율리아 사이의 다섯 아이들 중에서 대(大) 아그리피나는 황제 칼리굴라의 어머니이며 황제 네로의 외할머니였다. 자서전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가 기록한 방대한 지리 자료는 지리학자 스트라보와 대(大)플리니우스의 현존하는 저서에 영향을 미쳤다.
G. W. Bowersock 글
헤로데 아켈라오[아르켈라우스:Herod Archelaus]
BC 22 유대~AD 18경 갈리아.
유대의 왕 헤로데 대왕 아들.
헤로데의 제1계승자였으나, 유대인들에게 평판이 나빴기 때문에 로마인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유대인 왕국(유대 본토, 이두매, 사마리아) 중 가장 넓은 지역의 왕으로 지명된 뒤 로마로 가서(BC 4) 아우구스투스 황제 앞에서 동생들인 필립보와 안티파스의 권리주장을 물리치고 왕위를 지키려고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에게 가장 넓은 지역의 소유권을 인정해주었으나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왕보다 한 등급 낮은 분봉왕(ethnarch)의 지위를 주어 로마에 대한 종속관계를 강조했다. 이두매인과 사마리아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켈라오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유대인 신하들에게 이방인 압제자로 간주되었다. 유대인 신하들이 그에 대해 계속 불평하자 아우구스투스는 6년에 그를 로마로 소환했다.
후에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가 그를 변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켈라오는 왕좌를 빼앗긴 채 갈리아로 유배되었다. 마태복음 2:22에 따르면, 예수의 가족은 아켈라오의 폭정을 두려워하여 그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갈릴리 나사렛에 정착했다고 한다.
마태복음 2:19, "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헤로데 안티파스 [Herod Antipas]
BC 21~AD 39.
유대 왕 헤로데 대왕의 아들.
갈릴리 분봉왕이 되어 나자렛 예수가 선교활동을 하던 때에 갈릴리를 다스렸다.
BC 4년경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안티파스의 아버지 유언을 인정하여, 아버지가 다스리던 왕국의 일부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죽고 나서, 아버지의 유언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입었던 피해를 복구했다. 도시 둘을 복구했는데, 이중 하나는 로마의 황족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바꾸어 붙였다.
그는 자신의 왕국과 인접해 있던 사막 왕국의 공주인 나바테아인(人)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의 배다른 형제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재혼했다. 이 결혼으로 그의 예전 장인의 심기를 건드리고 유대인 신하들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
그의 치하에 있던 세례 요한이 이 결혼을 이유로 헤로데를 비난하자, 헤로디아는 헤로데를 부추겨 요한을 감옥에 가두도록 했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딸 살로메를 충동하여 그녀가 헤로데의 생일 축하연에서 춤을 추는 대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하게 했다. 안티파스는 마지못해 요한을 참수했는데, 그뒤 예수의 기적에 대한 소문이 들려오자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자,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내고 있던 안티파스에게 먼저 보냈다. 왜냐하면 예수는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갈릴리 지역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안티파스는 예수의 또다른 기적들을 보려고 예수를 만나고 싶었으나 재판하는 것을 꺼려 그를 곧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눅 23:6~12).
누가복음 23장 6,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이보다 먼저 안티파스는 갈릴리 해 서부 해변에 부분적으로 그리스 도시를 모방한 티베리아스라는 도시를 세웠다. 안티파스는 궁전 안에 그리스 양식의 조상(彫像)들을 세웠으나 동전에는 인물상을 넣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신을 지지하고 로마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부유한 유대인 집단인 헤로데당을 격려했다.
로마 제국 황실과 가까웠던 그는 36년 로마-파르디아 협상의 중재역을 맡았다. 그의 공로로 협상은 성공리에 끝났으나, 이 소식을 로마에 경솔하게 보고하여 이후 황제가 된 로마의 시리아 대사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의 분노를 샀다.
37년경 안티파스가 이혼한 이전 아내의 아버지인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4세가 안티파스의 왕국을 공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안티파스가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자 황제는 비텔리우스를 파견했으나, 그는 여전히 안티파스에게 악감을 지닌 채 일부러 최대한 느릿느릿 이동했다.
37년 칼리굴라가 로마의 황제가 되자 헤로디아는 그녀의 오빠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득세를 시기하여 남편 안티파스에게 아그리파를 황제에게 탄핵하도록 설득했으나, 칼리굴라 황제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그리파는 안티파스의 음모를 예견하고 그를 고발했다.
칼리굴라는 안티파스를 갈리아로 추방했으며, 헤로디아도 남편과 함께 그곳에서 지냈다. 또한 아그리파는 안티파스의 영지를 합병했다.
?~39 이후.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의 분봉왕(分封王) 헤로데 안티파스(BC 4~AD 39 재위)의 아내.
음모를 꾸며 세례자 요한을 처형하게 만들었다. 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동생과 이혼한 뒤, 역시 이혼한 헤로데 안티파스와 혼인했는데, 이 일로 요한에게 모세 율법을 범했다고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마르코의 복음서〉(6:19~20)에 따르면, 일찍부터 요한을 죽이고 싶어했으나 헤로데가 요한을 무서워하여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헤로데의 생일 축하연에서 헤로디아는 자기를 꾸짖은 요한에게 보복할 기회를 잡았다. 첫 남편에게서 낳은 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 헤로데를 즐겁게 하자, 헤로데는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어머니에게 충동을 받은 살로메는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갖다줄 것을 요구했고, 헤로데는 내키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지켰다.
헤로디아는 또한 남편에게 얼마 전 갈릴리 바다 동편에 있는 바타나이아와 트라코니티스의 분봉왕으로 임명된 자신의 오빠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평판을 떨어뜨려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황제 칼리굴라에게 반감을 사 39년에 추방당했다.
필리푸스 [Philippus]
BC 20~AD 34.
헤로데 1세 대왕의 아들.
아버지가 다스린 유대 왕국의 1/4에 해당하는 북동부 지역을 유능하게 다스렸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헤로데의 유언을 조정하여, 필리푸스에게 갈릴리 해 동쪽 지역을 할당했다. 이 지역은 오늘날 이스라엘 북부와 레바논 및 시리아 남부에 해당한다.
6년에 그는 유대를 잘못 다스린다는 이유로 이복형을 비난하는 데 가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후 유대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기 때문에, 그 자신은 거의 이익을 얻지 못했다.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그가 상속한 몫은 가장 빈약했지만, 그는 그 땅을 잘 다스렸다. 그의 백성 중에는 유대인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가 만든 동전에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으며, 그는 갈릴리 해 북해안에 베트사이다(성서의 벳새다)를 재건하고 황제의 딸을 기려 도시 이름을 율리아스로 바꾸었다. 그는 요르단 강 발원지 근처에도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방식에 따라 그 도시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필리푸스는 형제들만큼 사치스러운 통치자가 아니었다. 그는 로마까지 가는 긴 여행을 피하고 그 대신 자신의 영토를 널리 여행했으며, 자신의 백성에게 많은 시간을 바쳤다.
통치 말년에는 헤로디아스의 딸 살로메와 결혼했다. 살로메의 어머니 헤로디아스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례 요한을 처형 하도록 일을 꾸밀 때, 딸 살로메를 앞잡이로 이용했다.
헤로데 아그리파 1세 [ Herod Agrippa I]
본명은 Marcus Julius Agrippa.
BC 10경~AD 44.
유대의 왕(41~44 재위).
로마 황실과의 친분을 활용해 할아버지인 헤로데 대왕의 유대 왕국을 차지할 만큼 외교수완이 뛰어났다.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의 연대가 강화되도록 능력을 발휘했다.
헤로데 대왕의 아들이며 아그리파의 아버지인 안티파테르가 헤로데 대왕의 의심을 받아 처형된 뒤, 교육과 신변안전을 위해 로마로 보내졌다. 로마에서 성장하면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들인 드루수스와 친분을 맺었다. 어머니가 죽은 뒤 가산을 탕진하여 많은 빚을 졌다.
23년 드루수스가 죽자 로마를 떠나 팔레스타인 브엘세바 근처에 정착하고, 갈릴리 분봉왕으로 있던 삼촌 안티파스에게 호소하여 하급관리를 맡았으나 그만두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상당한 빚을 진 채 36년 로마로 돌아왔으나,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가 빚을 청산하기 전에는 궁정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다른 빚을 내서 부채를 갚은 뒤, 티베리우스의 손자를 가르치는 가정교사직을 맡게 되었으며, 티베리우스의 후계자인 칼리굴라와도 친구가 되었다. 티베리우스를 욕하는 말이 하인의 귀에 들어가 투옥되었으나 칼리굴라와는 계속 친하게 지냈다.
티베리우스가 죽은 지 1년도 안 되어 그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37년 칼리굴라는 아그리파를 그의 삼촌인 분봉왕 필립보가 다스리던 영토와 인근지역의 왕으로 임명했고, 삼촌인 안티파스가 쫓겨난 뒤에는 그의 영토도 차지했다.
41년경 아그리파는 시리아 총독의 충고에 따라 칼리굴라를 설득하여 예루살렘에 황제숭배를 도입하지 못하게 했다. 그뒤 칼리굴라는 아그리파에게 할아버지의 왕좌를 회복시켜주려고 했으나, 이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암살당했다. 황제 계승문제를 둘러싼 미묘한 정세 속에서 아그리파는 클라우디우스를 지지했으며, 클라우디우스는 황제로 등극한 뒤 아그리파에게 유대 왕국을 할양했다.
유대에서 아그리파는 정통 유대교 정책을 열렬하게 추구하여 유대인들의 호의를 얻고, 유대계 그리스도교도들을 강력하게 억압했다. 그는 베드로를 투옥했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했다. 로마와의 친분관계를 염두에 두었던 아그리파는 레바논 베이루트에 공공 건물을 지어 기증했고, 로마와 경쟁이라도 하듯 화폐를 찍어냈으며, 44년 봄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기리기 위해 카이사리아에서 대규모 경기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44년 헤롯이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을 때,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향한 그의 연설을 그들이 신의 소리라 칭송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교만스럽게 받아들였다가 주의 사자가 치므로 곧 죽고 말았다.
사도행전 12장 21절,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1~23).
그후 그곳 가이사랴에서 아그리파가 죽자, 로마 당국과 유대인 자치를 타협시키려던 그의 노력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시들어버렸다.
그의 아들이 17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유대는 다시 한번 속국의 지위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아그리파를 헤로데라고 부르는 자료는 〈신약성서〉뿐이다.
헤로데 아그리파 2세 [Herod Agrippa II]
27~93경.
남부 레바논 칼키스의 왕, 남부 시리아의 바타나이아와 트라코니티스의 분봉왕(分封王).
66~70년 유대인 반란 때 반란군들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헤로데 대왕의 증손자였다.
로마 황실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다. 44년 아버지 아그리파 1세가 죽었을 때 17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유대를 왕국에서 속국의 상태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나이에도 유대인들의 번영에 관심을 기울여 유대인들에게 온건령(edict of moderation)을 내리도록 도왔다. 48년에는 예루살렘의 성전 업무에 관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50년에 칼키스의 왕이 되었으며, 53년 이 땅을 필리푸스 총독이 이전에 소유하던 땅과 바꾸었다. 54년 로마의 새로운 황제 네로는 갈릴리 해 근처의 영토를 아그리파가 지배하던 왕국에 합병시켜주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그리파 2세도 로마와 매우 열성적인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의 분쟁을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2~60년 여러 명의 대제사장을 임명해 반대파들의 증오를 사기도 했다. 그리스화된 사람들과 분쟁을 겪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의 권익을 옹호했지만, 유대에서는 어떠한 정책도 시행하지 않았는데, 이는 유대에 테러 집단인 열심당원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60년 사도 바울이 체포되자 그곳의 지방 행정관은 아그리파에게 바울의 처리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으며, 아그리파는 바울의 무죄를 입증했다(행 25:13-26:32).
사도행전 25장 22,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가로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 와서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6장 1,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66년 지방 행정관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카이사리아에서 유대인을 대량학살하자 예루살렘에서 열심당원들이 봉기했다. 아그리파가 플로루스를 지지하면서 자제할 것을 촉구했으나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열심당원들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의 왕국 내에서도 점차 위협이 고조되었다. 66년 여름 그가 예루살렘으로 파견한 군대가 패배했고 반란군들은 로마군을 섬멸했다. 67년 티투스의 군대가 도착하자 아그리파는 로마군의 작전을 도왔다.
70년 아그리파는 티투스의 아들을 도와 예루살렘을 최종적으로 점령했다. 전쟁이 끝난 뒤 아그리파의 영토는 티투스에 의해 더욱 확장되었으며, 아그리파는 93년까지 생존했던 것 같다.
주요 출처: 브리태니커 백과
'◈◈◈ 신약[新約]강해 > 신약[新約]강해[종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예수의 생애와 사역 (0) | 2008.09.14 |
---|---|
[스크랩] 신약 그림 자료 (0) | 2008.09.14 |
※※ 헤롯의 족보 (0) | 2008.09.03 |
빌라도와 헤롯 안디바(시대 구분과 연대기 이해의 중요성⑤) (0) | 2008.09.03 |
신약성경에 언급된 헤롯 왕가에 대한 설명 (0) | 2008.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