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神學 · 敎理· 교회사

제5부: 구원론

영국신사77 2007. 6. 9. 23:27

                   제5부: 구원론

                        

                                   <구원>

 

 

  구원론(Soteriology)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실제로 적용하시는 과정을 정리한다. 구원론은 성령의 사역론이다.

 

 구원에 관한 진리는 구원의 필요성과 구원의 방법과 구원의 결과 등의 주제들을 포함한다. 이 주제들은 하나님의 복음 전체의 요약이다. 이 셋 중, 구원의 필요성은 신론과 인간론에서, 구원의 방법의 일부인 선택과 속죄는 신론과 기독론에서 다루어졌다. 구원의 방법의 나머지는 구원론에서, 그리고 구원의 결과는 교회론과 종말론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구원론에 관한 주요 성경들은 로마서(믿음, 칭의, 양자, 성화, 영화), 갈라디아서(칭의),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중생, 양자, 성화), 에베소서(성화), 야고보서(성화) 등이다.

 

               구원론의 주요 주제들

 

 

1. 하나님의 은혜

 

2. 부르심, 신비적 연합, 중생(重生)

 

3. 회개와 믿음

 

4. 칭의(稱義)와 양자(養子)

 

5. 성화(聖化)

 

6. 성도의 견인(堅忍)과 영화(榮化)

 

 

 

 

 

                              1. 하나님의 은혜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호의와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 특별 은혜를 구분한다.

 

 일반 은혜(common grace)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나 택하시지 않은 자들이나 구별 없이 함께 누리는 은혜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특별 은혜(special grace)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성령의 활동이시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Pelagius)는 하나님의 영께서 사람의 의지에 직접 역사하지 않고 오직 간접적으로만 역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반대로 어거스틴(Augustine)은 사람의 전적 부패와,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주권적 활동을 주장하였다. 그는 성령의 주권적 활동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며, 사람이 그것을 거절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의지에 직접 역사하셔서 사람의 영혼을 중생시키시는 선행적 은혜와, 하나님께서 중생한 영혼과 협력하여 그로 하여금 선을 행케 하시는 후속적, 혹은 협력적 은혜를 구별하였다.

 

 중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을 인정하는 어거스틴주의를 취하든지, 구원을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적 결과로 보는 소위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를 취하였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성례를 통해 주입된다는 소위 성례주의를 발전시켰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루터(Luther)와 칼빈(Calvin)은 어거스틴이 주장한 성경적 은혜의 개념으로 돌아갔고, 성례주의를 배격하였다. 그러나 후에 루터파는 루터의 입장을 떠나 반(半)펠라기우스주의적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의 경향을 보였다.

 

 칼빈을 따랐던 개혁교회는 성경적 은혜의 개념을 보존하였다. 칼빈은 또 처음으로 하나님의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를 구별하였다. 유아 세례를 부정했던 재세례파(再洗禮派, Anabaptists)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자연과 은혜를 대립시켰고, 자연의 질서를 불결하다고 보았다. 또 그들은 국가의 권위를 무시했고 전쟁을 반대하였다.

 

 17세기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는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를 구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와 구원을 위해 충족한 은혜를 주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이 충족한 은혜가 곧 일반 은혜요 ,구원하시는 은혜이다. 만일 하나님의 이 충족한 은혜가 구원하시는 은혜가 아니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회개의 원인은 성령과 협력하는 사람의 의지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반(半)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은 신인협력설이다. 개혁교회의 도르트 회의는 알미니우스주의를 정죄하고,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적 사역을 고백하였다.

 

 근래에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개혁교회 안에서도 헤르만 훽스마(Herman Hoeksema)는 은혜라는 말을 하나님의 구원적 은혜에만 적용하고, 일반 은혜는 은혜라고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일반 은혜

 

 

  하나님의 일반 은혜는 몇 가지 점들에서 고찰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여러 가지 자연적 혜택 주신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신다.

 사도행전 17:25,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그는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비를 주신다.

 마태복음 5:44, 4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또 그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때를 따라 식물을 주시며, 또 결실의 때를 주셔서 식물로 사람의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주신다.

   시편 145:9, 15, 16,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 . .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사도행전 14:16, 17,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와 재능 주심으로써 문화적 혜택을 누리게 하신다. 그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다(창 1:28).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문화 명령을 받아 땅을 정복하며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였다. 일찍이 가인의 자손들 가운데 야발은 목축을 시작하였고, 유발은 악기들과 음악을, 두발가인은 철공업을 개발하였다(창 4:20-22).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지혜의 영을 주셔서 아론의 옷을 만들게 하셨고(출 28:3),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세워 성막의 여러 기구들을 만들게 하셨다(출 31:1-11). 현대인들이 누리는 주택, 전기와 수도, 교통과 통신, 출판, 의술 등의 문화적 혜택들은 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적 마음, 즉 신(하나님)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생각을 주셨다.

 로마서 1:19, 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사도행전 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도덕 의식 주셨다. 그것은 사람의 양심에서 나타나며 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악 보응의 일들을 통해 강화된다. 양심은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해 두신 하나님의 율법과 같다(롬 2:14, 15). 멜리데 섬의 토인들 속에도 살인자는 공의의 보응을 받는다는 도덕 의식이 있었다(행 28:3, 4). 또 세상의 정부들이나 사회적 여론은 사람들의 도덕 의식을 반영한다.

  로마서 13:3, 4,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이러한 종교적 마음과 도덕 의식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느 정도 선과 의를 행하며, 세상의 악들은 상당히 억제되고 극단적 부패나 혼란이 방지된다. 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어느 정도 지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반 은혜는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특별 은혜

 

 

 하나님의 특별 은혜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내리시는 구원의 은혜이다. 이것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성령의 활동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에베소서 2:8,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죄인들 중의 일부를 선택하심이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께서 택한 자들을 부르셔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救贖)을 적용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도들의 구원의 전 과정은 성령의 활동이다. 구원론은 성령의 사역론이다.

 

 

                                                      성령의 세례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강림하셨다(행 2장). 오순절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과정에서, 한 시대적 분기점을 이루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성취이었다(사 32:15; 겔 36:27; 욜 2:28, 29; 요 14:16, 17; 15:26; 16:7, 13). 또 그것은 성령께서 교회 가운데 거하시기 시작한 사건이며(요 14:16), 성령의 활동 시대가 시작된 사건이다. 이러한 점들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은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성령을 받은 사건이라는 일반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신자가 성령을 받는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그 사건은 그 후 시대에 계속 반복된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의 전도를 듣고 믿은 고넬료의 가족들에게 내려오셨듯이(행 10:44), 죄인이 구원받을 때마다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들어오신다.

 

 신자가 처음으로 성령을 받는 일을 성령의 세례라고 부른다. 신약성경에 세 번 사용된(행 1:5; 11:16; 고전 12:13) '성령의 세례'라는 말은,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처음 들어오시는 사건을 가리킨다. 이것을 '성령의 세례'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에 근거하여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때문이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내주하심(요 14:17)이나 성령의 기름 부으심(요일 2:20)과 동일하다. 신자가 성령을 받는 것은 중생할 때이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 이전에는, 중생한 것과 성령받는 것이 시간적으로 달랐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이미 깨끗함을 얻었지만(요 13:10; 15:3),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였다(요 7:39). 그러나 오순절 사건 이후에는 그런 구별이 사라졌다. 믿는 자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다.

 

  로마서 8:9,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신약에는 성도들을 위해 성령을 받으라거나,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과 같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그는 우리에게 더 오실 수 없다.' 단지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단지, 사도행전 8장에 증거된 사마리아 교회의 경우는 예외적이었다. 사도행전 8:15, 16은 그 교회의 경우가 예외적이었음을 증거한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오직 . . . 만'이라는 표현은, 그 당시 다른 곳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이 동시적이었음을 보인다.

 

 그러나 사마리아 교회는 예외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 그 교회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반쯤 이방인이었다. 또 그 곳에 복음을 전했던 사람은 사도들 중 한 사람이 아니고 집사 빌립이었다. 이런 점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 교회에 성령의 강림을 지연시키셨던 것 같다.

 

 

 

                                          성령께서 오신 목적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오시는 목적은 구원을 위해서이다. 그것은 중생(重生)과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다 포함한다. 우리의 구원의 전 과정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활동하심의 과정이다.

 

 성령께서는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을 중생시키시고 의롭다고 인치신다.

 

  요한복음 3:5,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또 성령께서는 신자들 속에 영원히 계셔서, 그들이 죄성을 이기고 그들로 하여금 성화(聖化)를 이루게 하신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위로자, 격려자, 돕는 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에스겔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 율법]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로마서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13, 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로마서 8:26,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성령의 충만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았지만(롬 8:9), 성경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교훈한다(엡 5:18). '충만을 받으라'는 원어(플레루스데, 현재 수동태 명령법)는 '계속적으로 혹은 반복해서 성령으로 충만케 되라'는 뜻이다. 이것은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가리킨다. 성령의 충만함은 어떤 이상한 체험이 아니고, 성도들의 정상적 경건 생활의 과정이다. 성도는 그의 모든 죄악과 연약을 철저히 고백하고 버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의지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된다.

 

 특히 성령의 충만함은 전도와 봉사의 능력 관계된다.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과 성도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행 4:8, 31).

 

  누가복음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활동으로 시작되고 진행되고 완성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의와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 그 은혜를 사모하자.

 

 

 

 

                   2. 부르심, 신비적 연합, 중생(重生)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받는 구원은 어떤 순서와 단계로 이루어지는가? 사람의 구원은 크게 말하면 하나님의 예정과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의 부르심으로 이루어진다. 로마서 8:30은 구원의 순서를 예정, 부르심, 칭의(稱義), 영화(榮化)로 표현한다. 구원의 순서를 좀더 자세히 구분한다면, 부르심, 중생(重生), 회개와 믿음, 칭의(稱義)와 양자(養子), 성화(聖化), 성도의 견인(堅忍), 영화(榮化) 등으로 말할 수 있다.

 

 천주교회는 구원의 은혜를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로, 충족 은혜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은혜인데 사람은 이 은혜에 저항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둘째로, 협력 은혜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그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려고 결심하고 세례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로, 주입 은혜란 세례를 통해 초자연적 덕성이 주입(注入)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은혜를 통해 사람이 중생하고 의로움을 얻는다고 한다. 의로움은 순종과 선행으로 보존되고 불신앙과 죽음에 이르는 죄를 인하여 잃어버릴 수 있지만, 고해성사(告解聖事)와 관면(寬免)과 보속(補贖)으로 다시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관면은 죄책과 영원한 형벌을 제거하고 보속은 현세적 형벌을 제거한다고 한다.

 

 루터파는 구원의 순서를 외적인 부르심, 깨닫게 하심, 회개, 중생(重生), 믿음, 칭의(稱義), 양자(養子), 신비적 연합, 성화(聖化), 보전 등으로 본다. 알미니우스파는 구원의 순서를 외적인 부르심, 회개(복음에 대한 순종), 믿음, 칭의(稱義), 중생(重生), 성화(계속 순종할 때), 성도의 견인(믿고 순종할 때만) 등으로 본다.

 

 

                                                          부르심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표현한다.

 

  로마서 1:6, 7,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고린도전서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 . ."베드로후서 1:10,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시고 초청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마가복음 16:15,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께서는 구원을 잔치에 초청하는 것으로 비유하셨다.

 

  마태복음 22:1,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태복음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마태복음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누가복음 14:16,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누가복음 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이 부르심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차별 없이 주어진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사야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요한계시록 22:17,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마가복음 16:15,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율법의 요구가 진실하듯이, 구원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고 진실하게 부르시며 초청하신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이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

 

  마가복음 16:15, 16,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 외적 부르심이, 비록 구원을 받으라는 부르심이기는 하지만, 구원하시는 부르심은 아니다. 외적 부르심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나타낼 뿐이다.

 

  로마서 2:4, 5,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이 사람의 완전한 자유 의지의 응답으로 효력있게 된다고 보았다. 중세 시대의 반(半)펠라기우스주의자들(다수의 천주교 신학자들)이나 종교개혁 이후의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이 사람의 협력으로 효력있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성경이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증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은 사람의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성령의 활동이 없이는 효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이 사람의 구원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표현하는 것은 단지 외적 부르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효력있게 부르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내면적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은 이것을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표현한다. 이 부르심은 중생(重生)과 동일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1문답, "효력 있는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영의 하시는 일인데, 그것에 의해 그는 우리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권하사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내면적 부르심은 주권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성령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 즉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이끄시면 죄인들은 그에게로 나아올 것이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또 이 부르심은 불변적이다. 그가 한번 불러 구원하시면 그의 구원은 확실하다.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

 

 

 성경은 또한 구원을 연합의 개념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라고 부른다. 신비적 연합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초자연적 활동으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은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생명을 찾고, 그 생명 안에 포함된 모든 복과 특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신비적 연합을 구원 과정 전체의 기초로 보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을 부르심이나 중생(重生)과 동일한 사건으로 본다. 벌코프는 말하기를, "신비적 연합은 중생과 칭의(稱義)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나,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이다"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신비적 연합으로 구원의 충만한 복이 성도들에게 전달된다.

 

 성례주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미신적으로 이해한다. 소시너스파는 그것을 선생과 제자, 혹은 친구들 사이의 사랑의 교제와 같은 정도의 것으로 가볍게 취급한다. 신비주의는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육신적 연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거기에서는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구별이 없어진다. 그러나 개혁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영적, 신비적, 그러나 인격적 구별이 있는 연합이라고 이해한다.

 

 

                         성경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여러 구절들에게 증거한다.

 

 첫째로, 성경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신비적 연합을 포도나무와 몸의 비유로 말한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에베소서 1:22, 23, "그[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자신을 위해 완성시키시는] 자의 충만[완성]이니라."

  에베소서 4:15,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둘째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성도들은 그가 영으로, 생각으로, 정신으로, 마음으로, 말씀으로 그들 속에 계심을 인정한다.

 

  요한복음 15:4, 5,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 . . 내가 저 안에 있으면."

  로마서 8:9, 10,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고린도후서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갈라디아서 2:20,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빌립보서 1:21,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골로새서 1:27,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

 

 이 신비적, 영적 연합은 참으로 놀라운 복이다.

 

 셋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의 생각 안에, 그의 마음 안에, 그의 사랑 안에, 그의 보호 안에, 그의 능력 안에 있다.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로마서 16: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고린도전서 3:1,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

  고린도전서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고린도전서 15:18,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

  고린도전서 15:22,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후서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갈라디아서 1: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

  에베소서 2:6,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3:6,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빌립보서 4:2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골로새서 1:2,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골로새서 1:28,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2: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

  데살로니가전서 4:16,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요 특권이다.

 

 

                                                      중생(重生)

 

 

 

 성경은 구원을 또한 중생(重生, 거듭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중생이란, 죄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사람이 되고 새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경은 중생을 '하나님께로서 남,' '거듭남,' 혹은 '성령으로 남'이라고 표현한다.

 

  요한복음 1: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요한복음 3:5, 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야고보서 1:18,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아페퀴에센)."

  디도서 3:5, "중생의(팔링게네시아스 ????gg???????)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초대교회의 어거스틴은 중생과 회심을 구별하여, 중생은 마음의 시초적 변화로서 하나님의 단독적(單獨的, monergistic) 사역이며, 회심은 중생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생을 하나님의 단독적, 주권적 사역으로 본 것은 성경적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의 사상이었고, 오늘날 개혁신학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중생과 칭의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는 중생을 사람이 자기 생활과 습관을 도덕적으로 개선하는 행위 정도로 보았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다. 교회 역사상 어떤 이들은 중생을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보았다. 이런 견해를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 synergism), 혹은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라고 부른다. 근세에 나타난 알미니우스주의는 본질적으로 이런 견해와 같다. 한편, 천주교회는 사람이 세례를 통해 부패성이 제거되고, 의가 주입(注入)됨으로써 중생된다고 보았다. 이것을 세례중생설 혹은 주입은혜의 교리라고 한다.

 

 

                                                          중생의 성격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고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해져 있다.

 

  로마서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죽은 영혼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고, 하나님의 활동에 협력할 수도 없다. 죽은 자는 중생 시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 중생에 있어서 그는 전적으로 피동적(被動的), 수동적(受動的)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나사로야 나오라'고 불러내실 때, 죽은 나사로가 주의 음성에 협력할 수 없는 것과 똑같다. 선지자 에스겔이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향해 대언할 때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만 그것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겔 37장).

 

 그러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적(單獨的), 주권적 활동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중생에서 사람은 전적으로 피동적(被動的)이다. 중생에서 사람의 의지는 협력적 원인이 될 수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들을 중생시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증거한다.

 

  에스겔 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요한복음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5, "물과 성령으로(엑스 휘다토스 카이 프뉴마토스) 나지 아니하면."

 

  '성령으로'(??[??] . . . ?????????)라는 말은 중생에서 성령께서 원인자이심을 보인다.

 

  에베소서 2:1, "[하나님께서] 허물들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들을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4, 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3:5,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 . .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중생시키실 때, 주로 복음의 말씀을 사용하신다. 따라서 성경은 말씀을 중생의 수단이라고 표현한다.

 

  야고보서 1:18,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유아들의 경우는 다르나, 성인들의 경우, 중생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과 동시적이다. 그러므로 우리편에서는 오직 전도에 힘써야 한다.

 

 중생은 사람의 영혼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 중생한 영혼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중생은 중생한 자의 이전 영혼이 새 영혼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그 자신이다. 그의 영혼은 동일하다. 단지 그의 영혼이 중생으로 새로워진 것이다. 또 중생은 영혼의 지정의(知情意)의 기능들 중의 일부 혹은 전부가 단지 새로워지는 정도도 아니다. 죽은 영혼이 다시 산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을 의미한다. 중생은 중생한 자가 범죄할 수 없는 존재로 완전하게 변화되는 사건도 아니다. 사람은 중생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그것은 성경도, 경험도 증거하는 바다.

 

 중생은 영혼의 지배적 성향(governing disposition)의 변화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중생은 "새 생명의 원소를 인간에게 심으시고, 영혼의 지배적(혹은 주도적)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한다. 촬스 핫지의 설명도 비슷하다. 중생 사건에서 하나님의 영께서는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 속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셨고,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영혼의 성향, 의향, 즉 마음가짐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마음을 받는다. 비록 옛 죄악성이 그의 인성에 남아 있어 자주 실수하고 실패하기도 하지만(롬 7장), 그의 영혼의 이 새 성향은 의를 지향하고 의만 지향한다. 그것은 다시 불경건과 부도덕의 죄악성에 굴복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원리이다.

 

  에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에베소서 4:22-23,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즉 새 생명]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중생의 증거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중생한 자는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돌이키며,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게 된다.

 

  요한일서 2: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7,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복음 1:12, 13, "영접하는[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16의 말씀도 요한복음 3:3, 5의 중생에 대한 말씀과 관련해 생각하면, 중생으로 얻게 되는 영원한 새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확증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일서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중생한 영의 범죄 여부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생한 영은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입어 다시 살았으므로, 그것이 범죄한다면 다시 죽어 그리스도의 대속이 무효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은 범죄할 수 없다. 중생한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영이 아니고 심신(心身, 몸과 마음)이다. 영과 심신(心身)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며 죄성은 심신에게만 있고 영은 완전 성결하다. 믿는 사람에게 영의 구원은 이루어졌으나 육의 구원은 아직 안 이루어졌으므로, 그의 심신은 중생한 영의 지배를 받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이 견해가 의지하는 주요 근거 구절은 요한일서의 다음 몇 구절이다:

 

  요한일서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

                       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한일서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견해를 가지는 자들은 이상의 구절들이 중생한 영에 관해 가르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견해의 문제점은, 영과 마음(心)이 별개의 존재로 분리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전통적 개혁신학이 이해하는 대로, 사람은 영(프뉴마) 혹은 영혼(프쉬케)과, 육체(소마 ????)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고, 마음은 영의 기능이다. 육체는 물질적 실체이며, 자체적으로 지정의(知情意)의 기능을 가질 수 없다. 물론, 영육의 결합체로서의 인간의 마음이 순전히 영의 활동뿐인가 하는 질문은 정당한 질문이며, 그것에 대해 영육의 결합체로서의 인간의 마음은 순전히 영의 활동만은 아닐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마음은 육체와의 결합 속에서 생성된 마음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는 영육의 존재적 분리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육체와 분리된 영에 대해서만 무엇을 논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또한 주석적으로 볼 때, 요한일서의 구절들은 이 견해에 대한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요한일서의 구절들은 실상 중생한 영의 문제가 아니고, 중생한 사람의 문제이다. 더욱이, 만일 그 구절들이 중생한 영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그것들은 요한일서 전체 교훈에 비추어 볼 때 필요성이 없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중생한 성도가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이 범죄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요한일서의 교훈의 강조점에서 볼 때 실제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생한 사람이 범죄치 않고 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강조점이다.

 

 요한일서의 표현들은 동사의 현재시제의 현재진행적, 반복적 의미로 볼 수 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한다"는 요한일서 3:6의 말씀은 주 안에 거하는 자, 즉 중생한 사람이--중생한 영이 아님--현재진행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범죄하고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잠시 넘어졌을지라도 즉시 일어나 회개하고 의롭게 살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는 요한일서 3:9의 말씀도, 중생한 자가 계속 죄를 짓고 있거나, 죄 가운데 살고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새 생명이 그 속에 심어졌고, 그 새 생명은 거룩하고 의롭게만 살려는 새 성향이기 때문이다. NIV 영어성경은 이 구절들을 그런 뜻으로 번역하였다.

 

 또한, 중생한 자가 범죄하면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가 무효화되리라는 생각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적인 칭의와 실제적인 성화를 오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한 자가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법적 책임은 이미 제거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하고 영원한 의를 받았다(롬 3:21, 22). 그러므로 중생한 자는 아직 죄성을 가지고 있고 때때로 범죄하기도 하지만, 그의 성화의 전 과정은 실상 죄책이 없는, 결코 정죄될 수 없는 과정이다(롬 6:14; 8:1).

 

 더욱이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는 단순히 중생한 자의 영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영육의 인격 전체에 적용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전인적(全人的) 구원이다. 성도의 중생 뿐만 아니라, 또한 성화와 영화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의 구원과 육의 구원을 분리시켜, 중생한 자의 현실적 죄 문제에 연관시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택한 자들의 모든 죄 곧 영육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진술은, 성경적 근거가 약하다. 역사적 개혁신학은 그런 진술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생한 자에게 있어서 육과 분리된 영의 순결성 혹은 완전성을 추론하는 것은 가능하다. 베드로전서 2:11,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카타 테스 프쉬케스) 싸우는 육체의 정욕(톤 살키콘 에피두미온 ??? ???????? ?????????)을 제어하라." 이 구절은 '육체의 정욕'과 '영혼'을 구별하고 대조시킨다. 이것은, 육체 혹은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대조시키는 로마서 8장과 갈라디아서 5장의 구절들(롬 8:4-6; 갈 5:16, 17)과 다르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7문답은 "신자들은 죽을 때 그리스도께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신자들이 죽을 때 그 영혼들은 완전히 거룩해지며 즉시 영광으로 들어가고, 그 몸들은 그리스도와 여전히 연합된 채 부활 때까지 그들의 무덤들에서 쉽니다"라고 하였다. 신자가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해진다는 생각은, 육체와 분리된 중생한 영의 완전한 순결성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비록 성경이 육체와 분리된 중생한 영의 순결성을 적극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 가능성은 추론할 수 있다고 본다.

 

 

                                              유아들의 구원 문제

 

 

  의식적으로 회개하거나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유아 때에 죽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떤 이들은 유아 때 죽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보았다.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진술하기를, "우리는 유아 때에 죽는 모든 사람이 은혜의 선택에 포함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어느 방법으로나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 중생하며 구원얻는다고 믿는다"라고 하였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유아 때에 죽는 모든 사람이 구원얻는다는 것이 복음주의적 개신교인들의 공통적 교리라고 하였다. 그는 그 근거로 로마서 5:18, 19의 아담 안에서의 인류의 정죄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많은 사람들의 칭의를 든다. 그는 말하기를, "아담의 모든 후손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명백히 드러난 자들 외에는 다 구원받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유아들만 구원을 얻는다고 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3, 4, "유아 시에 죽는 선택된 유아들은 그가 기뻐하시는 때에, 기뻐하시는 곳에서, 또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에 의해 중생하고 구원을 얻는다. 또 말씀의 사역에 의해 외적 부르심을 받을 수 없는 그 외의 선택된 사람들도 그러하다." 우리는 이 두 번째 견해가 성경의 전체 진리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에베소서 1:4, 5,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3. 회개와 믿음

 

 

 

 사람은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옴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회개와 믿음이다.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의 방법이다. 중생(거듭남)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서 사람의 무의식 세계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의식 세계로 나타나는 것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와 믿음은 결코 인간편의 어떤 공로적 행위가 아니다.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의 당연한 표현일 뿐이다.

 

 죄를 회개하는 것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인가? 어떤 이들은 믿음을 먼저로 보고(칼빈, 핫지 등), 다른 이들은 회개를 먼저로 본다(죤 머리, 박형룡 등). 논리적으로는 죄를 회개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회     개

 

 

 회개는 사람이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죄로부터 떠나는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회개의 세 가지 요소들

 

 

 회개는 지정의(知情意)의 세 가지 요소를 가진다.

 

 첫째로, 회개는 지식적 요소를 가진다. 그것은 죄에 대한 깨달음을 말한다. 사람이 죄를 떠나려면 먼저 죄에 대해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율법과 성령의 역사로 된다.

 

  로마서 3:20,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둘째로, 회개는 감정적 요소를 가진다. 그것은 죄에 대한 슬픔과 미움을 가리킨다. 회개는 상한 마음을 동반한다. 사람이 죄를 미워하고 슬퍼하지 않고서는 죄로부터 돌이킬 수 없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욥기 42:6,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나캄 )."

 

 셋째로, 회개는 의지적 요소를 가진다. 그것은 죄로부터 돌이키는 의지적 결단, 곧 죄의 청산을 가리킨다. 이것이 회개의 핵심이다. 참된 회개는 마음의 변화에서 나온 행위의 변화이다.

 

  누가복음 15:20, "(탕자가)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 히브리어슈브는 '돌아온다'는 뜻이다.

  예레미야 3:12, 14, 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시편 51: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마태복음 4:17, "회개하라(메타노에이테 ??????????)."

  누가복음 24:47, "회개와 죄사함이 . . .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 . ."

  사도행전 11:18,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사도행전 3:19, "너희가 회개하고(메타노에사테 ???????????) 돌이켜(에피스트렙사테 )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사도행전 15:3,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데살로니가전서 1:9,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는 단지 죄에 관한(페리 ????), 혹은 죄로 인한(에피 ???) 슬픔의 감정 정도가 아니고, 죄로부터(아포 혹은 에크 ??) 돌아서는 의지적 결단과 행위이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반드시 회개의 열매를 동반한다.

 

  마태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맺으라]."

  누가복음 19:8, (삭개오의 예)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속여

                        빼앗았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회개의 성격

 

 

 회개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일으키신 선한 일, 곧 하나님의 재창조의 행위이다.

 

  시편 85:4,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돌이키소서]."

  예레미야 31:18, 19,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예레미야 애가 5: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

                                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사도행전 11:18,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중생은 사람의 무의식적 세계에서 시작되지만, 회개는 의식 세계에서의 변화이다. 회개에 대한 성경의 용어들은 주로 사람의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회개는 사람의 능동적, 의식적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은 회개에 있어서 '협력자'이며, '피동적인 동시에 또한 능동적'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박형룡, 217, 218쪽).

 

 중생, 회개, 칭의(稱義)는 모두 단회적이며, 성화는 점진적이다. 성경에서 '반복적 회개'를 보이는 듯한 구절들은 구원의 순서 혹은 단계로서의 회개가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일시적인 범죄와 방황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회개는 갑작스러울 수도 있고, 점진적일 수도 있다.

 

  누가복음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요한계시록 2:5, 16,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 . .

                                그러므로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3, 19, "회개하라. . . .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회개의 중요성

 

 회개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다.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은혜의 말씀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떠나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말씀 포함한다.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태복음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누가복음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사함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사도행전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사도행전 20:21,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회개는 또한 구원에 필수적이다. 회개는 죄의 깨달음과 돌이킴뿐이므로, 죄책과 죄의 형벌에 대한 보상이 되거나 구원의 공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회개는 죄 용서와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 조건이다.

 

  마태복음 18:3, "너희가 돌이켜[회개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가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3:3, 5,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3, "비록 회개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인,

                                             죄를 위한 어떤 만족이나 죄 용서의 어떤 원인으로 의지되어서는

                                             안되지만; 그것은 모든 죄인들에게 매우 필수적이어서, 아무도

                                             그것 없이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

 

 

                                       천주교회의 고해성사(告解聖事)

 

  천주교회의 고해성사(告解聖事, penance)는 덕과 성례를 포함한다. 덕(德)은 죄를 인한 근심과, 죄를 버리려는 결심과,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려는 의도를 가리킨다. 성례(聖禮)는 통회와 고명과 보속을 가리키는데, 통회(痛悔, contrition)는 범죄에 대해 슬퍼하는 행위요, 고명(告明, confession)은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16세기 천주교회의 트렌트 회의는 고명이 신자의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선언하였다. 보속(補贖, satisfacion)은 죄를 갚기 위해 행하는 고행이나 선행을 말한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고해성사는 성경이 말하는 회개와 다르다. 성경은 성도가 자신의 죄를 목사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특히, 자신의 죄를 갚기 위해 고행이나 선행을 한다는 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완전한 속죄제사에 대한 불신이요 모독이다.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믿     음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잘못된 믿음들

 

 

 사람들 가운데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 그것은,

 

 첫째로, 성경의 역사적 내용이나 정통적 신조들을 지식적으로만 믿는 것이다.이러한 믿음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야고보서 2:19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는 말씀은 이런 믿음을 가리킨다.

 

 둘째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 없는 일시적 믿음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심과 열정이 있지만, 새 생명의 뿌리가 없어 환난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실패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주로 감정에 근거하며,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더 추구한다.

 

  마태복음 13:20, 21에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라는 말씀은 이런 믿음을 가리킨다.

 

 셋째는 기적을 경험하거나, 기적을 행하는 믿음이다. 이것은 구원을 동반할 수도 있고 동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태복음 7:22, 23에는 이런 믿음에 대해 말하기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고 하였다. 누가복음 17:11-19에 기록된 대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다 병고침의 기적을 경험하였지만, 그들 중 오직 한 명 사마리아인만 예수께 나아와 감사하였다.

 

 

                                                   참    믿  음

 

 

                                                 참 믿음의 원천

 

 

 참 믿음은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믿음이다.

 

 알미니우스주의는 믿음을 단지 사람의 행위로만 본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다고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조성자이시며, 우리의 믿음은 그의 은혜의 선물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계시한다.

 

  마태복음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5: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태복음 16:16, 17,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고린도전서 12: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를 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후서 4:4, 6, "그들 안에서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느니라,"

                              "이는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음이니라."

  에베소서 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2:8, 9, "이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었으며 이것[구원의 사실]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임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originator, 창시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perfecter, 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보자."

 

   소요리문답 86문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복음 중에 우리에게 주신 대로 예수를 영접하고 그에게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1, "선택된 자들이 그들의 영혼의 구원에 이르도록 믿을 수 있게 되는

                                              믿음의 은혜는 그들의 마음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이시며,

                                              일반적으로 말씀의 사역에 의해 생겨나고; 또한 그것에 의해 또

                                              성례들의 집행과 기도에 의해, 그것은 자라고 강해진다."

 

 

                                                참 믿음의 대상

 

 참 믿음의 대상은

 

 ①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요한복음 3:16,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16:31, "가로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②참 믿음의 대상은 둘째로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에 관한 설명인 복음의 진리 간에는 어떤 대립이나 충돌이 있을 수 없다.

 

  마가복음 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6:15, 16,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③참 믿음의 대상은 셋째로 성경 전체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며, 더욱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4:14,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말씀]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요한복음 5:39, "성경책들을 자세히 연구하라. 이는 그것들을 통해 너희가 영생을 얻는 줄 생각

                        함이니, 그것들은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원문 직역).

  디모데후서 3:15,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참 믿음의 세 가지 요소들

 

 

 구원에 이르는 참 믿음은 세 가지 요소를 가진다.

 

 ①믿음의 첫번째 요소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 역사적 사실들을 자세히 기록하며 증거하고 있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

                           부터 자세히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

                           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칼빈은 말하기를, "믿음이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인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약속의 진리에 기초하며,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계시되며 확인된다"고 하였다(기독교 강요 3. 2. 7). 메이천(J. G. Machen)은, 믿음에 대한 오늘날의 비(非)지성적 관념을 비평하면서, "모든 참된 믿음은 지적 요소를 가진다. . . . 어떤 인격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그 인격에 대한 지식을 가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신앙이란 무엇인가?, 40쪽).

 

 천주교회는 '명시적(明示的)적 믿음'(explicit faith)에 대해 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묵종적 믿음'(implicit faith)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묵종적 믿음이란, 신자가 종교의 몇 가지 기초적 진리들에 대해서는 알아야 하지만,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지식 없이,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믿으려는 태도만 가지고서 믿는 믿음이다. 그러나 성경은 참 믿음이 확실한 지식을 동반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에, 묵종적 믿음이란 잘못된 개념이다. 지식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그러면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의 믿음의 지식이 필요한가? 사람은 구원을 위해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그리고 왜 하셨으며, 또 그가 장차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인지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박형룡, 252쪽).

 

 ②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찬동이다. 찬동은 복음 진리에 대해 기쁘게 동의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믿는다'는 말은 어떤 사실에 대해 동의함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4: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

                        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히브리어 헤에민 레- 는 어떤 증거에 대해 승인함을 가리킨다. 죤 오웬은, "모든 믿음은 증언에 대한 찬동이요, 신적 믿음은 신적 증언에 대한 찬동이다"라고 말하였다.

 

 ③믿음의 세 번째 요소는 신뢰이다. 신뢰란 믿음의 내용을 자기 것으로 확신하고, 그 내용을 주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인격과 그 약속을 믿고 의지하였다. 히브리어 헤에민 베- 는 사람이 어떤 인물이나 사물을 의지함을 나타낸다.

 

  시편 37: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바타크 베- 도 신뢰의 요소를 강조하는 말이다. 그 외에, 카사 는 '자신을 숨긴다, 감춘다'는 말로서 역시 신뢰의 요소를 강조한다(시 5:11; 7:1; 11:1; 16:1; 17:7 등). 신약성경에서 피스튜오 에이스- ??????? ???는 가장 특징적 구문이다(49회 사용됨). 이 구문은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을 표현한다.

 

  요한복음 3:16, 18, 36, "저를 믿는 자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죤 머리는, "지식은 찬동으로 옮겨가고, 찬동은 신뢰로 옮겨간다. . . .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신뢰함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그에게 맡기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믿음의 의지적 요소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은 믿음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② 예수님을 우러러 보는 것(요 3:14-15, 구리뱀을 우러러 보듯이 믿음).

   ③ 예수께로 나아오는 것(요 6:44, 65).

   ④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요 6:50-58)(속죄 신앙).

 

 믿음의 의지적 요소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참된 믿음은 순종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야고보서 2:17, 26,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행위로 그 구원을 확증한다. 성도의 의롭고 선한 행위는 구원을 위한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확실한 증거와 표가 된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성화>

 

                                         4. 칭의(稱義)와 양자(養子)

 

 

 

                                                    칭의(稱義)

 

 

 성경에서 구원은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로 표현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1은 칭의(稱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께서는 효력 있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 하시되, 그들 속에 의(義)를 부어 넣으심으로가 아니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고 받아들이심으로이며; 그들 안에 이루어진 혹은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것 때문에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나, 다른 어떤 복음적 순종을 그들의 의로 그들에게 전가(轉嫁)시킴으로써가 아니고,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그의 순종과 만족(satisfaction, 속상[贖償])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인데; 그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3문답은 "칭의(稱義)는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행위인데, 그것에서 그는, 우리에게 전가(轉嫁)되고 믿음으로만 받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 앞에서 의로운 자로 용납하십니다"라고 한다.

 

 

                                                     칭의의 성격

 

 성경이 말하는 칭의는 다음 몇 가지의 성격을 가진다.

 

 ①첫째로, 칭의는 법정적(法廷的, forensic)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선언인 것이다. 온 세상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그것은 죄인의 죄책(罪責, guilt; 법적 책임)이 없어지고,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성화와 비교해 볼 때, 칭의는 죄책이 없어지는 것이며, 성화는 죄성 혹은 부패성이 극복되는 것이다. 또 중생, 회심, 성화는 사람의 내면적, 인격적 변화이지만, 칭의는 사람의 법적, 신분적 변화이다. 칭의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사람 밖에서, 법적으로, 객관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에는 칭의의 법정적 성격이 명확히 인식되지 못했었다. 천주교회는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주입(注入)을 받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보았고, 따라서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경은 칭의가 법정적 선언임을 보인다. 칭의 혹은 '의롭다 하다'는 성경 용어가 사람을 실제로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뜻이라는 것은 다음의 여러 구절들에서 분명하다.

 

  출애굽기 23:7,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신명기 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이사야 5:23,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의롭다 하다'는 히브리어 히츠디크 는 정죄(定罪)라는 말과 대조되는 법적, 재판적 용어이지, 사람의 내면적 의(義)의 덕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의롭다 하다'는 헬라어 디카이오오 ???????도 법적, 재판적 의미를 가진다.

 

  로마서 8:33, 34,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로마서 3:21, 22, "이제는 율법 외에(코리스 노무,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②둘째로, 칭의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골자이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결론을 내리노라]."

  로마서 4:4,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③셋째로, 칭의는 즉각적이며 완전하다.

 

  로마서 5:1, 9,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원어(디카이오덴테스 ????????????, 부정과거분사)는 문법적으로 반복이나 진행의 의미가 아니고, 단순한 사건을 나타낸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곧 육신을 좇아 행하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전통본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 ?g????????, 완료시제)."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테텔레이오켄, ??????????? 완료시제)."

 

 그러므로 칭의는 믿음의 크고 작음, 혹은 많고 적음의 정도에 관계되지 않는다. 작은 믿음일지라도 진실한 믿음이라면 칭의를 얻기에 충분한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하신다.

 

 천주교회는 사람이 세례를 통해 원죄와 및 세례 받기 전의 모든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게 되지만, 세례받은 후의 죄들에 대해서는 고해성사(告解聖事)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계속적 칭의 혹은 증가적 칭의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는 성경적이지 않다. 한편, 신정통주의도 칭의가 즉각적이지만 또한 반복적이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성경적이지 않다.

 

 

                                                       칭의의 수단

 

 

 사람은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칭의는 우리의 선한 행위들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이사야 64:6,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로마서 3:21, "율법 외에"(코리스 노무 ,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 없이').

  로마서 4:4, 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율법의 행위와

                     관계 없고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기조메다 ??g???????,

                     결론을 내리노라)."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엑스 에르곤 노무 ?? ??g?? ?????)가 아니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디아 피스데오스)이다.

 

 그러나 믿음이 의로 간주된다고 해서(롬 4:3, 9), 믿음 자체가 의로 간주된다거나 믿음 자체가 효력을 가진다고 볼 것은 아니다. 믿음은 단순히 칭의의 수단일 뿐이며, 그 효력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다시 말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 때문에'(디아 피스틴)가 아니고, 단지 '믿음을 통하여'(디아 피스테오스)이다. 어떤 이들(알미니우스주의)은 믿음 자체가 의로 간주된다고 본다. 그러나 믿음은 기관차와 객차를 연결하는 연결쇠와 같다. 물론 객차가 가려면 먼저 연결쇠로 기관차와 연결되어야 하지만, 객차를 끄는 것은 연결쇠가 아니고 기관차이다(박형룡, 구원론, 299쪽).

 

 야고보서 2:14-26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과 충돌한다고 보일지도 모른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 .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使者)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복음과 야고보의 교훈을 충돌시켜서는 안 된다고 본다.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율법주의에 반대하여,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적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임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율법적 행위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를 구별하며 구원 진리를 설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참 믿음이 사랑으로 행동하며 의에 순종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로마서 6:17, 18,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한편, 야고보는, 율법 폐기론이나 혹은 그것이 빠지기 쉬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에 반대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선행을 동반함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을 구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죄인이 행함이 없는 믿음만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표현하였고, 이런 문맥에서 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순종의 행위를 인용한 것이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는, 구약 시대에도 성도들에게 적용되었는가? 그렇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이 은혜의 구원을 암시하였다(창 3:21). 아담과 하와의 아들 아벨은 양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을 의미한다(창 4:4). 특히 아브라함의 경우는, 구약 시대 성도에게도 이 원리가 적용됨을 증거한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없다고 증거한다(롬 3:20). 또 요한계시록에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고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말하기를, "구약 아래서 믿는 자들의 칭의는, 이 모든 점들에서, 신약 아래서 믿는 자들의 칭의와 동일하다"(11:6)고 하였다.

 

 

                                                          칭의의 때

 

 

 신자는 언제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택한 백성들을 위한 칭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속에 계획되어진 것이고, 역사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확립되었지만(롬 4:25), 그들을 위한 칭의가 영원 전에 이루어졌다거나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 온 세상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받은 성도들을 죄 없다고, 의롭다고 공적으로 선포하실 것이지만, 성도들의 칭의가 그 때 이루어진다고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죄인의 칭의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루어진다.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내리실 의롭다는 선언은 그들이 믿음으로 이미 받은 칭의의 확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놀라운 복

 

 

 칭의는 참으로 놀라운 복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하며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롬 5:1, 2). 또한 성도는 죄에게서 해방되었다(롬 6:18, 22). 우리를 억눌렀던 무거운 죄짐이 벗겨졌다. 우리는 옛 죄를 반복해서 고백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과거의 죄를 기억하고 낙망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성경은 성도가 심지어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 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갈라디아서도 이 진리를 분명히 증거한다(특히 5:1).

 

    로마서 8:1, "이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다시 정죄함이 없다

 

 칭의는 가장 큰 보화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때문에, 이 귀한 보화와 비교할 때 자기에게 유익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해로 여기며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다(빌 3:7-9). 또 그것은 그가 빌립보서에서 강조한 기쁨의 이유요, 성도의 감사와 감격의 삶의 원천이다.

 

                                           그러나 방종치 말아야

 

 

 그러나 성도는 반(反)율법주의, 또는 율법폐기론의 오류를 조심해야 한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율법주의)은 성도에게서 확신과 기쁨과 자유를 빼앗아가고 우리를 율법의 멍에 아래 두지만, 반대로 율법을 소홀히 하고 율법을 범하는 것을 큰 죄로 여기지 않는 생각(반율법주의)도 경계해야 할 큰 오류이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가 이제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롬 6:1-2, 15).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롬 6:18, 22).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죄의 기회를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하며(갈 5:13), 만일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롬 8:13). 야고보서는 선한 행함이 없는 입술만의 믿음의 고백은 헛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분명히 구원의 증거이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만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요일 2:3, 4), 중생한 자는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징은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요일 3:6, 9-10).

 

 이 모든 말씀을 통해 분명한 것은, 의롭다 하심을 확신하고 그 복을 누리는 자마다 반드시 한가지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죄 짓지 말고,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양자(養子)

 

 

 

 소요리문답 34문답, "양자(養子, 자녀로 삼으심)란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행위인데, 그것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수에 들고, 그 모든 특권을 누릴 권리를 가집니다."

 

 중생이 새 생명의 시작이라면, 양자는 새 신분의 시작이다.

 

 

                                                            양자의

 

 

 성도가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된 것은, 자연적 관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자연적 관계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된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시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도 두어 구절에서 그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사도행전 17:28, 29, "너희 시인 중에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히브리서 12:9, "모든 영의 아버지."

 

 그러나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이러한 자연적 관계에서가 아니고, 특별한 언약적 관계에서다.

 

  신명기 32:6,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예레미야 31:9,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요한복음 1:12,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일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중생과 칭의의 구원근거한다.

 

  요한복음 1:12, 13,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로마서 8:9, 13-14,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3:26,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4:4, 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양자의 특권

 

 양자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특권을 누린다.

 

  요한복음 1:12,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너희는 더 이상 외인(外人)도 아니요 손[이방인]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함께 동료 시민들]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들]이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복된 특권들은 다음과 같다:

 

 1. 양자의 영을 받아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감.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프뉴마 휘오데시아스)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갈라디아서 4:5,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2. 하나님의 긍휼과 보호와 공급함을 얻음.

 

  마태복음 6:31, 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 징계는 받으나 버림을 당하지 않고,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얻음.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에베소서 1:13,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4. 영광의 천국을 상속받음.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後嗣)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영생의 천국]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천국, 눅 12:32]을 이을 자니라."

 

 

 

 

                                                       5. 성화(聖化)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 단계로 되어 있다. 구원의 과거적 단계는 중생과 칭의(稱義)이며, 그것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졌다.

 

 구원의 현재적 단계는 성화(聖化)이며, 그것은 예수 믿는 자들 속에서 지금 진행 중이다. 구원의 미래적 단계, 곧 구원의 완성은 영화(榮化)이다.

 

 

                                                      성화가 무엇인가?

 

 

 성화(聖化, 거룩하여짐; sanctification)가 무엇인가?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重生) 의롭다 하심을 받은(稱義) 자들이 그 인격과 삶에 있어서 실제로 거룩해지는 과정을 가리킨다. 소요리문답 제35문답, "성화란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일인데,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전인(全人)이 새로워지고, 죄에 대해 점점 더 죽고 의에 대해 살 수 있게 됩니다."

 

 

                                                  전인(全人)의 실제적 변화

 

 

 성화는 전인(全人)이 새로워지는 것, 즉 영육 전체, 지정의(知情意)의 전 인격, 전 생활이 죄에 대해 점점 더 죽고 의에 대해 사는 것이다. 죄는 죄책과 부패성으로 구성된다. 칭의는 우리의 죄책이 법적으로 제거되는 것이지만, 성화는 칭의에 근거하여 우리의 부패성이 실제로 극복되는 과정이다. 또 칭의는 객관적인 사건이지만, 성화는 내면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인격과 삶의 변화의 문제이다. 성화는 사람의 인격과 삶의 실제적 변화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적용하신 법적 의(義)를 성도들이 인격과 삶에서 실제로 나타내는 것이다. 성도들은 법적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거룩해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도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내용은 지식과 도덕성이다. 사람은 범죄함으로 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통해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평생의 성화의 정도는 별로 크지 않은 듯하지만, 지식과 깨달음의 차원에서 그것은 상당히 진전된다. 성도들은 일생의 성화 과정을 통해 무엇보다 자신의 죄악성과 무능함,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을 깨닫는다. 물론 그는 그것과 함께 거룩함과 의로움, 선함과 사랑과 진실함 등의 도덕성에 있어서도 상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레위기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9:2 등).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 ."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에베소서 4:22-24, "(받았으니) 곧 옛 생활방식에 관하여 너희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와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라"(원문 직역).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베드로전서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성화는 성경에서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에베소서 4:13, 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예물과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셨음같이 너희도 사랑으로 행하라"(원문 직역). 골로새서 3:13, "피차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베드로전서 2:21,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점진적이며 불완전함

 

 

 성화는 점진적이다. 중생은 영적 출생이며 성화는 영적 성장이다. 사람이 출생한 후 자라듯이, 성도는 영적으로 중생한 후에 점점 성화된다. 중생(重生)과 회개와 칭의는 단회적(單回的)이며 즉각적이지만, 성화는 중생에서 시작되어 일평생 동안 계속되는 점진적 과정이다. 야곱의 생애를 흔히 성화에 비교하듯이, 성도의 일생은 성화의 훈련 과정이다. 채소가 자라려면 단지 수개월이 필요하나 참나무는 백 년이 필요하듯이, 성도들의 성화는 오랜 기간과 많은 훈련들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성도가 점점 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지만, 성화는 매우 더디어 보인다.

 

 또한 성화는 지상에서 불완전하다. 육신의 죄악성은 죽을 때까지 완전히 극복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며 경험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도의 구원은 이런 불완전한 성화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단번 속죄의 의(義)에 의존한다. 성도의 성화가 아무리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이루어주신 의(義)에 미치지 못한다. 성도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의 때문에 완전하며 성도는 최종적 영화의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성도는 죽을 때 그 영혼이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케 되어 즉시 영광의 천국에 들어간다. 그것은 성도가 죽을 때 그 영이 즉시 천국에 들어갈 것을 가르친 성경의 여러 구절들(눅 23:43; 고후 5:8; 빌 1:23 등)에 당연히 내포된 진리이다. 거룩한 영이 아니고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23은 천국에 올라간 영들을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불렀다. 소요리문답 [제37문] 신자들은 죽을 때 그리스도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습니까? [답] 신자들은 죽을 때 그 영혼들이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케 되어 즉시 영광에 들어가고, 그 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므로 부활 때까지 그 무덤들에서 안식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성도가 지상에서 완전 성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과 경험에 배치된다. 마태복음 6:12, 13,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로마서 7:7-26,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 .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갈라디아서 5:17,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스려 욕심을 내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리며,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원문 직역).

 

 알미니우스파는 의식적 죄만 죄로 간주한다. 그들은 마치 10m 사다리를 놓고 그 꼭대기에 올라가 '나는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덕적 표준은 우리가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디 엘 무디는 "사람들은 무죄(無罪)에 더 가까와질수록 그것에 대해 더욱 적게 말한다"고 말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은 잘 해석해야 한다.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를 보일 뿐이다.

 

  야고보서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여기의 온전함은 완전 무죄가 아니고, 영적 성숙함을 의미한다. 노아나 욥 등도 완전 무죄한 자들이 아니었다.

 

  요한일서 3:6, 8,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범죄치 아니하나니'라는 말은 중생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중생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까닭은, 하나님의 씨 곧 새 생명의 원리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요일 3:9).

 

 

                                            왜 성화되어야 하는가?

 

  성도는 왜 성화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성화되어야 할 근본적인 이유는 성화가 구원의 당연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갓난아기가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정상적인 일이다. 기형아가 아니라면, 아기는 자라게 마련이다. 영적으로도 똑같다. 성화는 반드시 중생, 회개, 칭의를 따른다. 각 사람의 성화의 정도는 다를지라도 성화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실패치 않는 구원이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이기는 자'라는 말은 성도들 가운데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음을 의미하는가? 중생하고 칭의함을 받은 자들 가운데 성화에 실패하는 자가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참으로 중생한 자, 참으로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세상을 이길 것이다.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

 

 성도가 성화되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너무 큰 은혜, 즉 너무 귀하고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의 목표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죄 짓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고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만 행하는 것이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로마서 12:1, 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린도전서 6:19, 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후서 5:14, 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

                                 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성화는 필수적 과정이므로 성도는 자신의 성화를 위해 분발해야 한다.

 

 

 

                                                 어떻게 성화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됨

 

 성화는 하나님의 전적인, 값없으신 은혜요 그의 하나님의 초자연적 활동이다.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2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 . . .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히브리서 13:20, 21, "영원한 언약의 피로 말미암은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특히, 성령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이제 중생시킨 성도들 속에 거하신다. 에스겔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성령께서는 성도들 속에 계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믿고 행하게 도우신다. 요한복음 14:16, 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 파라클레토스; 위로자, 권면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성령은 또한 그들을 도우신다. 성도들은 계속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로마서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13, 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친절]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람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함

 

  성화는 사람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선행의 능력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인격적 존재로 취급하신다. 사람은 중생에서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소극적이었지만, 성화에서는 능동적, 자발적, 협력적이어야 한다. 성화에서 인간의 성실한 노력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와 책임이다.

 

 빌립보서 2:12, 13,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매튜 풀(Matthew Poole)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우리는 구원의 일에 있어서 게으르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일함으로써 그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구원의 공로나 값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주께서 풍성하게 완성하신 것을 적용하는 것이며, 구원의 원인이나 근거가 아니고 단지 우리가 구원에 참여하는 과정과 수단일 뿐이다'(Commentary on the Holy Bible, III, 691).

 

 로마서 6:12, 13,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 .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고린도후서 7:1,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데살로니가전서 4:1-3,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더욱 많이 힘쓰라. . .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베드로후서 1:5-10,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 . .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성화의 수단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몇 가지 수단들을 주셨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 및 하나님의 섭리적 지도 등이다.

 

 첫째로, 성화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이다. 골로새서 1:28, 29,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여기에 있다. 디모데후서 3:15-17,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우리의 성화를 위해 유익한 책이다.

 

 둘째로, 성화의 또 하나의 수단은 성례이다. 바르게 집행된 성례는 말씀 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증거하고 기억케 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큰 은혜와 유익을 준다.

 

 셋째로, 성화의 또 하나의 수단은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영적 도움과 능력을 받을 수 있는 합법적 수단이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성도의 기도 제목들 가운데 영적 성장, 곧 성화는 매우 중요한, 기본적 제목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넷째로, 그 외에도 하나님의 여러 가지 섭리적 훈련과 지도는 성도의 성화를 위한 수단들이다. 예를 들어, 직업 현장에서의 훈련, 시험과 유혹, 고난 등이 그러하다. 그것들은 다 성도를 겸손케 하고 성결케 하는 수단들이다. 베드로전서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시편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성도는 이러한 수단들을 성실히 사용함으로 영적으로 점점 더 자라며 거룩해져야 한다.

 

 

 

                                                       성화와 상(賞)

 

 

                                                       선행과 봉사

 

  선행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인 동시에 성화의 당연한 열매이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성령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상(賞)은 각각 다를 것

 

  성경은 선행에 대한 상(미스도스 ??????)에 관해 많이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상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3, 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10:41, 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상(賞)은 선행과 봉사의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를 것이다. 다니엘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마태복음 5:11, 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9:16, 17,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25:19-21,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특히,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에게 각각 수고하고 충성한 만큼의 상이 약속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3:8, 14,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린도전서 3:12-15의 말씀은 종종 오해된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 말씀은 일반 성도의 성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사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금과 은과 보석은 바른 성경적 교훈을 말하고, 나무나 풀이나 짚은 그릇된 인간적 교훈을 말한다. 이 말씀의 요지는, 목사가 바른 교훈으로 사역하면 마지막 날 상을 받을 것이지만, 목사가 바른 교훈으로 사역하지 않으면 자신은 구원 받을지 모르나 자기의 교훈을 받던 자들의 멸망으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상(賞)은 하나님의 은혜임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의 선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고 오직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비유에서, 주께서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5). 또 사도 바울은 주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고 역사상 아마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종이었지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다(고전 15:10). 또 사도 요한이 본 천국의 환상 중에 24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영원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계 4:10, 11).

 

 더욱이,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에 비추어볼 때 여전히 부족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는 여전히 예수님의 보혈 공로밖에 없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은 진술하기를, "그들의 순종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능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라도 공로를 쌓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이상을 할 수 있기는커녕, 그들이 의무상 해야 할 만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들은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상은 오직 그의 은혜일 뿐이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해야 마땅한 자들이다(눅 17:10).

 

 

 

 

                                           6. 성도의 견인(堅忍)과 영화(榮化)

 

 

 

                                                    성도의 견인(堅忍)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끝까지 견딤)은 예수 믿고 구원얻은 사람이 은혜의 상태 안에서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1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시고 그의 영으로 효력있게 부르시며 거룩케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떨어져 버릴 수 없고; 그 안에서 확실히 끝까지 견디며, 영원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도의 견인의 진리는 다른 말로 구원의 보장에 대한 진리이다. 어떤 이들은 구원의 보장에 대한 진리란 없고 구원은 신자가 끝까지 지킬 때만 유지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보장에 대해 가르친다.

 

 

                                                     성경적 증거

 

 성도의 견인(堅忍, 끝까지 견딤)을 명백히 가르치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0:27, 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 .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로마서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고린도전서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데살로니가후서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디모데후서 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구원의 일을 포함함]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이런 명백한 구절들 뿐만 아니라, 성도의 견인 교리를 지원하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들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성이다.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에독사세 ???????)은 부정과거시제로서 미래의 확실한 사건을 나타낸다. 예정된 자들은 남김없이 다 영화롭게 된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디모데후서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의 완전성이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요한복음 6:39, ". .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로마서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8, 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 . .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셋째는 성령의 인치심이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에베소서 1:13, 14,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를 바라며 그를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는 그 얻으신 것의 구속(救贖)의 때까지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재번역). 에베소서 4:30,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인치심'은 보증이다. 이렇게 보증된 자들은 중도에 실패할 수 없다.

 

 천국의 기업을 약속하심도 이와 관련된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베드로전서 1:3, 4, ". . .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를 것이다.

 

 

                                                   구원의 확신 문제

 

  로마 천주교회는 신자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의무적이지 않고 원할 만한 것도 아니며 또 가능하지도 않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구원이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으로 되며 고해성사(告解聖事)가 죄사함에 필수적이라는 사상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구원의 확신을 가능한 것으로 본다. 구원의 확신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35, 37-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 .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구원의 확신이 믿음에 본질적 요소인가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견해가 나뉘인다. 어떤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믿음에 본질적 요소라고 본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믿음에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믿음의 열매라고 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1-4은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주 예수를 참으로 믿으며, 그를 진실히 사랑하며, 그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으로 행하기를 힘쓰는 자들은 그들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을 이 세상에서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할 수 있으며; 그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 . . 이 무오한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참 신자라도 그것에 참여하기 전에 오래 기다리며, 많은 어려운 일들과 싸울 수 있지만 . . . . 참 신자들이라도 그들의 구원의 확신이 여러 방식으로 흔들리고 감소되고 중단될 수 있는데 . . . .

 

 구원받은 성도가 진실한 믿음과 순종 속에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또 자신의 구원에 대한 보장도 확신하는 것은 확실히 복된 일이다.

 

                                             이 교리에 대한 반론들

 

 성도의 견인의 교리에 대해 여러 가지 잘못된 반론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성화에 대한 권면에 반대된다고 반론한다. 물론 성경에는 성화에 대한 권면들이 많이 있다.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요한복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그러나 이 말씀들은 권면받는 신자들 중에 어떤 사람이 끝까지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사람의 자발적 행위를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또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성도를 나태와 방종으로 인도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편의 근면과 성실한 노력 없이 우리을 보호하신다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며, 성도의 견인의 확신은 도리어 성화를 위해 큰 위로와 힘이 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어떤 이의 표현과 같이 "위험한 시간에 불기둥"과 같다.

 

 또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배교의 경고에 반대된다고 반론한다. 물론 성경에는 배교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이 많이 나온다. 마태복음 24:4, 5,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로마서 11:20-22, ". . .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러나 이 말씀들은 신자들 중에 어떤 이가 배교하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구원의 완성을 위해 경고가 수단으로 사용됨을 증명할 뿐이다. 배교에 대한 경고가 구원받은 성도들의 배교의 가능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또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배교의 실례들에 반대된다고 반론한다. 성경에는 배교의 실례들이 없지 않다. 디모데전서 1:19, 20,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디모데전서 4:1,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디모데후서 2:17, 18,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베드로후서 2:1, 2,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그러나 배교자들이 한 때 교회 안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들이 참으로 중생하고 구원얻은 자들이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속하였지만,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 도적이요 깨끗지 않은 자이었다(요 6:64; 12:6; 13:10, 11). 히브리서 6:4-6과 10:26-29의 말씀들도 배교의 경고 혹은 실례들에 관련된다고 본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성경적이다. 우리가 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신다.


 

 

 

                                                 영     화(榮化)

 

                                                            영화의 의미

 

  영화(榮化, glorification)란 신자가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부활 때에 몸까지도 완전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영화된 몸은 죄성이 없고 범죄하지 않고 범죄할 수도 없는 몸이다.

 

 물론, 신자는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한 상태로 천국에 들어간다. 천국은 완전히 거룩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소요리문답 37문답, "신자들은 죽을 때, 그 영혼들이 완전히 거룩해지며 즉시 영광 안으로 들어가고." 누가복음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빌립보서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히브리서 12:23, ". . .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그러나 우리의 구원의 최종적 단계는 몸의 구속(救贖), 곧 우리의 몸이 영광스런 몸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8:23,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성도의 부활의 몸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범죄할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고, 다시 범죄할 수 없고 다시 죽을 수도 없는 몸이다. 누가복음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부활의 몸은 썩지 아니하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영적인 몸이다(고전 15:42-44, 49). 그 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닮은 몸이다. 로마서 8:29,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빌립보서 3:21, "그가 . . .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요한일서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런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세계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로마서 8:18-23에 증거한 대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며 탄식하고 있다.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 그 곳에는 눈물도, 사망도, 애통도, 아픈 것도 없다. 그 세계는 현재의 이 세계가 완전히 새로워진 세계이다(계 21:1-5).

 

 

                                                  완전한 구원의 영광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로 말미암아 이미 법적으로 거룩해졌고(고전 1:2; 히 10:10) 도덕적으로 완전해졌다(히 10:14). 그것이 칭의(稱義)이다. 성화란 구원받은 성도에게 법적으로 이루어진 그 거룩과 의를 그의 인격과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비록 성도의 성화가 이 땅 위에서 매우 더디게 이루어지고 심히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구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완전한 의 때문에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인으로 간주된다. 성도의 미래의 영광은 그의 불완전한 성화의 정도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완전한 의에 근거한다.

 

 영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救贖)에 내포된 바이다. 로마서 8: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은 성도들의 영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고 몸에도 관계된다. 장차 성도들이 가질 영광스런 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의 결과이다.

 

  마태복음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로마서 8:29, 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3:20, 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거룩한 삶의 결과를 단순히 '영생'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부르심의 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로마서 6:22, 23,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브라베이온 ????????, prize)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주실 상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에 비교될 수 없다. 성도들의 거룩한 행실은 부족투성이며 불완전하나, 하나님의 구원은 영화롭고 완전하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상은 그의 은혜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하나님이 주신 영화롭고 완전한 구원에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나은 구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상급에 따른 내세의 영광의 차등

 

  그렇지만, 성경은 성도들이 지상에서 행한 선행과 봉사에 대해, 장차 천국에서 차등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을 보이기 때문에, 이 사실로부터 성도가 내세에 누릴 영광도 차등이 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상급의 차등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앞에서 살펴본 바가 있으나, 몇 구절을 다시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누가복음 19:16, 17,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고린도전서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헤프는 그의 개혁파 교의학에서, 역사상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 피스카토(Piscator), 부칸(Bucan), 코체유스(Cocceius) 등의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그들은 성도들이 내세에 누릴 영광의 차등에 대해 말했다. 코체유스는 말하기를, "영광에 있어서 개인들에게 차이가 있을 것이나 질투함이 없을 것이며, 가장 큰 영광 곧 머리의 영광이 모두에게 흘러넘칠 것이다"라고 했고, 그는 또 "영광에 있어서 또한 등급들이 있을 것인데, 행위들의 공로에 따른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이 세상에서 맺은 의의 열매들에 일치하는 방식으로일 것이다"라고 했다.

 

 헤르만 훽스마와 박형룡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카이퍼, 바빙크, 훽스마 및 박형룡 자신의 견해들도 위에 헤프가 인용한 사람들의 것과 비슷하다. 바빙크는 우리의 합리적 믿음이라는 책에서도 서술하기를, "사람은 그에게 주어진 재능을 사용하는 성실성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큰 영예와 통치권을 받을 것이다(마 24:14 이하). . . . 따라서, 물론 모두가 동일한 복, 동일한 영생, 하나님과의 동일한 교제를 나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광과 광휘에 있어서 그들 가운데 차이가 있다. 교회들은 그들의 충성과 열심에 비례하여 그들의 주님과 왕으로부터 다른 면류관과 상을 받는다(계 2-3장)"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