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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의 1,2차 전도여행

영국신사77 2007. 6. 26. 08:37
                                        
바울의 1,2차 전도여행 

                                                                                                 

                                                                                                                           

 

바울:Paul(인명)

뜻 : 작은 자

라틴 이름은 Paulus, 

히브리 이름은 Saul, Sau'lo"(사울로스) Saouvl(사울)=(샤울)이다.

 

 

                                        

1. 제1차 전도여행:AD 46~48         

 

 


바울의 대 전도여행은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에게 대한 

성령의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행 13:1-3).

교회는 이 지시에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 전도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요한 마가가 조수로 동행하였다. 이들은 먼저 구브로 섬에 건너가 섬 전체를 순회하고 그 후 소아시아에 건너가 밤빌리아의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하였다. 이것이 소위 제1차 전도여행인데, 사도행전 13장, 1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왜 이 코스를 취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때 소아시아의 남해안을 따라 전도할 계획이어었는데, 버가에서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렸으므로 건조한 고원 지방인 갈라디아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학자는 바울이 지금까지 전도한 수리아, 길리기아의 주변 지방으로 전도의 범위를 확대하는 뜻으로 이 여정을 택했다고 한다. 이 전도여행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생략하고 일반적 고찰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① 이 여행의 처음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구브로 섬 바보 전도이후는 거의 `바울과 바나바' 또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로 고쳐 기록되어 있다. 즉, 여행의 중간 이전에 이미 바울은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이방인에 대한 사도로서의 실력을 발휘하기에 이른 것을 시사하고 있다. 바울이 바보에서 서기오 바울을 개종시킨 때부터, 누가는 히브리 이름 사울을 라틴 이름 바울로 바꾸어 놓았다.

 

② 바울은 항상 지방의 중심 도시 집중적으로 전도하였다. 이것은 그의 전도 방침의하나였다. 혹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왔다는 신념에서, 하루 속히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도시 중심의 전도 방법을 택한 것 같다. 또 도시 출신인 그가 특히 도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③ 그는 어떤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했다.

이것은 첫째, 동포를 구원하려는 생각에서였으나,

둘째, 유대인 회당에 출입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즉 경건한 이방인 구도자를 인도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어진다.

 

초대 기독교가 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었던 큰 원인 중의 하나는, 이미 유대교에 의해 종교적 윤리적으로 양육되고 있던 이방인 구도자가 계속 기독교로 개종한 데 있다. 바울은 재빨리이 점에 착안했던 것이다.

 

④ 바울의 메세지는 대체적으로 유대인에 대해서는 예수에 의한 구약 종교의 성취 완성, 이방인에 대해서는 유일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역설하며, 때를 얻든지못얻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였다. 사도행전 13:16~ 41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 14:15~ 17의 루스드라인에 대한 설교 등은 그의 메세지의 내용을 엿보고도 남음이 있다.

 

⑤ 바울은 단순히 설교하고 신도를 만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조직하고, 장로를 세우고, 성도의 교제를 유지시키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귀로에 자연스럽고 안전한 더베·다소· 안디옥의 코스를 택하지 않고 지금까지 더듬어 온 길을 다시 순회한 것은, 이와 같은 교회 조직을 촉진시키고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열렬한 전도자임과 동시에 용의주도한 목자인 바울의 면목을 엿볼 수 있다.

 

 이 전도여행 후,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말하고 감사했다.

 

                                                    

  예루살렘 회의:

 

상술한 바와 같이, 바울의 이방인 전도는 대 성공적이었으나, 유대주의적 신자들은 전통을 중시하여 이를 기뻐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바울 일행이 안디옥 교회에서 전도여행의 결과 보고를 하고, 일동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을 때, 유대에서 온 유대주의적인 어떤 신자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15:1)고 주장하여, 바울의 예수를 믿는 신앙에 의한 구원의 교리에 정면 도전했다.

 

 이 때문에 교회 내에 분규와 논쟁이일어났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 예루살렘에서 바울·바나바, 사도들, 그리고 장로들이 회집하여 협의하게 되었다. 갈라디아서 2장은 이때의 사정을 기록한 것이며, 사도행전도 이 회의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회의 결과는 기독교의 장래를 결정할 만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격렬한 논쟁 끝에 예루살렘의 중심적 사도들, 특히 베드로가 바울의 입장을 지지하여 유대주의적 입장을 부결함으로써 논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베드로는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줄을 믿노라"라는 연설을 했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라는 결의문을 각 교회에 보내자는 야고보의 제의가 채택되었다.

 

 바울은 복음의 자유원칙이 승인되었으므로 야고보의 제의에 찬성했고, 그 결의문을 이방인 교회에 주지시키는 역을 바나바·바사바·실라와 더불어 맡았다. 이것은 바울측의 승리였다. 원래 위의 네 가지 금지령(행 15:20=15:29)은 유대적 관습에서의 양보를 의미한다.

 

 바울은 원칙적으로 자기의 주장이 인정된 이상, 지엽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위해 관대히 양보했다. 이렇게 그들은 상호 양보함으로써 위기를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다(네 가지 금지령 중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은 계 2:14, 고전 10:16-22에, 음행을 멀리 하라는 것은 신약에 많이 있으니 논할 필요도 없고, 피를 먹지 말라는말씀은 살인하지 말라는 뜻으로 본다. 또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구약의 사상이기도하다. 피는 생명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베자 사본XCodex Bezae〉에는 `목매어 죽인 것'이 없다).

  

※ 1차 전도 여행 때의 바울 서신서

   갈라디아서[*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성급한 배도에 대한 놀람(갈 1:6)과

                  의심(갈 4:20)의 관점에서 볼 때 예루살렘 공회 직후에 

                  이 서신을 쓴 것으로 보는 것이 다수의 합리적인 결론임.-아카페 성경사전 참조-

 

                                    

2. 제2차 전도여행:AD 49~52         

 

 

 

예루살렘 회의 결과, 바울의 전도 방침과 주의에 대해서는 전 교회적인 공식 지지를 받아 이방인에 대한 전도가 더욱 확고하게 정해졌으므로, 바울은 바나바와 더불어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 하였다. 그런데 제1차 전도여행 도중 버가에서 일행을 버리고 도중 하차한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에 대해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려 서로 "심히 다투어", 마침내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건너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를 향하여 떠났다.

 

 바울은 도중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는데, 그도 일행에 가담했다. 바울은 처음에 소아시아 서쪽 에베소의 전도를 뜻했으나,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므로 드로아로 내려가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런데 밤에, 환상에 한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에게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청하므로, 바울은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고, 이에 비로소 구라파의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행 16:9,10).

 

 사도행전에 있어서는 이때 홀연히 `우리'라는 대명사를 쓰기 시작하고 있다(행 16:10). 이것은 본서의 저자가 이 전도여행에 동행한 사실을 말해 준다. 즉, 누가라는 의사이다. 그 이유는, 본서에 의학 용어가 있고, 또 바울의 동역자 누가는 의사인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환상에 나타난 `마게도냐 사람 하나'는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전승이 있다. 

 

 어떻든,  바울 자신의 심중에는 하루 속히 구라파에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못견딜, 참을 수 없는 열정이 있어, 그를 서쪽으로 서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한 것은, 사도행전 16:1- 10의 글쓴 태도로써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아덴, 그리고 고린도로 다채롭고 의의깊은 전도가 펼쳐진다.사도행전 16:1~ 18:22에는 제2차 전도여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① 마게도냐 지방에서는 여자 결신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빌립보에 있어서, 즉 구라파에 있어서의 최초의 그리스도인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한에 있어서는 루디아라는 부인이었다는 것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부인의 위치를 시사하는 사실로서 의의가 깊다. 빌립보 교회에는 또 순두게와 유오디아라는 유력한 여신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신앙의 길에 들어섰으며, 아덴에서는 `다마리라 하는 여자'가 회심자들 중에 섞여 있었다.

 

② 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 운동이 가는 곳마다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였다. 특히 데살로니가에서는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라고 하면서 바울 일행을 체포하려한 것은, 그들의 운명에 대하여 불길한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었다. 아덴의 마르스 언덕. 바울이 이곳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이란 설교를 하였다.

 

③ 이 여행에 있어서 기독교는 헬라(희랍) 사상과 처음으로 정면에서 접촉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덴에 있어서 바울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여 이에 극히 철학적인 연설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보아 실패였다. 믿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 후 바울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1-5) 전도하려고 결의를굳혔다.

 

④ 고린도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는 이교 사상과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이교적 생활과도 접촉했다. 그리하여 이것을 기독교화하는데 다소의 효과는 거두었음에는 틀림없으나, 아직 교회 그 자체가 그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고린도전서에서 취급되고 있는 여러 문제는, 사실은 고린도에 있어서의 이교 생활과 기독교와의 접촉에서 생긴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교 사상과 생활의 기독교와의 관계는 더욱 더 복잡하게 되어, 몇 개의 중대한 문제를 교회에 던지게끔 되었다. 여하튼 이교 생활의 전형적 대표 도시인 고린도에 유력한 교회가 설립된 것은 위대한 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⑤ 빌립보에서는 로마의 관헌에 체포되었다.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 주었더니 그 주인이 수입이 끊어지는 까닭에 군중을 충동시켜 소송하였다. 그러나 밤중에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스스로 열렸다. 그들은 자결하려는 간수에게 전도하고 이튿날 풀려 나왔다(행 16:16-40).

 

이렇게 1년 반에 걸친 고린도 전도 후, 바울은 고린도에서 얻은 동역자 브리스 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데리고 배로 에베소에 건너가, 거기에 이 부부를 남겨 두고, 그와 실라 일행은 일단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바울의 고린도 도착은 AD 50년 초라고 한다. 

이것은 바울의 연대기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따라서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다른 사건의 연대를 추정하는 

열쇠가 될 만한 아주 중대한 연대이다.

1905년 에밀 부르게XEmile Bourguet〉가 

연구 발표한 '델피 비문'갈리오<행 18:12~ 17〉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어, 

그의 부임하던 해, 따라서 바울의 고린도 도착 후와 체재(滯在)의 연대를 

아주 확실히 미루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 2차 전도여행 때의 바울 서신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참고 자료 : 주석성경자료 + 성경말씀, 톰슨 성경, khi4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