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앙금이 만든 석회암 온천 파묵칼레(Pamukkale)는 사도 빌립의 순교지인 터키 남서부의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 언덕을 순백으로 채색하고 있다.
터키어로 ‘목화의 성’이란 뜻의 파묵칼레는 멀리서 보면 목화를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하고 만년설에 덮인 언덕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많은 석회층으로 이루어진 파묵칼레는 수천년 동안 히에라폴리스 언덕에서 솟아난 뜨거운 온천수가 리쿠스 계곡 언덕의 비탈을 흘러내리면서 형성되었다. 온천수에 함유된 산화칼슘 성분이 굳어지면서 중국 쓰촨성의 황룽처럼 계단식 자연 풀장을 만든 것이다.
파묵칼레 최고의 절경은 기하학적 곡선의 턱을 가진 야외 풀 모양의 ‘테라스 풀’이다. 고드름 모양의 종유석이 떠받치는 테라스 풀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풍경은 파묵칼레를 소개하는 책자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하지만 로마의 황제와 귀족은 물론 클레오파트라까지 찾아와 온천욕을 즐겼다는 파묵칼레는 1980년 이후 인근에 온천호텔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온천수가 서서히 고갈되기 시작했다. 쪽빛 하늘을 담은 파스텔 톤의 온천수가 찰랑거리며 넘쳐흐르던 테라스 풀은 바싹 말랐고,순백의 천연 풀장도 물이 말라 누렇게 퇴색했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자연유산으로 지정한 1988년 이후에는 석회층의 보존을 위해 파묵칼레에서의 목욕을 금지시키고 맨발로 걷게 했다. 다랑논을 닮은 18개의 커다란 웅덩이 중 아래에 위치한 절반 정도는 온천수가 흘러 넘쳐 아쉬우나마 바지를 걷어 부치고 온천수의 따뜻함을 느껴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그러나 파묵칼레 정상 북동쪽에는 비록 크기는 작지만 지금도 수십 개의 ‘테라스 풀’이 자라고 있다. 풀 가장자리 턱의 유려한 곡선과 거울 파편처럼 햇빛을 반사하는 수면은 한 폭의 그림. 특히 해질녘 오렌지색으로 물드는 테라스 풀은 파묵칼레가 숨겨놓은 비경 중의 비경으로 꼽힌다.
히에라폴리스 박물관 맞은편에 위치한 파묵칼레 온천수영장은 비록 석회암층에서 즐기는 온천욕만큼 운치는 없지만 온천수영장 바닥에 로마시대의 기둥 등 유적이 굴러다녀 저 유명한 로마목욕탕으로 시간여행을 온 듯하다.
히에라폴리스엔 유난히 석관묘가 많다. 북쪽 성 밖에 산재한 1200여 기의 다양한 석관묘는 파묵칼레의 온천수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고대부터 온천수가 류머티즘,피부병,그리고 신경통에 좋다고 소문이 나면서 아시아와 유럽에서 병자들이 떼를 지어 모여들었다고 한다. 병을 치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온천 옆에 묻히면서 히에라폴리스는 오랜 세월에 걸쳐 무덤의 도시로 변한 것이다.
석회봉 위쪽에 위치한 히에라폴리스는 기원 전 190년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2세에 의해 건설됐다. ‘성스러운 도시’라는 뜻의 히에라폴리스는 로마,비잔틴 시대까지 번성했으나 결국 셀주크 왕조에 의해 멸망한다. 도시 전체가 파괴된 것은 14세기의 대지진 때문.
유적 중 가장 볼 만한 것은 야산 중턱에 위치한 원형극장이다. 2세기에 건설된 로마의 원형극장은 1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보존상태가 뛰어나다. 파묵칼레 시내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관중석에 서서 시계 바늘을 뒤로 돌리면 검투사의 기합소리와 관중들의 환호성이 메아리칠 듯하다.
이밖에도 히에라폴리스에는 박물관으로 변한 목욕탕과 교회 터,바실리카,극장,잡초밭에 나뒹굴고 있는 아폴로 신전의 잔해,그리고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도미티안 문 등이 푸른 이끼를 훈장처럼 달고 그 옛날의 영광을 증거하고 있다.
원형극장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만나는 팔각형의 건물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건물 중의 하나인 사도 빌립 교회. 사도 빌립은 그의 아들들과 함께 이곳에 집을 짓고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던 중 우상 숭배자들에게 매를 맞고 옥사했다고 한다.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사도 빌립은 4명의 딸과 함께 이곳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해질 무렵 히에라폴리스의 푸른 초장에서 만난 풍경 하나가 낯익다. 양떼에 둘러싸인 양치기가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으로 귀가하는 풍경은 성화 속의 한 장면이 아니던가.
파묵칼레(터키)=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