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나라 사막에서 배추농사를 지어 우리 농업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전남 강진의 버려진 뻘밭 70만여 평을 옥토로 일궈 놓은 주인공이면서, 지난 2003년에는 ‘한사랑농촌 문화재단’을 설립하여 평생 일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아름다운 퇴장의 모범을 보이는 김용복 서울영동농장 회장 겸 한사랑농촌문화재단 이사장을 만나봤다.
지난 2006년 4월 20일. 농업과 농촌의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자신의 분야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숨겨진 애국 농업인을 발굴하여 시상하는 제1회 한사랑농촌문화상 시상식이 건국대 새천년기념관에서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 행사의 주인공은 물론 이날 상을 받은 농민, 농업경영자, 농촌지도자 등 이었다. 시상대에서 수상자들을 바라보는 김용복 ‘한사랑농촌문화재단’ 이사장의 눈이 촉촉해졌다.
1934년생이므로 올해 한국나이로 73세. 그 나이가 되어도 감정이 풍부하여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만 입에 올려도 금세 울컥 감정이 복받친다고 한다.
피폐해진 농업에 희망을 걸고 국가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오늘 이렇게라도 격려하고 용기를 줄 수 있어서 눈물나게 고맙고 행복했다고 한다.
김용복 회장은 취재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한다는 성경 말씀도 말씀이지만, 이제 일선에서 은퇴한 사람으로 자신을 내세우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시상식의 취지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농업발전의 문제나 서울영동농장에 대한 기사는 총괄사장을 맡고 있는 아들 김태정씨에게 들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은퇴한 노인들이 주 독자층인 본지에 대해서는, 같은 노년세대로서 인터뷰를 할만하다고 자리를 내주었다. 김 회장의 첫인상은 젊음이었다.
50대 후반쯤으로 보일 정도로 목소리는 힘이 있고 쩌렁쩌렁했으며 젊은이처럼 활달하고 정열적이었다.보통 가난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면 천박해지기 십상인데, 김 회장이 말하는 순간 글로 쓴 듯이 로맨틱해졌다. 그만큼 정열적이다.
세상에 베풀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배어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하는 말도 활달한 목소리와 밝게 꾸며진 집무실 분위기, 그리고 우리나라 농업계의 지도자라는 위치로 인해 한편의 소설이나 흑백영화 같은 느낌으로 와 닿는다. 고향 떠나며 돈과 땅 꿈꿔 슬픔이 겨우면 울음도 멜로디가 된다.
‘월사금’이라는 이름의 학비를 내지 못해 퇴교 당하고 고향을 떠나던 15살 때를 김용복 회장은 잊지 못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 내리 1등을 하며 수재 소리를 들었던 그가,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어린 마음에 너무나도 슬프고 처절한 일이었다.
어찌나 서럽던지 마을 앞 호안 둑길을 걸어가며 울부짖다 울부짖다, 나중에는 ‘연분홍치마가 꽃바아람에…’라고 읊조렸다고 한다. “그때 두 가지 꿈을 꿨어요. 돈을 많이 벌어 나 같이 돈 없어 공부 못하는 아이들 도와주고, 우리 아버지 평생 땅 없어 서러웠으니 백만 평쯤 땅을 사리라고요. ”물론 그 꿈은 진작에 이루어졌다.
수천억 대의 큰 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김회장의 이름을 내건 ‘용복장학재단’을 설립해서 능력 이상의 사회공헌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고향 강진의 버려진 갯벌 땅 70만여 평을 사서 옥토로 바꿔 지금 농사를 짓고 있기도 하다. 어떻게 해서 큰 돈을 벌게 됐는지 묻자, 열사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채소농사를 지었던 이야기를 했다.
“1979년, 삽 네 자루와 라디오도 안 나오고 에어컨도 안 나오는 중고 일제 픽업트럭 한대를 사가지고 인간 이하 취급받으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대사관 사람들은 물론이고 사우디 사람들도 인정을 안 해주더라고 했다.
사우디에서 농사를 지을 생각을 한 것은 베트남전 당시 파월기술자였던 경험이 바탕이 됐다. 김치를 못 먹은 한인 기술자들이 시위를 했을 정도로 한국인들에게 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베트남에서 겪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중동에 15만여 명이 나가 있었다. 이들에게 김치를 제공한다는 것은 돈벌이는 물론이고, 근로복지차원에서도 대단히 값진 일이었다.
문제는 채소농사가 불가능한 사막기후였다. ‘김용복이 미친 짓을 한다’고 했다고 한다. 배추·무 없어서 못 팔고 집 뒤창고에 달러 궤짝 가득 차 악조건 속에서도 함께 한 근로자들과 정성을 다해 파종을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배추 500킬로그램을 수확했다. 그 날이 1979년 4월 20일이었다. 그래서 이번 제1회 한사랑농촌문화상 시상식도 4월 20일에 열린 것이다.
그 성공을 기반으로 계속해서 농장을 늘렸고 수만 평을 경작했다. 그래도 무 배추는 없어서 팔지 못할 지경이었다. 무 하나가 15킬로그램 나가는 것도 있었는데, 킬로그램 당 1달러 50센트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집 뒤 창고에는 현찰 달러가 궤짝으로 가득 찰 정도였다.
평생 그렇게 현금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1982년 언제일 거예요. 한번은 차를 타고 농장으로 가는데, 눈물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막 무섬증이 들어요.”
김 회장은 돈을 벌어 가난해서 못 배우는 사람 돕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책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무섭게 들었다고 한다. 서울의 모 명문 여상고 교장 앞으로 그 자리에서 편지를 썼고, 그것이 오늘날 ‘용복장학재단’의 모태가 됐다. 강진 땅도 사막에서 지은 채소농사의 결과물이었다.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완전 철수를 하면서 9억을 들여 버려진 갯벌 70만 평을 매입했고, 네덜란드 간척전문회사에 10억을 들여 현대식 농경지로 개발했다. 백만 평쯤 땅을 가지리라고 했던 15살 소년 시절의 꿈도 그렇게 이뤘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채소농사에 성공했다 하여 세간에 큰 화제가 됐다.
여러 언론매체에 소개되기도 했는데, 황인용 강부자의 ‘상쾌한 아침’ 라디오 프로에 초청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도 황인용씨와는 가까이 지낸다고 한다. 이번 한사랑농촌문화상 시상식 사회도 황인용씨가 봤다. 또 노무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농업은 오늘날 사양산업에 속하고, 세상에는 김용복 회장 못지않게 많은 돈을 번 재산가들이 많다.
김용복 회장이 아니라도 역할을 할만한 사람이 많다. 그런데도 김용복 회장이 앞장서서 ‘용복장학재단’ ‘한사랑농촌문화재단’ 등 재단에 사재를 쏟는 이유가 특별히 있는지 물어보았다.
“배고플 때 밥 한 그릇이 배부를 때 천금보다 소중합니다.” 이것이 ‘용복장학재단’과 한사랑농촌문화상을 운영하는 정신이라고 한다.
어려운 때에 상금 1,000만 원이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회장 자신과 같이 서러운 길을 안 걷게 하고 싶은 바람이다. 장학재단 수혜자가 벌써 100명을 넘어섰으며 장학생들 중에는 판사, 의사, 교수 등 사회의 동량으로 성장한 사람이 부지기수다. “이번 한사랑농촌문화상 수상자들도 앞으로 50명, 100명으로 늘 겁니다.
”농업이 사양화되는 이런 때, 농업 발전에 기여할 농업계 재원들인 만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수상자를 선발한다. 이번에도 최종 후보를 선정한 뒤 김 회장의 최측근이 현지 실사를 했다. 위기의 농업, 20% 농민은 크게 성공할 것
재단에 사재를 쏟아 붓는 데 대해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는지 물어보았다. “자식들한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독약을 물려주는 것이나 같습니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면 됩니다. 그래서 나는 교육은 정말 최상으로 시켰습니다. 내 아들, 제대로 교육시켰습니다.
물론 사업을 하는데 종자돈이 필요한 경우는 지원해줍니다. ”아들 태정씨의 ‘미생물연구소’를 지원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 연구소를 토대로 서울영동농장이 토종 미생물을 활용한 친환경 농법의 농수축수산물 생산에 나서 기대된다고 한다.
연구소도 올해 말부터는 흑자로 돌아설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싹수가 보이는 일이라면 밀어주겠다는 것이 김용복 회장의 생각이다. 베트남, 중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에도 미생물사업 분야에서 진출하고 있으며, 광주 광역시와는 정식 계약을 체결하여 사업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단다. 서울영동농장은 한국 농업과 농촌을 선도하는 농업기업이 될 것이라고 한다.
현재 2개의 연구팀(월정농업연구소, J&K 미생물연구소), 생산팀(영동농장 영농조합법인), 지원3팀((주)신세계 개발), 재단법인 용복장학재단 등으로 구성돼 있다. “안된다, 안된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을 하면 오히려 지금이 기회입니다.
물론 20% 정도만이 성공을 거둘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20%의 성공의 대가는 대단할 것입니다. ”미국의 칼로스쌀 같은 외국 쌀이 들어온대도 두렵지 않다고 한다. 외국 쌀은 도정해서 운반 될 것이고, 결국 화학처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웰빙 시대에 누가 방부 처리된 외국 쌀을 먹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농촌이 위기이지만 기회라는 것이다. 농업이 피폐해진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며 정부와 농정 당국자들에게도 잊지 않고 한마디 던졌다. “노벨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 박사는 말합니다. 저개발, 미개발 국가가 농업을 도외시하고 공업화를 시도해서 중진국으로 발돋움한 예는 많지만, 중진국 이후까지도 농업발전에 소홀한 국가가 선진국에 진입한 경우는 없다고...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이정도 선진국 됐으니 농촌 없어도 된다, 택도 없습니다.”‘
한사랑농촌문화상’을 제정하여 시상한 농업계 원로 지도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적이다. 아름답게 퇴장하는 원로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주)노년시대신문사 박병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