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남터 기념관(2006. 9. 3 축성)
서울 새남터본당(주임 한원식 신부)은 9월 3일 용산 이촌2동 새남터 성지에서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관’ 축복식을 가졌다. 새남터 성당 지하 100여평 공간에 마련된 ‘새남터 기념관’은 4개 공간으로 나눠 꾸며졌다. △‘도입공간’ 및 ‘상징의 장’에는 새남터 성지 역사와 103위 성인 성화 등을 전시했으며 △‘추모의 장’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 14인의 흉상과 부조를 설치했다. 또 △‘전시 공간’에는 천주교 수용과 창설, 박해, 순교의 과정을 그래픽과 유물 등을 통해 전시하고 있으며 △‘체험 및 교육공간’은 조배실과 다목적 영상실을 설치, 신자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순교 성인에 대해 묵상할 수 있도록 했다.
새남터 기념관
새남터 기념관
새남터 기념관
새남터 기념관
입구 벽 순교성인화
전시실
전시실
기념관 내부
기념관 내부
선교사들이 입었던 상복
선교사들이 입었던 상복
최양업 신부
성인 유해실
새남터에서 순교한 9분(김대건신부, 앵베르 라우렌시오주교, 모방 베드로신부, 사스탕 야고보신부, 야고보신부, 베르뇌 시메온주교,
브르트니에으 유스토신부, 볼리외 루도비코신부, 도리 헨리코신부, 우세영 알렉시오) 과 타 지역에서 순교한 5분(다블뤼 안토니오주교, 황석두 루카,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김성우 안토니오, 이명서 베드로)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인 유해
성인 유해
성인 유해
성인 유해
성인 유해
성인유해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14인 순교자 흉상 부조
14인 순교자 흉상 부조
14인 순교자 흉상 부조
주문모 야고보신부
성 우세영 알렉시오
성 사스탕 정아각백 야고보신부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신부
성 현석문 까를로
성 앵베르 범세형 라우렌시오주교
성 김대건 안드레아신부
성 베르뇌 장경일 시메온주교
성 도리 김 헨리코신부
성 볼리외 루도비코신부
성 정의배 마르코
성 모방 나 백다록 베드로신부
푸르티에 안토니오 신요안신부(좌), 프티나콜라 미카엘알렉산데르신부(우)
새남터 14인 순교자
새남터 14인 순교자
전시물
전시물
전시물
전시물
서적과 십자가
서적과 십자가
서적과 십자가
한국 천주교회 창설
한국 천주교회 창설
한국 천주교회 창설, 벽위편 상하
니벽전, 성교요지
주교요지, 상재상서
신유박해(1801년 1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한 박해이다. 이 박해로 첫 사목사제로 입국한 주문모 신부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이제 조선교회는 박해가 없어도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한탄 했을 만큼 초대교회가 받은 타격은 컸다.
신유박해(1801년 1월)
신유박해(1801년 1월), 척사윤음
신유박해(1801년 1월), 조선 대목구 설정 칙서
신유박해(1801년 1월), 성경직해, 신명초행
기해박해 (1839년 3월)
기해박해는 1839년 3월(음)에 시작하여 그 해 10월 막을 내린 박해로 이 때 희생된 70위가 103위 한국순교 성인 안에 포함되어 있다. 30여년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와 새로 등장한 풍양조씨의 정치 세력 다툼과 지방 관리들의 탐욕에 의해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로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사제들, 정하상(바오로)과 현석문(가롤로)등이 순교했다. 기해일기에는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사나 장사한 순교자가 60여명이나 된다고 했으며 달레의 한국교회사에는 참수된 신자가 70명이 넘는다고 했다.
기해박해 (1839년 3월)
기해일기
기해박해 (1839년 3월), 순교성인, 성 앵베르 주교 친필서한
기해박해 (1839년 3월), 성 허계임 막달레나 횡대, 앵베르 주교 모발
기해박해 (1839년 3월), 세례문서 등
병오박해 (1846년 6월)
병오박해는 1846년 6월 성 김대건 신부의 피체를 계기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에 끝난 박해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봄 새로운 해로개척을 위해 중국어선과 접촉하여 편지와 해로도를 전하려 하다가 6월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었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외국 선박의 출몰과 국경 침범을 문제삼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김대건과 현석문은 군문효수로 순교하고 임치백, 남경문 등은 매 맞아 죽는 장사로 순교하였다. 이때의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페레올 주교에 의해 조사되어 1846년 11월3일자 서한인 '병오일기"에 기록되어 시복 시성에 소중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병오박해 (1846년 6월)
병오박해 (1846년 6월), 김대건 신부 족보, 시험답안
병오박해 (1846년 6월), 김대건 신부 옥중서한, 최양업 신부 친필서한
병오박해 (1846년 6월), 최양업 신부 순교록과 순교목록
병인박해 (1866년, 고종8년)
병인박해는 1866년(고종8년)에 시작되어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된 가장 참혹하고 희생이 큰 박해이다. 흥선대원군은 국제정세의 변화와 천주교를 배척하는 정치세력들의 공세로 당시 신자수가 약 2만 3천명 중 약 1만 명이 순교할 정도로 참혹한 박해가 계속되었다. 이 중 24명이 한국순교 103위 성인 중에 들어 있으며 이런 박해로 순교신심은 더욱 깊어지고 순교자 현양운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더욱 깊은 영성을 지니며 현대교회에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병인박해 (1866년, 고종8년)
병인박해 (1866년, 고종8년), 부대부인 민씨 수세실기, 요리강령, 천당직로
병인박해 (1866년, 고종8년), 성 베르뇌 주교 교서, 성 황석두 횡대, 선교사 조선 출발 전 사진
병인박해 (1866년, 고종8년), 영세대의, 성찰기략, 진교절요, 회죄직지, 천주성교공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친필 서한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친필 서한
한국 천주교회 박해와 시복 시성
한국 천주교회 박해와 시복 시성
한국 천주교회 박해와 시복 시성
한국 천주교회 박해와 시복 시성
순교자 약 1만명 중 교회법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성인에 오른 이가 103위이다. 1925년에 시복된 한국의 79위는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자들이며, 1968년에 복자 위에 오른 24위는 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이다. 1984년 5월4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 기념 행사로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의 순교자 103위가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 박해와 시복 시성
한국 천주교회 박해와 시복 시성
푸르티에 안토니오 신부 친필서한
푸르티에 안토니오 신부 친필서한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친필, 출생신고서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친필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출생신고서
성 볼리외 신부의 친필서한
성 도리 헨리코 신부 친필서한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 친필서한
주문모 신부 순교기록
성 앵베르 주교 시종직 확인문서
성 유스토 신부 친필서한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 친필서한
순교의 열매
박해 기구들
박해 기구들 (용수, 십자형틀, 금군월도, 곤장, 착고, 의자형틀, 육모방망이, 칼 등)
박해 장면
박해장면
용수
박해 기구들
박해기구
선교사들의 포교활동
선교사들의 포교활동관 내부
'국내 聖地 · 선교사 > 1.國內 성지순례歷史교회文化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두산 (서울) (0) | 2008.05.23 |
---|---|
성공회 강화성당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0) | 2008.05.23 |
★ 2 발안 제암교회/ [디카] (0) | 2008.05.23 |
★ 발안 제암교회 (0) | 2008.05.22 |
★ 용인 기독교순교자기념관-2 (0) | 2008.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