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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라틴어: Josephus, 37?~100?)

영국신사77 2008. 6. 13. 18:40

요세푸스(라틴어: Josephus, 37?~100?)

 

요세푸스(라틴어: Josephus, 고대 그리스어: Ιώσηπος 이오세포스, 37년 경 ~ 100년 경)는 기원후 1세기의 유대인 정치 선동가이자 역사가이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틴어: Flavius Josephus, 고대 그리스어: Φλάβιος Ιώσηπος 플라비오스 이오세포스)로도 불린다.

 

그는 역사가이자 동시에 사제로, 군인으로, 학자로 활동했다. 제사장 가문인 마타디아스와 왕족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유대 땅을 로마가 점령하고 있을 시기인 37년경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두개인(Sadduccee)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너무나 영특해서 16세에 이미 모든 것을 배웠고 그것들의 진실을 알기원했다. 그는 모든것을 내랴놓고 사두개파, 엣세네파, 바리새파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다 3년 정도 밴누스(Bannus)라는 이름의 은자와 함께 사막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 바리새파를 선택한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유대 군을 이끌다가 로마 군의 포로가 된 후 정보를 제공해 주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배려로 풀려나 로마 시민이 된 후 새로 로마 시민이 된 이들에게 적용되는 관례에 따라 보호자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 티투스의 가문 이름을 따서 '플라비우스'를 가문 이름(nomen)으로, '티투스'를 이름(praenomen)으로 삼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생애

요세푸스는 직접 감독한 《유대 전쟁기(Ιουδαϊκός Πόλεμος)》의 고대 그리스어 번역문에서 자신을 "마티아스(마티탸후)의 아들 이오세포스(요세프), 예루살렘의 사제"로 소개하고 있다(I.3). 그는 66년-73년의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갈릴리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는데 정확한 경위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67년 7월 갈릴리에 침공한 로마 군에 투항하였다. 전쟁 포로가 된 요세푸스는 전쟁에 관하여 로마군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했다. 로마군은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가 지휘했는데 둘 다 이후에 황제가 되었다. 69년 풀려난 요세푸스는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70년 예루살렘 포위 당시 유대 군과의 협상에 참여한 듯하다.

요세푸스는 71년에 티투스의 수행자 신분으로 로마에 입성하여 로마 시민이 되었다. 또 베스파시아누스의 옛 저택에 머무는 배려를 받고 점령당한 유다이아의 땅과 상당한 연금도 지급받았다. 요세푸스의 알려진 저작들은 모두 로마에 있으면서 플라비아누스 가문의 보호를 받을 때 저술한 것이다.

70년경 요세푸스는 첫 아내와 이혼하고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여성과 혼인하여 플라비우스 히르카누스(Flavius Hyrcanus)라는 아들과 알려진 바가 전혀 없는 다른 아이를 포함하여 아이 둘을 낳았다. 75년경 다시 이혼하여 세번째 혼인으로 플라비우스 유스투스(Flavius Justus)와 시모니데스 아그리파(Simonides Agrippa)라는 아들 둘을 낳았다.

 

요세푸스의 생애는 모호한 점이 많다. 그를 비난하는 이들은 그가 전쟁 당시 갈릴리에서 동료들과 같이 자살하지 않고 로마 군에 투항한 점, 포로가 된 후에는 로마 군과 협조한 점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래서 요세푸스를 배반자 및 밀고자로, 그의 저술은 로마의 선전물 내지는 자기 변호로 보고 그의 역사가로서의 신용을 평가절하해왔다.

그러나 로마 시대, 특히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대에 유대인들과 유대 문화에 대한 중요한 변명자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는 스스로 애국적이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으로 보았다. 교육받은 이방인들에게 유대교를 옹호하고 추천하기까지 했으며 그리스-로마 사상과의 호환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유대 문화가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유대인들을 문명화되고 신앙심이 두터우며 철학적인 민족으로 그렸다.

 

요세푸스가 그리스어 저서에서 사용한 이름은 '이오세포스 마티우 파이스(Ἰώσηπος Ματθίου παῖς)', 즉 '마티아스의 아들 이오세포스'이다. 요세푸스는 아람어도 구사하였고 거의 확실히 히브리어도 구사하였다고 생각되지만 그의 이름이 이들 언어로 적힌 것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리스어에서 사용한 이름에서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요세프 벤 마티탸후(יוסף בן מתתיהו), 아람어로 번역하면 요세프 바르 마티탸후(יוסף בר מתתיהו)이다.

 

 

인류 역사상 요세푸스만큼 칭송과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유대인 동족들에게는 배신자요 변절자로 지탄을 받고 있는 반면에 그는 기독교인들, 특히 초대 변증가들과 중세 시대에는 위대한 저술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는 진실만을 탐구한 양심적이고도 공정한 탐구자라기보다는 어떤 인상을 주려는 고도의 목적을 가진 저술가였음이 분명하다. 고대 저술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결점을 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는 탁월한 역사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유대주의와 헬레니즘의 두 전통을 종합하였으며
로마의 세속 세계와 성경의 종교적 유산을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치하의 여러 민족들의 멘탈리티-특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 백성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여러 정보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탄생 이전 시대와 기독교 1세기 동안에 일어났던 팔레스틴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를 알려주는 유일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본서 "요세푸스"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요세푸스는 유대동족들에게는 변절자로 지탄을 받았지만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위대한 저술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가 자기 민족을 옹호하고 유대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저술한 이 전집은 유대주의와 헬레니즘을 종합하고
로마의 세속 세계와 성경의 종교적 유산을 연결시켜 유대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예수님 탄생 이전시대와 기독교 1세기 동안 걸쳐 일어났던 팔레스틴디아스포라 유대인 역사를 알려주는 유일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요세푸스가 차지하는 위치란 거의 절대적이다.또한 요세푸스는 유대인뿐 아니라 로마제국 치하의 다른 여러 민족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정보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 책의 영문 역자 헨리 스테빙은 이 책이 현존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다 보면 성경의 장엄한 진리와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에 대해 전율할만큼 확실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연결고리 : 유대인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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