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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성서번역의 위대한 공로자 J. S. 게일(Gale) 선교사 가족

영국신사77 2008. 6. 14. 19:40
성서번역의 위대한 공로자 J. S. 게일(Gale, James Scarth) 선교사 가족 


양화진 제2묘역(가-12)에는 캐나다 출신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성서 번역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J. S. 게일(Gale, James Scarth)의 아들, 비비안 S. 게일이 안장되어 있다. 또한 그의 종(從) 손자이며 첫 부인 해티의 외손자 제임스 M. 게일도 제1묘역(자-9)에 안장되어 있다.

          ◇ J. S. 게일(1863-1937,74세) 1세 

 
 제임스 스카스 게일(Gale, James Scarth, 한국명: 奇一)은 1863년 2월 19일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스코틀랜드 계의 부모로부터 출생했다.

1888년,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기독청년회 지원으로, 25세 되던 1888년 12월 15일 기포드와 함께 인천으로 내한했다.

 1889년 황해도 해주 지방과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한 뒤, 1890년 예수교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891년 2월 토론토대학의 선교비 중단으로, 같은 해 8월 31일 미 북장로회 선교부로 전적했다.

1892년 4월 7일 29세 때, 헤론 선교사의 미망인 깁슨(Harriet Elizabeth 별명;Hattie) 선교사와 서울에서 결혼했다. 성서공회 전임(專任) 번역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주로 사도행전,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전서, 요한1서 등을 번역했다.




            성경 번역 과정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번역하로 관철시킴  
성경 번역 과정에서, 언더우드는 하나님을 "천주"로, 마펫과 게일은 "하나님"으로 번역하기를 주장하여 결국 하나님으로 관철하였다.

 1925년 62세 때, 한국 최초의 사역(私譯)으로 성경 (신·구약)전서를 출판하였다.


1897년 4월, 그리스도신문 주간으로 시작하여 기독신보로 바뀐 뒤까지 10여 년간 주필로 활동하였다. 안식년에 미국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898년 4월 재차 내한했다.

1900년 5월, 연동교회 목회를 시작으로, 1901년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교육기반을 구축하였다.


1901년 한국성교서회 회장(제3대)과 황성기독청년회 창립위원 및 초대회장(1903)으로 문서 선교활동에 힘썼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장으로 두 차례(1908, 1910) 선출되었으며, 평양신학교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음악연구회를 조직하고 찬송가 개편에 힘썼다.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고,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1922)하여 출판하는 등 단행본 저서가 43권에 이른다.

 1925년 62세 때, 한국 최초의 사역(私譯)으로 성경 (신·구약)전서를 출판하였다. 



첫 부인 해티는 1908년 3월 29일 결핵으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아-14)에 안장되었다.

 그후 1910년 4월 7일 영국 실업가의 딸 루이스(Gale, Ada Louise Sale)와 재혼했다.

 1927년 5월 연동교회 시무를 마치고 정년 은퇴(1928, 65세)하여 부인의 고향인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1월 31일 부인과 막내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74세로 생을 마쳤다.


 "그의 설교는 치밀하고 논리적이며 예화나 일화가 없는 성서 중심이었다." 고 전해진다.

 이상재 선생은 "길의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빛을 얻게 하였다" 고 하였다. 




Gale 선교사  안녕하십니까 ?
재미있고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게일 제임스 스카스 ( Gale, James Scarth ) 선교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은 민영익과 6명의 사절단을 미국을 견학시키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미국 방문단을 견미단이라고 부릅니다.


견미단 일행은 갓을 쓰고 한복을 입고 다니면서 , 미국의 아름다움과 근대화된 모습을 관람하고 있었습니다. 견미단이 기차를 타고 미국 전역을 다닐 때의 일입니다. 마침 그 기차 안에 고우처 목사와 게일이라는 청년이 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쳐다보고 웃고 지나쳤지만,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인, 고우처 목사님과 게일은 남다른 관심으로 우리 민족을 바라보게 됩니다. 고우처 목사님과 게일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 된 후에 주님이 오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 그들에게 다가가 어느 나라에서 왔으며 , 그 나라에 선교사가 들어갔는지를 알아 봤습니다.

그들은 조선에 문은 열렸으나 , 복음은 아직 까지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 고우처 목사님은 즉시 가지고 있던 유산 2000 달라를 선교부에 드리면서, 조선 복음화를 위해 써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부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일본에 계신 맥클레이 선교사에게 편지를 해서, 조선에 들어가 조선 선교의 구체적인 정보를 알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던 것입니다.

견미단이 타고 있던 그 기차에서 , 게일은 고우처 목사님과 함께 견미단 일행의 이야기를 듣고 조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조선 선교사로 가기로 작정하고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열심히 선교사로서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마침내 게일은 카나다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고 토론토 대학 YMCA 소속으로 1888년 한국 제물포 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이창직을 만나 3개월간 한국어를 배우고, 서울에서 선교사님을 도우며 한국을 배워가다가, 일년 후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다가 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부산에 머물면서 선교의 여건을 찾는 도중 , 부산을 선교지로 정하고 순회전도를 하며 내려온 호주의 데이비스 선교사님의 순교를 지켜보게 됩니다.
 
또한 서울에 올라와서는 최초로 조선 선교사로 자원했고 , 최초로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오셨던 죤 헤론 선교사의 순교를 지켜보게 됩니다.
 
죤 헤론의 죽음으로 고종황제는 그를 묻을 수 있는 땅을 주었습니다. 그 땅이 바로 서울 합정역 근처에 있는 양화진 선교사 묘지입니다. 죤 헤론이 가장 먼저 그 땅에 묻히고 , 그 뒤를 이어 111 명의 선교사가 그 땅에 묻혀 있습니다.
 
게일은 죤 헤론의 장례식이 열린, 양화진에서 쓸쓸히 두 딸의 손을 잡고 돌아서는 헤티(Hattie, 깁슨: Harriet Elizabeth)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 그를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게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죤 헤론의 미망인 헤티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딸을 키우면서 조선선교의 장을 활짝 열어갔습니다.

그는 문인으로서 수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 중 코리언 스켓치 라는 책은 구 한말의 상황을 아주 자세히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 책에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지만 한 가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번은 게일 선교사가 순회 전도를 하는 중 , 어느 집에서 고기를 주었습니다. 너무 배고파 고생하던 게일에게는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 고기를 맛있게 먹고, 너무 맛있어서 그 고기가 무슨 고기냐고 물어봤습니다. 그 때 고기를 대접했던 조선인이 그 고기가 '개 고기' 라고 하자 그는 너무 놀랬습니다. 서양인들에게 개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책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이 후로 노란 개만 보면 군침을 흘렸노라 "

그는 야소교 회보의 주필을 비롯 각 기독교신문에 관여했고, 예수교 서회의 문서활동을 하면서 한국 문화에 혁혁한 공헌을 남긴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서울 연동교회 목회를 하면서 현 정신여학교와 경신여학교를 설립하였으며, 평양신학교 교수 활동도 하였습니다.

젊었을 때 기차안에서 만난 조선인을 보면서, 조선 선교사의 꿈을 키워오다가, 조선을 사랑하여 조선을 위해 모든 것을 주고 가신 게일 선교사 .... 그는 1937년 별세하였지만 , 그의 이름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2003-01-09 21:51:41
 
 
 
  ※ James Scarth Gale : 1863년 캐나다 온타리오우 출생.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이민 온 장로였다. 터론토 대학 졸업을 한 후 YMCA를 통해 선교사로 입국한다. 그의 나이 25세 때 1888년 12월 15일 그는 전국을 다니며 코리안 스케치를 하였다


 

                                ◇ 비비안 S. 게일(1916-1917) 2세


 비비안 S. 게일(Vivian Scarth Gale)은 성서 번역으로 큰 업적을 남긴 J. S. 게일 선교사와 그 두 번째 부인 아다 루이스 (Ada Louise Sale)사이에서 출생한 2세이다. 1916년 2월 14일 출생하여 1917년 8월 7일 사망하여 양화진 제2묘역(가-12)에 안장되었다. 게일과 아다 사이에서는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으며, 비비안 게일은 둘째 아들이었다.

 한편 존 헤론 미망인이던 첫 부인 해티(Hattie)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었으나
전남편 존 헤론과의 사이에서 두 딸,
사라(Sarah Anne Heron Gale)와 제시(Jessie Elizabeth Heron Carroll)가 있었다.

큰딸 사라는 성장하여 J. S. 게일의 조카 에손 게일과 결혼하였으며,
그들 사이에서 제임스 M. 게일(Gale, James M.)을 낳았다.


                                ◇ 제임스 M. 게일(1914-1914) 3세

 제임스 M. 게일(Gale, James M.)은 J. S. 게일의 조카 에손 게일(Esson Gale)과, 헤론-해티의 장녀 사라(Sarah Anne Heron Gale)사이에서 출생한 게일 가문의 3세이다.
  출생한지 얼마 안되어 사망하여 양화진 제1묘역(자-9)에 안장되었다.

바로 앞자리에는 제임스 M. 게일의 외조부모(外祖父母),
즉 존 헤론과 해티의 묘소(아-14 및 15)가 연계되어 있다. .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4-05-13 (105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