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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2- 나폴레옹, 샹폴리옹과 이집트

영국신사77 2007. 10. 26. 00:41
성지를 찾아서 2- 나폴레옹, 샹폴리옹과 이집트 
출처 블로그 > ♡~작은기쁨~♡
원본 http://blog.naver.com/plusgen/50006303943

영국박물관 이집트 조각 전시관 로제타 스톤

                        나폴레옹,샹폴리옹과 이집트 

 

                                                                     김성 〈협성대교수·성서고고학〉

(◀ 샹폴리옹 1790~1832년, 어릴때부터 고대어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던 그는 17세에 이집트 파라오들의 연대기를 재구성하였다. 로제타 석비를 토대로 샹폴리옹은 1822년에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아브라함의 이주와 출애굽사건,예수님의 피난 무대가 되었던 이집트는 성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다.오늘날 회교국가가 되었지만 이집트에는 아직도 많은 기독교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이집트는 19세기 초까지는 역사의 뒤편에 가려져 있었다.이집트의 고대문명을 인류 앞에 다시 끌어낸 것은 나폴레옹과 샹폴리옹이었다.

1817년 3월 초 프랑스 남부의 그르노블에서 한때 이집트를 점령했던 프랑스 황제와 상형문자 해독의 열쇠를 쥔 학자의 극적인 만남이 있었다. 유배지 엘바를 탈출한 나폴레옹은 1천2백명의 근위병을 거느리고 파리를 향해 진격하던 도중이었다.그 와중에 그르노블대학의 고대사 교수였던 샹폴리옹은 정치가인 형의 소개로 그를 만나 자신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콥트어 사전에 관해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집트학의 초석을 놓는 정복자와 학자의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1798년 5월19일 스물 아홉에 프랑스 군대의 최고사령관이 된 나폴레옹은 3만8천명의 군대,3백28척의 함대를 이끌고 툴롱항을 떠나 이집트로 향했다. 인도로 통하는 지중해의 동서교통로를 확보한 영국에 맞서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이탈리아와 이집트를 남북으로 연결해 영국의 위상에 치명타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나폴레옹의 선단에는 이집트를 체계적으로 탐사하기 위해 1백75명의 고고학자 언어학자 지리학자 물리학자 토목기사 측량기사 화가 시인 등과 함께 탐사에 필요한 모든 장비와 참고 서적 등이 실려 있었다. 나폴레옹의 전기작가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 에밀 루드비히는 이를 두고 그가 소규모 대학을 이집트에 상륙시켰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한편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한달내내 지중해의 길목을 지켰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짙은 안개로 그만 프랑스 함대를 놓치고 말았다. 약 40일동안의 항해 끝에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프랑스 군대는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이집트 내륙으로 진격했다. 8월7일 영국 함대는 아부키르에 정박해있던 프랑스 함대를 찾아냈고,두 척만 남겨놓고는 모조리 침몰시켰다.그러나 이미 이집트 내륙으로 진출한 프랑스군은 이집트를 요새화하였고,이로써 두 세력의 대결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듬해인 1799년 8월 한 무리의 프랑스 공병대가 지중해 연안의 로제타 근처에서 줄리앙 요새를 건설하기 위해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있었다. 그 중 한 병사가 새까맣고 단단한 돌판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한 쪽에 촘촘히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높이 125㎝,폭 70㎝,두께 28㎝의 이 현무암 석비에는 상형문자와 흘림체인 민용문자,그리스어 등 모두 세 종류의 문자가 기록되어 있었다.유물은 곧 알렉산드리아의 프랑스 탐험대 본부로 옮겨졌다. 프랑스 학자들은 우선 쉽게 읽을 수 있었던 맨밑의 그리스어 비문을 해독한 결과 이 석비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업적을 찬양하는 공적비로 BC 196년3월27일에 북부 이집트의 중심 도시였던 사이스(Sais)의 한 궁전 광장에 세워졌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뒤 프랑스 군대는 1801년9월 영국에 이집트를 양도하는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나폴레옹은 이미 1년 전에 프랑스로 도망친 뒤였고,그동안 이집트에서 수집한 수많은 유물들은 고스란히 영국의 전리품으로 대영박물관을 장식하게 됐다.

어릴때부터 고대 언어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던 샹폴리옹은 17세가 되던 해 `파라오 지배 하의 이집트'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학술원의 인정을 받았고,로제타 석비의 탁본을 갖고 본격적인 상형문자 해독을 시도하였다. 19세에 이미 그르노블대학의 고대사 교수로 발탁되었으나 1821년에는 나폴레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몰려 대학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비로소 상형문자의 해독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게 된다.

샹폴리옹은 먼저 로제타 석비의 그리스어 부분 해독을 통해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라는 두 왕의 이름을 밝혀냈고,상형문자에서 왕의 이름은 반드시 타원형의 카르투쉬 안에 들어 있다는 전제 하에 두 이름을 비교해 중복되는 상형문자들의 음가를 하나씩 찾아내기 시작했다. 1822년 프랑스 학술원의 책임자인 다씨에르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그는 `소리글자인 상형문자 알파벳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1천5백여년동안 인류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있던 이집트 상형문자가 드디어 그 비밀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탐사는 모두 24권에 이르는 방대한 `이집트 묘사'의 출판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고,샹폴리옹의 연구는 그 속에 묘사된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의 정체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고대 이집트라는 보물상자를 유럽으로 가져왔다면 열쇠를 찾아 그 상자를 연 사람은 바로 샹폴리옹이었다. 이 두 프랑스인의 노력에 힘입어 성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고대 이집트의 문명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