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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성서의 향기] (25) 그리스도의 무덤은 어디인가

영국신사77 2008. 8. 19. 22:30
 [新성서의 향기] (25) 그리스도의 무덤은 어디인가

                                                                2001.4.16. 국민일보

  1099년 6월 7일 예루살렘에 도착한 십자군들은 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부족한 물과

식량, 그리고 더위 때문에 십자군들은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성을 공격하고자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달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을 공략할 수 없자 7월 6일 아침 십자군의 한 사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3일 동안 금식을 하고 9일 동안 맨발로 예루살렘 성 주위를 돌 것을 제안했다. 그 사제는 요단강을 건넌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리고 성 주위를 돌고 7일째 성벽이 무너진 기적을 다시금 재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제의 행렬과 함께 멀리 사마리아 산지에서 운반해 온 목재로 공성용 장비들을 보강했다.

7월 10일 잘 만들어진 3개의 공성용 탑이 북쪽 성벽과 시온산 근처에 설치됐다. 1만 2천명의 보병과 1300명의 기병들로 구성된 십자군은 7월 13일 밤 본격적인 성 공격을 시도했다. 쏟아지는 대포알과 불화살을 뚫고 14일 밤 공성탑을 성벽 가까이에 접근시키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서기 1099년 7월 15일 아침 예루살렘은 함락됐다. 십자군들은 눈물을 흘리며 골고다의 성묘교회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서기 638년 예루살렘이 이교도의 손에 들어간지 450년 만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무덤이 다시금 기독교인들의 성지로 회복된 것이다.

오늘날 골고다를 찾는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예루살렘 성 내부의 복잡한 골목과 붐비는 인파 때문에 그리고 무덤 자체가 건물 내부에 그것도 원형 광장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서 도저히 그리스도의 무덤을 방문했다는 감동을 느끼기 어려운 실정이다. 수많은 십자군들이 목숨을 걸고 탈환하고자 했으며 신약시대 이래 전세계 수십억 기독교인들이 최고의 성지로 여겨왔던 예루살렘의 골고다 성묘교회는 과연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곳일까?

 

원래 골고다 지역은 구약시대부터 채석장으로 활용되던 곳이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 이 곳은 더 이상 채석장으로 사용되지는 않았고 여러 개의 바위굴 무덤들이 뚫려 있었다. 이때는 골고다가 성벽 밖에 있었지만 서기 41년 예루살렘의 헤롯 아그리파가 성벽을 확장했기 때문에 골고다가 성안에 들어오게 됐다. 따라서 당시 유대교 율법에 따라서 골고다에 매장됐던 모든 유골들은 성밖으로 이장됐을 것이다. 서기 135년 바르 코크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의 명칭을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바꾸고 전형적인 로마식 도시로 재건했다. 이 과정에서 골고다 채석장 자리는 흙으로 메워 거대한 언덕이 만들어졌고 그 위에 비너스 신전이 건설됐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서기 326년 비너스 신전을 헐어버리고 흙 속에 파묻힌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냈다. 서기 4세기 가이사랴의 대주교로서 교회사를 집필한 유세비우스는 당시 인부들이 신전을 헐었을 때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공사가 진행되어 지표의 흙을 파내었을 때 주님 부활의 거룩한 현장이 드러났다’. 이 구절은 훗날 그리스도의 나무 십자가를 발견했다는 전승으로 확대된다. 10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서기 335년 최초의 성묘교회가 완성됐다. 무덤 위에는 부활을 뜻하는 아나스타시스 돔이 건설됐다. 무덤 주위로 거대한 바위를 평지로 쪼아내는 작업은 서기 380년이 되서야 마무리됐다. 그 결과 바위굴 무덤은 원형 광장의 한 가운데 자리잡게 됐으며 무덤에서 동남쪽으로 50미터 떨어진 곳에는 누구든지 바라볼 수 있는 골고다 바위언덕이 있었다.

서기 638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아랍 통치자 오마르는 방문하여 기도해도 좋다는 성묘 교회측의 초빙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만일 그가 이곳에서 기도를 한다면 이 교회의 기독교적 거룩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겸손의 표시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훗날 서기 1009년 파팀 왕조의 통치자 하킴(Hakim)이 성묘교회를 완전히 파괴하는 계기가 된다. 왜냐면 만일 오마르가 다른 교회들처럼 이 곳을 이슬람교 사원으로 만들었다면 비잔틴 시대의 골고다 건축물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전산의 경우에서와 같이 어쩌면 골고다가 이슬람교의 성지로 둔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서기 1009년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의 무덤을 감싸고 있는 바위 언덕을 정으로 쪼아내 버렸다. 이 때부터 이 곳은 더 이상 무덤이라고 보기는 어렵게 됐다. 서기 1042년 비잔틴 황제 모누마쿠스는 파괴된 성묘교회를 재건했다.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십자군들은 그 후 50년 동안 무덤과 골고다 언덕 사이에 교회당을 새로 건설하면서 성묘교회를 재건했다. 비록 1808년의 지진과 1927년의 화재로 여러 부분이 파괴됐지만 오늘날의 성묘교회는 십자군 시대의 건물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이다.

조용한 정원 한 가운데 놓였을 요한복음서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무덤을 예상한다면 온갖 제의 기구와 향불과 등잔이 어지럽게 장식된 성묘교회의 현실은 실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더욱이 골고다의 성묘교회는 라틴 카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시리아, 콥트, 에티오피아 기독교 등 모두 여섯 교파가 각각 한 부분씩 차지하며 소유권을 주장하는데 반해서 개신교의 자리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새로운 골고다를 찾는 운동이 시작된다.

1894년 영국 성공회 소속의 ‘정원무덤협회’는 예루살렘 성벽 북쪽에 위치한 한 정원지역을 사들였다. 이 곳에 위치한 무덤과 근처의 바위언덕은 1883년 영국의 고든(C. Gordon) 장군에 의해 골고다로 인정된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은 일단 예루살렘의 성벽 밖에 위치하고 있고 정원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근처의 바위 언덕이 해골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적격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이 때부터 골고다 성묘교회의 역사적 신빙성이 의심받기 시작한다.

1974년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바르카이(G. Barkay)는 정원무덤을 공식적으로 조사한 끝에 이 무덤은 서기전 7세기에 건설된 전형적인 유다 왕정 시대의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무덤은 근처에서 발견된 프랑스 고고학 연구소 마당에 위치한 유다 왕들의 지하묘지의 일부이며 서기전 7세기의 토기가 함께 발견됐기 때문이다. 비록 예루살렘 주위에는 옛날 무덤을 다시 사용하는 사례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요 19:41)에 묻혔기 때문에 정원무덤을 더 이상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여길 수는 없다. 반면 성묘교회의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서쪽으로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서기 1세기에 만들어진 또 다른 신약시대의 한 무덤이 발견됐다.

/김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