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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김진홍 목사>

영국신사77 2007. 6. 16. 13:18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김진홍 목사>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①  

지금 덴마크는 잘사는 나라 중에서도 잘사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소득이 높은 점보다 각종 복지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기에 국민들의 삶의 질이 최고 수준에 이르러 있음으로 인해서다.

그러나 150여 년 전의 덴마크는 그야말로 바닥을 헤매는 나라였다. 영국과의 명분 없는 오랜 전쟁이 패배로 끝나자,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죽거나 다치고 나라 안에는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상이군인들만 그득한 처지였다. 국토 중의 좋은 부분은 빼앗기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만 남겨졌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면 번성하는 것이 도박과 싸움판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덴마크를 일으킨 정신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바로 그룬트비히 목사의 삼애 운동(三愛運動)이다. 삼애 운동이라 함은 그룬트비히 목사가 주창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겨레 사랑의 세 가지 사랑 운동을 일컫는다.

덴마크란 나라가 그렇게 거덜 나게 되었을 때에, 선각자 그룬트비히는 ‘무너져 가는 나라를 바로 일으키려면, 먼저 종교와 교육의 개혁이 일어나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바른 신앙 운동으로 백성들의 혼을 깨우쳐 나가는 교육 운동을 일으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작된 운동이 그 유명한 덴마크의 국민 고등학교 운동이다.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드비히 ②  

-새 교육 운동-

 그룬드비히(Nikolaj Grundvig, 1783~1872, 89세) 목사가 삼애 운동(三愛運動)을 바탕으로 삼아 종교와 교육을 개혁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에 감명을 받은 한 젊은이가 있었다.

 크리스텐 콜(Christen Kold, 1816~1870, 54세)이란 이 젊은이는 18세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자, 그룬드비히 목사의 설교를 통하여 감명을 받은 바대로, 자신이 맡은 교실에서 교육 개혁을 실천하려 하였다.

 살아 있는 말을 살아 있는 학생들에게 심어 주는 산 교육을 실천하자는 뜻에서 그는 국정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만든 교과서로 학생들에게 생생한 대화식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의 반 학생들은 한결같이 행복한 얼굴로 받아들였으나, 교육청 당국으로부터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2년 만에 교직에서 해임 당하게 되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이곳 저곳으로 방황하기를 15년거듭하다가, 35세 되던 때에 한 섬에서 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 학교가 덴마크 교육을 살리고 나라까지 살리는 새 교육 운동, 새 나라 건설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헌 농가 건물 한 동을 빌려 15명의 학생들을 모아 5개월 기간으로 실시하였던 첫 번째 학기부터, 그는 학생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변화시키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살고 함께 뒹굴며 산 교육을 베풀었다.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③  

 크리스텐 콜이 한 섬에서 국민고등학교를 세우던 때인 1851년 11월 1일을 개교일로 잡고는, 첫 입학생 15명을 보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입학식이 있던 전날인 10월 31일까지 단 한 명만이 등록하였다. 난감하여진 그는, 11월 1일에 개학식 시간이 되기 직전까지 학교 뒤 숲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품고 시작하는 이 학교에 학생이 겨우 한 명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14명의 학생을 더 보내 주시옵소서”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숲에서 나온즉, 마차 소리가 덜커덩거리며 나더니 한 마차에 14명의 이웃 마을 젊은이들이 타고 와, 학교에 등록하겠다며 교정에 들어서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에서 크리스텐 콜은 학생들과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뒹굴며, 가슴으로 몸으로 실천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첫 학기인 5개월이 지난 뒤에는, 15명의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변하고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

 그들이 졸업을 앞두고 남긴 소감문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크리스텐 콜 선생이 그들에게 삶의 방향을 깨우쳐 주었고,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조국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었다고 적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의 목표는 바로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④  

 나는 대학 시절에 철학을 전공하였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크게 매력을 느꼈던 철학자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소위 유신론적 실존주의(有神論的 實存主義)의 원조격으로 인정받는 철학자로, 그룬트비히 목사와 동시대에 활약하였던 분이다.

 나는 철학과를 다니는 동안에 상급반이 되면서 한 가지 고민하였던 문제가 있었다. 내가 장래에 어느 분야로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때 나는 19세기 중엽, 덴마크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선각자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그 두 사람은 키에르케고르와 그룬트비히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순수 철학자다. 자신의 철학을 철저히 하기 위해, 사랑하는 약혼녀까지 포기한 채 순전히 자신의 철학적 사유에 전념하였던 분이다.

 그러나 그룬트비히는 같은 시대에, 같은 도시인 코펜하겐에서 코펜하겐대학을 같이 다녔지만, 자신을 실현하여 나가는 과정은 달랐다. 그룬트비히는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 후, 일반 성직자들처럼 교회 안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겨레와 백성을 살리는 운동에 헌신하였던 분이다.

 말하자면 사회 개혁자로 활약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던 개혁자다. 특히 자신이 속한 덴마크 교회와 교육을 개혁하여 새로운 덴마크 국민정신을 일으키는 데 헌신하였다.

 나는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장 민감하였던 대학생 시절에, 키에르케고르의 길을 따라 순수 문학으로서의 철학자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그룬트비히 목사와 같이 사회 개혁자의 길을 가느냐의 문제로 갈등을 겪었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룬트비히 목사의 길을 선택하였던 셈인데, 그간에 이루어 놓은 열매로써 평가한다면 그룬트비히의 그림자만 밟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⑤  

 그룬트비히 목사의 혼을 깨우는 설교에 감동을 받은 크리스텐 콜이 세운 국민고등학교는, 헛간 같은 허름한 집에서 15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다. 다섯 달 만에 첫 학기를 끝낸 후에 학생 중의 한명이 남긴 글이 있다.

 “나는 일반 국민학교에서 배웠던 것보다 더 높고 깊은 무엇인가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삶의 공허함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 나의 고민을 콜이 해결해 주었다. 욕망과 회의에 차 있었던 때에, 나는 그의 두 손에 쥐어진 양초 토막과도 같았다. 그는 마치 조각가가 흙덩이를 빚어 작품을 만들 듯이 같은 방식으로 나를 만들 수 있었다.”

 크리스텐 콜에게는 방황하고 고뇌하는 젊은이들의 혼 속에 깃들어 있는 고귀한 것들을 일깨워 주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목숨을 걸고 믿고 있는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에, 젊은이들의 마음은 감동으로 채워졌다.

 이런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교사인 콜의 인격과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혼으로부터 나오는, 살아 있는 말이, 살아 있는 젊은 혼에게 전하여졌을 때에 일어나는 기적 같은 힘이었다. 이런 힘이 참 교육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⑥  

- 새 교육 운동 -

 크리스텐 콜은 그냥 교사가 아니었다. 학생들의 어버이였고, 형님이었고, 친구였다. 그는 학생들과 한 식탁에서 먹고 한 침실에서 잤다. 함께 대화하고, 함께 노래 부르고, 함께 노동하였다. 학교가 마치 화목한 한 가정과 같았다.

 그가 세운 국민고등학교가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자, 당시의 교육학자였으며 정규학교의 교장이었던 몬라드(D.G. Monrad)박사가 학교를 방문하여, 콜에게 학교의 설립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18세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였기에, 나의 모든 삶을 바쳐 다른 사람들도 이를 배워 행복하게 되도록 도와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라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크리스텐 콜의 이 말을 들은 몬라드 박사는 비웃는 투로 대꾸하였다. “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시구려. 그러나 잘 되겠소이까?” 형식적이고 구태의연한 교육 이론에 젖어있던 그로서는, 콜의 새로운 교육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⑦  

 그룬트비히가 활약하였던 때의 덴마크는,  독일의 침범을 막으려고 10여 년간 싸우다가 지치고 쓰러져 패배의 쓴잔을 마셨던 때였다. 국토 중에 아름답고 쓸모 있는 부분은 빼앗기고, 국민들은 희망을 잃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한 때에 그룬트비히 목사는 실의에 빠진 동포들을 향하여,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토하였다. 삼애 운동(三愛運動)으로 알려진 운동이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백성들을 도우신다. 살고자 땀 흘려 일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도우신다.

 둘째, 땅을 사랑하라! 좋은 땅은 독일에 빼앗기고 황무지 모래땅만 남았으나 그렇다고 낙망하여선 안 된다. 황무지 땅도, 모래땅도 땀 흘리고 정성들여 갈고 가꾸면 옥토로 바뀐다.

 셋째, 동포를 사랑하라! 건장하고 똑똑한 젊은이들은 강대국과의 10여 년에 걸친 전쟁에서 전사하고 약자들만 남았다. 그러나 낙망하거나 포기하여서는 안 된다. 약한 사람들도 뭉치면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룬트비히의 심금을 울리는 애국 설교에 뜻있는 일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각 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삼애 운동을 실천하여 병든 겨레를 치유하기 시작하였다.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⑧  

- 죽음에 이르는 병 -

 1864년이 덴마크에게는 망국의 해였다. 한 민족, 한 국가로서의 덴마크가 희망을 잃어버린 해였다. 개인도 국가도 희망을 잃어버리게 됨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제목이다.

 그 책에서 이르기를, ‘희망을 잃어버림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하였다. 개인이 희망을 잃어버리면 개인이 망하고, 한 민족이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민족이 망하게 된다. 1864년에 덴마크는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덴마크는 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10년을 끌어왔던 독일과의 전쟁에서, 최후로 항복하게 된 해였다. 항복하게 되면서 덴마크는 국토 중의 곡창지대였던 남쪽 땅을 독일에 빼앗기게 되고, 쓸모없는 황무지나 모래밭만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실망에 빠진 젊은이들은 댄스나 당구치기로 세월을 보냈다. 어른들은 도박과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때에 구국 운동에 발 벗고 나선 이가 그룬트비히였다.

 이미 65세이 이른 그는, 율랜드 반도 남쪽에 있는 스캄링스뺑컨(Skamlingsbanken)이란 곳에서, 나라의 운명을 염려하는 백성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구호 아래, 날마다 강연회를 열어 백성들의 혼을 깨우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