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침입’ 허락 않는 산꼭대기 영령 |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42> 성스러운 안식처, 넴루트산 | |
폭파까지 했지만 아직 입구 못찾아 왕과 네 신들 석상 땅위에 나란히 헬레니즘·로마 문화융합 웅변
산르 우르파에서 먹은 늦점심에 호졸근해진 몸을 차에 맡겼다. 두 시간을 달려 디야르바키르에 도착했다. 티그리스강 상류에 있는 인구 72만의 이 고도(옛 이름 아미다)는, 로마와 비잔틴의 치하에 있다가 639년 이슬람 동정군에게 점령되었다. 셀주크 시대를 거쳐 15세기 악코윤루조의 수도가 되면서 번영했으나, 1473년 오스만 제국과의 결전에서 패해 1515년 제국 영토에 편입되고 만다.
우선 들른 곳은 울루 자미아(대사원)다.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이 사원의 내경은 길이가 120m, 너비가 30m나 된다. 원래 ‘마르 토마’란 이름의 기독교회였다.
셀주크 시대 자미아로 개축하고 셀주크 고유 무늬로 외벽을 장식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쓰여온 터키 유일의 사원이며, 11계단의 민바르(설교단)도 유일하게 돌로 만든 것이다. 이어 도시를 둘러싼 고성을 찾았다. 히타이트 시대 축조한 성은 로마와 비잔틴, 셀주크, 오스만 시대를 거치면서 증축되어 왔다. 성벽 잔해에서 이런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성채 높이 12m, 기부 너비는 2~3m, 길이는 5.5㎞나 된다. 규모, 축조법에서 주목할 만한 성채임이 틀림없다.
디야르바키르는 오늘날 한국, 터키 사이에 날로 돈독해지는 유대와 교류를 상징하는 고장이다. 2005년 4월 강원도 씨감자가 디야르바키르주 비스밀의 척박한 땅에 뿌려져, 100일 만에 수확에 성공했다. 9월에 이곳을 찾은 태백씨감자보급단은 줄기 하나에 감자 15개가 알알이 맺힌 것을 확인했다. 감자가 주산물인 이곳에서 다수확 감자씨 재배에 성공한 것은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어, 이곳 사람들은 크게 환영했다고 한다. 씨는 싹을 틔워 줄기를 뻗고, 가지를 치게 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법이다.
8월17일, 일행은 터키인들이 세계 8대 기적의 하나로 치는 넴루트산을 찾았다.
시 중심을 지나는데, 성보 위에 수박 한 통을 얹은 커다란 조형물이 눈에 띈다. 알고 보니 고성과 수박은 이곳 상징물이라 한다. 서늘한 아침 기운을 가르며 서쪽 126㎞ 지점에 이르니 유프라테스강 상류 도선장이 나타났다. 강물은 맑고 깨끗한 청정수다. 관광객과 주민 20여명, 짐트럭을 태운 나룻배는 15분간 거울 같은 수면을 미끄러져 갔다. 이름 모를 물새들이 뱃전을 스친다.
하선 뒤, 20분쯤 달려 넴루트산으로 꺾어 들어가는 어귀의 나린제 마을을 지나면서부터는, 아스라히 깊은 계곡을 굽이굽이 빠져나간다. 이윽고 가파른 산등성이에 있는 카라두트 마을을 왼편에 끼고 한참 오르니, 산장 같은 카라반 사라이 호텔이 나타났다. 잠시 쉬었다가 30분 더 달려 넴루트산 매표소에 이르렀다. 해발 2000m 가까운 고산지대라, 차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움직인다. 매표소 얼마 전부터는 너비 10㎝ 가량의 검은 용암석으로 포장한 폭 6~7m의 좁은 오르막길이다.
세계 8대 기적의 하나로 꼽아 |
매표소에서 30여분간 오솔길을 따라 해발 2150m의 넴루트 산정에 등반했다. 나무 없는 민둥산이다. 사방으로 뻗은 산들과 구릉들을 발밑에 거느린 주봉이다. 여기에 기원전 1세기 콤마게네 왕국(기원전 163~기원후 72)의 안티오코스 1세(기원전 69~31)가 자신을 위해 지은 이른바 ‘히에로테시온’이 있다.
그리스어로 ‘히에로스’는 ‘성스러운’, ‘테시스’는 ‘장소’란 뜻이다. 여기서 ‘장소’란 ‘영원히 휴식하는 곳’, 즉 ‘안식처’를 말한다. 따라서 ‘히에로테시온’은 ‘성스러운 안식처’란 의미의 분묘로 해석할 수 있다. 산상 왕국이던 이곳은, 계곡에서 일년 내내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 덕분에 농경이 발달했다. 기원전 1세기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콤마게네의 초기 도읍 사모사타에 관해 ‘좁은 천연요새지만, 놀라울 정도로 기름진 땅’이라고 묘사했다.
안티오코스 1세의 ‘성스러운 안식처’는, 그가 묻힌 고분과 3개 테라스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넴루트산 높이는 2100m였으나, 꼭대기에 지은 7 높이의 분묘가 50m로 낮아져 지금은 통상 2150m를 헤아린다. 작은 자갈로 지은 고분 지름은 150m로, 들어간 자갈의 부피만 약 29만㎥, 무게는 60만톤에 달한다. 동서쪽 테라스는 구조가 대체로 일치하는데, 석회암 석상들과 배후의 사암 구조물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석상들은 안티오코스 1세와 4명의 신상들을 중심으로, 좌우에 수호동물인 수리와 사자, 안티오코스 1세와 수호신들의 악수 장면을 새긴 부조물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5대 석상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안티오코스 1세→여신 콤마게네→제우스 오로마스데스→아폴론 미트라스→헤라클레스 아르타게네스 아레스의 순이다.
석상들은 당시 여러 문명의 융합상을 오롯이 보여준다. 콤마게네의 의인상인 여신 콤마게네는 도시나 특정 지역을 여신상으로 인격화하는 헬레니즘 예술의 영향을 받았다. 한가운데 신상 제우스 오로마스데스는 그리스 신화의 천지 주재자 제우스와 조로아스터교의 천지 창조주 오로마스제데스(아후라 마즈다의 그리스어 발음)를 혼합한 신이다. 이 혼합 신상은 무게 5~0.9톤짜리 돌 31개로 만든 105톤짜리 신상으로 가장 크다. 그 오른쪽 아폴론 미트라스 신상에서 아폴로는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이며, 미트라스는 조로아스터교의 빛의 정령이니, 역시 융합신이다. 마지막 신상은 그리스 신화에서 불멸의 강자인 헤라클레스와 전쟁신 아레스를 페르시아 군신(軍神)인 아르타게네스와 한데 묶은 것이다. 하지만 천지를 쥐락펴락한다는 신들마저도, 지진 위력 앞에 머리가 잘려나가는 수난을 당하고 말았다.
지진으로 석상들 머리 동강나
일부 석상이나 부조물에 새겨진 그리스어 명문들은 이 고분과 콤마게네 왕국 연구에 귀중한 사료를 제공했다. 비문을 보면, 매달 16일 왕의 탄생일과 10일 즉위일에 즈음해 경축행사가 치러졌음을 보여준다. 동서쪽 테라스와 달리 북쪽 테라스에는 석상, 비문 등은 없고, 80m짜리 벽과 몇몇 석판 잔해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아마 제사 때 집합 장소이거나, 후계자들을 위해 남긴 예비 테라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쪽 테라스 앞에는 사방 13.의 제단도 있다. 아직까지 고분 입구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고고학자 고에르가 고분 안 묘실을 찾으려고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켰지만 허사였다. 첨단의 지구물리학적 방법으로도 조사한 바 있으나, 결과는 오리무중이다.
넴루트산 유적 발굴은 독일이 시작했다. 일찍이 1835년 독일의 헬무트 모르토케 대위(후에 육군원수가 됨)는 군사 작전에 필요한 이 지대 도로 지도를 작성하면서, 초점을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 넴루트산에 맞췄다. 그러나 발표한 보고서에는 유물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 뒤 오스만 제국에 고용된 독일인 기사 카를 제스터는, 동아나톨리아로부터 중앙아나톨리아를 지나 지중해 항구까지 수송로를 탐색하다, 콤마게네에서 아시리아 유물을 발견했다고 1881년 프로이센 제국과학아카데미에 편지로 보고했다. 보고를 접한 고고학자 오토 프슈타인은 곧장 현지에 달려가, 제스터와 조사에 착수했다. 이듬해 오스만제국 박물관(현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의 전신) 관장 오스만 함디 베이가 합류한 독일-터키 합동조사단은 넴루트산을 비롯한 부근 유적 조사를 1938년까지 벌여 개략적 면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콤마게네 왕국은 셀레우코스 왕국의 일부로 출범해, 로마에 병합될 때까지 헬레니즘, 로마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넴루트산 유적 말고도 카라큐슈 고분, 세레우키아 암굴묘 등 다수의 유적유물들을 남겼다. 아쉽게도 이런 유적들 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하산했다.
안티오코스 1세는 죽으면 영혼이 승천하는 것으로 믿고, 왕국에서 가장 높은 넴루트산 꼭대기에 안식처를 마련했다. 아마 그는 자신이야말로 하늘과 가장 가까이 있을, 그래서 가장 위대한 영령(英靈)으로 자위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고의 영웅호걸 모두 북망산 황천객 신세를 면치 못했을진대, 그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안식처는 돌무덤으로 남았을 뿐이다. 단, 그 망상에 날개를 단 조형물이나 기록은 당대 특정 역사상을 반영한 유물 대접을 받아, 세인의 눈과 귀를 끌고 있는 것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헤라클레스상, 통일신라 사천왕상과 한 뿌리
실크로드 타고 동쪽으로 전파
인도 불교문화와 섞여 한반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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넴루트산의 헤라클레스상은 통일신라 사천왕상과 계보상 한 뿌리라고 한다. 무슨 뚱딴지같은 말일까.
넴루트산 정상에 있는 안티오코스 1세 영묘 부조(오른쪽 사진)를 유심히 보면 왕과 악수하는 알몸 남자상이 있다. 사자 가죽을 어깨에 걸치고 몽둥이를 들었지만, 키는 ‘짜리몽땅’한 헤라클레스다. 실크로드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최근 이 헤라클레스상이 실크로드를 타고 동쪽으로 가서 불교 수호신인 사천왕상으로 바뀌었다는 견해가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네메아의 사자를 목졸라 죽여 퇴치한 뒤, 그 사자 가죽을 걸치고 다녔다. 몽둥이와 사자가죽으로 장식된 그의 상들은 권위와 힘의 표상으로 고대 유라시아에서 흔하게 만들어졌다.
특히 그를 시조로 받들며 사자가죽을 헬멧처럼 쓰고 다닌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이래, 헤라클레스는 헬레니즘 문화의 대표적인 시각 상징물로 등장하면서, 페르시아, 인도,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숱한 지역 신 이미지로 변형되어 크게 유행하게 된다. 안티오코스 1세 부조에 새겨진 헤라클레스는, 사실 땅딸막하고 경직된 지역 수호신 ‘베레타그네’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알렉산더 제국 멸망 뒤 나타난 인도 아소카 왕조의 토착 불교 문화가, 기원후 1~2세기 쿠샨 왕조 시대 간다라, 중앙아시아 등지로 북상하면서, 동쪽으로 퍼져간 헤라클레스 유행과 만났다는 점이다. 일부 학자들은 절에서 흔히 보는 험상궂은 무사형 사천왕상의 기원인 금강역사(바즈라파니) 상이, 불교 교리와 헤라클레스상과의 결합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금강역사는 원래 인도 토속신으로 부처를 따라다니던 권속이었으며, 수염 난 평민상 혹은 온화한 귀족풍 얼굴을 지녔으나, 사자가죽, 몽둥이를 든 헤라클레스 이미지와 결합되면서, 험상궂은 몰골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실제로 1970년대 발굴된 아프가니스탄 핫다 테페슈투르 감실부처 유적의 금강역사상은 사자가죽 걸치고 금강저를 든 곱슬머리상으로 헤라클레스상과 똑같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헤라클레스풍 양식은 파미르 산맥을 넘어 중국 서역의 쿠처와 둔황으로까지 전파되면서, 사자 입이 역사의 머리나 어깨를 무는 얼개의 ‘사교형’ 장식을 단 사천왕으로 발전한다.
이런 형식이 중국 장안 등 중원을 거쳐 한반도 경주의 신라 감은사터 삼층석탑 사리함에 새긴 사천왕상 어깨 장식으로까지 나타났고, 지금도 사찰의 대형 사천왕상에서 이를 볼 수 있다. 이런 변용의 모태인 넴루트 헤라클레스상은 거리와 세월의 간극조차 초월하는 실크로드 교류의 위력을 새삼 일깨우는 유적이 아닐 수 없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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