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오바고 언덕*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
1. 아레오바고의 위치
“아레오바고”는 전쟁의 신에서 유래된 형용사 "Άρειο"(“호전적인, 전쟁의, 아레스 신의”)와 언덕이라는 단어 "Παγο"가 연결된 용어이다. 아레스는 남신 제우스와 여신 헬라 사이에서 태어난 전쟁과 학살, 역병의 신이다. 따라서 “아레오바고”라는 뜻은 전쟁과 재난의 신, 아레스의 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아덴 시의 광장인 아고라(Agora)로부터 남쪽으로 약 200m, 그리고 아크로폴리스(문자적으로는 "the upper city" 즉 "citadel")의 중심부인 판테온 신전에서 북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아레오바고는 해발 80-90m이며 아크로폴리스는 110m이다. 아덴의 북서쪽에 위치한 디필론(Dipylon) 성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판테온이라 불리우는 거리를 따라 아덴 시 중앙에 위치한 아고라 광장에 이르게 된다. 이 광장은 시민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장소나 또는 공공 회합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특별히 아고라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Stoa Poikile는 (“채색된 주랑”이라는 뜻) 철학자들의 쉼터로 유명하였다. 저명한 철학자 제논은 그곳에서 토론을 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후계자들은 “스토아 철학자”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이 아고라는 해발 60-70m에 위치하고 있다. 아고라를 지나 남동쪽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길이 200m, 폭 100m 정도의 자그마한 언덕이 눈에 띄는데 이것이 바로 아레오바고 언덕이다.
2. 아레오바고란 언덕 혹은 기관인가?
‘아레오바고’가 앞에서 말한 단순한 언덕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관청을 일컫는 것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아레오바고’의 뜻을 파악하는 문제는 또한 ‘바울이 어디서 아덴사람들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변론 했는지’라는 물음과도 연결이 된다. ‘아레오바고’가 언덕이라고 할 때에, 바울의 연설 장소는 앞에서 언급한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 사이에 위치한 언덕이 된다. 하지만 ‘아레오바고’를 기관의 이름으로 본다면, 바울이 연설한 곳은 이 기관의 소재지나, 회합을 가진 장소가 어디였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고대 희랍 시대부터 의장 Archon Basileus가 주재한 회의, 아레오바고가 있었는데, 이것은 왕을 위한 고문단이 발전된 형태였다. 이 회합은 재판을 관할했으며 정치적인 사안을 결정하기도 했다. 플루타크에 따르면 아레오바고는 예로부터 아덴의 ‘살인 법정’ 역할을 수행했으며 솔론 시대에는 풍습과 규율을 관장하는 최고의 기구였다. 풍부한 경험을 지닌 사람들(Archonten)만이 회원이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모임은 대단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민주정 시대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페리클레스의 동료인 Ephialtes는 주전 462년에 아레오바고가 부패되었다는 이유로 이 기구가 갖고 있던 대부분의 정치적인 권한을 박탈했다. 또한 재판권도 다른 기관으로 이양했고 단지 피의 재판정과 종교적인 영역을 관할하는 권리 등 만 남겨두었다. 로마인들이 그리스를 점령하자 그들은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요소들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레오바고는 정치적인 권한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제정 시대의 금석문들을 살펴보면 아레오바고는 가장 많이 거론되는 기구 중의 하나로서, 아덴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처럼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아레오바고는 일반적으로 Stoa Basileios에서 회합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주랑은 정방형의 모양인 아고라의 북서쪽 모서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었다. P. M. 프래서의 발굴 보고에 따르면 Stoa Basileios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 볼 때, 아레오바고는 바울 당시 아덴 시 아고라의 한 편에 위치한 Stoa Basileios에서 모임을 가졌던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임은 시의 주요 문제, 특별히 종교, 교육에 관한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려는 바울이 호기심 많은 아덴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했다고 할 때, 이 아레오바고는 아레스의 언덕이 아니라 기관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3. 아레오바고와 바울
바울이 아고라에서 만나 토론한 자들은 스토아 철학자나 에피큐레스 철학자들인데(17:18), 이들은 바울이 예수와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하자 그를 이방 신들을 전하는 자 라고 판단하고(18절) 아레오바고에 데려가서, 그에게 새 교에 대해 알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19절). 이어 나오는 절에서도 (20절) 계속 그들은 이상한 것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는 21절에는 아덴 사람들과 이 도시에 머무는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 외에는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자들이라는 보충 설명이 등장한다. 여기서 저자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복음을 선포한 바울에 대해, 오직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아덴에 거하는 자들이, 어떻게 반응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다. 32절에 따르면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로 요약되는 연설을 끝내자 한편의 사람들은 조롱했지만(“기롱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시 말을 들어보자고 한 점, 그리고 33절에 의하면 바울은 별다른 제재 없이 아레오바고를 떠날 수 있었다는 점, 또한 연설을 들은 자들 중 몇몇은 바울의 편이 되어 믿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헌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 라고 하는 여자도 있었다는 점에서, 바울은 수인이나 혐의자의 신분으로 재판이나 심문을 받았다기 보다는 토론 형식을 통해서 아덴에 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4.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
바울은 우선 아덴 사람의 신앙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22절). 이로서 ‘그가 새로운 신을 소개하려는 것은 아닌가’ 라는 아덴 사람들의 의혹을 불식시키고, 연설을 듣는 청중들로부터 호의를 얻음으로서 그들의 마음과 귀를 열도록 유도하고 있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 대해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할 때의 단어는 이곳 외에 다른 신약성서에서는 나오지 않고 있다. “경건한”, “종교적인”이라는 뜻의 명사형 “종교”도 사도행전 25:19에 오직 한 번 나오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단어군은 신약에서 누가 만이 사용하는 특수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 단어군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초자연적인 것, 즉 신을 의미하는 명사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22절은 신에 대한 경건한 태도, 즉 종교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 쓰인 단어가 아덴인들을 칭찬하는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고는 볼 수 있다. 바울은 도시를 두루 다니며 아덴 사람들이 위하는 것들을 보던 중,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壇)도 보았는데, 이에 대해 설명하겠다고 선언한다(23절). 이로서 그는 헬레니즘 종교와 기독교 간의 접촉점을 찾아, 그것을 기반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해 설명 한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내용이 쓰여 있는 제단이 아덴에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문학 작품이나 비명을 통해 볼 때 이와 같은 내용이 확인 된다. 아덴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바울 자신이 전하려는 하나님이라는 논지인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누가는 바울의 입을 빌어, 이방사람인 아덴인들도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신에 대한 인식은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본론에서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고 있다(24-25절): 하나님은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시다(24a절). 따라서 그분은 손으로 지은 전에 거하지 아니하시며 , 인간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재차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25b절의 내용(“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은 신약성서 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표현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앞에서 서술한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대해 어떤 일을 행한 분이신 지에 대해 설명 한다(26-27절): 하나님은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신 분으로서(26a절), 인류를 위해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까닭은 만약 사람이 그를 더듬어 찾으면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나오는 설명,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다(27c절)”는 스토아 철학에서 종종 언급되는 내용이다. 다음으로 (28-29절)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긴밀한 관련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28a절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란 하나님 안에서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 이 상반절의 내용을 더욱 설득력 있게 하기 위해 바울은 아덴의 한 시인의 말을 인용한다. 이 시인은 바울과 동향인인 아랏(Arat 대략 주전 270년 경 사람)으로, 그가 지은 파이노메나(Phainomena)의 한 구절이 인용된 것이다. 이로서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다시 강조한다. 29절은 앞 절의 언명을 근거로 우상숭배에 대해 반대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이므로, 하나님을 금, 은, 돌에 인간의 기술이나 생각으로 새긴 것들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연설 마지막 부분에서(30-31절) 결론적으로 바울은 먼저, 시대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30절). 앞의 시대는 무지의) 때였고, 지금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고 계시는 때이다. 하나님을 모르던 때인, 전자의 시기에 하나님은 눈감아 주셨지만, 그가 계시된 때인 지금은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보는(눅 24:47; 행 2:38) 누가에게 있어, ‘회개’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누가가 파악한 인류 역사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신학적인 통찰은 미래에 대해서 까지 (31절) 미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날을 정하셨다. 천하를 심판하실 때의 기준은 “의”이다. 심판은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비록 직접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이 ‘한 사람’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자의 역할을 담당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부활 사건에 의해 확증 된다.
5. 아레오바고 연설과 바울
아레오바고 연설은 선교설교의 정형이며, 바울도 바로 이러한 형식의 설교를 했다는 점에서 둘 간에는 서로 연관성이 있다. 바울의 대표적인 선교설교의 구절로는 데살로니가전서 1:9을 들 수 있다. 이곳에 등장하는 테마들, 예를 들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아들”, “장래 노하심” 등은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각각의 내용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회개” (30절),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 알게 하리라” (23절),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 (31절), “심판할 날” (31절). 아레오바고 연설은 실제 아덴에서 선포된 바울의 말씀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아레오바고 연설에는 바울이나 신약성서에 나타나지 않는, 주로 스토아 철학에서 사용되는 생소한 개념들이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 분’,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 ‘인간은 과거에 하나님을 몰랐다’ 등.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은 이미 헬레니즘과 접촉을 한 유대교에 알려져 있던 것들이다. 아레오바고 연설에서 이러한 사상들이 선명하게 표현되고 있는 까닭은 바울보다는 누가가 헬라화 된 상황을 좀더 반영했기 때문이다. 누가의 기술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그것이 바울 서신의 내용과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이유이다. 즉 사도행전에서의 바울은 선교설교라는 상황 가운데, 진리를 논증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이방인들인 아덴 사람들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호교론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단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소개한 복음을 받아들인 교인들을 대상으로 바울이 직접 쓴 서신의 내용과 누가의 아레오바고 연설과는 그 접근하는 방식에서부터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 17장에서의 ‘아레오바고’는 아고라(廣場)를 지나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 오른 쪽에 위치한 언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Stoa Basileios에서 회합을 가졌던, 아덴의 종교나 살인죄와 관련한 문제를 다루는 의결 기관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누가가 사용한 용어들을 살펴볼 때, 바울이 이 기관에서 취조와 심문, 더 나아가 재판을 받았던 것은 아닌 듯 하다. 바울이 호기심 많은 아덴 사람들에게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하자, 양자 간에 논의와 토론이 아고라에 위치한 Stoa Basileios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은 분명히 아덴을 방문했으며 (살전 3:1), 따라서 그곳에서 선교설교를 행하였을 것이다. 이 연설이 여타의 바울 서신과 달라 보이는 이유는, 헬레니즘의 중심지요 이방 신들을 잘 숭배하기로 유명한 아덴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 복음을 소개하고 그들의 관심을 우상들에서 유일신 하나님에게로 이끌고자 하는 특별한 상황 때문이다. 누가는 확보한 원자료를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는 자신의 두 번째 저술에서, 전술한 상황에 맞게 그리고 수록한 여타의 연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첨삭, 윤색 등의 손질을 가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과 누가의 기록 사이에 서로 상이한 점들이 생기게 되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