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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영국신사77 2007. 6. 5. 21:23
제        목   아테네(서진교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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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아덴(Athens)

1. 도시의 유래
  고대 아티카지방의 주요 도시이자 현대 그리스의 수도이다. 이 도시의 이름은 여신 아테네의 이름으로부터 연유하였을 것이다. 바울은 아덴을 방문하여 회당과 시장과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곳에 교회를 서립하지는 않았다(행 17“16-34).

2. 도시의 역사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경사지에서 신석기 시대의 도기가 발견됨으로써 석기시대 말기(주전 3000년 이전)에 이 곳에 사람들이 거주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후기 청동기 시대(주전 1600-1100년경)에 아크로폴리스는 튼튼하게 요새화된 성채였는데, 이것은 이 시대에 해당하는 성벽 유적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초기 철기시대(1100-750년경)의 기하학 시대에 수많은 묘지들에서 많은 도기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그 이전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던 자유분방한 양식들과는 전혀 대조적으로 형식적인 도안들로 채색되어 있었다.
  주전 6세기 초에 법률제정자 솔론은 아테네의 민주적 조직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이 때에 아크로폴리스 입구의 바로 밖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아고라, 즉 시 중앙 광장은 훨씬 북서쪽으로 옮겨져 콜로누스 아고라이우스 언덕 옆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옛 의사당(불류테리온)의 이전 건물과 최초의 아폴로 신전을 포함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공공건물들과 성소들의 기초가 발견되었다.
  주전 6세기 중엽에 전제 군주 피시스트라투스는 아고라 안에 헬리아이아(법정)와 톨로스의 모체가 되는 것을 건축했다. 한편 일부 사람들은 옛 아테네의 신전을 그가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신전의 기초는 파르데논신전과 에렉데이온 신전의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주전 6세기 말에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적 개혁이 일어났다. 솔론의 때, 또는  그 이전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자문의회는 의원수가 500명으로 증가되었다. 클레이스데네스는 그 국가의 백성을 열 부족으로 나누었는데, 한 부족에서 각기 50명씩의 의원들이 나왔다. 한해를 열 기간들로 나누고 각 기간마다 50명의 의원들이 프리타네스, 즉 회의의 의장들로서 봉직하였으며 이들은 계속적으로 실행위원회로 만났다. 옛 의사당은 확장된 의회의 회합장소로서 이 시대에 건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의사당에는 여러 개의 방들이 첨가되었는데 후대에 이 건물 위에 톨로스가 세워졌고 여기서 프리타네스들이 회합하였다.
  주전 5세기 초엽에 아테네는 강한 성벽으로 둘러싸여졌는데 이것은 페르시아인들의 침략위협에 직면했을 때 데미스토클레스(525-460년)에 의해 건축 또는 중건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이 주전 480년 아테네를 실제로 파괴했을 무렵, 옛 파르테논 신전과 옛 프로피레아 신전은 이미 아크로폴리스 위에 세워져 있었다. 페르시아인들이 축출되었을 때 재건과 신축의 광범한 프로그램이 제정되었다. 페리클레스의 행정 아래서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과 프로필레아 신전이 건립되었고 그 후 곧 아렉테이온 신전이 건축되었다. 아마 페리클레스 시대에 콜로누스 알고라이스 위에 있는 헤파이스투스 신전과 아레스 신전의 원래 건물이 세워졌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시대인 주전 5세기에 원형 톨로스, 포이킬레의 스토아, 새 의사당, 제우스의 스토아 등 다른 구조물들이 이 아고라에 세워졌다.
  한편 페이디아스와 그 제자들의 업적으로 이 도시는 더욱 아름다워져 프리즈가 많은 동상들의 숲으로 변하였다. 아테네는 그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에 이르렀으며 아리스토파네스는 찬사로 경의를 표하였다. “오, 그대, 우리 아테네여! 보랏빛 화관을 쓰고! 찬란하며 가장 탐스런 도시어라!”
  주전 4세기에 아테네의 재무상 리쿠르구스(338-326년)는 많은 공공건물들의 건축에 관심을 가졌으며 후대에 디필론 성문으로 알려진 건축물과 처음부터 아테네의 경기장으로 알려졌던 건물을 건축하였으며 디우니수스의 극장을 재건하고 프닉스 언덕 위에 있는 공회당을 증축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175-164년) 피시스트라투스에 의해 착공되었던 올리피아의 제우스 신전을 웅장한 규모로 재건하였다. 페르가뭄의 왕 아탈루스 2세(159-138년)는 아고라의 동쪽 기슭에 거대한 아탈루스의 스토아를 세웠는데 그 후 이 것은 중건되어 현재 아고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거대한 스토아들이 아고라의 동쪽 기슭에 세워졌다. 이와 같은 시대인 주전 2세기에 옛 의사당과 그 근처에 있던 신들의 어머니의 신전이 메트룬으로 대치되었다. 이 건물을 메트룬이라 부르게 된 것은 신들의 어머니의 성소가 그 안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곁에는 국가의 공문서들을 보관하는 문서 창고가 있었다.
  주전 86년 로마장군 술라가 아테네를 함락했을 때 주로 개인 저택을 파괴하였고 아우구스투스(27-주후14년)의 통치기에는 새로운 공공건물들이 첨가되었다. 아크로폴리스 위에는 자그마한 원형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이 백성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아고라의 중앙에는 오데움, 또는 아그립페움으로 알려진 음악당이 아우구스투스의 사위이자 장관이었던 비프사니우스 아그립파에 의해 건축되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아레스신전이 놓여 있었다. 이 신전이 원래 있었던 자리는 어디인지 모르지만 이곳으로 이전된 것만은 확실하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옛 아고라에는 건물들로 들어차게 되었고 따라서 새로운 로마식 아고라가 옛 아고라의 동쪽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이 마련되었다. 이 지역이 더 계속 발굴되어야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시장 북쪽에 거대한 건물의 폐허들은 오랫동안 알려져 왔으며 하드리아누스의 스토아와 도서관과 동일시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올림피아 제우스의 신전을 계속 건축하였다. 주후 143년경 부유한 로마인 거주자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화려한 대리석으로 리쿠르구스의 스타디움을 재건하였고 후에 아크로폴리스의 남서쪽 기슭에 하나의 주악당을 건설하였다.
  1970년에 궁중 스토아가 발견됨으로 말미암아 아고라의 지정 상태를 밝히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바실레이오스 도는 궁중 스토아는 고대의 문헌에 더러 언급되는 유명한 건물이었다. 이것은 종교적 문제에 대한 재판과 더불어 고대 아테네의 행정장관들 중 한명인 왕 집정관의 자리였다. 어떤 재판을 위한 예비적 심리들이 여기서 열렸는데 그 가장 유명한 사례는 소크라테스의 경우다. 아레오바고의 법정이 종종 열렸는데 어떤 학자들은 사도바울이 아레오바고 자체에서보다 오히려 여기서 재판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스토아는 매우 작아 건물 정면을 가로지르는 원주들이 8개에 불과하였다. 하나의 기다란 의자가 뒷면 벽을 따라 놓여 있었다. 건물정면의 각 끝에는 돌기둥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스토아의 바로 정면에 크고 부드러우며 편편한 돌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집정관들이 그 위에 서서 공직상의 맹세를 하던 그 유명한 돌임이 명백하다. 이 스토아가 은 것인지를 밝히는 일은 그 위치, 즉 사람들이 성문에서 나와 아고라로 들어갈 때 우측의 첫 번째 건물이라는 점에 의해서 확증되며, 그리고 그 정남쪽에 있는 제우스 스토아와 이것의 관계에 의해서, 그리고 이 지역에서 발견된 수많은 헤르메스 두상들과 그 기초부분들 및 왕 집정관에 의해 헌정된 것으로 새겨진 약간의 비문들에 의해 확증된다. 이 유서 깊은 건물은 원래 주전 6세기 중반 경에 건축되었으며 고전 시대 동안 계속 사용되었다.

3. 도시의 주요 관광지

1) 아크로폴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오르면 밤 밑으로 펼쳐지는 아테네의 멋진 전망을 볼 수 있다. 하늘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신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하늘과 가까우면서도 인간 세상을 굽어볼 수 있는 곳인 아크로폴리스 주변엔 신들의 집들이 즐비하다. 지금은 폐허에 가깝지만 그래도 그리스 관광수입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아크로폴리스 주변을 거닐면 수 천년 전 그리스인들의 체취가 느껴진다.

  언덕 위에는 아테네의 대표적인 상징인 파르테논 신전과 건물을 받치고 있는 소녀상이 아름다운 에렉테이온 신전, 아크로폴리스를 발굴하면서 출토된 유물과 신전에서 떨어져 나온 부조나 조각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 아크로폴리스박물관, 시장이면서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이었던 아고라, 전통적인 반원형 극장인 디오니소스 극장, 아테네 페스티벌의 무대가 되는 헤로데스 아티에스 음악당 등 수많은 유적들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빛나는 건축물은 파르테논 신전이다.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미네르바)를 위해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은 그리스에서 유일하게 바닥과 기둥, 지붕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대리석만으로 된 건축물이다.

2) 아고라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있는 아고라는 그리스어로 "시장이 있는 광장" 이란 뜻이나 고대정치가나 철학자, 예술가등이 토론을 주고받던 사교장이며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스토아 학파라는 철학파도 이회랑 Stoa에서 사색을 했고 제논과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생겨났다.
  로마시대에는 실제로 이 광장을 축으로 장터가 형성되어 폴리스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 아고라는 직접 민주주의의 효시가 되었던 곳으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곳이다. 아고라에는 시대를 풍미하는 철학자와 정치가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모여 당시의 주요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고 발전방향을 모색한 토론의 장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던 소크라테스가 젊은 이들을 상대로 철학을 논하던 이 곳에 지금은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모여 소크라테스를 애기한다. 아테네 여행의 묘미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건축물이나 시가지 풍경을 감상하는 것 외에 그리스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데 있다. 세월이 흘러 부서지고 낡아버린, 사람들의 손때가 까맣게 뭍은 조각상에서 예술품으로서의 조각상외에 시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아고라에는 고대 아테네의 행정건물과 시장 통의 잔해가 남아있으며 주변에는 헤파이스트 신전이나 아타로스의 회랑박물관이 있다. 입구는 3곳이 있지만, 아크로폴리스에서 돌아올 때ㅡ 산기슭의 성 아포스토리 교회 옆의 남문으로 들어와 지하철 선로 근처의 북문으로 나가면 편리하다.
  1931년부터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벌어져, 아티로스의 스토아가 복원되어 박물관이 되어 있고 여기서 발굴된 것이 진열되고 있다.

3) 근대 올림픽 경기장
  아테네 중심인 신타그마 광장 뒷편에 위치한 근대 올림픽 경기장은 플라카에서 좀 떨어진 리오포로스 올가스 거리에서 바실리스 콘스탄티누 거리로 빠지는 막다른 곳에 있다. 1896년에 여기서 제1회 근대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기원전 331년에 판 아테네 대축제 경기장으로 지어진 것이 시작이다. 그 무렵은 객석이라는 것은 없고 구경꾼은 제방의 경사면에 서 있었다고 한다. 제1회 근대올림픽이 열리기 1년 전에 고대경기장에서 가까운 형태로 복원한 것이다.
  알렉산더 출신의 대부호 아베로프가 사재를 털어서 재건했으며, 로마시대의 대부호 "이로테스 아티쿠스"가 대리석으로 만든 객석을 기증했으나 지금은 그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경기장은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열리기 얼마 전에 알렉산드리아의 부호 "아베로프"의 후원을 힘입어 고대 경기장에 가까운 형태로 복원된 것이다. 스타디움 앞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좌석은 대리석으로 50,000명이 들어 갈 수 있다. 독특한 것은 트랙이 요즈음 것들과 달리 말굽 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4) 신타그마 광장
  아테네 중심인 신타그마 광장에 위치한 국회의사당이다. 신타그마란 헌법이란 뜻이며 사진의 전경에는 무명 용사비가 보인다. 신타그마 광장은 당연히 관광객들에게는 중심이 되는 곳이며, 아테네의 얼굴이다. 관광안내소,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무소, BUDGET TRAVEL 판매점, 국회의사당, 고급호텔, 상점, 가장 값비싼 카페, 붐비는 차량 등 번화가로 아테네의 중심지이다. 국회 의사당 옆에는 국립공원이 있고 그 안에는 자페이온과 박람회장이 있다.
  신타그마와 아크로폴리스 사이의 플라카는 상점, 레스토랑, 카페들로 복잡하며 좁고, 가로수가 늘어선 미로이다. 아테네의 몽마르트라고 불리며 부추키라는 만돌린과 비슷한 악기를 연주하며 그리스 연가를 들을 수도 있으며, 시루다키라는 민속무용까지 한다.

5) 헤파이스토스 신전
  고대 아고라 내에 있는 그리스에서 가장 원래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신전이다. 건축 시기는 파르테논 신전이 세워졌던 시기와 비슷하다. 이 신전은 씨세이온 신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헤파이스토스는 올림포스 12신 중 대장장이 일을 주관하는 신의 이름이며, 씨세이온은 아테네시의 종주였다. 발굴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이 건물을 씨세이온 신전이라고 생각하며 발굴했는데 대장장이와 관계된 물건들이 발굴되어 헤파이스토스 신전이라고 바뀌어 불렀으나, 아직도 그리스인들은 씨세이온 신전이라고 부르고 있다.

6) 플라카
  신타그마 광장과 아크로 폴리스와 로마시대의 아고라를 연결하는 삼각지대로서 아테네의 몽마르트라고 불려진다. 플라카 일대는 특별보존지역이어서 건물을 함부로 지을 수도 없으며 아테네 시내에서는 유일하게 차가 들어올 수 없는 지역이기도 하다. 낮에는 모리스티라키역 주변의 선물 값을 물어보고, 저녁에서 심야에는 동쪽일대의 선술집풍의 레스토랑 타베르나에서 구경을 하도록 한다. 부추키라는 만돌린과 비슷한 악기를 연주하며 그리스 연가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시루다키라는 민속무용도 하며 노래하며 술을 마시는 디스코텍까지 있어 밤에는 흥겨운 분위기가 극에 달한다.

 

제        목   아레오바고의 바울(서진교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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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오바고 언덕*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

1. 아레오바고의 위치

  “아레오바고”는 전쟁의 신에서 유래된 형용사 "Άρειο"(“호전적인, 전쟁의, 아레스 신의”)와 언덕이라는 단어 "Παγο"가 연결된 용어이다. 아레스는 남신 제우스와 여신 헬라 사이에서 태어난 전쟁과 학살, 역병의 신이다. 따라서 “아레오바고”라는 뜻은 전쟁과 재난의 신, 아레스의 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아덴 시의 광장인 아고라(Agora)로부터 남쪽으로 약 200m, 그리고 아크로폴리스(문자적으로는 "the upper city" 즉 "citadel")의 중심부인 판테온 신전에서 북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아레오바고는 해발 80-90m이며 아크로폴리스는 110m이다.
  아덴의 북서쪽에 위치한 디필론(Dipylon) 성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판테온이라 불리우는 거리를 따라 아덴 시 중앙에 위치한 아고라 광장에 이르게 된다. 이 광장은 시민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장소나 또는 공공 회합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특별히 아고라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Stoa Poikile는 (“채색된 주랑”이라는 뜻) 철학자들의 쉼터로 유명하였다. 저명한 철학자 제논은 그곳에서 토론을 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후계자들은 “스토아 철학자”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이 아고라는 해발 60-70m에 위치하고 있다. 아고라를 지나 남동쪽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길이 200m, 폭 100m 정도의 자그마한 언덕이 눈에 띄는데 이것이 바로 아레오바고 언덕이다.

2. 아레오바고란 언덕 혹은 기관인가?

  ‘아레오바고’가 앞에서 말한 단순한 언덕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관청을 일컫는 것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아레오바고’의 뜻을 파악하는 문제는 또한 ‘바울이 어디서 아덴사람들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변론 했는지’라는 물음과도 연결이 된다. ‘아레오바고’가 언덕이라고 할 때에, 바울의 연설 장소는 앞에서 언급한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 사이에 위치한 언덕이 된다. 하지만 ‘아레오바고’를 기관의 이름으로 본다면, 바울이 연설한 곳은 이 기관의 소재지나, 회합을 가진 장소가 어디였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고대 희랍 시대부터 의장 Archon Basileus가 주재한 회의, 아레오바고가 있었는데, 이것은 왕을 위한 고문단이 발전된 형태였다. 이 회합은 재판을 관할했으며 정치적인 사안을 결정하기도 했다. 플루타크에 따르면 아레오바고는 예로부터 아덴의 ‘살인 법정’ 역할을 수행했으며 솔론 시대에는 풍습과 규율을 관장하는 최고의 기구였다. 풍부한 경험을 지닌 사람들(Archonten)만이 회원이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모임은 대단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민주정 시대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페리클레스의 동료인 Ephialtes는 주전 462년에 아레오바고가 부패되었다는 이유로 이 기구가 갖고 있던 대부분의 정치적인 권한을 박탈했다. 또한 재판권도 다른 기관으로 이양했고 단지 피의 재판정과 종교적인 영역을 관할하는 권리 등 만 남겨두었다. 로마인들이 그리스를 점령하자 그들은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요소들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레오바고는 정치적인 권한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제정 시대의 금석문들을 살펴보면 아레오바고는 가장 많이 거론되는 기구 중의 하나로서, 아덴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처럼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아레오바고는 일반적으로 Stoa Basileios에서 회합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주랑은 정방형의 모양인 아고라의 북서쪽 모서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었다. P. M. 프래서의 발굴 보고에 따르면 Stoa Basileios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 볼 때, 아레오바고는 바울 당시 아덴 시 아고라의 한 편에 위치한 Stoa Basileios에서 모임을 가졌던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임은 시의 주요 문제, 특별히 종교, 교육에 관한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려는 바울이 호기심 많은 아덴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했다고 할 때, 이 아레오바고는 아레스의 언덕이 아니라 기관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3. 아레오바고와 바울

  바울이 아고라에서 만나 토론한 자들은 스토아 철학자나 에피큐레스 철학자들인데(17:18), 이들은 바울이 예수와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하자 그를 이방 신들을 전하는 자 라고 판단하고(18절) 아레오바고에 데려가서, 그에게 새 교에 대해 알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19절). 이어 나오는 절에서도 (20절) 계속 그들은 이상한 것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는 21절에는 아덴 사람들과 이 도시에 머무는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 외에는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자들이라는 보충 설명이 등장한다. 여기서 저자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복음을 선포한 바울에 대해, 오직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아덴에 거하는 자들이, 어떻게 반응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다. 32절에 따르면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로 요약되는 연설을 끝내자 한편의 사람들은 조롱했지만(“기롱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시 말을 들어보자고 한 점, 그리고 33절에 의하면 바울은 별다른 제재 없이 아레오바고를 떠날 수 있었다는 점, 또한 연설을 들은 자들 중 몇몇은 바울의 편이 되어 믿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헌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 라고 하는 여자도 있었다는 점에서, 바울은 수인이나 혐의자의 신분으로 재판이나 심문을 받았다기 보다는 토론 형식을 통해서 아덴에 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4.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

  바울은 우선 아덴 사람의 신앙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22절). 이로서 ‘그가 새로운 신을 소개하려는 것은 아닌가’ 라는 아덴 사람들의 의혹을 불식시키고, 연설을 듣는 청중들로부터 호의를 얻음으로서 그들의 마음과 귀를 열도록 유도하고 있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 대해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할 때의 단어는 이곳 외에 다른 신약성서에서는 나오지 않고 있다. “경건한”, “종교적인”이라는 뜻의 명사형 “종교”도 사도행전 25:19에 오직 한 번 나오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단어군은 신약에서 누가 만이 사용하는 특수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 단어군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초자연적인 것, 즉 신을 의미하는 명사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22절은 신에 대한 경건한 태도, 즉 종교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 쓰인 단어가 아덴인들을 칭찬하는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고는 볼 수 있다.
  바울은 도시를 두루 다니며 아덴 사람들이 위하는 것들을 보던 중,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壇)도 보았는데, 이에 대해 설명하겠다고 선언한다(23절). 이로서 그는 헬레니즘 종교와 기독교 간의 접촉점을 찾아, 그것을 기반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해 설명 한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내용이 쓰여 있는 제단이 아덴에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문학 작품이나 비명을 통해 볼 때 이와 같은 내용이 확인 된다. 아덴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바울 자신이 전하려는 하나님이라는 논지인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누가는 바울의 입을 빌어, 이방사람인 아덴인들도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신에 대한 인식은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본론에서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고 있다(24-25절): 하나님은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시다(24a절). 따라서 그분은 손으로 지은 전에 거하지 아니하시며 , 인간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재차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25b절의 내용(“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은 신약성서 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표현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앞에서 서술한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대해 어떤 일을 행한 분이신 지에 대해 설명 한다(26-27절): 하나님은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신 분으로서(26a절), 인류를 위해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까닭은 만약 사람이 그를 더듬어 찾으면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나오는 설명,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다(27c절)”는 스토아 철학에서 종종 언급되는 내용이다.
  다음으로 (28-29절)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긴밀한 관련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28a절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란 하나님 안에서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 이 상반절의 내용을 더욱 설득력 있게 하기 위해 바울은 아덴의 한 시인의 말을 인용한다. 이 시인은 바울과 동향인인 아랏(Arat 대략 주전 270년 경 사람)으로, 그가 지은 파이노메나(Phainomena)의 한 구절이 인용된 것이다. 이로서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다시 강조한다. 29절은 앞 절의 언명을 근거로 우상숭배에 대해 반대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이므로, 하나님을 금, 은, 돌에 인간의 기술이나 생각으로 새긴 것들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연설 마지막 부분에서(30-31절) 결론적으로 바울은 먼저, 시대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30절). 앞의 시대는 무지의) 때였고, 지금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고 계시는 때이다. 하나님을 모르던 때인, 전자의 시기에 하나님은 눈감아 주셨지만, 그가 계시된 때인 지금은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보는(눅 24:47; 행 2:38) 누가에게 있어, ‘회개’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누가가 파악한 인류 역사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신학적인 통찰은 미래에 대해서 까지 (31절) 미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날을 정하셨다. 천하를 심판하실 때의 기준은 “의”이다. 심판은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비록 직접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이 ‘한 사람’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자의 역할을 담당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부활 사건에 의해 확증 된다.

5. 아레오바고 연설과 바울

  아레오바고 연설은 선교설교의 정형이며, 바울도 바로 이러한 형식의 설교를 했다는 점에서 둘  간에는 서로 연관성이 있다. 바울의 대표적인 선교설교의 구절로는 데살로니가전서 1:9을 들 수 있다. 이곳에 등장하는 테마들, 예를 들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아들”, “장래 노하심” 등은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각각의 내용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회개” (30절),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 알게 하리라” (23절),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 (31절), “심판할 날” (31절).
  아레오바고 연설은 실제 아덴에서 선포된 바울의 말씀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아레오바고 연설에는 바울이나 신약성서에 나타나지 않는, 주로 스토아 철학에서 사용되는 생소한 개념들이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 분’,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 ‘인간은 과거에 하나님을 몰랐다’ 등.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은 이미 헬레니즘과 접촉을 한 유대교에 알려져 있던 것들이다. 아레오바고 연설에서 이러한 사상들이 선명하게 표현되고 있는 까닭은 바울보다는 누가가 헬라화 된 상황을 좀더 반영했기 때문이다. 누가의 기술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그것이 바울 서신의 내용과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이유이다. 즉 사도행전에서의 바울은 선교설교라는 상황 가운데, 진리를 논증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이방인들인 아덴 사람들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호교론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단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소개한 복음을 받아들인 교인들을 대상으로 바울이 직접 쓴 서신의 내용과 누가의 아레오바고 연설과는 그 접근하는 방식에서부터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 17장에서의 ‘아레오바고’는 아고라(廣場)를 지나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 오른 쪽에 위치한 언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Stoa Basileios에서 회합을 가졌던, 아덴의 종교나 살인죄와 관련한 문제를 다루는 의결 기관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누가가 사용한 용어들을 살펴볼 때, 바울이 이 기관에서 취조와 심문, 더 나아가 재판을 받았던 것은 아닌 듯 하다. 바울이 호기심 많은 아덴 사람들에게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하자, 양자 간에 논의와 토론이 아고라에 위치한 Stoa Basileios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은 분명히 아덴을 방문했으며 (살전 3:1), 따라서 그곳에서 선교설교를 행하였을 것이다. 이 연설이 여타의 바울 서신과 달라 보이는 이유는, 헬레니즘의 중심지요 이방 신들을 잘 숭배하기로 유명한 아덴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 복음을 소개하고 그들의 관심을 우상들에서 유일신 하나님에게로 이끌고자 하는 특별한 상황 때문이다. 누가는 확보한 원자료를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는 자신의 두 번째 저술에서, 전술한 상황에 맞게 그리고 수록한 여타의 연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첨삭, 윤색 등의 손질을 가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과 누가의 기록 사이에 서로 상이한 점들이 생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