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45) 요르단 오지의 성읍들 | ||
[국민일보 2006-01-09 15:35] | ||
사울은 이곳 사람들을 암몬의 나하스왕으로부터 구했으며(삼상 11:1∼11), 후에 이곳 사람들은 사울의 은혜를 기억하여 사울 왕 부자가 블레셋과의 길보아산 전투에서 전사해 목이 없는 시체가 벧산 성벽에 못 박혀진 것을 알고, 이곳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에 가져와 매장하였다(삼상 31:11∼13). |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41) 디셉과 아벨므홀라 | ||
[국민일보 2005-12-12 15:35] | ||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 가장 유명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엘리야와 그 후계자 엘리사의 고향을 답사하기로 하고 암만을 출발해 성서에 나오는 ‘왕의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성경에 나오는 왕의 대로는 오늘날 요르단의 35번 도로 중 수도인 암만 북쪽으로는 가장 중심된 도로로 암만 남쪽으로는 사막으로 난 15번 도로 다음으로 중심을 이루는 도로다. 암만을 출발해 50km를 달리면 요르단에서 가장 큰 유적이 남아있는 제라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20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안자라(Anjara)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그릿 시냇가에 도착하게 되는데, 바로 시냇가 위 언덕에 엘리사의 고향인 아벨므홀라가 보인다. 그릿 시냇가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때 가뭄이 들어 엘리야가 잠시 머문 곳으로 오늘날의 와디 알 야비스(Wadi al Yabis)이다. 그릿 시내에서 잠시 멈춘 후 도로를 따라 올라가자 바로 위에 야비스의 푯말이 있어 이곳이 그릿 시냇가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시내라고는 하지만 우기 때만 흐르는 와디(건천)인지라 도착했을 때도 물이 없어 엘리야 때의 가뭄을 상기시켰다. 엘리야는 이곳에서 까마귀가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로 연명했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이곳을 떠나 오늘날 레바논 지역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그곳 과부의 공궤를 받았다(왕상17:1∼9).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의 고향인 아벨므홀라는 바로 이 시내 계곡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오른쪽 언덕의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이곳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주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곳으로 경사진 산 언덕에 위치해 있지만 밭을 경작할 수 있는 비교적 비옥한 지역이다. 오늘날 텔 엘 마클룹(Tell el-Maqlub)인 아벨므홀라가 성경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사사 시대에 미디안 사람들이 기드온 300명 군사의 기습을 받고 스레라와 아벨므홀라 평원의 경계를 경유해 도망하는 사건에서 언급되었다(삿7:22). 그리고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아벨므홀라에 있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까지 와서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았다(왕상19:16, 19∼21). 오늘날 별다른 유적이 없지만 그 옛날 엘리사가 12겨리소로 밭을 갈다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되었던 아벨므홀라 가까이서 사진을 찍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엘리야의 고향 디셉으로 갔다. 디셉은 아벨므홀라가 보이는 그릿 시냇가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막길의 산을 넘어가다가 다시 비포장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엘리야는 성경에서 여섯 번이나 디셉 사람으로 나오고 있다(왕하3:1). 그리고 디셉의 지명에 대해서는 독립적으로 나오고 있지 않고 확실한 자료도 없기 때문에 디셉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약간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이전까지 디셉은 그릿 시내(와디 엘 야비스) 지류 중 하나인 와디 엘 마스쿠프(Wadi el-Masquf) 근처에 위치한 리스팁(Listib)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글루엑은 왕상17:1의 야베스 길르앗의 야베스 사람을 엘리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엘리야의 활동 무대가 대체로 와디 엘 야비스(그릿 시내) 지역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디셉은 얍복강과 야르묵강 사이의 길르앗 지역의 산악지대에 있는 성읍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일반적으로 오늘날 텔 마르 일야스(Tell Mar Ilyas)로 보고 있다.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발굴이 거의 끝나고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마침 한국 사람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에 대해 신기한 듯 나에게 엘리야와 관련된 모자이크를 가리켜 주었다. 현재 이곳에는 산 정상에 일부 바닥이 모자이크로 장식된 회당터로 보이는 60평 정도의 유적이 남아있어 그나마도 사람이 거주했던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고향인 디셉과 아벨므홀라.오늘날 별다른 유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힘들게 이곳을 찾아 멀리 요단계곡 너머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그 옛날 바알 숭배에 빠져 종교적으로 암울한 이스라엘을 일깨웠던 엘리야와 그 후계자 엘리사의 시대적 사명을 되새겨 본다. 이원희 목사 photobible.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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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몰고 온 ‘강간치사 사건’
그런데 다른 남자들에게 강간당한 첩의 시신을 열두 조각으로 토막내어, 전국 각지로 보낸 사람이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에 있었다. 그 어느 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끔찍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사사기 19장 서두에 보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지도자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자기 정욕과 고집대로 방자하게 행동해도 통제하기 힘든 시대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그때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레위 지파에 속하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여 데리고 왔다. 그런데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간통을 저질러 남편을 떠나 다시 베들레헴 친정으로 돌아가 지내게 되었다. 남편이 그 여자를 내쫓았는지, 그 여자가 남편 보기 민망하여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갔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넉 달쯤 지나자 남편은 마음이 조금 누그러져 여자를 다시 데려오기로 하였다.
남자가 하인 한 명과 함께 나귀 두 필을 끌고 베들레헴 장인 집으로 내려가서 여자를 만났다. 성경에서는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라고 하였는데, 다정히 말했다고 하는 것은 용서와 화해의 말을 했다는 뜻일 것이다. 자기 잘못으로 인해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아내는 감격하여 남편을 친정집으로 들였다. 장인도 사위를 환영하여 융숭하게 대접해주었다.
남자가 사흘을 머물다 여자를 데리고 에브라임으로 돌아가려 하자 장인이 하루 더 쉬었다 가라며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러기를 장인이 여러 차례 되풀이하여 결국 며칠 더 머무르게 되었다.
첩 잃은 남자, 첩의 시체 토막낸 뒤 각 지파에 보내
남자가 장인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여자와 하인과 함께 에브라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기브아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어느 노인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고 발을 씻고는 잠을 자려고 하는데, 동네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노인에게 그 남자를 내어놓으라고 시비를 걸어왔다. 이때 그들은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동성애적인 표현인 셈이다.
이 장면은 천사들이 소돔의 롯의 집에 머물 때 일어난 사건과 아주 비슷하다. 소돔 사람들도 손님을 끌어내어 ‘상관하겠다’고 하였다. 롯은 손님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딸을 내어주겠다고 하였는데, 기브아에서도 노인이 남자 손님을 구하기 위해 자기 딸을 내어놓겠다고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노인의 제안을 거부하자 남자가 할 수 없이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놓았다. 그들은 밤새도록 그 여자를 상대로 윤간(輪姦)을 저질렀다. 여자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돌아가면서 성폭행을 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여자를 범하였는지 모른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그 짓을 하다가 불량배들이 여자를 놓아주었다. 여자는 기다시피 하여 남편이 기거하는 집 문 앞에 이르러 고꾸라지고 말았다. 남자가 아침 일찍 나가보니 여자가 엎어져 있어 일어나라고 하였으나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첩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에브라임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칼을 들어 시체를 열두 개로 토막내었다. 왜 열두 토막으로 쪼개었느냐 하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자기 첩에게 어떤 짓을 했느냐 하는 것을 그 시체 토막을 증거로 하여 생생히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 시체 토막을 전해 받은 각 지파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전대미문의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자의 시체를 열두 토막으로 내어 전국을 상대로 일종의 극렬 시위를 벌인 일도 없던 사례였다.
토막 시체를 본 사람들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 지파에서 인구 10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칼을 들고 모여들어, 순식간에 40만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기브아 지방으로 몰려가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행한 불량배들을 내어놓으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그 불량배들만 처단하려고 하였으나, 기브아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자 결국 베냐민 지파 전체를 상대로 싸우게 되었다.
칼을 들어 싸울 수 있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의 수는 대략 3만3000명 정도 되었다. 3만의 병력으로 40만의 대군과 맞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작전을 잘 짜서 초기에는 40만 대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전과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투가 계속될수록 베냐민 지파가 불리하게 되어 마침내 씨가 남아 있지 않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종전 후엔 베냐민 지파 종족 보존 협조 ‘아이러니’
여기서 특이한 점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이 베냐민 지파와 싸워 대승을 거두고 나서 베냐민 지파가 안쓰러워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다. 눈물을 흘린 정도가 아니라 대성통곡하였다고 한다.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통곡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비록 전쟁에서는 적으로 싸운 베냐민 지파이긴 하지만, 그들은 같은 동족이 그와 같이 씨가 마를 정도로 처참하게 된 사실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면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도록 할 것인가 민족 전체가 고민하며 묘수를 짜냈다. 말하자면 한때 적이었던 베냐민 지파에 대해 햇볕정책을 펴기 시작한 셈이다.
우선 베냐민 지파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얼마 남지 않은 베냐민 남자들이 아내를 얻어 씨를 퍼지게 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전쟁 중에 베냐민 여자들이 거의 죽고,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들도 베냐민 지파 남자들에게는 자기 딸들을 주지 않기로 성급하게 하나님 앞에 맹세하였기 때문에, 살아남은 베냐민 남자들이 아내를 얻을 길이 묘연하였다.
결국 이스라엘 지파들이 묘책을 짜내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그곳으로 쳐들어가, 남자들과 유부녀들을 다 죽이고 처녀 400명만 포로로 잡아와서 베냐민 지파 남자들에게 아내로 주었다. 그래도 여자가 모자라자, 이번에는 베냐민 남자들에게 실로 지역에서 명절 축제가 벌어질 때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춤추러 나오는 여자들을 보쌈해오라고 부추겼다. 그 여자의 아비나 형제가 항의를 하면 자기들이 잘 수습해주겠다고까지 하였다.
베냐민 남자들은 그 조언대로 실로의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축제 분위기에 들떠서 춤을 추러 나오는 여자들을 납치하여 자기 아내로 삼아버렸다. 그리하여 베냐민 지파는 보존되고 이스라엘 각 지파도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것이 사사기 끝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다. 사사기 마지막 구절을 한번 더 소개하겠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에셀나무:깃으로 덮은 것 같은 가지와 여기에 섬세한 비늘 같은 잎이 달라붙은 것 같은 독특한 모양의 나무다.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사울은 기브아에서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그의 사후 뼈는 야베스-길르앗의 또다른 에셀나무 아래 매장됐다(창세기 21:33,사무엘상 22:6,31:13).
야베스 길르앗:Jabeshgilead(지명)
(d['l]qi $BE[]y', Jabeshgilead)
요단 강 동쪽 길르앗 땅에 있어서의 중요한 성읍이다.
사사 시대에 그 시민이 종교적 의무를 게을리한 탓으로 엄한 징벌을 받았다(삿 21:812).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은 암몬 왕 나하스에게 포위 당하였을 때, 사울에게 내원(來援)을 구하여 구조되었다(삼상 11:1`길르앗 야베스').
그들은 오랫동안 이 은혜를 기억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길보아 산에서 전사하여 그들의 시체가 모욕 당한다는 소식을 듣자 이를 찾아다가 길르앗 야비스에 엄숙히 장사하고 금식하였다(삼상 31:11,대상 10:11,`길르앗 야베스').
다윗은 왕이 되었을 때 그들의 용기와 선의의 행위를 칭찬하였다(삼하 2:4-7). 그리고 다윗은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유골을 야베스 길르앗에서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그들의 조상의 묘에 장사하였다(삼하 21:14).
벧산의 동남쪽 15km, 와디 엘 야비스(Wadi e1 Y bis)의 북안에 있는 델아부 카라스(Tell Abu Kharaz)와 동일시된다.
이 곳은 요단 유역 동쪽 북반(北半)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다. BC 3200년 경에 일어나 초기 청동기 시대로부터 각 시대를통하여 로마 시대, 비잔틴 시대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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