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Shloam)
뜻:보낸다
벧엘 동북쪽 16km 지점
(1) 옛 이름은 실로, 실로아 또는 셀라이다(사8:6, 느3:15).
(2)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못으로서 히스기야왕이 앗수르의 산헤립의 공격 에 대비하여 기혼의 샘으로부터 성내에 있는 실로암 못까지 지하도를뚫어서 물을 끌어 왔다(왕하20:20, 대하 32:30).
(3) 그때까지는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이라고 표횬한 것 같이 동남 모퉁 이를 돌아서 옛 실로암 못까지 천천히 흘러 들어간다(사8:6)
(4) 시로암 못은 넓이가 16-5.4미터 못물은 아랫 쪽에 있는"옛 못"또는"윗 못" 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불리는 "아랫 못"으로 흘러 들어갔다(사7:3, 왕하18:17,사22:9,11).
(5) 신약 성서의 예수 당시도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사람이 죽었단 말이 있다(눅13:4).
(6)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에 진훌에서 침을 뱉아 발라준 다음 실로암 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눈을 뜨게한 이적으로 알려졌다(요9:7).
이스라엘 역사속에서의 실로
happymp 님의 박스
이스라엘은 제의를 중심으로 결속된 신앙 공동체이다. 이들은 야웨종교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였고 제의를 통해 자신들의 특별한 공동체임을 자각하였다.
실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이미 고대 가나안인들을 위한 제의 장소였다. 이스라엘이 이 장소를 어떻게 차지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성서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으나 성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실로가 야웨종교를 위한 성소가 되었음을 증거한다.
중앙성소는 처음에는 세겜이었고 그 다음에는 벧엘에 있었다고 널리 추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확인 할 수 없다. 벧엘로 말하면 그곳 역시 족장들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성소였고 또 한때는 거기에 언약궤가 있었다는 말도 들린다.(삿20-26-28) 그러나 언약궤는 자주 싸움터로 옮겨졌고 또한 동일한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진영은 실로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삿21:12) 지파들의 중심지가 여러번 옮겨졌다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사료들은 오로지 실로만을 중앙 성소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지파 동맹이 무너졌을 때에도 여전히 중앙성소는 그곳에 있었다.
이스라엘이 광야 유랑생활을 할 때 구심점이 되었던 회막과 전쟁수호신의 역할을 한 법궤가 이곳에 있었다. 이스라엘 각 지파에 대한 토지 분배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할 때에는 이곳이 전쟁을 지휘하는 전쟁사령부의 기능을 담당했다. 실로 성소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던 매우 초기 시대부터 이스라엘 역사의 구심점인 장소였고 정치적군사적 중심지였다.
[송인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실로가 오시기까지
2007-12-12 09:13 기독일보
이스라엘은 그들의 민족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기다림' 이었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그것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의 시작이었으며 전부였습니다.
한 개인이나 한 민족의 역사도 본래는 어떤 '기다림'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습관이 되고 그것이 의식 구조로 형성이 됩니다. 야곱이 12 아들을 불러놓고 축복하는 창세기 49장의 말씀 중에 나타난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8-12) 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인 그들 가정의 의식 구조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며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입니다. ??실로??는 히브리말로 ??평화?? ??안식?? 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의 생애도 그랬고 그들의 민족적인 역사도 그랬습니다.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족속들이었기 때문에 늘 안정되고 평화로운 생활을 갈구해 왔습니다. 자기나라와 자기 땅이 없으니 안정과 평화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쫓겨다녀야 했으며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광야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언젠가는 실로가 올 것이며, 그 실로가 오시기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주실 것이다' 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다림'은 곧 신앙으로 그들의 민족성 속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에는 '막연함'이나 '짐작함'이 있습니다. 가슴만 부풀어 올랐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것이 바로 '기다림'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막상 진짜 '기다림'의 실체가 나타날 때도 사람들은 그것을 잡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때가 많습니다.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보면 실로 '실로'에 대한 기다림만 있었지 그 실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나름대로 그 실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림은 초조하고 지루함을 가져옵니다. 그러니 때문에 사람들은 '실로'가 오기 전에 때로는 실망하고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실로'가 이 땅에 왔을 때는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실로'가 구체적으로 현현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부분은 바로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모습이 없는 막연함이 대부분입니다. 막연함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상한 형태의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로'의 실체는 예수님이 오시면 분명해집니다. 신앙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신 것같이 우리의 신앙도 분명하고 우리의 구원도 분명하고 우리의 기도의 응답도 분명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우리 인생들에 있어 막연한 것이나 희미한 모든 것에 대해서 확실함을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해답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개인이나 역사 속에 예수님께서 ‘실로’로 오신 것입니다.(*)
주안장로교회 송인 담임목사
'# 이스라엘[자료실] > ♣北部(갈릴리) 이스라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단과 아합왕 시대의 성터<김성교수> (0) | 2008.04.09 |
---|---|
여리고와 종려나무<김성교수> (0) | 2008.04.09 |
3500년 전통 사마리아 유월절, 사마리아인들은? (0) | 2008.04.03 |
★세겜 유대인 성지 요셉의 무덤: 팔레스타인 폭도들에 의해 파괴되다 (0) | 2008.04.03 |
벳산과 하솔<김성교수> (0) | 2008.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