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 연구
1. 명칭과 위치
1) 히브리어로는 @av] tyBe(베트 셰안)으로 '휴식처, 안식처'(place of quiet)를 의미한다.
2) 벧산 성읍은 해발 120m로서 우물물이 있는 이스라엘 평원 동쪽 끝에 있는 비옥한 지역의 주요 교차로 지역에 위치한다.
3) 여리고에서 요단 계곡을 다라 북쪽에 있으며, 디베랴에서 30분도 안 되는 곳에 있다.
4) 이집트로 가는 대상들이 다니는 길 중앙에 위치하여 옛부터 군사적, 경제적으로 요충지이다.
2. 애굽 문헌에서의 언급
1) 주전 15세기 투트모스 3세 시대의 애굽 문헌에 언급된다. 텔 벳-샨의 발굴은 대상들의 역으로서, 그리고 애굽 통치의 중심지로서 벧산의 중요성을 증명하였다.
2) 세티(Seti) 1세가 다스리던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 현무암 비명은 설형 문자로 기록된 아피루(the Apiru), 하비루(the Habiru)를 말한다. 그 내용은 이들이 평화를 깨뜨리고 벧산 지역의 정부당국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3) 람세스(Ramses) 2세는 그 성읍을 다시 축성하고 세티 1세의 신전과는 다른 신전을 건축하였다. 그의 현무암 비석은 '아시아인들과 사막 주민들'을 진압하였다고 전한다.
3. 역사적 변천
1) 이스라엘이 가나안땅 정복시에 정복하지 못한 가나안 성읍 중의 하나였다. 사울 당시에는 블레셋이 관할하였는데 그들이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매달았다(삼상31:10,12)
2) 솔로몬 때는 아힐룻의 아들 바아나가 관할하였다(왕상4:12). 언덕에서 발견된 성, 문, 돌을 쪼개는 양식은 솔로몬 시기에 속하는 형태들임을 보여준다.
3) 알렉산더 대왕의 계승자 디아도키(Diadochi)가 다스리는 동안에는 스키토폴리스(Schthoopolis:스키디아인들의 성읍)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명칭은 주전 218년 애굽에 대항한 안티오쿠스 셀류쿠스(Antiochus Seleucus) 3세의 군사 행동에서 최초로 언급된다.
4) 유다 마카비 시대까지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다. 거기서 유다의 형제인 요나단은 시리아의 횡령자인 트리폰(Tryphon)과 싸웠다.
5) 이 성읍은 주전 107년에 죤 힐카누스(Hyrcanus) 1세의 아들들에 의해 정복되었다. 하스모니안(Hasmonean) 시기 동안에는 중요한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6) 주전 57-54년까지 시리아의 지방 총독이었던 가비니우스(Gabinius)는 이 성읍을 개조하여 확장하였다. 이성읍은 데가볼리 연맹으로 알려진 헬라의 열 성읍들의 연맹 수도가 되었다.
7) 66년 유대 전쟁이 발발하자 유대인들은 벧산을 공격하였다. 이 성읍의 유대인들과 이방인 거주자들이 함께 대항하였다.
8) 미쉬나와 탈무드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거주하였다. 그들의 주요 직업은 가죽옷을 만들기, 농작물 생산, 올리브 배양 등이었다. 이곳은 당시 섬유의 생산과 수출에 있어서 세계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였다. 연극장, 원형 경기장, 곡마장에서는 정규적으로 연극이 상연되었다.
9) 비잔틴 성벽 북쪽에서 발굴된 회당은 4세기 이후부터 일단의 유대인 인구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 회당은 거의 200년 동안 사용되었으며 개축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회당은 624년에 전소된 것 같다.
10) 5세기 초에는 팔레스티나 세쿤다(Palestina Secunda)로 불리는 주의 수도로 지방 행정관과 법정이 있는 성읍이 되었다.
11) 아랍 시기의 처음 몇 세기 동안에는(7~9세기) 야자수, 포도원, 포도주, 쌀 등으로 유명하였는데 쌀은 수출을 하였다.
12) 그 시대에 주민들은 지능이 낮은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13) 맘루크 시기는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 주었다. 14세기 동안에는 다메섹 지구의 주요 성읍이 되었고 다메섹에서 카이로까지 이르는 중간 역이었다.
14) 이 성읍의 마지막 아랍인 정착은 1883년 이집트 통치자의 아들인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의 정복으로 이루어졌다.
15) 19세기 초엽에는 기껏해야 200명의 거주민이 있는 초라한 마을로서 쇠퇴기를 맞이하였는데 그때부터 벧산은 아주 느리지만 제1차 대전까지 성장하였다.
4. 발굴 작업의 결과
1) 1921~33년까지 미국 탐험단에 의해 이루어진 발굴은 주전 4천년경부터 초기 아랍 시기까지 18개의 거주층을 발견하였다.
2) 주요한 발견은 신전들이었다. 이것들은 분명히 엘-아마르나 시기에서 주전 12세기의 람세스 3세가 다스리던 시기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후대의 두 신전들은 주전 1000년까지 이어졌다.
3) 벧산의 신인 메칼(Mekal)에게 헌증한 현판(懸板)을 포함하여 다양한 이집트 비명들이 발견되었다.
4) 텔 맞은편의 경사지에서 다른 시기에 속하는 수많은 묘지 동굴들이 발굴되었다. 이중의 일부에는 블레셋인들(내지는 해양 민족들과 관계 있는 집단)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석관(石棺)이 있었다.
5. 근대 시기
1) 1918년에 영국군이 이곳을 정복하였고1920~30년대는 벧산 골짜기 출신의 베드윈이 성읍에 정착하였다.
2) 1921년에는 2,000명이었고 이스라엘 독립 전쟁(1948) 동안에는 3,000명이 넘었다. 20세기 초에 주로 쿠르디스탄과 다른 모슬렘 국가들 출신의 유대인들도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29년의 아랍인 폭동 기간 동안 떠나게 되었고, 1936년 봄에 유대인 주민들은 94명에 지나지 않았다.
3) 독립 전쟁으로 1948년 5월 12일 유대 군대가 이곳을 접수하였다. 유대인 이주민들의 정착은 1949년에 시작되었다.
4) 1950년에는 1,200명, 1968년에는 12,800명이 되었다. 절반은 북아프리카(주로 모로코) 출신의 사람들이었고, 30%는 다른 모슬렘 국가들, 이란, 이라크, 터어키 출신자들, 20%는 유럽에서 온 사람들 내지는 이스라엘 태생의 사람들이었다.
5) 정착 초기에는 산업이 거의 없어서 정착민들은 1950년대에 주로 소규모의 상거래나 혹은 고용된 농장일을 하며 생활하였다.
6) 그 이후에 많은 기업들이 생겼는데 섬유 공장, 의류 공장, 플라스틱 공장 등 소규모의 기업들이 대부분이었다. 몇몇 공장들은 이 지역의 키부츠에 의해 운영되었다.
7) 사회적 생활 수준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고, 1965~67년 사이의 불경기 동안 더욱 그러하였다.
8) 6일 전쟁 이후에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포병 진지의 포격으로 고통을 당하였다.
9) 현재의 인구는 약 14,000명이며 겨울에는 따뜻하지만 여름에는 매우 덥다.
6. 가볼 만한 곳
1)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이 있다. 보존 상태가 좋으며 8천 명의 인원을 수용했다고 한다.
2) 원형 극장 뒷편에는 텔(Tell)이 있는데 이집트 시대의 신전 유적, 사울 시대의 도자기,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물,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십자군 시대의 요새지, 아랍 터기 시대의 도구등이 있다.
3) 근처에는 사울이 블레셋과 싸운 길보아산과 십자군 요새지인 벨보아르(Belvoir.프랑스어-아름다운 금관)가 있다.
벧스안(Beth-shan)
=> 벧산을 보라뜻: 안전한 집
갈릴리호수 남쪽 19km 지점. 요단강 서쪽 6.4km 되는 지금의 벧산으로 인구 1,500가량이다.
(1) 잇사갈의 경내지만 므낫세에게 속한 요해지다(수17:11,삿1:27).
(2) 사울과 그아드리 블레셋과 싸우다가 이곳을 빼앗기고 또 그들도 다 이곳 에서 전사하였다.
이곳의 이름을 벧산 이라고도 한다(삼상31:10).
예수 당시에는 하나의 긴요한 지방이였고, 그후 이곳에 교회학교를 설립하므로 유명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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