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성지순례/이스라엘[종합]

아키바 벤 요셉 [Akiba ben Joseph]

영국신사77 2008. 8. 19. 21:58

 

                          아키바 벤 요셉 [Akiba ben Joseph]

 

  AD 40년경~135년경 팔레스타인(지금의 이스라엘) 카이사리아. 유대교 현인, 랍비 유대교를 세운 주요인물.

 유대교 구전 율법(할라카)을 해석하는 데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성서시대 이후 최초로 기록된 유대교 법전인 미슈나의 기초를 세워 놓았다. 널리 알려진 많은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이에 따르면 그는 글도 읽지 못하는 목자였으며, 40세가 넘어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헌신적인 아내 라헬은 이 힘겨운 만학 기간 동안 물심양면으로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그가 만난 중요한 스승들은 엘리에제르 벤 히르카누스와 요수아 벤 하나니야 같은 율법의 대가들이었다. 아키바는 베네베라크(지금의 텔아비브와 야포 사이에 있음)에 학교를 세웠고, 메이어와 시메온 요하이 등 다음 세대를 이끌고 갈 현인들을 길러냈다.

 

 아키바는 ' 미드라시'라고 하는 성서해석법을 완성했는데, 이것은 구전으로 인정되어온 법률·종교·윤리 등의 교리가 성서에 포함된다고 보는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성서는 표면적인 의미 외에도 함축적인 가르침이 가득한 책으로 이해되었다. 성서는 사실상 모든 것을 포괄한다. 따라서 성서의 '기록된 율법'과 전승의 '구전 율법'은 결국 하나이다. 2세기에 씌어진 많은 미드라시 작품들은 아키바 학파에서 나온 것이다. 그밖에도 그는 유대인의 개인·사회·종교 생활 등을 규제하는 구전 전승들을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래서 아키바는 ' 미슈나의 아버지'라고 불려왔다. 그의 성서관(聖書觀)을 비판한 당대의 랍비 이스마엘 벤 엘리샤는 '토라는 사람들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에 억지로 특별한 의미를 짜내려 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논리적인 해석규칙들을 사용하여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키바의 중요성은 랍비 학자로서 이룩한 업적과 당대의 현실에 끼친 인격적 감화에 있다. 그는 율법 문제에 대해서는 엄격했지만('판단에 긍휼이란 있을 수 없다!' 즉 긍휼은 율법을 정의하거나 해석하는 것과 무관하다고 봄),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여자들이 맡고 있는 역할을 높이 평가했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은 그 시대 여자들의 훌륭한 덕 때문이라고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겸손한 태도로 살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재판관이었던 그는 소송 당사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키바 벤 요셉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는 법률의 여러 주제들, 성서주석, 종교사상 등에 관해 강의했다. 그는 유대교 교훈의 핵심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함으로써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는가를 나타내 보이셨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며('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계시지만, 선택할 자유를 주신다'), 자신의 행위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 행위에 대한 보상은 장차 올 세상에서 비로소 주어질 것이다. 현세에는 많은 고통이 있으나, '고통은 소중한 것'이며, 사람은 그것을 부여하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할' 의무를 갖는다. 아키바는 아가를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대화로 해석한다. 이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세상사로부터 물러선다. 이상의 가르침들(그 가운데 일부는 초기 그리스도교 교리들에 대한 답변으로 내놓은 것임)을 가지고 아키바는 세계 여러 민족 사이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념에 기초를 놓았다.

 

 95년경 아키바는 다른 현인들과 함께 로마를 향해 여행길에 올랐다. 푸테올리 항구에 내린 그들은 제국의 권력과 장엄함을 보았다. 동료들은 20여 년 전에 로마가 유대를 짓밟은 일을 기억하고 소리내 울었지만, 아키바는 차분한 태도로 하나님이 악한 로마인들에게 이렇게 관대하시다면 결국에 가서는 이스라엘에 훨씬 더 관대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70년에 로마인의 손에 의해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갔을 때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으며 멸망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으나, 이제 우리는 재건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질 날을 기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본명은 시메온 벤 코지바)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사건(132~135)에 가담했다. 그가 어느 정도 깊이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어떤 이들은 아키바가 그 반란을 배후에서 이끈 정신적 실세였다고 보는 반면, 다른 이들은 아키바가 바르 코크바를 성서에 약속된 메시아 왕으로 판단했다는 〈탈무드〉의 기록을 중시하지만, 아키바가 바르 코크바 편에서 계속 활동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본다.

 

 실제로 아키바는 로마인들에게 체포되어 카이사리아에 구금되었다가 결국 순교했으나(135경), 그의 죄목은 혁명활동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대중교육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맑은 정신으로 순교의 고통을 참아냈고(전승에 따르면 그는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았다고 함), '네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기회를 갖게 된 데에 감사했다. 그는 평소 그 계명을 '그분이 여러분의 목숨을 거두어 가실 때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주는 한 분이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것은 유대교 신앙고백("이스라엘아 들으라!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며, 주는 한 분이시다")의 마지막 어구이다.

 

                                                                                  N.N. Glatzer 글 | 李吉商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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