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양화진묘원· 선교사

★ 양화진 외국인 묘지 (서울) <성화사랑>

영국신사77 2008. 5. 23. 21:43
                       양화진 외국인 묘지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100주년 기념 교회)

 

                           교회 내부 제단(출처- http://www.kmc.or.kr/)  

 

                                                              외국인 묘지 배경

 

                                                             양화진 이야기

 

                                                     100주년 기념교회 봉헌석

 

 

                                                      최초 매장자 헤론 선교사

 

                                              존 헤론 선교사 묘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존 헤론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병풍

 

                                 존 헤론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병풍

 

 


                            선교 120주년 기념비

 


                          한국 감리교 최초 선교사 아펜젤러 추모비

 


                          아펜젤러 선교사 아들 묘(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 추모비(배재동문)

 


                                             아펜젤러 소개

 


                                              아펜젤러 추모비 뒷면

 

                                           아펜젤러 추모비 제막식, 서천앞바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직 장소가 그동안 알려졌던 군산 앞바다가 아니라 서천 앞바다에 있는

오세이도라 불리던 어청도 부근이라는 최근 교회사가들의 주장에 근거해 2006.6 아펜젤러 순직

104주년을 추모하며 감리교 충청연회 주관하고 서천군기독교연합회와 서천군이 공동으로 진행

중인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마량진에서 48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어청도는 1914년 이전에는 행정경계상 충청남도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세대 아펜젤라관, 사적 277호

 


                                   스크랜튼 선교사(이화여대)

 


                                                  스크랜튼 소개

 


                                     언더우드 선교사 일가의 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일가 묘역

 


                                                언더우드 선교사 묘

 


                                               언더우드 소개

 


               헐버트 [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1 

 

  버몬트주(州) 뉴헤이번 출생. 1884년 다트먼트대학을 졸업, 그 해 유니언신학교에 들어갔다가 1886년(조선 고종 23) 소학교 교사로 초청을 받고 D.A.벙커 등과 함께 내한(來韓),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외국어를 가르쳤다. 1891년에 육영공원을 축소하려고 하자 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가, 2년뒤에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내한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후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여,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에 돌아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다시 내한, 《한국평론 The Korea Review》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행위를 폭로하는 한편, 이듬해 고종에게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도록 건의하였다. 그는 한국 대표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 《회의시보 Courier de la Conferénce》에 한국 대표단의 호소문을 싣게 하는 등 한국의 국권 회복운동에 적극 협력하였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면서 한국에 관한 글을 썼고, 1919년 3 ·1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徐載弼)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수립 후 1949년 국빈으로 초대를 받고 내한하였으나, 병사하여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저서에 《한국사 The History of Korea》(2권) 《대동기년(大東紀年)》(5권) 《한국견문기 The Passing of Korea》 등이 있다.

 

  조상 전래의 구전으로 전해오던   우리 민요 아리랑을 서양식 악보에 기록한 것은 1896년 당시 미국 선교사로 활약하던 헐버트(1863.1-1949.8.5)에 의해서이다. 그는 문서선교를 위한 책자를 발간하였고 영문 한국학 연구지인 “코리아 레포지토리”(Korea Repository)하는 잡지에 한국의 역사 풍속 언어등에 대한 글을 실었다. 바로 이 잡지 안에 ‘Korea Vocal Music’이라는 란에 아리랑의 영문 가사를 싣고 있다.

 

  이런 한국학 연구를 통해 헐버트는 한국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으며, 열강 제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몸부림치는 한국인들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책에 아리랑의 악보와 가사를 실고 그가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1896년2월에 태어난 아들이 생후 1년만에 죽게된 사별의 슬픔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헐버트 선교사 묘비-2

 

  이 묘비는 1949년 8월 11일 헐버트 선교사의 영결식때 제막한 것인데,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묘비명을 쓸 수 있도록 비석의 가운데 부분을 비워두었었다. 당시는 건국 초기여서 국내의 여러가지 사정상 추진위원회가 글씨를 미쳐 받지 못했다치고, 그 이후에도 50년 동안 그 자리는 그대로 비어 있었으니 우리는 그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어쨌든 이 묘비는 헐버트 박사의 서거 50주년을 맞아 1999년 당시의 대통령이던 김대중씨의 휘호를 받아 묘비명을 새겼다한다. 가운데 세로글씨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한글 휘호가 김대중씨의 필적이다. 사연 많은 비석이 아닐 수 없다.

 


                                              헐버트 선교사 소개비

 

  대한제국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우다 강제추방까지 당했던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 는 미국 버몬트주 태생으로 대한제국 초청으로 1886년 23세 나이로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내한해, 교육분야 총책임자와 외교 자문관으로 고종황제를 보좌했다.

 

  헐버트 박사는 1907년에는 이준 열사 등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참석 할 수 있도록 면밀히 지원하는 등 항일운동을 벌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됐다.

 

  그는 그 후 40여 년 만인 1949년 7월 29일 우리 정부 초청으로 8ㆍ15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했다가, 일주일 만인 같은 해 8월 5일 8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울 선교사

 


                                             셔우드 홀 선교사

 

                                                         베텔 선교사

 

                                          루비 켄트릭 선교사  묘지

 

             "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

                                                                                                   - Ruby Kendric -

 

   "내게 줄 수 있는 천번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 번의 삶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

                                                                                                      -루비 켄트릭-

 

                                                  클라크(곽안련)선교사-1

 

                                                                  클라크 묘지-2

 

                                 캠벨 선교사(배화학당, 종교교회, 자교교회 설립자)-1

 

                                                  캠벨 선교사 묘지-2

 

                                            테일러 선교사 묘지

 

      감리교 하디 선교사 기념비 (윤춘병 감독, 신경하 감독 등)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의 남감리교 의료선교사로 1898년부터 함경남도 원산을 거점으로 강원도 북부에서 의술을 베풀며 전도를 시작했다. 그는 5년 동안 선교에 매진했으나 뚜렷한 열매를 남기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 1903년 8월 24일부터 일주일 동안 원산에서 열린 선교사 연합기도회를 인도하다가 ‘아무리 수고해도 성령의 임재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후 그는 동년[1903년]8월 30일 원산 감리교회에서 열린 주일예배에서, 자신의 교만과 한국인들을 멸시했던 죄를 공개적으로 자복했고, 그의 회개는 곧 한국인들의 가슴에도 회개의 불을 붙여 원산 대부흥운동의 도화선 됐다.

 

  그는 그 후에도 개성과 서울, 인천 등지를 순방하며 집회를 인도했고, 특히 1906년 8월 평양에서 그가 인도했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 연합기도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의 기폭제가 됐다.

 

    하디 선교사는 1935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한국에서 선교할 당시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두 딸이 서울 양화진 묘역에 묻혀 있다.

 

 

               

                                                                  하디선교사  

 

                                      

                              하디 선교사 부부 (1890년경)(출처- http://cafe.daum.net/kchistory)

 

                                                          하디 선교사 가족 (1910년경)

 

                                                      하디 선교사 별세 기사 (1949년)  

 

                                                  선교사 자녀들 묘역

 


                                           선교사 묘지들-1

 


                                              선교사 묘지들-2

 


                                        선교사 묘지들-3

 

                               양화진 외국인 묘지 공원 (한국 기독교 선교기념관)

 

  서울 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5- 8/ 명칭은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되어있다.

 

  1893년 10월 24일에 개설이 허가 되었으며 면적은 13,224 제곱미터이다.

  무덤은 514여 기(基)가 있으며, 최초의 피장 선교사는 존 헤론이다.

 

  이곳에는 초대 선교사와 조국 근대화에 헌신한 구미 각국의 저명인사 500여명이 묻혀있는 양화진 외국인 공원 묘역에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성금으로 선교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들의 선교정신과 숭고한 희생 봉사의 업적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후세에 전승키 위하여, 1985년 1월 14일 재단법인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제 5차 총회에서,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한국 기독교선교회관을 건축키로 결의하였다.

 

  이 사업이 1985년 6월 28일 선교기념관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1986년 8월 20일 건조물 및 토목공사가 완료되고, 동년 9월 10일 조경 공사가 완공되었다.

 

  이곳에는 선교 기념실, 자료실, 대강당, 외국인 연합교회 예배처소, 중·소회의실 교육실, 목회자실, 부속실, 친교실, 식당, 기관실, 다목적실, 야외 행사 공간, 주차장, 관리인 숙소, 휴게실이 구비되어 있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 할 때, 한국은 미개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복음과 함께 문명화와 근대화 사역을 함께 수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병행해야 했는데, 알렌은 제중원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언더우드, 헤론, 감리교 의료 선교사 겸 목사 스크랜톤이 일하였다.

 

  처음에는 알렌이 와서 일하였으나, 밀려오는 환자를 혼자서 치료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가 약국의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1885년 5월에 내한한 스크랜톤과 함께, 같은 해 6월 헤론이 가담하였다. 그러나 부족한 약품들과 의료 재료들 만으로는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전염병은 창궐하였다. 당시의 조선인들은 위생관념이 희박하였기 때문에 물을 끓여먹지 않아서 온 가족과 동네가 몰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헤론은 내한한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렸다. 그는 그곳에서 그렇게 순직했다.

 

  이러한 제중원이, 후에 미국의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세브란스>가 15,000 달러를 희사하여, 지금의 서울역 앞 대지를 구입하여 '세브란스'라는 이름을 갖은 세브란스병원이 생겨났다.

 

  헤론은 이렇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의료 선교에 뛰어 들었고, 그는 그렇게 이질에 걸려 질병으로 숨져갔다. 그는 5년간이라는 짧은 선교의 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다가 이방 땅에서 그렇게 뼈를 묻었다.

 

  그는 조국보다도 자신의 가족 보다도 더욱 한국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묘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JOHN W. HERON, MD/who came to Korea IN  1885/MISSIONARY PHYSICIAN/ TO/ CORT ANT LEGATIONS/DERBYSHIRE ENG,1856/ DIED/  SEOUL JULY,1890/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그는 1885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와서, 1890년  7월 여름에 순교했다. 그리고 그 비문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라고 자신의 신앙을 묘비에  적어놓았다.  헤론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선교에 대한 일념으로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죽어갔다. 

 

  한국의 복음은 이런 사명자들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곳에 잠들어 있는 많은  선교사들의 묘비에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자신들의 묘비에 적으면서  순교의 길에 들어갔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 R. 아펜젤러-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D. 언더우드

"주님 !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G.A. 테일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H.B. 헐버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A.K. 젠슨-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R. 켄드릭-

 

  이곳에는 선교사들을 따라 왔다가 부모와 함께 순직한 가족들이 함께 있으며, 채 꽃피우지 못하고 부모와 함께 한국에 묻힌 아이들도 많다.

 

  이곳에 한국 복음의 선교를 위하여 숨진 사람들의 묘는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봉의 높이도 높지 않다.  마치 예수님께 책망받던 바리새인들의 비유와 같이 평토장한 무덤같아 보여 쓸쓸하다. 화려하지 않게 잠들어 있는 이들의 영혼은 아름답기만하다.

 

  그러나, 이들의 휴식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이 땅에서의 안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안식이 평온하지 만은 않은 듯 싶다. 전쟁과 그 포화의 흔적들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비석을 대신한 돌 십자가들이, 모진 세월속에서 십자가 조차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파손되어 있다.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이렇게 받았으며, 또한 우리보다 더욱 한국을, 한국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주어졌다.

 

  이 사랑의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 도표들은 우리가 누구이기에, 외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며, 복음의 빚진 자임을 느끼게 해 준다.


                    신분별, 국적별 순교자

구분

어른

어린이

선교사

75

36

111

선교사,

군인 아닌 사람

46

10

56

미군부대와

관련된 사람

26

38

64

소속 불명

44

31

75

한국인

15

11

23

 

국명

인원수

국명

인원수

미국

265

캐나다

7

백러시아

54

스페인

4

영국

30

벨기에

4

프랑스

25

덴마크

3

한국

20

일본

1

호주

12

425명

   *숫자에는 표지없는 무덤 80여기와

                       어린이는 포함되지 않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