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神學 · 敎理· 교회사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장흥길)

영국신사77 2007. 10. 22. 18:18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

-로마서 6장을 중심으로-

(Indicative and Imperative in Paul

: A Study on Romans 6)

 

                                                                                             장  흥  길


 

1. 들어가는 말

초대 교회 이래로 지금까지 교회는 '믿음 없는 행함'과 마찬가지로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항하여 싸워 왔다. 때로는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기독교 신앙을 세속적인 기복 신앙 내지는 복지 멘탈리티로 변질시키는 신앙 없는 행동주의(Aktionismus)에 맞서 싸우기도 하였고, 때로는 기독교를 세상을 포기 혹은 단념하거나 세상으로부터 도피 내지는 은둔하는 단순한 내세 종교(Jenseitsreligion)로 이해하는 행함이 없는 내면화 신앙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교회가 어떤 세속 이념을 신봉하는 사회 단체나 은밀한 비밀 집회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동시에 세상을 위한 선교·봉사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죄인을 위한 구속의 중재자(Erlösungsmittler)일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창조의 중재자(Schöpfungsmittler)요, 우주의 통치자(Kosmokrator)이기 때문이다(고전 8:6; 골 1:15ff; 히 1:1-4; 요 1:1-18 참조). 이런 점에서 볼 때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양자택일(Alternative)의 문제로 보는 어떤 견해도 그 관계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아니다. 게다가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경건치 않은 자가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믿음과 행함을 나란히 동일한 구원의 요소로 보는 신인(神人) 협력설(Synergismus)도 결코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믿음 없는 행위자'가 되지 않고 또 '행함 없는 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신약성경에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조사하는 것은 불가피한 연구 과제이며, 특히 선물(Gabe)인 구원의 직설법(Indikativ)과 과제(Aufgabe)로 요구되는 구원의 명령법(Imperativ)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본 연구는 초기 기독교의 뛰어난 증인인 바울이 내용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게 구원의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표준적인 본문(locus classicus)인 로마서 6장을 석의하고 그 신학적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바울에게 있어서의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한다. 이로써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행함의 올바른 관계 이해를 위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려 한다.

이런 논문의 목적에 이르도록 먼저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 해명을 시도했던 다양한 연구 중 대표적인 몇 연구를 선별하여 간단히 일별하고 로마서 6장 본문을 사역(私譯)한 다음 그것을 석의(釋義)하고 그 신학적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2.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 관계의 연구사

바울서신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한 본문 안에서 구원의 직설법과 명령법이 나란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 4-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직설법),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명령법) 라든가,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직설법),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명령법), 또는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직설법),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명령법)처럼 직설법과 명령법이 한 본문에 동시에 언급된다.

이러한 직설법과 명령법의 공존(共存)을 바울의 윤리 논의에서 처음으로 문제 삼은 사람은 스위스 바젤(Basel)의 신학자 파울 베른레(Paul Wernle, 1872-1939)였다. 그는 1897년 출판한 자신의 저서,『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과 죄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 있는 죄를 알고 있었지만 이론가로서는 그것을 부인하였다" 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인에게 이미 주어진 구원의 약속인 직설법과 인의자(認義者)에게 요구된 권고인 명령법의 관계를 일치될 수 없는 한 모순으로 규정하였다. 이로써 베른레에게서는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 해명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문제 제기 이상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에 대해 양자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모순으로 이해한 베른레와 다르게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은 1924년 발표한 소논문(Aufsatz), "바울에게 있어서의 윤리의 문제"에서 양자의 관계를 불가분(不可分)의 공속(共屬) 관계에서 그 해명을 시도했다. 즉, 불트만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내용적으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진정한 이율 배반"(eine echte Antinomie) 혹은 "역설"(Paradoxie)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직설법과 명령법이 겉보기에는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나, 내용적으로는 빌립보서 2장 12-13절에서처럼 상호 결합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명령법은 인의(認義)의 근거 위에 세워져 있으며 직설법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불트만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단지 인간 실존을 변증법적으로 이해한 인간론적인 관점에서 "너는 네가 된 자가 되어라"(Werde, der du bist)라는 관념론적인 공식문 안에서 이해함으로써 바울 윤리의 종말론적인 관점과 기독론적인 관점을 간과하였다. 또 불트만은 경험적으로 인지될 수 있는 것으로서 "죄 있음과 죄 없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그것을 단지 믿음 안에 두는 극단"에 이른다. 이로써 의와 죄를 인의자(認義者)의 전체 삶과 윤리적인 행동으로부터 분리하여 "경험적인 행동 차원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의 무죄 선고의 우선성(extra nos)이 유지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의 실행에 대한 인간의 참여라는 관점이 축소되고 단지 두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볼 때 불트만은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이해하는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점을 마련하였지만, 양자의 관계를 충분하게는 설명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불트만의 입장에 대해 귄터 보른캄(Günther Bornkamm, 1905-1990)은 드러나게 비판하지는 않지만 불트만의 견해를 너머 간다. 보른캄은 로마서 6장 전반부(1-11절)의 주제인 세례와 후반부(12-23절)의 주제인 권면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해명하려 하였다. 그에 의하면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에 참여함으로써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의 전환이 일어났으며, 수세자에게 선사된 새 생명의 감추어져 있음이 당연한 명령법의 근거이다. 즉 명령법은 인의자에게 있는 어떤 선한 능력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례 받을 때 일어난 것을 반복하는 것이기에 명령법은 "요구하는 위로(aufrufender Trost)이며 위로적인 요구(tröstlicher Aufruf)인 신적 권고(paravklhsi")"이다. 보른캄의 경우 명령법의 불가피성은 수세시 선사된 새 생명의 감추어져 있음 내지는 잠재성 안에 그 근거를 두고 있지만 이 새로운 생명의 잠재성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옛 시대가 변하기는 하였으나 새 시대가 우주적으로 드러나게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론적인 관점보다 더 넓은 관점 안에 나타난다. 즉 보른캄은 직설법과 명령법에서 그 이율 배반의 근거를 불트만의 경우처럼 인간론 뿐 아니라 나아가 더 넓은 시계(視界)인 기독론과 성령론을 포함하는 종말론적인 변증법 안에서 찾는다.

볼프강 나우크(Wolfgang Nauck) 역시도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자신의 짧은 연구인 "불변사 ou^n"에서 바울서신 뿐 아니라 전체 신약성경 서신에 나타난 권면 말씀 앞에 위치한 접속사 '그러므로'(ou^n) 용어를 조사한다. 이 연구에서 나우크는 불변사 ou^n에 접속된 권면이 체계 있게 신학적으로 전개된 논구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 준다. 즉 나우크는 "ou^n-불변사가 원시기독교 윤리의 성격을 분명하게 알게 하는데, 곧 원시기독교 윤리는 자율적인 윤리나 목적 윤리가 아닌 결과적인 윤리이며, 삶을 영위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으로부터 도출해내는 윤리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는 '감사할 수 있음의 윤리'(Ethik der Dankbarkeit)이다" 라고 결론짓는다. 나우크의 연구는 초기 기독교의 권면 말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기초한 권면의 신학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밝혀 준다. 그러나 직설법을 단지 명령법의 전제나 근거로 보고, 명령법을 직설법에서 나온 단순한 결과로 여긴다면, 즉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순수한 인과 관계로 해명한다면, 이는 직설법과 명령법과 관련된 바울의 본문을 다만 피상적으로 성찰한 결과일 것이다.

보른캄과 다른 각도에서 에른스트 캐제만(Ernst Käsemann, 1906-1998)은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에 대한 불트만의 해명 시도가 충분치 않으며 인간론적으로 축소되었다고 비판한다. 캐제만은 불트만의 경우 직설법이 너무 일방적으로 선물로 간주되고 이로써 구원의 선물이 선물을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음을 염려한다. 캐제만에 의하면 명령법은 직설법에 단순하게 추가된 어떤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직설법과 함께 주어져 있었다. 직설법을 단지 명령법의 근거로 여기고 명령법을 단순히 직설법에서 유래되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면, 명령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능성을 실현하라는 요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캐제만은 바울의 경우 오히려 명령법이 "직설법 안에 통합되어 있으며(integriert) 결코 역설적으로 직설법 옆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를 섬기는 자에게 있어서만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게다가 캐제만은 인간론적인 차원을 너머 하나님의 의(dikaiosuvnh qeou')를 단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여기는 하나님의 '선물'(Gabe)로 이해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Macht)으로 이해함으로써(롬 1:16f 참조) 선물을 선물 공여(供與)자이신 하나님과 분리하지 않는다. 이로써 조건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추가적으로 제한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지막 때 하나님의 의를 향해 뛰어 들어(롬 6:12ff) 이제는 "의의 열매"(빌 1:11)를 맺을 수 있다. 이처럼 캐제만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변증법을 단지 인간론적으로만 보지 않고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올바르게 이해한다.

요약하면, 바울의 윤리를 이해하는데 베른레에 의해 문제 제기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는 '모순'(베른레)으로 규정될 수 없으며, '이율 배반'이나 '역설'(불트만)로도 적절하게 해명될 수 없다. 또 단순한 '인과(因果) 관계'(나우크)로도 충분하게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인간론보다 더 폭넓은, 기독론과 성령론을 포함한 종말론적인 시야에서(보른캄), 나아가 구원의 선물과 선물 주신 하나님을 분리하지 않는 통합적인 관점에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바울의 본문 진술 의도에 일치할 것이다. 이제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의 선물(직설법)과 선물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권면(명령법)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본문인 로마서 6장으로 시선을 옮겨보자.

3. 로마서 6장의 본문 사역(私譯)

바울 윤리의 핵심 문제인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바울서신에서 가장 범례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본문인 로마서 6장을 석의(釋義)하기 위해 먼저 본문을 자리 매김하고, 본문을 사역한 다음, 요약적으로 본문을 석의하고, 그리고 나서 그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3.1. 본문의 자리 매김

캐제만은 로마서의 몸체 부분(Briefkorpus)을 '하나님의 의' 주제 전개의 관점에서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눈다. 곧 하나님의 의 계시의 필연성(1:18-3:20), 믿음의 의로서 하나님의 의(3:21-4:25), 종말론적인 자유의 실현으로서 믿음의 의(5-8장), 하나님의 의와 이스라엘 문제(9-11장)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활 안에서의 하나님의 의(12:1-15:13)가 그것이다. 이 몸체의 가운뎃 부분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의가 현실에서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죽음 권세로부터의 자유'(5장),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6장), '성령의 권세 안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7-8장)라는 소주제 안에서 설명된다.

그리고 이 주제들은 직선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인의(認義)의 현실이라는 보다 큰 주제 안에서 불가분(不可分)으로 공속(共屬)되어 있다. 바울은 5장에서 주장한 세상에서의 종말론적인 삶을 세상의 일상, 교회, 개인 실존의 현실로부터 설명한다. 이를 위해 바울은 믿음의 의로서 하나님의 의의 현실적인 의미를 죄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로 규정하고, 인의자에게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의 시대 전환(Äonenwende)을 굳게 붙잡을 것과 이에 부합된 주권(통치권) 교체(Herrschaftswechsel)를 요구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6장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서 "바울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단지 죄의 권세로부터의 분리로만이 아니라 즉각적인 새로운 순종 관계로의 편입, 곧 새로운 존재 안에서의 영의 섬김으로 묘사"한다. 바울은 전해 받은 세례 전승 본분(롬 3:25f; 4:25)에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관점으로부터 인의 진술을 강조한다. 인의자는 수세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속죄 죽음의 효능에 참여하게 되며, 그분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며, 살아 계신 주님이시요 화해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에게 있어서 "세례, 인의, 성화는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Miteinander)"이다. 이러한 직설법과 명령법의 불가분성은 성령의 권세 안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다루는 7-8장의 명제적 요약 구절인 7장 5-6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5-8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성령의 권세 안에서의 자유'라는 주제들이 단순하게 직선적으로,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인의에 대한 현실적 해명이라는 과제 앞에서 통합적으로 설명되는 불가분의 한 덩어리이다. 특히 구원의 직설법을 묘사하는 세례 본문(6:1-11)은 인의자에게 "거룩함에 이르라"(6:19)는 권면으로 요구되는 명령법 진술인 권고 본문(6:12-23)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 있는 한 단위진술(Einheit)이다.

3.2. 본문 사역(私譯)

1그런즉 우리가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가? 은혜가 더하도록 우리가 죄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인가?

2결코 그렇지 않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아직도 그[죄] 안에 살겠느냐?

3또는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세례 받았던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에 세례 받은 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그 죽으심 안으로 들어간 세례로 말미암아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그분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5곧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에 일치하여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 또한 부활에 일치하여 연합한 자가 될 것이다.

6우리의 옛 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이것을 우리가 아는바 이는 죄의 몸이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7그것은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이미) 의롭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을 믿는다.

9우리가 알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으니 다시는 죽지 아니하고 사망이 그분을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10그분이 죽으셨던 것은 죄에 대항하여 단번에 죽으셨던 것이요, 그분이 사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신 것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들도 너희 자신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위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

12그러므로 (너희들이) 몸의 욕구에 순종하기 위해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도리어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단번에)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15그러므로 어찌 하겠느냐?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에 죄를 짓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16죽음에 이르는 죄의 종으로 순종하는 자든, 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으로 순종하는 자든, 너희가 너희 자신을 순종하려고 종으로 맡기는 자에게 종이 되는 줄 알지 못하느냐?

17하지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너희가 (이전에)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가 전해 받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며

18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19너희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내가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한다. 이는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不淨)과 불법에 종으로 내어 주어 불법에 이른 것처럼 이제는 거룩함에 이르도록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단번에) 드리라.

20너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

21그때에 너희가 무슨 열매를 가졌느냐? 이제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일)의 마지막이 사망이기 때문이다.

22그러나 이제는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너희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가지고 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

23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기 때문이다.

3.3. 요약적인 본문 석의

(1절) "그런즉"(ou^n)으로 시작되는 새 단락은 단순히 논리적인 인과 관계를 나타낼 뿐 아니라 5장과 6장이 연결된 한 덩어리임을 보여 준다.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5:20하)고 말하는 바울의 의도가 더욱 넘치는 은혜를 받기 위해 인의자가 계속 죄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인가?

(2절) 결코 그렇게 생각될 수는 없다. 인의자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ajpeqavnomen, 단순과거)면 어찌 죄 가운데 여전히 살 수 있는가? 6장 전체에서 16번 단수로 사용된 "죄(aJmartia)"는 구체적인 '범죄'나 '과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화된 '죄의 권세'(Sündenmacht)를 가리킨다. 인의자가 결코 죄 지을 수 없다거나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수세자는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바울의 의도이다.

(3절) 인의가 세례와 함께 나란히 묘사된다. 세례 받을 때 죽음을 상징하는 물 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수세자는 수세시 예수의 죽으심 '안으로'(eij") 들어가는 것이다.

(4-9절) 이로써 수세자는 예수와 함께 하나가 된다. 물론 이 하나됨은 신비적인 합일(unio mystica)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례를 통해서 수세자는 그리스도와 "운명공동체"(Schicksalsgemeinschaft)가 되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Eingliederung)가 되는데 이는 수세자가 현실에서 영위할 새 생명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6:19 참조). 이러한 그리스도와 수세자의 하나됨은 "함께"-공식문(suvn-Formel)으로써 묘사된다. 수세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sunetavfhmen, 4절), "연합한 자"(suvmfutoi, 5절)가 되었으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sunetaurwvqh, 6절), "함께 살 것이다"(suzhvsomen, 8절). 4절에 suvn-합성동사(suvn-Komposita)를 뒤따르는 여격의 인칭대명사 aujtw'/는 '연합(사귐)의 여격'(dativus sociativus)으로 내용적으로는 8절의 "그리스도와 함께"(suvn Cristw'/)와 동일하게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나타낸다. 세례를 통해 수세자는 그리스도와의 믿음의 사귐 안으로 편입된다. 그러므로 세례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기독교적인 삶과 사고를 결정하는 중심적인 출발 '시점'(Datum)"이다.

(5절) 이렇게 볼 때 자주 논의의 대상이 되는 tw'// oJmoiwvmati는 '수단의 여격'(dativus instrumentalis) 또는 '원인의 여격'(dativus causae)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오히려 '관계의 여격'(Dativus sociativus)으로 보는 것이 전체 문맥에 더 어울린다. 또 때때로 논란이 일어나는 oJmoiwvma의 해석 문제와 관련해서 그것은 다른 여러 가지 해석 가운데 세례에서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재화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동등, 일치'란 뜻이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6절) "죄의 몸"(toV sw'ma th'" aJmartiva")에서 "죄의"는 여러 속격의 용법에서 '성질의 속격'(genitivus qualitatis)이다. 바울의 경우 죄를 지었던 인의자의 몸은 동시에 "죄로 죽을 몸"(12절)이다. 세례 받은 인의자는 더 이상 이 몸으로 하여금 죄에게 '종 노릇하지'(douleuvein) 못하게 해야 한다.

(8-9절)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된 자인 수세자에게 사망이 다시 '주인 노릇할'(kurieuvein) 수 없기 때문이다.

(10절) th'/ uJmartiva/는 '대항의 여격'(dativus incommodi)이며 tw'/ qew'/는 '호의의 여격'(dativus commodi)이므로 여기서는 각각 '죄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위하여'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죽으심은 '죄에 맞서서' 단번에 죽으심이며, 그분의 사심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신 것이다. 특히 9절의 "다시 죽지 아니하고"(oujkevti ajpoqnhv/skei)와 "다시 주인 노릇하지 못함"(oujkevti kurieuvei)과의 맥락에서 볼 때 "단번에"(ejfavpax)가 강조되어 있다.

(11절) 이 구절에서 이제 6장 전반부를 마감하는 필연적인 결론(conclusio)이 내려진다. 그러므로 수세자는 이제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하나님을 위해서는 산 자로 여겨야 한다. 여기서 '여기다'(logivzesqai)는 단순하게 '생각하다'는 뜻이 아니라 고린도후서 5장 14절처럼 '판단하다'(krivnein)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2절) 세례론을 다룬 앞 단락(1-11절)에서 바울은 수세자가 이미 죄의 권세에 대하여 죽었음(2. 6절)을 말한 다음 (교리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삶을 위한 권면의 단락(12-23절)의 첫 머리에서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mhV basileuvetw)"고 말한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 구절에서 바울은 '죄 짓지 말라', '죄 짓지 말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죄는 인간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인격적인 한 권세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죄의 '권세 몰수' 내지는 "권세 박탈"(Entmächtigung)을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인의자가 새 생활을 영위하는 새로운 자세요 시계(視界)이다. 이제 죄로 하여금 더 이상 "죽을 몸"(sw'ma qnhtovn)을 주관하게 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몸'(sw'ma)은 헬라적인 이분적인 개념에서 '혼'(yhchv)의 대립어가 아니라 바로 13절에 언급된 수세자 '자신'을 말한다. 이 '몸'은 하나님이나 의인화된 권세인 죄에 대하여 사귈 수 있고 교통할 수 있는 인간이며, 권세가 인간을 다스리는 자리이며, 인간을 다스리는 권세인 주권이 교체되는 자리이다. 모든 사람은 몸을 입고 있으며 죄를 지을 수 있다(posse peccare). 수세자도 역시 유혹을 받을 수 있으며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마땅히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인의자는 그 몸의 부활을 기다린다. 이때 육체의 부활을 선취(先取)하는 것인 몸의 새로운 순종이 요구된다.

(13절) 수세자는 자신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의 권세에게 '내어 주지 말고'(mhdeV paristavnete, 현재 명령), 하나님께 (단번에) '드려야'(parasthvsate, 단순과거 명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세자는 하나님의 병기가 될 수 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선물을 제공해 주신 하나님은 결코 분리될 수 없게 된다. 바울은 '순종'이나 '행함'과 같은 인간의 행동을 하나님의 창조성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이런 식으로 윤리는 인의의 메시지에 통합되어 있다".

(14절) 그 이유로 두 가지가 언급된다. 하나는 수세자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그가 더 이상 "율법 아래"(uJpoV novmon) 있지 않고 "은혜 아래"(uJpoV cavrin)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음'은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은혜 아래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때 '은혜'는 인의나 화해 또는 성령의 은사 받음 등의 용어에 대한 상위(上位) 개념이다. '죄 아래 있지 않음', 곧 '죄로부터 자유함'이란 바울의 경우 '죄 지을 수 없음'이나 '무죄함'이 아니라 의를 위해, 하나님에 대하여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음'을 뜻한다.

(15절) 이제 '디아트리베 문체'(Diatribenstil)로 "은혜가 더하도록 죄에 머물러 있을까?"라는 1절의 질문이 다른 표현을 사용한 변형 질문으로 다시 제기된다.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에 죄를 짓겠느냐?" 여기서 분명한 선택이 수세자에게 요구된다.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하여 "결코 그럴 수 없다"로 대답하면서 그 이유를 16-23절에 자세하게 서술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하여 이전의 진술보다 더 강하게 부정한다.

(16절) '죄로부터 자유함'이란 "단지 죄의 권세로부터의 격리(Absonderung)"가 아니라, "즉시 새로운 어떤 순종 관계 안으로 들어감(Einfügung)"이며 "영의 새로운 존재 안에서의 섬김"(롬 7:6)이다. 따라서 '죄로부터 자유함'이란 복종의 진공 상태가 아니라 '새로운 순종'(nova oboedientia) 관계 안으로의 편입이며, 이런 의미에서 죄의 지배를 받는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 의의 종이 되는 '주권 교체'를 의미한다. 바로 주권 교체가 수세자에게서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인의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에서 일어난다. 이때 '순종'(uJpakohv)이란 '믿음'(pivsti")의 다른 표현이요 '믿음'의 동의어이다(롬 1:5; 10:3; 11:30 참조). '믿음'이란 은혜 아래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며 순종하며 사는 삶이다. 죄는 하나님을 맞서지만 이러한 순종의 선택은 죄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운다. 바로 이 믿음의 순종이 의로 인도한다. 그러니까 구원의 선물에 부합된 삶을 요구하는 과제가 구원의 현재 안에 포함되어 있다.

(17절) 이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된 것에 대한 감사가 뒤따른다. 감사의 내용이 18절까지 이어진다.

(18절) 수세자는 의의 종이다. 수세자가 받은 의는 그 수세자로 하여금 섬기게 하는 의이다. '의에게 종이 되었다는 것', 곧 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께로 양도된 주권교체가 명령법의 전제이다. 또 죄에게서 벗어나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은 "이루어진 어떤 상태가 아니라 삶의 해방(Freigabe)"이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실제로 이제 비로소 미래를 향해 세워진 삶의 자유"이다.

(19-23절) 이 단락에서 '그때'(tovte)와 '이제'(nu'n)가 대립되어 있다. 그때에는 "죄의 종"(dou'loi th'" aJmartiva", 20절)이 되었으나, 이제는 "의에게 종"(dou'la th'/ dikaiosuvnh/, 19절)이 되고 "하나님께 종"(doulwqevnte" tw'/ qew'/, 22절)이 되었다. 이것은 대조 양식문(Kontrastformel) 안에 나타난 '주권교체'를 요구하는 '시대교체'와 관련되어 있다.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나 새 사람이 된 수세자, 곧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 넘어온 인의자에게 이에 합당한 주권교체가 요구된다.

(19. 22절) 바울은 이 두 구절에서 '인의'와 '성화'의 관계를 해명한다. '거룩함'(aJgismov")에 이르도록 자신의 지체를 의에게 드려야 하며,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 '거룩함'이란 "믿는 자의 어떤 상태(Zustand)나 성질(Beschaffenheit)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을 위해 구별됨(Absonderung)"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위해 요구하시는 것이 거룩이라면 "성화(aJgiasmov")는 곧 하나님의 거룩함에 일치하는 행동이며, 또 그러한 행동의 결과"이다. 로마서 6장 전체에서 나타나듯이 구원의 직설법은 성화의 요구인 명령법 앞에 놓여 있다. 게오르그 슈트레커(Georg Strecker)가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자만이 죄의 종이나 의의 종,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16절) 거룩함은 자유인 동시에 섬김이며, 종말론적인 목표인 거룩함(롬 6:22; 살전 4:3f 참조)은 "의의 열매"를 통해 선취(先取)된다(롬 6:19ff; 빌 1:11). 하나님의 뜻은 인의자의 거룩함이다. 이 '거룩함'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이며, 그것은 수세자가 자신을 의에게 드려 하나님의 종이 됨으로써,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가능하게 된다. 인의가 하나님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처럼 성화 역시도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말미암는다. 바로 이 '거룩함'의 개념에서 직설법과 명령법은 함께 만난다. 이렇게 바울의 경우 하나님의 선물인 '인의'와 선물 받은 자에게 요구된 '과제'는 불가분으로 서로 공속(共屬)되어 있다. 곧 '성화'는 인의와 다른 개념이 아니라 수세자의 삶에서 영위되는 '인의'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인의와 성화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하나의 단위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 곧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는 길(방법)이며, 하나님의 은사(cavrisma)가 하나님의 종된 자를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한다. 이렇게 볼 때 '거룩함'이란 일차적으로 믿는 자가 점진적으로 종교적인 완전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포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과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3.4. 신학적인 결론

바울은 본 연구를 위해 선정된 본문에서 하나님 내지는 의에 대한 순종을 위하여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룬다. 이때 '죄로부터 자유함'이란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의미하며, 내용적으로 그것은 수세자가 새로운 순종을 위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은혜로 주어진 구원의 선물(Gabe)과 이것을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과제(Aufgabe)는 양자 모두 '그리스도의 주권'(Regnum Christi) 아래 있는 수세자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니까 '인의'(직설법)와 '성화'(명령법)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성화란 수세자들에게 있어서 세례 받은 이후 변화되는 다양한 상황 안에서 또 새로운 순종 관계 안에서 늘 새롭게 경험하는 인의이기 때문이다.

개신교회는 수세기 동안 인의와 성화의 관계를 연속적 혹은 발전적인 구원의 단계라는 관점에서 직선적으로 여겨 왔다. 즉 '구원의 길'(ordo salutis)의 도식에서 인의는 성화의 전제로, 성화는 인의의 후속 단계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인과적 내지는 단계적 이해는 인의를 기독론이나 종말론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단지 인간론 내지는 실존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데서 기인한다. 다시 말하면 인의를 선물 받은 혹은 의롭다 여김 받은 인의자의 관점에서 보고 선물을 그 선물 주신 분으로부터 분리하여 인의를 바울이 강조하는 죄의 권세로부터 의에게 드려진 주권 교체의 관점에서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에 의하면 인의와 성화는 "연속적으로 뒤따르는 두 선물"이 아니다. 성화는 인의의 다음 단계로 시간상 인의의 후속 과정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의와 함께 일어난다. 인의는 성화를 요구하며, 성화는 인의에 대한 감사와 기억이며 새로운 순종 관계 안에서 경험하는 인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에 관해 말하는 직설법은 단순한 명령법의 전제가 아니며, 또한 명령법은 단지 직설법에서 유래되어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명령법이 선물 받은 확실한 증거로 선물 받은 인의자에게 순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명령법은 직설법과 동시에 일어난다. 직설법과 명령법을 시간적인 전후(前後) 순서 안에서 인과(因果)론적으로 이해하고 성화를 단지 인의의 다음 단계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본문에 전개된 바울의 사상과 온전하게 일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직설법과 명령법을 교호(交互)적인 통합성 안에서 이해할 때 로마서 6장뿐 아니라 바울서신 전체 본문과도 어울린다.

바울은 확실히 자신의 신학 핵심인 '하나님의 의'(dikaiosuvnh qeou')를, 죄인을 의롭다 여기시는 구원주 내지는 심판주 하나님의 '선물'로 여길 뿐 아니라 인의자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실제로 살 수 있게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본다. 또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복음을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인정 받는 '믿음의 의'(롬 3:21-4:25 참조)가 단순하게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인정하는 '경건치 않은 자의 인의'(justificatio impiorum) 내지는 죄인을 의롭게 여기시는 '법정적인 인의'(justificatio forensis)일 뿐 아니라 인의자로 하여금 실제로 의로운 행동을 하게 하며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효과적인 인의'(justificatio effectiva)로 이해한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 선포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와 함께 동시에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해 말함으로써 단지 "값싼 은혜"뿐 아니라 분명하게 "값비싼 은혜"도 가르치고 있다(롬 2:16 참조). 바울의 경우 믿음은 단지 경건치 않은 자의 인의를 얻게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섬기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그것을 이루게 한다(롬 6:17ff; 8:4ff; 12:1ff). 따라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인의-성화의 도식에 따라 관념론적인 표어인 "너는 네가 된 자가 되어라"로 이해하는 것보다 세례시 인의자에게 일어난 죄의 권세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의 '주권 이양(移讓)' 내지는 '주권교체(交替)'의 관점 아래 인의와 성화를 상호 교류적인 통합적인 관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울의 원래 진술 의도에 일치할 것이다. 수세시 인의자에게 "세례는 수세자에게 새 생명을 '증정(贈呈)하는 것'(Zueignung)이요, 새 생명이란 세례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Aneignung)이다." 수세시 인의자에게 요구되는 성화의 방법은 하나님께 종이 됨으로써만 가능하며(롬 6:19-2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만 가능하다(롬 12:1f).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수세자가 그리스도를 본 받음으로써만 가능하다(고전 11:1 참조).

4. 나가는 말

로마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의 윤리적 권면은 다른 바울서신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목회적인 동기와는 다른 동기, 곧 구원의 선물을 받은 자가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려 자신에게 일어난 주권교체에 부합되게 함으로써, 선물을 주신 하나님과 분리됨이 없이, 자신에게 부과된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의의 병기라는 것을 알리려는 바울의 선포적인 동기에서, 즉 구원에 있어서 직설법과 명령법이 함께 내적으로 불가분으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통합적인 직설법-명령법 관계를 깨우치려는 교화(敎化)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바울은 윤리를 자신의 신학 안에 통합시켰다. 신학은 윤리를 요구하며, 윤리는 신학에 상응한다. 인의는 성화의 기초이며 성화는 경험되는 인의이다. 새 생명의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의 종이 됨으로써만, 하나님께 자신을 드림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의 경우 인의자의 행함(Tun)은 결코 업적이나 공로(Verdienst)로 이해되는 '일'(e!rga이 아니라 '섬김'(Dienst)으로 이해되는 열매(karpov")이다. 행함이 하나님께 드림으로 이해되고 섬김으로 파악될 때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으로서 행함과 통합적인 관계 안에 놓이게 되며, 직설법과 명령법은 쌍방향에서 서로 교류하는 통합적인 관계 안에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바울서신에 진술된 윤리적인 본문을 이해하고 전할 때 고려해야하는 출발점이요 바울 윤리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윤리는 그 신학적인 기초를 잃은 도덕이나 일반적인 덕론으로 전락할 것이며, 인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으나 성화를 단지 인간에게 맡겨진 일이나 소임으로 잘못 이해하는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에 빠질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는 믿음과 행함의 괴리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시급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믿음과 행함, 인의와 성화, 직설법과 명령법, 선물과 과제를 분리됨 없이 통합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다시 한번 로마서 6장에서 외치는 바울의 간절한 선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출처 블로그 > 성경과의 데이트, 신학과의 데이트
원본 http://blog.naver.com/ssnhy/40013676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