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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세상을 디자인하다

영국신사77 2007. 10. 9. 19:10
 
디자이너, 세상을 디자인하다
 
조선일보 나지홍/김현진 기자 2007 10 6

  • 런던 시민들이 영국의 화폐·동전모양들로 단장한‘밀레니엄 브리지(Millennium bridge)를 건너고 있다.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보행자 전용으로 2000년 새해를 맞아 개통됐다. /블룸버그
  • 미국 IRS(국세청)는 2005년 ‘가혹한 세무조사’나 ‘피도 눈물도 없는 세리(稅吏)’ 등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세금징수 시스템을 개선하는 프로젝트를 민간에 발주했다. 이 프로젝트를 수주한 전문가는 뜻밖에도 카네기멜론 디자인스쿨의 리처드 뷰캐넌(Bucahnan) 교수였다. 재정학이나 행정학, 경영학 교수들이 주로 담당하던 행정시스템 혁신작업을 디자인 교수가 맡은 것이다. “디자인 교수가 무슨 행정혁신”이라며 의아해하던 사람들에게 뷰캐넌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국민이 가장 싫어하는 정부 부처는 중앙정보국(CIA)이나 연방수사국(FBI)이 아니라 IRS입니다. 세금징수가 납세자의 권익보다는 행정편의적 발상에 따라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데다, 세무조사도 납세자를 범인 취급하는 분위기에서 실시되기 때문이죠. 따라서 국민들이 세금을 자발적으로 즐겁게 내게 하려면 행정·경영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디자인이론과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는데 IRS 관료들이 동의했습니다.”

    ‘디자인의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디자인이 예술이라는 텃밭 울타리를 넘어 기업·정부 등 사회조직으로 급속히 침투하고 있다. 조화와 균형의 원리로 무장한 디자이너들이 특유의 창의적 시각에 입각해 경영과 행정분야에서 문제해결사로 활약하고 있다. 도심의 보행환경을 개선하는 작업부터 의료사고 예방, 범죄율 하락, 교실의 학습성과 향상 등 “디자이너가 이런 일까지?”라고 의아해할 만한 다양한 프로젝트에 디자이너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은 이제 스스로를 ‘자유로운 사상가(free thinker)’라고 부른다. ‘디자인=순수 예술’이라는 고정관념은 무너진 지 오래고, 대신 ‘디자인=문제해결(problem solving)’이라는 새로운 공식이 등장했다. 영국왕립미술학교 줄리아 카심(Cassim) 교수는 “디자인은 원래 오감(五感) 중에서도 시각, 즉 아름답게 보이는 것에만 집중했지만 지금은 오감 전체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발전했다”며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디자인의 문제해결능력이 강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 경영혁신의 주체, 디자이너

    디자이너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기업이다. 지금까지 ‘디자인’하면 ‘제품, 포장, 그래픽과 로고를 만드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글로벌 경쟁 격화로 기술력이나 품질의 차이가 급격히 축소되면서 디자인은 기업의 차별적인 경쟁력 원천으로 자리잡았다. 기업들은 만국 공통 언어인 디자인이 기업과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는데 주목한다. 바디숍(Body Shop) 창립자인 애니타 로딕(Anita Roddick) 회장은 “우리는 우리와 공동체 사이를 이어줄 스타일이나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면서 “방법은 오직 하나, 뛰어난 디자인 뿐”이라고 말했다.

    혁신적인 디자인은 기존 제품에 대한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속이 비치는 누드디자인을 도입한 아이맥(iMac)이 대표적 경우다. 일리노이대 마이클 맥코이(Michael McCoy) 교수는 “아이맥 출시 이후 개성없는 상자에 불과했던 컴퓨터가 갑자기 조각이자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평했다.

    선진 기업들은 디자이너들을 경영혁신의 첨병으로 활용한다. 도요타의 자동차 디자이너들이 개발한 친환경모델 프리우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도요타는 프리우스를 앞세워 신흥시장의 환경 친화적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일렉트로룩스(Electrolux), 유니레버(Unilever), 나이키(Nike) 등도 환경이슈에 대응해 지속가능한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디자이너들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디자이너를 원하는 기업 수요가 급증하면서, 디자이너의 전공도 빠른 속도로 세포분열하고 있다. 디자인컨설팅업체 AIG대표 팀 펜들리(Fendley)는 “현재 런던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의 전문분야만 50개는 족히 넘는다”며 “인터페이스 디자이너·아이덴티티 디자이너·시스템 디자이너 등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이름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가장 빠른 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분야는 전략적(strategic) 디자인이다. ‘전략 디자이너’들은 기업의 경영전략을 개발하고, 시장 조사를 통해 소비자욕구를 파악하며, 신제품이나 서비스 출시를 돕는다. ‘디자인식 문제해결능력’을 기업 경영에 접목시킨 것이다.

    ■ 걷고 싶은 런던만들기

    런던시는 2004년 ‘걷고 싶은 런던만들기’라는 보행환경 개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난 10년간 20%가량 줄어든 런던 도심의 ‘보행(walking)’량을 늘리기 위해서다. 보행량 증가는 대중교통 이용 활성화뿐 아니라 교통체증과 대기오염 개선에도 도움이 된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곳은 AIG라는 디자인 컨설팅 회사였다. 걷고 싶은 런던만들기 추진위원회인 ‘런던 도심 파트너십(Central London Partnership)’ 파트리샤 브라운 대표는 “기존 문제 해결 방식으로 한계에 부딪쳐, 디자이너들의 독특한 시각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AIG가 2006년 3월 제출한 보고서에는 구체적인 해결방안 26가지가 제시됐다. 이 보고서에서 단연 눈길을 끈 것은 독특한 현황 조사 방법이었다. 바로 제인이란 대학생의 일상생활을 촬영한 ‘제인의 걷기’라는 다큐멘터리였다. 제인은 도보로 10분밖에 안 걸리는 짧은 구간을 거의 지하철로 다녔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드는 헛수고를 덜기 위해서’였다. 다큐멘터리는 제인이 걸으면서 겪는 불편을 여과없이 담아냈다. 제인이 학교에 가는 길에는 모두 11개의 표지판이 있었지만, 이 중 제인이 실제로 보고 도움을 받은 것은 8개뿐이었다. 런던시는 이 다큐멘터리를 토대로 제기능을 못한 나머지 3개의 표지판을 없애버렸다. 또 제인은 걷는 도중에 표지판보다 거리에 있는 쓰레기통이나 공중전화박스 등 소소한 공공 시설을 이정표로 삼았다. 이 같은 관찰을 근거로 AIG는 “공공시설물이 좀 더 눈에 잘 띌 수 있도록 디자인하자”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AIG 대표 팀 펜들리는 “도로를 실제로 걷는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배려하는 인간 친화적인 시선을 갖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런던교통당국은 2007년 2월, 이 다큐멘터리를 인터넷에 공개해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유도했다. 파트리샤 브라운은 “생생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떻게 하면 시민들이 대중교통을 버리고 걷게 할 수 있는지 영감을 얻었다”면서 “이런 게 바로 디자이너식 문제해결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 이후 AIG는 현재 아일랜드 더블린과 영국 브리스톨시의 버스 교통체계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 정부와 공공부문으로의 확장

    디자이너들을 공공분야에 활용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디자인 강국 영국이다.

    영국 교육부는 최근 ‘교실의 디자인이 어떻게 학습 성과에 효과적으로 연결되는가’에 대한 해답을 디자이너들로부터 구했다. 디자이너들은 18개월 동안 전국 12개 학교의 교사·학생들과 함께 생활한 후, “답답한 학교 인테리어와 딱딱한 책걸상 시스템에서 창의력을 키우기는 힘들다”는 의견을 냈다. 디자이너들은 리버풀에 있는 세인트마거릿 교회학교를 시범학교로 선정해 교실을 360도 회전교실로 바꿨다. 교실 네 벽에 모두 화이트보드를 설치해 교사가 움직이며 수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학생들이 앉는 의자는 회전과 이동이 자유로운 ‘Q파드’라는 의자로 교체했다. 시범사업으로 학생들의 학습능률이 높아지자, 영국 교육부는 360도 회전교실을 전국 학교로 보급하고 있다.

    영국 환자안전국(National Patient Safety Agency)은 ‘의료 실수·사고 감소’ 프로젝트를 디자이너들과 진행했다. 디자이너들은 의료 사고를 막을 수 있는 약조제 방법부터 병원을 환자 친화적으로 만드는 방안까지 독창적인 해결책들을 제시했다. 이 중 환자들의 약이 바뀌지 않도록 환자 개개인에게 고유 아이디를 부여하는 시스템은 영국 전역에서 시행되고 있다.

    영국 경찰청은 디자이너 자문단과 공동으로 범죄방지디자인(Design Against Crime)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디자인이 어떻게 강도와 폭력을 근절할 수 있는지’를 연구했다. 그 결과 범죄 방지용 가로등 디자인, 휴대폰 절도 방지 캠페인, 범죄 방지용 지하철 설계도, 경찰 개혁 방안 등 다양한 해결책들이 나왔다.

    ■ 관찰과 전문성이 디자이너 경쟁력

    디자이너들이 이렇게 자신의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해 나가는 이유는 뭘까? 첫째는 그 누구보다 ‘관찰’에 능한 디자이너의 속성 때문이다. 디자인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관찰에서 출발한다. 당연히 디자이너들은 학창시절부터 관찰법을 집중적으로 배운다. 디자인회사 시모어 파월의 데이비드 피셔 이사는 “사람들은 늘 입으로 말하는 것과 다른 행동 양식을 보이기 마련”이라며 “소비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무의식 중에 이들의 몸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하고, 이런 면에서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관찰하고 그리도록 훈련받은 디자이너들이 강점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디자이너들이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주로 사람, 그 중에서도 ‘극단적 사용자(extreme user)’다. 예컨대 주방용품을 디자인할 때 평범한 가정주부보다는 대형식당의 요리사를 관찰하는 게 문제점을 신속·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다.

    두번째 비결은 전문성이다. 일류 디자이너들은 단순히 그림만 예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전문지식도 갖추고 있다. 세계 최대 디자인컨설팅업체인 미국의 아이데오(IDEO)는 ‘T자형 인재’를 강조한다. T자형 인재란 교양에 대한 다방면의 이해(broad interest)와 함께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말한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바로 앞에 위치한 아이데오에는 스탠퍼드 디자인스쿨(석사과정) 출신이 많은데, 이들은 대부분 학부에서는 공학·경영학·심리학·인류학 등 비(非)디자인분야를 전공했다. 디자인 외길을 걸은 순수 디자이너가 아니라, 공학이나 경영학 등 다른 분야를 이해하는 디자이너들이 훌륭한 디자이너라는 것이다. 애플 CEO인 스티브 잡스는 디자이너의 전문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어떤 제품의 디자인을 정말로 잘하기 위해선 그 제품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 제품과 완전히 ‘통해야(go grok)’한다는 것이다.”

 

 

출처 : 그 나라와 그 의  |  글쓴이 : 나라지기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