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스미트와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
1872년 가을철 어느날.30대 초반의 대영박물관 직원이 창고에서 무더기로 쌓인 토판문서들을 하나씩 들추어내며 쐐기문자로 쓰여진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그는 벌써 여러 날 동안 `길가메쉬'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한 영웅의 모험담을 담고 있는 토판들을 찾아내 11개째 읽는중이었다.
사랑하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슬퍼하며 삶의 허무를 느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영생을 누리고 산다는 우트나피슈팀을 찾아가 그로부터 영생의 비밀을 귀담아 듣는 구절을 읽다가 청년은 깜작놀랐다. “신들이 홍수를 결정한 후..... 에아 신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집을 부수고 배를 만들어라! 모든 생물의 씨앗을 배에 함께 실어라!” 바로 창세기 6~9장에 등장하는 노아 홍수의 첫 부분을 연상시키는 대목이었다.
조지 스미트라는 이 청년은, 그 해[1872년] 12월 3일 런던에서 개최된 성서고고학회에서 자신이 해독한 문서들을 토대로 `갈대아인들의 대홍수'에 관해 발표했다.이 발표는 당시 성서적 보수주의가 지배하던 영국 사회에서 대단한 화제거리가 되었다.
1840년 3월26일 런던에서 태어난 스미트는 지폐를 인쇄하는 한 회사에 도안공으로 취직했다.이 출판사는 롤린슨,레이야드,라쌈 등 당대 유명 고고학자들에 의한 메소포타미아의 발굴결과를, 그림을 곁들인 호화 양장본으로 출판했고, 스미트는 이런 책들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이미 1800년대 초부터 쐐기문자의 부분적인 해독이 시도됐기 때문에, 쐐기문자는 더 이상 신비의 글자가 아니었다.따라서 스미트는 독학으로 고대의 기록들을 읽을 수 있었다.
날마다 대영박물관 앗시리아 유물 전시실에서 석상들에 새겨진 문자들을 스케치하고 연구하던 그는, 당시 앗시리아 부서의 책임자였던 롤린슨의 눈에 띄어 그의 조수로 일하게 됐다. 1871년 `쐐기문자 기록으로부터 번역한 앗슈르바니팔의 역사'를 발표해 이 분야 최고 전문가가 된 스미트가, `메소포타미아의 대홍수'를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의 토판들은 1852년 라쌈이 니느웨에 있는 앗슈르바니팔의 도서관을 발굴해 수집한 2만4천여개 토판들 중의 일부였다.서기전 7세기에 기록된 것이지만,서기전 18세기에 기록된 수메르의 홍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깊은 신화였다.
스미트의 대발견은 1842년 보타,그리고 1845년 레이야드에 의한 니느웨 발굴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의 성서 고고학적 탐사는, 영국의 지중해 장악을 방해하고자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했던 17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듬해 팔레스타인으로 진출한 나폴레옹은 부하들에게 예루살렘을 비롯한 성지를 답사케했으나 영국과의 접전 끝에 항구도시 악코에서 패배했다.그 결과 영국이 11세기 십자군 시대 이후, 유럽국가로서는 처음으로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이후 영국은 메소포타미아를 가로질러 인도로 가는 교통로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사적 첩보의 임무를 띤 영국군 장교들의 발굴에 의해,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유물들이 하나씩 드러나게 되었다.
무슬림이라 불리는 이교도들이 들끓던 저주받은 광야의 땅 속에서 캐낸 토판문서들이 흙 속에 묻힌 먼 옛날의 전설이 아니라, 바로 성서의 사건들을 차례로 조명해주는 결정적인 단서로 여겨지면서, 비로소 성서고고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스미트는 홍수 이야기의 결론 부분이 누락됐음을 공표했고, 당시 영국의 최대 일간지인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라프지는 그 나머지 부분을 찾는데 1천 기니아의 포상금을 내걸었다. 스미트는 이 모험을 자청, 1873년 기나긴 여행 끝에 티그리스 강변의 모술에 도착하여, 고대의 니느웨로 여겨지는 쿠윤직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5일째 되던 날, 그는 온영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대홍수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들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그는 새로 발견한 3백84개의 토판문서들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랐다.
스미트는 1876년 두 번째의 탐사 도중, 열사병으로 쓰러져 이국땅에서 36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그러나 그의 비범한 집착력이이뤄낸 성과는, 항상 성서고고학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