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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희 목사] (45) 요르단 오지의 성읍들-길르앗 야베스

영국신사77 2008. 4. 14. 23:55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45) 요르단 오지의 성읍들
                                                                                      [국민일보 2006-01-09 15:35]


  오늘날 요르단 지역에 있는 성경의 도시들은 이스라엘 다음으로 많다. 성경에 언급된 도시는 대체로 480곳 이상으로 이스라엘에 절반이 넘는 264여 곳이 있으며, 다음으로 요르단에 67여곳이 있어 두번째로 많다. 그리고 이집트 35여곳, 그리스 시리아 레바논과 기타 지역 순으로 소재해 있다. 지금까지 ‘성서속 도시 이야기’를 통해 현대 국가별로 비교적 생소한 도시들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본인이 답사한,요르단 지역의 생소한 도시들을 사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도피성 중의 하나인 길르앗 라못

이곳은 다메섹 남쪽 약 112㎞ 지점,오늘날 이르비드 동쪽 약 24㎞쯤 되는 곳에 있다. 라못 길르앗으로 부르기도 하는 이곳은 요단강 동쪽에 있던 베셀, 바산 골란과 함께 도피성(逃避城) 중 하나이다(신 4:43,수20:8). 가나안 정복 후 레위 지파 므라리 자손에게 할당되었으며(수 21:38) 솔로몬 왕에 의해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왕상 4:13). 이후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200여년이 넘도록 전투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이곳은 낮은 언덕에 베두인 가정이 양을 치고 있을 뿐 전쟁의 흔적은 흙속에 묻혀버렸다.

                                    아담 근처의 요단 계곡에 있는 사르단

이곳은 현재 텔 에스 사이디야(Tell es-Saidiyah)로 요단 계곡 동쪽의 아담과 숙곳 사이,곧 아담 북쪽 19㎞ 지점에 있다. 오늘날 텔(tell·언덕) 형태로 남아 있으며 언덕 꼭대기에 서면 요단 계곡이 남북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사울이 장사된 길르앗 야베스

  야베스(Jabesh)는 벧산 남동쪽 15㎞ 지점에 있는 요단강 유역 동북쪽 지방의 가장 비옥한 지역에 있다. 성경의 그릿 시내로 주장되는 와디 야비스(Wadi el-Yabis)의 북안에 있는 텔 아부 카라즈(Tell Abu Kharaz)와 동일시되는 이곳은 길르앗 야베스라고도 한다.

  사울은 이곳 사람들을 암몬의 나하스왕으로부터 구했으며(삼상 11:1∼11), 후에 이곳 사람들은 사울의 은혜를 기억하여 사울 왕 부자가 블레셋과의 길보아산 전투에서 전사해 목이 없는 시체가 벧산 성벽에 못 박혀진 것을 알고, 이곳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에 가져와 매장하였다(삼상 31:11∼13).

                                             압살롬이 죽은 마하나임

마하나임은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군대)를 만나 붙인 지명이다(창 32:1∼2). 지금은 유적과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한 가정집이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압살롬이 상수리 나무에 걸려 죽임을 당한 것(삼하 18:9∼15)을 보여주듯 주위는 온통 상수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요단강물이 넘쳤던 아담

아담(Adam)은 요단 동쪽의 얍복강이 요단강으로 유입되는 계곡에 위치한 읍으로 현재 텔 엣 다미예(Tell ed-Damiyeh)이다. 이곳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여리고 앞의 요단강을 건널 때 요단강이 멈춰 강물이 이곳까지 넘친 곳이다(수 3:9∼17).

                                음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은 아벨싯딤

요단강 하류 동쪽 10∼13㎞ 지점인 텔 엘 케프레인(Tell el Kefrein)으로 추정되는 아벨싯딤(Abel-Shittim)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최후로 진을 쳤던 곳이다(민 33:49). 이스라엘은 이곳에서 모압 여인과 음행을 하다가 2만4000명이나 죽었다(민 25:1∼9). 이후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냈다(수 2:1).

                                       에돔의 북쪽 요새 도시인 보스라

오늘날 부세이라(Buseira)인 성경의 도시 보스라(Bozrah)는 사해 남동쪽 약 32㎞,페트라 북부 약 56㎞ 거리에 위치해 있는 에돔의 중요한 요새 도시로 에돔 왕 요밥(Jobab)의 고향이며 수도이다(창 36:33,대상 1:44). 보스라는 에돔의 북쪽 지역에서 가장 견고한 도시였다.

오늘은 잘 접하지 못하는 요르단 지역의 여러 도시들을 화보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아쉽지만 요르단 지역의 도시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부터는 터키 지역의 도시들을 찾아간다.

(photobible.co.kr)



                    [이원희 목사의 성서 속 도시 이야기] (41) 디셉과 아벨므홀라
                                                                                                                      [국민일보 2005-12-12 15:35]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 가장 유명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엘리야와 그 후계자 엘리사의 고향을 답사하기로 하고 암만을 출발해 성서에 나오는 ‘왕의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성경에 나오는 왕의 대로는 오늘날 요르단의 35번 도로 중 수도인 암만 북쪽으로는 가장 중심된 도로로 암만 남쪽으로는 사막으로 난 15번 도로 다음으로 중심을 이루는 도로다. 암만을 출발해 50km를 달리면 요르단에서 가장 큰 유적이 남아있는 제라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20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안자라(Anjara)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그릿 시냇가에 도착하게 되는데, 바로 시냇가 위 언덕에 엘리사의 고향인 아벨므홀라가 보인다.

  그릿 시냇가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때 가뭄이 들어 엘리야가 잠시 머문 곳으로 오늘날의 와디 알 야비스(Wadi al Yabis)이다. 그릿 시내에서 잠시 멈춘 후 도로를 따라 올라가자 바로 위에 야비스의 푯말이 있어 이곳이 그릿 시냇가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시내라고는 하지만 우기 때만 흐르는 와디(건천)인지라 도착했을 때도 물이 없어 엘리야 때의 가뭄을 상기시켰다. 엘리야는 이곳에서 까마귀가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로 연명했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이곳을 떠나 오늘날 레바논 지역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그곳 과부의 공궤를 받았다(왕상17:1∼9).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의 고향인 아벨므홀라는 바로 이 시내 계곡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오른쪽 언덕의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이곳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주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곳으로 경사진 산 언덕에 위치해 있지만 밭을 경작할 수 있는 비교적 비옥한 지역이다.

오늘날 텔 엘 마클룹(Tell el-Maqlub)인 아벨므홀라가 성경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사사 시대에 미디안 사람들이 기드온 300명 군사의 기습을 받고 스레라와 아벨므홀라 평원의 경계를 경유해 도망하는 사건에서 언급되었다(삿7:22). 그리고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아벨므홀라에 있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까지 와서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았다(왕상19:16, 19∼21).

오늘날 별다른 유적이 없지만 그 옛날 엘리사가 12겨리소로 밭을 갈다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되었던 아벨므홀라 가까이서 사진을 찍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엘리야의 고향 디셉으로 갔다. 디셉은 아벨므홀라가 보이는 그릿 시냇가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막길의 산을 넘어가다가 다시 비포장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엘리야는 성경에서 여섯 번이나 디셉 사람으로 나오고 있다(왕하3:1). 그리고 디셉의 지명에 대해서는 독립적으로 나오고 있지 않고 확실한 자료도 없기 때문에 디셉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약간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이전까지 디셉은 그릿 시내(와디 엘 야비스) 지류 중 하나인 와디 엘 마스쿠프(Wadi el-Masquf) 근처에 위치한 리스팁(Listib)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글루엑은 왕상17:1의 야베스 길르앗의 야베스 사람을 엘리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엘리야의 활동 무대가 대체로 와디 엘 야비스(그릿 시내) 지역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디셉은 얍복강과 야르묵강 사이의 길르앗 지역의 산악지대에 있는 성읍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일반적으로 오늘날 텔 마르 일야스(Tell Mar Ilyas)로 보고 있다.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발굴이 거의 끝나고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마침 한국 사람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에 대해 신기한 듯 나에게 엘리야와 관련된 모자이크를 가리켜 주었다. 현재 이곳에는 산 정상에 일부 바닥이 모자이크로 장식된 회당터로 보이는 60평 정도의 유적이 남아있어 그나마도 사람이 거주했던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고향인 디셉과 아벨므홀라.오늘날 별다른 유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힘들게 이곳을 찾아 멀리 요단계곡 너머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그 옛날 바알 숭배에 빠져 종교적으로 암울한 이스라엘을 일깨웠던 엘리야와 그 후계자 엘리사의 시대적 사명을 되새겨 본다.

이원희 목사 photobible.co.kr



 

                 [함태경기자의 미션 업] 영성 사회성으로 성경읽기

                                            -영성과 사회성의 조화와 균형을 갖춘 다윗의 리더십

                                                                                                  [국민일보 2005-01-03 15:14]

한국 교회가 사회적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성장세가 둔화되고 지역 계층 이념 갈등에 휘둘리면서 한국 교회에 대한 이런저런 우려섞인 지적들이 나타나고 있다. 기자는 한국 교회를 보면서 ‘위기 속의 기회’를 떠올리곤 한다. 시대상황을 뛰어넘어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총체적 복음 즉,성경의 본질로 돌아가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있다고 확신한다.

성경에 대한 통전적 이해와 정확한 해석,적용에 힘쓴다면 기독교내 보수와 진보 양 진영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다. 이를 위해 성경읽기의 편향성을 거둬내야 한다. 과거 양 진영은 특정 구절만을 강조,반복하면서 성경 본문 선택의 편중성과 진영적 해석이라는 오류를 범했다. 기독인들조차 정치나 경제는 현실세계에,성경은 이상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결코 옳지 않다는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영성과 사회성의 조화와 균형을 갖춘 다윗의 리더십


   예들 들면 다윗의 생애는 영성과 사회성의 조화와 균형을 갖춘 평신도 리더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집권 초기 유다 지파만의 왕이었던 다윗은 베냐민 지파 끌어안기에 나섰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가를 지어서 유다 지파 사람들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

 

  사울은 자신의 출신 지파인 베냐민 지파를 이용, 40년간 국가 경영을 사유화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 폭정의 직접적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넓은 아량과 기지로 지연과 혈연 등 연고주의로 상처입은 민족의 마음을 달랬다. 자신의 정적 사울의 장례를 치러주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까지 상을 내렸다.

  그의 통치력의 절정은 인내에서 찾을 수 있다. 베냐민 지파를 끌어안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왕국이 남북으로 나눠진 것. 통일을 위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군대를 일으켜 북쪽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민족 화합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 기다림을 선택했다.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때문이다. 유다 지파의 왕을 넘어 더 큰 왕이 되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게 해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을 가졌던 것이다.

  7년반 뒤 북쪽의 실세자인 아브넬이 다윗 왕과의 협상을 위해 찾아왔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하지만 다윗의 측근 요압이 사사로운 이익에 얽매어 아브넬을 암살,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다윗이 요압을 시켜서 아브넬을 암살했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오해는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남북 모두 다윗을 믿지 못할 사람으로 여기게 된 것. 뒤틀려진 상황 속에서 그는 종일 금식하며 울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부터 아브넬에 대한 암살이 요압의 단독 소행임을 믿게 됐다.

  다윗 왕의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계 위에 높이는 것이었다(시 57:11). 국가가 하나님의 공과 의를 드러내는 나라로 세워져야 한다는 믿음이다.

 

  정치란 위기 상황 속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권모술수 궤계 등 잔재주를 펴는 기술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이 밝혀지면서 12지파 장로들의 합의하에 다윗은 국가의 통일 대업을 완수했다. 국가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제국주의자의 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는데 힘썼다(삼하 5:12).

  부분이 아닌 전체를, 나무가 아닌 숲을 볼 수 있는 성경통독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영성과 사회성이라는 두가지 잣대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전쟁 몰고 온 ‘강간치사 사건’

                                                                                                 2004-04-06 10:31 주간동아
 
 
  강간과 토막 시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몇 년 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인체의 신비전’에서 한 서양인의 시신이 세로로 14개의 절편으로 쪼개져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정교하게 쪼개지고 방부제 처리가 잘 되어 있어 섬뜩하다는 느낌은 덜한 편이었다.

  그런데 다른 남자들에게 강간당한 첩의 시신을 열두 조각으로 토막내어, 전국 각지로 보낸 사람이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에 있었다. 그 어느 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끔찍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사사기 19장 서두에 보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지도자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자기 정욕과 고집대로 방자하게 행동해도 통제하기 힘든 시대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그때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레위 지파에 속하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여 데리고 왔다. 그런데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간통을 저질러 남편을 떠나 다시 베들레헴 친정으로 돌아가 지내게 되었다. 남편이 그 여자를 내쫓았는지, 그 여자가 남편 보기 민망하여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갔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넉 달쯤 지나자 남편은 마음이 조금 누그러져 여자를 다시 데려오기로 하였다.

남자가 하인 한 명과 함께 나귀 두 필을 끌고 베들레헴 장인 집으로 내려가서 여자를 만났다. 성경에서는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라고 하였는데, 다정히 말했다고 하는 것은 용서와 화해의 말을 했다는 뜻일 것이다. 자기 잘못으로 인해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아내는 감격하여 남편을 친정집으로 들였다. 장인도 사위를 환영하여 융숭하게 대접해주었다.

  남자가 사흘을 머물다 여자를 데리고 에브라임으로 돌아가려 하자 장인이 하루 더 쉬었다 가라며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러기를 장인이 여러 차례 되풀이하여 결국 며칠 더 머무르게 되었다.

                               첩 잃은 남자, 첩의 시체 토막낸 뒤 각 지파에 보내

  남자가 장인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여자와 하인과 함께 에브라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기브아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어느 노인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고 발을 씻고는 잠을 자려고 하는데, 동네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노인에게 그 남자를 내어놓으라고 시비를 걸어왔다. 이때 그들은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동성애적인 표현인 셈이다.

  이 장면은 천사들이 소돔의 롯의 집에 머물 때 일어난 사건과 아주 비슷하다. 소돔 사람들도 손님을 끌어내어 ‘상관하겠다’고 하였다. 롯은 손님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딸을 내어주겠다고 하였는데, 기브아에서도 노인이 남자 손님을 구하기 위해 자기 딸을 내어놓겠다고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노인의 제안을 거부하자 남자가 할 수 없이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놓았다. 그들은 밤새도록 그 여자를 상대로 윤간(輪姦)을 저질렀다. 여자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돌아가면서 성폭행을 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여자를 범하였는지 모른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그 짓을 하다가 불량배들이 여자를 놓아주었다. 여자는 기다시피 하여 남편이 기거하는 집 문 앞에 이르러 고꾸라지고 말았다. 남자가 아침 일찍 나가보니 여자가 엎어져 있어 일어나라고 하였으나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첩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에브라임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칼을 들어 시체를 열두 개로 토막내었다. 왜 열두 토막으로 쪼개었느냐 하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자기 첩에게 어떤 짓을 했느냐 하는 것을 그 시체 토막을 증거로 하여 생생히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 시체 토막을 전해 받은 각 지파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전대미문의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자의 시체를 열두 토막으로 내어 전국을 상대로 일종의 극렬 시위를 벌인 일도 없던 사례였다.
  하긴 요즈음도 시신 시위라는 것이 있다. 어떤 목적을 위해 투쟁하다가 장렬하게 자기 몸을 내던진 사람의 시신을 앞세우고 시위를 계속 이어가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그런데 시신을 열두 토막 내어 자기 뜻을 관철하고자 시위를 벌인 것은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토막 시체를 본 사람들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 지파에서 인구 10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칼을 들고 모여들어, 순식간에 40만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기브아 지방으로 몰려가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행한 불량배들을 내어놓으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그 불량배들만 처단하려고 하였으나, 기브아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자 결국 베냐민 지파 전체를 상대로 싸우게 되었다.

  칼을 들어 싸울 수 있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의 수는 대략 3만3000명 정도 되었다. 3만의 병력으로 40만의 대군과 맞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작전을 잘 짜서 초기에는 40만 대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전과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투가 계속될수록 베냐민 지파가 불리하게 되어 마침내 씨가 남아 있지 않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종전 후엔 베냐민 지파 종족 보존 협조 ‘아이러니’
  여기서 특이한 점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이 베냐민 지파와 싸워 대승을 거두고 나서 베냐민 지파가 안쓰러워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다. 눈물을 흘린 정도가 아니라 대성통곡하였다고 한다.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통곡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비록 전쟁에서는 적으로 싸운 베냐민 지파이긴 하지만, 그들은 같은 동족이 그와 같이 씨가 마를 정도로 처참하게 된 사실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면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도록 할 것인가 민족 전체가 고민하며 묘수를 짜냈다. 말하자면 한때 적이었던 베냐민 지파에 대해 햇볕정책을 펴기 시작한 셈이다.

  우선 베냐민 지파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얼마 남지 않은 베냐민 남자들이 아내를 얻어 씨를 퍼지게 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전쟁 중에 베냐민 여자들이 거의 죽고,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들도 베냐민 지파 남자들에게는 자기 딸들을 주지 않기로 성급하게 하나님 앞에 맹세하였기 때문에, 살아남은 베냐민 남자들이 아내를 얻을 길이 묘연하였다.

  결국 이스라엘 지파들이 묘책을 짜내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그곳으로 쳐들어가, 남자들과 유부녀들을 다 죽이고 처녀 400명만 포로로 잡아와서 베냐민 지파 남자들에게 아내로 주었다. 그래도 여자가 모자라자, 이번에는 베냐민 남자들에게 실로 지역에서 명절 축제가 벌어질 때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춤추러 나오는 여자들을 보쌈해오라고 부추겼다. 그 여자의 아비나 형제가 항의를 하면 자기들이 잘 수습해주겠다고까지 하였다.

  베냐민 남자들은 그 조언대로 실로의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축제 분위기에 들떠서 춤을 추러 나오는 여자들을 납치하여 자기 아내로 삼아버렸다. 그리하여 베냐민 지파는 보존되고 이스라엘 각 지파도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것이 사사기 끝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다. 사사기 마지막 구절을 한번 더 소개하겠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에셀나무:깃으로 덮은 것 같은 가지와 여기에 섬세한 비늘 같은 잎이 달라붙은 것 같은 독특한 모양의 나무다.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사울은 기브아에서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그의 사후 뼈는 야베스-길르앗 또다른 에셀나무 아래 매장됐다(창세기 21:33,사무엘상 22:6,31:13).

 

                                           야베스 길르앗:Jabeshgilead(지명)

                                                                           (d['l]qi $BE[]y', Jabeshgilead)
   요단 강 동쪽 길르앗 땅에 있어서의 중요한 성읍이다.

  사사 시대에 그 시민이 종교적 의무를 게을리한 탓으로 엄한 징벌을 받았다(삿 21:812).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은 암몬 왕 나하스에게 포위 당하였을 때, 사울에게 내원(來援)을 구하여 구조되었다(삼상 11:1`길르앗 야베스').

  그들은 오랫동안 이 은혜를 기억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길보아 산에서 전사하여 그들의 시체가 모욕 당한다는 소식을 듣자 이를 찾아다가 길르앗 야비스에 엄숙히 장사하고 금식하였다(삼상 31:11,대상 10:11,`길르앗 야베스').

  다윗은 왕이 되었을 때 그들의 용기와 선의의 행위를 칭찬하였다(삼하 2:4-7). 그리고 다윗은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유골을 야베스 길르앗에서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그들의 조상의 묘에 장사하였다(삼하 21:14).

 

  벧산의 동남쪽 15km, 와디 엘 야비스(Wadi e1 Y bis)의 북안에 있는 델아부 카라스(Tell Abu Kharaz)와 동일시된다.

  이 곳은 요단 유역 동쪽 북반(北半)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다. BC 3200년 경에 일어나 초기 청동기 시대로부터 각 시대를통하여 로마 시대, 비잔틴 시대에까지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