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성지와 유적지 순례 1 <광성보①>
강화의 기독교 역사
1893년 성공회와 감리교가 같이 시작( 개혁과 수구 사이에서 곡예를 하던 시대)
교세는 감리교로 대표되는 개신교가 우세하지만, 문화적 유산은 성공회가 우세하다.
이것은 감리교로 대표되는 개신교는 농어업에 종사하는 상민 이하 계층이 처음 믿기 시작하였는 데 비해(토담집에서 초가집으로 시작), 성공회는 기존 전통 문화와 조화를 이루며 복음을 전하려는 토착화 의식이 강해, 지배 계층과 유식자 계층을 대상으로 전도한 결과이다.
강화의 기독교 성지와 유적지는 서울에서의 교통 편의상, 먼저 조선시대 신미양요의 격전지였던 광성보를 둘러 본 다음, 성공회 온수리 교회, 성공회 강화성당 및 교산교회의 순서로 살펴 보도록 하겠다.
1. 광성보 [廣城堡]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광성나루(광성진)에 있던 성보(城堡). |
사적 제 227호.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광성보는 조선시대 광해군 때 헐어진 데를 다시 고쳐 쌓았으며,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그 후 숙종(肅宗) 5년(1679)에 용두(龍頭), 오두(鰲頭), 화도(花島), 광성(廣城) 등 소속 돈대(墩臺)가 축조되었다.
그후 영조(英祖) 21년(1745) 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고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고종(高宗) 3년(1866년)의 병인년 9월 3일, 조선 개신교의 최초 순교자인 토마스 선교사가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대동강에서 참수 당한 얼마 후인 9월 18일 날,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의 극동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함으로써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다. 병인양요<丙寅洋擾>의 1차 침입은 9월 18일~9.25일까지, 2차 침입은 10월 14일~11월 11일까지 당시의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는 데, 특히 2차 침입 때는 약 한달간 강화도가 프랑스군에게 점령 당했고, 프랑스 측에서는 6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까지 하였다.
그후 고종 8년(1871)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이곳에서 미국의 아세아 함대와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가 벌어졌던 곳이다. 그해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 처음에는 초지진·덕진진·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 되기를 거부,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하였다.
현재 광성보의 경역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雙忠碑)와 ,무명 용사들의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및 당시 파괴된 문루와 돈대(墩臺)를 1976년에 복원하여 세운 강화 전적지(江華戰蹟地), 보수정화비(補修淨化碑) 등이 건립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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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성보 안해루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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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때 순국한 350명의 영령들을 기리는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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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雙忠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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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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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용사들의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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