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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첫 면허 의사, 이름·얼굴 확인되다/ 100년전 연세의료원

영국신사77 2008. 6. 7. 13:35
7인의 첫 면허 의사, 이름·얼굴 확인되다
100년전 '세부란시병원의학교(現연세의료원)'
1회 졸업장 최근 발견

학교엔 4회 졸업장이 最古… 후손이 기증
홍난파의 형·김구 선생 손위 동서도 동창
5명은 인술 펼치면서 치열한 독립운동도
 
오윤희 기자 oyounhe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한국어와 영어가 함께 표기된 1908년 제1회 세브란스병원(제중원) 의학교(현 연세의료원) 졸업장. /연세의료원 제공

빛 바랜 흑백사진 안에 '젊은 그들'이 있다. 학사모와 졸업 예복 차림으로 서양인 교수를 가운데 모시고 잔디밭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세브란스병원(제중원)의학교(이하 세브란스)' 1회 졸업생(1908년 졸업) 7명 전원이다. 이들은 꼭 100년 전 탄생한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였고, 대부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투사이기도 했다. 이들의 신원이 세간에 완전히 알려진 건 최근 일이다. 지난 4월, 1회 졸업생 중 한 명인 김희영씨의 외손자 송덕근씨가 아픈 아내와 함께 병원에 들렀다가 연세대 100주년 기념전시회에서 세브란스 4회 졸업장(1914년)을 본 게 계기가 됐다.


외삼촌집 거실에서 봤던 외할아버지의 졸업장과 비슷하다고 느낀 송씨는 학교에 이 사실을 알렸고, 김희영씨 증손자 용재씨가 연세대의 권유를 받고 지난 3일 이 졸업장을 학교에 기증했다. 집안에 숨어 있던 조선 최초 서양 의학원의 100년 전 졸업장이 세상 빛을 본 데는 이렇게 '우연'이 크게 작용했다.

덕분에 김희영씨의 손녀 김부전(여·70)씨가 연세대가 따로 갖고 있던 1회 졸업생 사진에서 할아버지를 찾아내면서, 졸업생 7명 신상도 정확히 확인됐다. 이전까지는 5명의 신상은 알려져 있었지만, 자료 부족으로 김씨를 포함한 나머지 두 명은 학교 측이 사진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름과 얼굴을 연결시키지 못했었다.

특히 1회 졸업장을 확보하면서 당시 학교 이름이 '제중원의학교'가 아니라 '세부란시병원의학교'라는 것도 새로 알게 됐다.

7명은 같은 해 졸업했지만 입학연도는 다 다르다. 학제가 정비돼 있지 않아서 교수가 "이 정도면 됐다"고 허락할 때까지 제각각 7~10년씩 공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졸업식 다음날인 6월4일 조선 정부로부터 국내 최초의 의사면허인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았다.

1999년부터 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장을 맡고 있는 박형우 교수(연세대 의대 해부학)는 "당시 교육은 철저한 도제식이었다"고 전했다. 학생들은 처방전에 적힌 약을 가져오고, 스승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취와 상처 꿰매는 법을 차근차근 배워나갔다고 한다. 박 교수는 "세브란스 에비슨 교장의 자서전에 따르면, 1회 졸업생들은 종기 째는 간단한 수술은 물론, 외국인 교수의 보조를 받아 팔다리 절단 수술도 했다"며 "졸업장에 '내과·외과·산과에서 충분한 수련을 쌓았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으로 치자면 전문의(專門醫)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7명 가운데 1910년(추정) 폐결핵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홍종은씨,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31년까지 세브란스에 남아 안과·이비인후과 분야를 가르친 홍석후씨(작곡가 홍난파의 형) 이외에 5명은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중국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수입금 전부를 독립군 자금으로 내놓은 김필순씨. 김씨는 외국인 교수가 진행하는 수업 통역을 도맡았고, 외과총론·내과학 등 영어교재를 번역할 만큼 영어 실력이 탁월했다. 김씨는 1911년 12월31일 34살의 나이에 독립군 기지와 의형제인 도산 안창호 선생이 기다리고 있는 중국 퉁화(通化)현으로 갔다가 아깝게도 8년 뒤 작고했다.

이번에 발견된 1회 졸업장을 갖고 있던 김희영씨는 졸업 후 충남 직산에 병원을 열고 광부를 치료하면서 일본군 총칼에 맞은 동포를 몰래 돌보다 옥고를 치렀다. 그는 그때 얻은 폐병 때문에 1920년 41살에 세상을 떠났다.

백정의 아들 박서양씨와 관기(官妓)를 어머니로 둔 주현칙씨는 조선시대 최하 계층 출신이라는 아픔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박씨는 에비슨 교장에게서 장티푸스 치료를 받은 아버지가 "너라도 공부해서 인간답게 살아야지"라며 등을 떠밀어서, 주씨는 고향 평안북도의 한 병원에서 의료 보조를 한 경험을 살려 세브란스에 들어왔다가 졸업 동기가 됐다.

이후 박씨는 1918년 만주로 가서 구세의원을 운영하다 독립군 의료 총 책임을 맡았고, 주씨는 평안북도에서 개업해 의료활동을 펼치는 한편 흥사단 일원으로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두 번이나 모진 옥고를 겪은 주씨는 꿈에 그리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현재 김필순·주현칙씨는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로 등록돼 있고, 박서양씨와 신창희씨는 박 교수가 지난 3월 독립유공자로 신청해, 이르면 오는 광복절 때 그 결과가 나온다. 백범 김구 선생의 손위 동서인 신씨는 동몽골에서
일본의 폭정 때문에 나라를 떠난 동포를 치료하고, 상해임시정부 시절 적십자 활동을 하면서 독립자금을 모은 공로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박 교수는 "독립 운동과 후진 양성에 몸 바쳤던 이분들은 출세만 꾀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좋은 본보기"라고 말했다.

▲ 100년전 졸업사진 1908년 세브란스병원(제중원)의학교를 1회로 졸업한 최초의 면허 의사 7인. 제일 뒤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필순, 홍석후, 신창희, 박서양, 홍종은, 김희영, 주현칙씨. 가운데는 당시 외과교수였던 허스트 박사. /연세의료원 제공
입력 : 2008.06.06 23:54 / 수정 : 2008.06.06 2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