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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 - 분열왕국 분석표 및 요약 정리

영국신사77 2007. 4. 28. 21:38
                   열왕기 - 분열왕국 분석표 및 요약 정리 

 

 

                 A. 남북 투쟁 시기(왕상 12:25~16:20)

 

 

        1. 남북 투쟁 시기의 북왕국 이스라엘(여로보암 1세-디브니)

 

가. 여로보암 왕가(B. C. 922-901)-2대-(12:25-14:20, 15:25-31) 


 가) 여로보암(Jeroboam I) (주전 931-910)-22년간-(12:25-14:20)

       * 솔로몬의 강제부역과 지나친 과세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짐.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을 듣고 반역을 함(유다와 에브라임 지파의 알력)
       * 이 일로 인해 솔로몬의 노여움을 사고, 애굽으로 도망침.
       * 르호보암 때에 세겜에서 반란을 주도하여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초대 왕이 됨
         (수도를 세겜-브누엘-디르사로 옮김)

 

       * 후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쪽 예루살렘으로 내려갈 것을 두려워하여
         벧엘과 단에 금 송아지를 만들고 그 곳에서 제사하게 함
       * 평민을 제사장으로 삼고,

       * 절기를 7월에서 8월 15일로 바꾸어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함.
       * 여호와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게 만드는 종교혼합주의를 초래하게 함.

 

       >>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보내어 그 제단을 파괴하고
          장차 다윗의 자손 중에서 요시야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그의 뼈를 이 제단에 불사르 것이라고 예고하심.


       * 남 왕국의 2대왕인 아비얌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하나님의 재앙을 입어 사망함.

 

 나) 나답(Nadab) (주전 910-909년)-2년간-(15:25-31) 
       * 여로보암의 아들, 바아사라는 모반자에게 피살당함.

 

 

나. 바아사 왕가(B. C. 909-876)(15:33-16:10) : 바아사-엘라
 

 가) 바아사(Baasha) (주전 909-886)-24년간-(15:33-16:7)
       *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죽여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성취
       * 여로보암의 죄악을 그대로 답습함
       * 남왕국의 제 3대왕 아사와 일평생 전쟁상태에 있었음.
       * 이스라엘 백성들로 유다와 연락하지 못하도록
         벧엘과 예루살렘 중간에 있는 라마에 성을 건축하였으나,
         유다왕인 아사(Asa)왕의 다메섹(아람)왕 벤하닷에게 원병을 청함으로

         이 일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아사왕은 라마성을 짓던 건축 자재들로

         게바와 미스바(베냐민 지파의 땅)를 지어서
         오히려 국경을 더욱 확장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 여로보암의 가문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문도 같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고됨.

 

 나) 엘라(Elah) (주전 886-885)-2년-(16:8-10) 
       * 바아사의 아들로 군대장관 오므리를 기브돈에 파송하고
         자신은 술을 마시고 취해있을 때에

         그의 신복이었던 군대장관 시므리에 의해서 피살당함. 
       * 이때에 시므리는 그의 친족과 친구들까지 모두 죽임으로서

         예후의 예언을 성취하였다.

 

다. 시므리(Zimri) (주전 885)-7일간-(16:11-20)
       * 바아사의 후손을 멸함으로 예언을 성취함.
       * 그러나 그도 7일만에 동료 군대장관 오므리에 의해
         궁전에서 포위당하여 자결함.

 

라. 오므리(Omri)
       * 이때에 절반은 디브니(Tibni)를 좆고 절반은 오므리를 좆음
       * 결국 오므리(Omri)가 디브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통일함.

 

 

 


                2. 남북 투쟁 시기의 유다 (르호보암~아사)

                                 (주전 931-870, 왕상 14:21-15:24, 대하 10-16장)

 

 

   처음 솔로몬 왕국이 분열 되었을 때에

   유다 지파만이 르호보암을 따랐다.(왕상 12:20)

   베냐민 지파는 처음에 북쪽의 여로보암을 좆았으나,
   지리적으로 유다와 인접한 관계로 후에 남 유다에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우고

   레위 지파 아닌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을 때에,
   레위 지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남 유다로 귀환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르호보암의 세력이 강화되었다.(대하 11:13-17)

 

 

 

가. 르호보암(Rehoboam) (주전 931-913 왕상 14:21-31, 대하 10-12장)


       * 르호보암은 41세에 남 유다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7년을 다스렸다.
       * 아버지 솔로몬의 말기의 영향을 받아 문란하게 우상을 섬겼는데,
         이는 암몬 족속이었던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


       * 북 이스라엘과의 전쟁(왕상 14:25, 26, 30) 
         -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르호보암은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 중에서 용사 18만을 뽑아
           여로보암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이를 금하셨다.
           그 이후 그는 북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항상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 애굽 왕 시삭의 침략(왕상 14:25-27, 대하 12:2-12) 
         -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의 교만함을 징벌하시기 위하여
           르호보암 제 5년에 애굽왕 시삭의 침입을 받게 하셨다. 
         - 시삭은 여로보암이 애굽에 있을 때에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던 왕이었다.(왕상 11:40)
         - 르호보암은 애굽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을 때에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과 솔로몬 때에 만든 금 방패까지
           모두 다 조공으로 바치고 겨우 나라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역대하 12:4-8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붙였노라....
    여호와께서 저희의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저희가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대강 구원하여....
    그러나 저희가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열국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되리라"

 

 

 

나. 아비야 (Abijah) (주전 913-911, 왕상 15:1-8, 대하 13:1-22)

       * 여로보암(Jeroboam)을 이김
       * 르호보암의 뒤를 이어 3년간 통치하였다.
       * 그는 르호보암왕의 죄를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해 주셨다.
       * 아비야는 약 40만의 군대로

         북 이스라엘의 80만의 군대를 물리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50만의 희생자를 내었고,
         종교 중심지였던 벧엘과 몇 성읍들을 빼앗기게 되었다(대하 13:19).
       * 그는 북 이스라엘의 배반을 꾸짖었으며,
         위기를 만났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함을 받았다.(대하 13:4-12)

 

다. 아사 (Asa) (주전 911-870, 왕상 15:9-24, 대하 14-16장)


       * 아사는 아비야의 뒤를 이어 41년간을 통치

       * 그는 왕위에 오르자 모든 우상을 제거하였다. 


       * 종교 개혁 운동(왕상 15:11-15, 대하 14:2-5, 15:8-18) 


         - 그는 개혁 운동을 가장 가까운 궁중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그의 어머니가 우상 숭배를 하자

           이를 꾸짖고 그녀의 태후의 위를 폐하였다. 


         - 그는 또한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들을 찍어 불살랐으며,
           열조의 모든 우상들과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제거해 버렸다.
         - 산당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 그는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히 행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막아 주시고 나라에 평안을 주셨다.
         -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에 감사하면서
           나라를 견고케 하기 위하여 성곽을 만들며 성읍들을 건축했다.
         - 선지자 아사랴의 조언에 힘입었으며그의 경건 운동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중에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지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사왕에게로 돌아옴.(15:8-9) 


       * 애굽 및 구스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대하 14:9-15) 
         - 구스(에디오피아)사람 세라가 이끌던 애굽(구스)과의 전쟁에 있어서

           세라의 군대는 군사가 100만이요, 병거가 300승이었다. 
           아사왕의 군대 58만과 비교해 볼때에 두 배에 가까운 숫자.        

         - 아사 왕은 적군이 "마레사"까지 진입하게 되었을 때에
           스바다 골짜기에 진을 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 결국 아사 왕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전쟁에서 대승리를 했으며,
           블레셋 땅인 그랄까지 쫓아가서 많은 전리품을 얻었고,

           블레셋까지 점령하였다.(대하 14:13-15) 


      * 이스라엘(바아사)과의 전쟁과 하나님의 책망

         - 아사 왕은 세라의 군대를 이긴 후에
           점차로 신앙이 식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
           아사 왕 제 16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Baasha)가 유다를 공격해왔다.
         - 바아사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연결해주는 요충지인

           베냐민 땅 "라마"를 점령하고,
           거기에 성을 건축하여 백성들이

           유다와 연락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 이때에 아사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메섹(아람) 왕 벤하닷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 다메섹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북방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며,

           결국 바아사는 철군을 하게되었다.
         - 아사 왕은 라마를 건축하던 모든 건축재들을 모아서

           "게바"와 "미스바"의 두 성을 건축했다.
         -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하나니를 통하여
           다메섹을 의지한 아사 왕을 책망하였을 때에

           왕은 크게 분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 그러나 선지자 하나니는 만일 아사 왕이 아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했다면 이스라엘뿐 아니라

           아람까지도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 아사 왕은 그 후 2년 후에 병이 들어 죽었다.

 

 

 

 

 

                  B. 남북 평화 시기(왕상 16:21~왕하 8:15)

 

 

1. 남북 평화 시기의 북왕국 이스라엘(오므리-여호람)

 

 

   * 오므리 왕가(B. C. 885-841)(왕상16:21-왕하 10:11)

    - 4대 44년간-남방 유다와 우호관계를 맺음

    - 북 이스라엘의 초기 50년간은 매우 불안하였다.

      그러나 오므리 왕조가 들어섬으로 이스라엘은 안정세력을 찾게 되었고

      유다와의 긴장도 해소되었다.

    - 외부적인 안정과 반영과는 달리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는 암흑시대였다.

 

 


1-1. 오므리(Omri) (주전 885-874)-12년-(왕상 16:21-28)

       * 세속적으로 강력한 국가였다.
          - 북왕국의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김

          - 이때까지의 왕 중 가장 막강한 왕이었음.

          - 모압을 속국으로 삼음으로서 요단 동편의 남부를 다시 장악하게 됨

       * 영적으로는 암흑의 시기였다.

         - 아들 아합을 이세벨과 결혼시킴

         - 성경은 그의 정치적 성공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고

           그의 영적인 타락상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얼마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헌신하였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1-2. 아합(Ahab) (주전 874-853)-22년-(왕상 16:29-34, 17:1-22:40)

       * 요단 동편(요단 동편의 옥토와 왕의 대로) 점령을 위해 노력함

         - 이를 위해 다메섹(아람) 의 남하정책을 막아야만 하였는데,

           아합은 북쪽의 베니게(두로와 시돈 지역)와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서

           다메섹(아람)을 막으려 하였다.

         - 당시 베니게를 통치하던 시돈 사람 엣바알 왕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 남쪽 유다의 힘을 빌리기 위하여 자신의 딸(아달랴)을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인 여호람에게 주었다.

 

       * 왕후 이세벨은 바알에게 헌신한 여인이었다.

         - 그녀가 적극적으로 바알종교를 지원하게 되자,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바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분기점에

           이르게 되었다.

         - 바알 종교는 이미 백성들 사이에서

           가나안의 우수한 문화를 형성시킨 신으로 동경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세벨의 바알 선교 정책은 가속화되었다.

        - 사마리아의 바알의 산당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음

        - 아세라 목상을 만듦.



1-3. 아하시야(Ahaziah) (주전 853-852)-2년-(22:51-53, 왕하 1:1-18)

       * 아합과 이세벨의 맏아들

       * 그의 아버지와 같이 죄를 범하고 바알을 섬김

       *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궁전에서 떨어져 병들어 치유를 위해

         바알세붑에게 물어보았다가 엘리야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음(왕하 1:1-18)

 

 

1-4. 요람 (Joram) (주전 852-840)-12년-(왕하 3:-8:)

       * 아합과 이세벨의 막내 아들

       * 바알의 주상을 제거함으로 아비와 같이 하지는 않았으나,

         여로보 암의 길을 따르는 죄를 범하였다(왕하 3:1-3)

       * 여호사밧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 모압을 침.

         그러나 물이 갈하게 되었을 때에 선지자 엘리사의 도움으로

        (여호사밧 때문에) 물을 얻고 전쟁에서 이김.(왕하 3:4-27)

       * 나아만이 문둥병이 낫고자 하여 왔을 때에 고쳐 보냄(5:-)

       * 엘리사가 아람의 침입계획을 알아내자

         엘리사를 죽이려고 군대를 파송했으나 전멸함.

       * 그 후에 아람이 다시 침공하여 사마리아가 극한 기아에 시달렸으나

         하나님께서 네 문둥병자를 통해 사마리아를 기근으로부터 구출하심

       * 아람 왕 벤하닷이 죽고 하사엘이 왕이 되었을 때에

         갈르앗 라못을 탈환하기 위해 하사엘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해

         치료하던 중 군대장관 예후에게 피살당하게 되었다.

       * 그 후에 에돔과 립나가 다시 그 수하에서 떠나게 됨.


 

 

 

 

2. 남북 평화 시기의 남왕국 유다(여호사밧-아달랴)

 

 

 


2-1. 여호사밧 (Jehoshaphat) (주전 870-845, 왕상 22:41-50, 대하 17-20장)

     

       * 종교 개혁 운동

          - 여호사밧은 아사의 뒤를 이어 25년간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는 왕이 된 처음부터 부왕 아사가 시작한 개혁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경건한 인물로서 전심으로 여호와의 도를 행하려고 하였다

          - 그는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하고(대하 17:6)

            또 부왕이 미처 계속하지 못한 "남색하는 자"를 붸아 내었다

          - 그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뽑고 또 방백들을 뽑아

            각 성읍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에게 율법책을 가르치게 하였다 


       * 군대 조직과 전쟁에서의 승리

          - 여호사밧의 군대는 5개의 군단으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유다 지파에서 3개의 군단, 베냐민에서 2개의 군단이 조직되어

            그 군대의 수는 100만이 넘었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을 방비하기 위하여

            성읍들을 더욱 견고히 하였으며, 각 성읍마다 군대를 주둔시켰고,

            에브라임 성읍들에 영문을 두었다.

        *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과 에돔의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에

           온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함께 기도하였다.

        *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하시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왕은 특별히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여 찬송을 부르게 하였다.

        * 이 전쟁은 대승리로 끝이 나게 되어

          그들은 전리품을 나르는데 3일이 걸렸다.

        * 여호사밧은 그밖에도 국고성을 건축하는 등의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이처럼 나라가 튼튼해지고 견고해 졌을 때에

          그는 북방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었다.


        * 이스라엘과의 동맹

           -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 화친을 이루기 위하여 아합 왕의 딸 아달랴를

             자부로 맞았다.(왕하 8:18) 이로 인하여 그의 아들 여호람은 아달랴로

             부터 영향을 받아 종교적으로 크게 부패해졌다.(대하 21:6)

           -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 합작하여 에시온게벨에서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배를 짓고 다시스와의 무역을 통하여

             오빌의 금을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선지자 엘리에셀의 예언대로

             그 배가 파선함으로 실패하고 말았다.(왕상 9:26-28)

           -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 군사 동맹을 맺고, 아합의 요청을 받아

             아람의 벤하닷과의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길르앗 라못에서 아합은 전사하였고, 그는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건지게 되었다.(왕상 22:29-33, 대하 18:29-34)

           - 그러나 그 후에 그는 또다시 아합의 아들 여호람의 청원을 따라

             모압과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때에 그들은 7일동안 물을

             얻지 못하여 군사와 가축이 다 죽게 되었다.

           - 여호사밧이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모압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왕하 3:15-27).

           - 그러나 선지자는 여호사밧이 이스라엘과 함께 참전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책망하였다.(대하 19:2)


2-2. 여호람 (Jehoram) (주전 848-841년. 왕하 8:16-24, 대하 21장)

 

        * 여호사밧의 뒤를 이은 여호람 왕의 유다 통치의 8년간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 그는 아사 왕이나 여호사밧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아합 왕의 뒤를 따랐는 데,

          그것은 바로 그 아내인 아달랴 때문이었다(대하 21:6, 왕하 8:18).

 

        * 만일 하나님께서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완전히 멸망당했을 것이다.(대하 21:7)

 

        * 그는 왕이 된 후에 아달랴를 반대하는 자기 형제들을 모두 죽였으며,

          이스라엘과 같이 우상종교 정책을 썼다.

 

        * 엘리야는 그의 가족들과 모든 재물을 빼앗길 것이며,

          의 창자에 중병이 들어 창자가 빠져 나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대하 22:11~12, 23:1~15)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 블레셋과 아라비아가 군대를 일으켜 유다를 쳐서

          왕궁의 모든 재물과 아들들과 아내를 탈취하였으며,

          오직 여호아하스만이 남고 여호람 자신은 예언대로 중병이 들어

          2년 후에 죽었다(대하 21:16-20).

 

        * 여호람 통치 기간 중에 국세는 심히 약해져서 블레셋과 아라비아가

          유다를 침략하였으며, 에돔도 유다를 배반하여 독립하였고,

          립나도 유다를 배반하여 그 수하에서 벗어났다.

                                                             (대하 21:8-9, 왕하 8:20-22)
 

2-3. 아하시야 (Ahaziah) (주전 841, 왕하 8:25-29, 9:27-29, 대하 22:1-9)

 

        *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공으로 겨우 여호아하스만이 살아 남아

          여호람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왕하 21:17),

          그는 왕이 된지 1년도 못되어 죽었다.

 

        * 그는 왕위에 있는 동안 어머니인 아달랴의 교도를 따라

          아합의 길로 행하였고, 북방 이스라엘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했다.

 

        * 그는 북방 아합의 아들 요람 왕이 아람의 하사엘과의 전쟁이 있었을 때

          그를 도우려 길르앗 라못으로 갔다.

 

        * 그 전쟁에서 요람 왕은 부상을 입고 이스르엘로 돌아와 있었으며,

          아하시야가 그의 병 문안 차 갔다가 때마침 반란을 일으킨

          예후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어 그의 통치가 끝나게 되었다.

          이때에 아하시야는 자기의 부하들까지 잃게되어

          왕위를 지킬 힘을 잃고 말았다.


 2-4. 아합의 딸 아달랴(Athaliah)의 섭정

          (주전 841~835년, 왕하 11:1~6, 대하 22:10~23:15)

 

        * 아달랴는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왕족들의 씨를 모두 죽여 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 그때에 여호람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어린 아들인 요아스를 간신히 피신시켜서

          6년 동안 숨겨 키웠다. 


        * 아달랴는 그 어머니 이세벨의 뒤를 따라 남방 유다에서

           피의 숙청을 자행하였다.

          그는 바알 종교를 다시 부흥시키려 하였다.

 

        * 만일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이 없었더라면

          유다는 다시 한 번 영적 암흑기를 맞을 뻔하였다.

 

        * 그러나 결국 아달랴는 여호야다의 반정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칼에 죽었다(대하 23:21).

 

        * 그러나 어린 요아스가 왕위에 오름으로 6년간의 암흑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북방 이스라엘과의 긴밀한 관계도

         끊어지게 되었으며, 얼마동안 두 관계는 평행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C. 남북 평행 시대(왕하 8:16~15:12)

 

 

 

1. 남북 평행 시대의 북왕국 이스라엘(예후-호세아)

 

1-1. 예후 왕가(B. C. 842-753)-5대 89년간-(왕하 9:)

 

       * 오므리 왕가를 멸하고 왕이 된 예후 왕가는

         이스라엘 왕가 중에 가장 강력한 정권이었다.

       * 그러나 예후 왕가는 아람의 침입으로 많은 것을 잃었으며,

         종교적으로 바알을 반대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는 못하였다.

 


   가. 예후(Jehu) (주전 841-814)-28년-다메섹 및 앗수르의 침입-(왕하 9:-10:)

 

       * 엘리사가 보낸 사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혁명을 일으켜 치료차

         이스르엘에 있던 요람을 죽였으며, 병문안차 요람을 방문한 아하시야도

         므깃도에서 죽었다. 그리고 즉시 이세벨을 죽임으로 엘리야의 예언을

         모두 응하게 하였다(9:-)
       * 그리고나서 그는 사마리아의 정치적 지도자들에게

         아합의 70인 아들 중 한 명을 내세워 싸우게 하라고 하였으나,

         예후를 두려워한 그들은 아합의 아들 70인을 모두 죽여

         예후에게 그 머리를 보내었다.

       *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전국에 있는 바알 숭배자들을 처단하였다.

         하나님께 서는 이 일을 인하여 그를 4대동안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해셨다.

       * 그러나 그도 역시 하나님 의 율법을 전심으로 섬기지는 않았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

       * 그가 이세벨과 유다 왕 아하시야와 그 일가를 죽임으로

         베니게와 남 유다와 원수가 되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는 혼자 힘으로 아람과 모든 주위 나라들과

         싸워야 할 입장이 되었다.
       *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람왕 하사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치시기 시작하셨고, 예후는 죽게됨(10:-)


 

   나. 여호아하스(Jehoahaz) (주전 814-798)-16년-구원자를 만남-(13:1-9)

 

       * 예후의 아들: 그의 군대가 아람의 하사엘에게 공격을 당하여

         거의 전멸되었을 때에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였으며,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일으키셔서

         아람을 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다.
       * 그러나 그가 계속하여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고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두었으므로,

         하나님은 아람을 통해 그 나라를 치게 하셨고,

         극히 미약한 군대만 남겨두었다. 


 

   다. 요아스(여호아스)(Jehoash) (주전 798-782)-16년-국세를 회복함-(13장)

  

       * 여로보암의 죄을 좆아 범죄를 함

       * 병상에 누운 엘리사를 찾아가 아람에게 세 번 이길 것을 예고받고

         아람을 쳐 성을 빼앗음.

       * 유다왕 아마샤를 치고 예루살렘의 성벽 일부를 무너뜨리고

         성전과 궁궐의 보물들도 빼앗았다.

         이후 남쪽 유다는 북쪽 이스라엘에게 완전한 예속을 당하게 되었다. 


 

   라. 여로보암 2세(Jeroboam II)

        (주전 793-753)-40년-이스라엘을 부강케 함-(14:23-29)

 

       * 북왕국 왕 중 최장기간 통치함

         북왕국 왕 중에서 가장 막강한 왕중에 하나.

       * 요아스와 여로보암 2세는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는 아니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요나의 에언을 성취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여로보암 2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상실한 영토 중 상당 부분을

         회복하게 하셨다.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솔로몬 때의 영토 회복)

       * 아람을 속국으로 삼고 요단 동편의 모든 영토를 정복

         (아람이 앗수르의 공격으로 약해졌으며, 앗수르도 북방 민족을 막기에

          골몰하였고 연약한 지도자들이 왕위에 있었다.)

       *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로 더욱 겸손해야 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부요해지면서 부패하게 됨.

       * 바로 이때에 이들을 향해 메시지를 던진 사람들이

         바로 호세아와 아모스였다. 
 

   마. 스가랴 (Zechariah) (주전 753년)-6개월-(15:8-12)

 

       * 예후의 4대손, 예후 왕조의 4번째 왕

       * 살룸이라는 폭도에게 피살당함.

         이리하여 하나님이 예후에게 내린 예언이 성취됨

 

   바. 살룸 (Shallum) (주전 752)-1개월-(15:13-16)

 

       * 스가랴가 살룸에게 죽으면서 예후왕가와 함께

         이스라엘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 므나헴이라는 잔인한 병사에게 살해됨.

 

 


2-2. 므나헴 왕가(B. C. 752-742)-10년-(15:17-26)

 

      가. 므나헴 (Menahem) (주전 752-742)-10년(15:17-22)

 

       * 예후 왕가의 마지막 왕이었던 스가랴의 군대장관으로서

         예후 왕가의 스가랴를 죽인 살룸을 물리치고 왕이됨.

         그러나 이때에는 앗수르가 다시 강력한 세력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의 침공 때에 은 일천 달란트로

         그를 매수하였으나, 결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

         꼭두각시가 되기에 이르렀다.


 

      나. 브가히야 (Pekahiah) (주전 742-740)-2년-혁명으로 죽음-(15:23-26)

        * 므나헴의 아들, 군대장관 베가에게 피살됨.


 

      다. 베가 (Peka) (B. C. 740-732)-20년-앗수르에 굴복함-(15:27-16:20)

        * 브가히야를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됨. 여로보암의 죄를 좆음.

        * 아람과 연합하여 앗수르를 치려했으나

          유다 왕 아하스가 앗수르에게 원병을 요청하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이스라엘의 북부와 동부를 공격하고,

          백성을 앗수르로 잡아감.

        * 호세아에게 피살당함

          - 그 이후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완전히 점령되는 상태가 됨


 

      라. 호세아 (Hoshea) (B. C. 732-721)

        *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처음 9년 동안은

          앗수르왕 살만에셀의 공격을 받고 그에게 굴복하여 조공을 드렸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애굽과 연합하였다가

          호세아 9 년에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되었다.

 

@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왕하 17:7-18)

 

1) 우상을 섬기고 이방인의 규례를 따름

2) 여로보암의 죄악을 좆음.

3) 하나님을 배반하고 산당을 세우고 목상과 아세라 상을 세움.

4) 산당에서 분향을 함

5)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함

6) 사술과 복술을 행함

7) 선지자들의 전한 말을 듣지 않음-하나님을 배반하고 모세가 준 규례를 어김.

 

@ 종교 혼합주의와 혼혈족 사마리아인의 탄생(17:24-41)

 

앗수르는 이스라엘에 수많은 이방인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이는 혼혈 족으로 만들어 앗수르에 대항하려는 혁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종교의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방 신과 여호와와를 함께 섬기는 혼합종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아있던 유대인들이 이주해 온 이방인들과 결혼을 함으로

하나의 혼혈족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2. 남북 평행 시대의 남왕국 유다(요아-아하스)

 

 


   2-1. 요아스 (Joash) (주전 835-796년, 왕하 11:4-12:36, 대하 23:1-24:27)

       :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 


        * 반정의 성공과 왕의 즉위(대하 23:1-21, 왕하 11:4-21)

           - 여호야다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여호와의 백성이 되어

             바알들을 깨뜨리고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였다. 


        * 성전 수리(대하 24:4-14, 왕하 12:4-16)

           - 여러 해 후에 이제 요아스 왕은 스스로 정책을 결정할 때가 되었을 때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할 계획을 세웠다.

             왜냐하면 아달랴는 모든 성전을 파괴하고

             성물들을 바알에게 드렸기 때문이었다.

 

           - 요아스는 여호야다에게 명하여 성전을 수리할 헌금을 모으게 하였다.

             그리하여 성전이 완성되었으며

             모든 성물들은 옛날같이 정돈이 되었다.

             매일 드리는 번제도 회복되게 되었으며,

             전국에는 여호와를 섬기는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  타락과 징벌(대하 24:15-27, 왕하 12:17-21)

           - 그러나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사정은 급변하였다.

             여호아댜가 죽자 유다의 방백들은 아세라 목상을 세우며 섬길 것을

             청원하였고 요아스는 이를 허락하였으며,

             이를 경고하는 선지자 스가랴를 돌로 쳐죽였다(대하 24:20, 22).

 

           - 스가랴는 죽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신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고, 그 기도대로 스가랴가 죽은 후 1년 뒤에

             다메섹 왕 하사엘이 유다를 쳤다.

 

           - 이때에 요아스는 성전의 모든 금을 다 거두어 아람에게 조공을

              드리고 하사엘을 떠나가게 하였으나, 이때에 많은 방백들이 죽었고

             요시야 자신도 크게 부상을 입었다.(대하 24:25)

 

           - 그 후 그는 부하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죽음을 당했는데

             그의 통치 기간은 40년이었다.


   2-2. 아마샤 (Amaziah) (주전 796-767년, 대하 25장, 왕하 14:1-20):

                                                                                  승리와 실패

 

        * 요아스의 뒤를 이어 그 아들 아마샤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부왕의 죽음 이후 약해 졌던 나라를 든든하게 하였으며,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처형하였다(대하 25:3).

 

        * 그리고 그는 에돔을 공격하기 위하여 30만의 군대를 조직하고,

          또 이스라엘에서 10만의 용병을 고용했다(대하 25:5,6).

          그러나 한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이 용병을 원하시지 않는다고 하여

          다시 돌려보냈다.

 

        * 이 용병들은 화가 나서 유다의 성읍들을 공격하여

          약 3천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노략하였다(대하 25:13).

          그러나 아마샤 왕은 계획대로 에돔을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으나,

          개선하여 돌아올 때 에돔의 우상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경배하며 분향하였다(대하 25:14).

 

        *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어찌 자기도 구원하지 못한

          나라의 우상을 섬기느냐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아마샤는 선지자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25:15-16)

 

        * 그 후에 아마샤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으며,

          선지자의 예언대로 크게 패하였다.

 

        * 마침내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전의 모든 기구도 약탈되었으며

          아마샤 왕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

 

        * 역대기의 기자는 이러한 사실이 아마샤가

          에돔의 신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대하 25:20)

 

        * 그는 마침내 자기 백성들의 모반을 받아 피살되어

          재위 29년만에 끝나게되었고, 그 아들 웃시야가 대신 왕이 되었다.


  2-3. 아사랴 (Azariah)[웃시야] (주전 767-739년, 대하 26장, 왕상 14:21-22)

       : 유다 왕국을 부강케 함

 

        * 아마샤 왕의 아들 웃시야(또는 아사랴)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을 다스렸다.

 

        * 그는 유다의 열왕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유능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는 북쪽 이스라엘을 크게 부강하게 하였던 여로보암 2세와

          대등한 인물이었다.

        * 그는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여로보암이 차지했던 위치를 대신 차지하였다.


        * 영토의 확장

           - 그는 부왕 아마샤가 정복한 에돔을 계속 주관하고

              북부 연안에 엘랏 엘롯 항구를 건축하여

              솔로몬 때와 같이 무역정책에 힘을 쓰면서 남방을 제압했고,

              또 동쪽으로는 암몬을 다스리며 그들에게서 조공을 받았고,

              서쪽으로는 블레셋을 쳐서 여러 성읍을 정복했다. 

              애굽 변방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예루살렘의 성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 산업정책

           - 그는 엘랏을 건설하여 홍해를 통한 아라비아의 무역에 힘쓸 뿐만

             아니라, 거친 땅에는 물웅덩이를 많이 파서 목축에 힘을 썼고,

             산과 밭은 농부들과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어

             농업에 힘을 썼다.


        * 국방과 군사정책

            - 그는 지금까지의 군대의 조직을 재편성하여 군대장관 하나냐 밑에

              족장들 중 용사 2,600명을 뽑고 그 수하 30만 7천 5백 명의 정예병을

              두어 훈련시켰다.(대하 26:14-15)

            - 당시의 무기인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 맷돌까지도

              풍부하게 준비하였고, 성 주위에는 돌을 쏘는 장치를 만들었다

            - 그가 이렇게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북방의 다메섹은

              신흥 앗수르에게 꺾여 약해져 있었고, 또 앗수르마저

              북방의 "아라랏"의 공격을 받아 그것을 방비하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이때에 북방의 여로보암 2세는 구력을 키워

              중동 아세아의 가장 강력한 나라로 등장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로보암 2세가 죽게되어 이스라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유다왕 웃시야가 강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 그의 교만과 실패

            - 유다 왕국이 강하여지매 백성들을 물질주의로 기울어져

              한없이 사치해졌고(사 3:18-23),

              웃시야 왕 또한 교만해졌다(대하 26:16).

            - 그는 마침내 제사장의 직분마저도 무시하게 되었다.(대하 26:21-23)

            - 그는 하나님의 징계로 문둥병이 들어 별궁에 살면서

              그 아들 요담에게 왕국을 관리하게 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후에 결국 문둥병으로 죽게되었다(대하 26:5).

            - 그도 역시 하나님을 구하는 동안에는 형통하였으나,

              하나님을 버리고 교만해져서 세상의 번영만 생각하게 될 때에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다.


   2-4. 요담 (Jotham) (주전 739-731년, 대하 27장, 왕하 15:32-38)

       : 유다의 부패를 다스리지 못함

 

        * 요담 왕은 16년간 유다를 치리 했으나(대하 27:1)

          그것은 부왕 웃시야의 섭정 밑에서의 기간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는 이같이 부왕의 생존시에 이미 정치에 참여하였다.

        * 그는 부왕의 신앙을 본받아서 비교적 신앙적으로 경건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부왕에게서 계승한 많은 건축 공사도 완성시켰으며

          부왕이 남겨준 군사력도 계속 유지하였다.

        * 이때 암몬이 그를 배반하려 했으나,

          그는 암몬을 정복함으로 계속 조공을 드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부유한 틈을 타서 사치해졌으며 점점 더 타락해갔다.

        * 그리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그들이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하였다. 이때에 앗수르에서는 새로운 전략가요 정치가인

          디글랏 빌레셀 3세(주전 745-727년)의 세력이 커져 가는 시기였으며,

          당시 북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의 세력권 안에 들어 있었다.

        * 요담 왕 말년에 다메섹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는 강성해져 가는

          앗수르를 공격하고자 먼저 그 동맹자인 유다 왕 요담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하였다.(왕하 15:37)


   2-5. 아하스 (Ahaz) (주전 731-715년, 대하 28장, 왕하 16:11): 

                                   친 앗수르 정책

 

        * 아하스는 왕위에 올라 16년간을 통치하였으나,

          이 기간에 유다 왕국은 심히 약해졌다.

          북쪽에서는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압력이 계속되었고,

          서쪽과 남쪽에서는 블레셋과 에돔의 공격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때 아하스왕은 오직 앗수르만을 의지하는 친 앗수르 정책을

          견지하였으나, 앗수르는 유다를 돕기보다 유다마저 괴롭게 하였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의 정책의 잘못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 베가와 르신의 공격(대하 28:5-21, 왕하 16:5-9)

            - 친 앗수르의 노선을 걷는 아하스 왕을 다메섹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하여 공격을 해왔다(왕하 16;5, 대하 27:5,6)

              이것은 앗수르를 대항하는 연합전선에 유다를 끌어들이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두 연합국의 공격으로 유다는 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며,

              이때 아하스는 매우 당황하여 앗수르만을 의지하였다.

              이 사실을 안 이사야는 아하스 왕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였으나 아하스는 이 말을 믿지 않았다.

              마침내 이사야는 세내 온 삭도인 앗수르가

              결국 유다 백성의 발 털도 밀게될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이스라엘과 다메섹의 연합군은 앗수르의 개입으로

              물러가기는 했으나, 사실상 가장 큰 적은

              이스라엘과 다메섹이 아니라

              앗수르임을 아하스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 에돔과 블레셋의 반격(대하 28:16-21)

            - 아하스의 세력이 약해지자 에돔은 유다를 배반하고 공격해왔다.

              이때 유다의 많은 백성들이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후 또 블레셋이 침략해왔다.

              그리고 유다의 여러 성읍들을 점령하였다.

              이처럼 에돔과 블레셋의 공격을 받은 아하스 왕은

              또 다시 앗수르의 디글랏벨레셋에게 많은 재물을 보내며

              구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때는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하였다.

              오히려 앗수르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북쪽으로는 다메섹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남쪽의 에돔까지 그 힘을 뻗치게 되었고,

              유다도 앗수르의 손에 빠져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처럼 된 유다는 사면초가의 연약한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 아하스의 종교적 타락(대하 28:1-4, 22-25, 왕하 16:2-4, 10-18)

           - 아하스는 백성들을 괴롭게 하고 하나님을 분노케 한 자였다.

             아하스는 모든 우상을 다시 섬겼으며,

             바알 우상을 다시 부어만들었고,

             어린 자녀를 불살라 드리는 몰록 종교를 따랐고,

             산당에서 우상을 섬기는 일을 자행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만을 의지하였다.

             그리고 다메섹의 제단 모양을 본떠다가 예루살렘에 두고

             제사를 드렸으며, 성전의 놋 제단을 그 우상의 제단 북편에 두었으며,

             성전의 기명들을 뜯어내고 성전을 폐쇄해 버렸다.(대하 28:24)


 

 

 

                D. 유다 단일 왕국 시대(왕하 18장~25장)

 

 

       아하스 이후 남방 유다는 이스라엘처럼 즉시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유다는 이스라엘보다 더 오래 유지될 수 있었는가?

       (왕하 18-25장)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유다 왕국이 단독으로 존재했던 약 150년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에 유다는 몇 차례 대대적인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유다는 이스라엘처럼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 종교개혁이 필요했다.

       남유다가 이스라엘처럼 멸망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은 다윗 시대와 같은 순결을 회복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남 유다의 종교 개혁은

       히스기야 로부터 시작되었다.

 

 

 

               1. 히스기야(Hezekiah)의 종교 개혁(주전 715-686년)

 

    1) 반 앗수르 정책과 개혁운동

 

       * 히스기야 왕(Hezekiah)은

         부왕 아하스(Ahaz)가 남긴 연약한 정권을 인계받은 후

         예루살렘에서 29년을 치리했다(대하 29:1, 왕하 18:2).

         역대기 저자는 그를 가리켜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자"

        라고 평가했다.

 

     2) 종교 개혁 운동(대하 29:3-31:21)


 

       * 히스기야 왕은 아하스 왕 이후에 개혁의 주자로 등장했다.

         왕위에 오르게되자, 즉시 부왕 아하스가 폐쇄했던 성전 문을 열고,

         성전을 정결케 하는 일에 힘썼다.

       * 또한 그는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일이 끝나게 되자,

         모세의 율법을 따라 번제와 화목제의 제사를 드림으로

         유다왕국이 하나님 앞에 돌아왔음을 분명히 나타냈다.

       * 그는 다시 한 번 더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켰다(대하 30:1-27).

         이때에 그는 북쪽 이스라엘에도 초청장을 보내어

         예루살렘에서 함께 절기를 지키자고 제안했다(대하 30:1).

       * 그리고 그때에 많은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요청에 호응했다.  

         전국적인 행사로 인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다.

       * 이스라엘에서 솔로몬 후에 이러한 기쁨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감격한 나머지 7일의 절기를 지킨 후에,

         또 다시 7일간 절기를 지켰다(대하 30:23).

       * 히스기야 왕은 모든 산당들을 훼파했으며,

         모세가 만든 놋뱀(민 21:8,9)을 "느후스단" (놋조각)이라고 부르고,

         그것과 함께 아세라 목상을 깨뜨리는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감행했다.

       * 이로 인해 열왕기 기자는

          "그의 전후에 유다 여러 왕 중에서 그와 같은 자가 없었다"

         고 극찬하고 있다.

       * 이러한 히스기야의 개혁으로 인해

         아하스때에 유다에게 내려진 재앙의 위협은 잠시 유보될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경건한 히스기야 왕과 함께 하셨으며,

         "앗시리아"와 "블레셋"을 이기게 해주셨다(왕하 18:7-8)."

 

     3) 앗수르 왕 사르곤과 히스기야(사 20:1-6)

 

       * 히스기야는 처음부터 그의 부왕과는 달리 반 앗수르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마리아를 점령한 사르곤이 살아 있을 때에는

         공개적으로 앗수르를 대항하지 않았다.

       * 사르곤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끌어갔으며,

         그 대신에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을 그 곳으로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 주전 711년에 아스돗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사르곤은 블레셋으로 출병하여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다.

         그 때에 애굽은 아스돗을 돕기로 약속했지만 돕지 못했다.

         그때에 히스기야 왕도 아스돗을 도와야 할 입장에 있었지만 돕지 않았다.

         이 조치는 선지자 이사야의 권면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사 20:1-6).

 

     4) 앗수르 왕 산헤립과 히스기야

                           (대하 32:1-21, 왕하 18:13-19:37, 사 36-37장)

 

       *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이 앗수르 왕이 되었다.

         사르곤이 죽게 되자 앗수르에 예속되었던 나라들이 독립하기 시작했다.

         이때 히스기야 왕은 애굽의 후원을 얻어

         두로와, 아스글론, 에글론과 함께 반앗수르동맹을 맺고

         국방을 튼튼히 했다(대하 32:5).

       * 그는 앗수르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밖의 기혼샘과 도성 안에 있는 실로암 연못을 연결하는

         지하 수로를 팠다(왕하 20:20).

       * 히스기야의 반 앗시리아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서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히스기야 14년(주전 701년)에 유다를 공격했다.

         당시에 히스기야의 처지는 절망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스기야는 라기스를 포위하고 있던 사신을 보내 항복의사를 밝혔다.

       * 산헤립은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의 공물을 요구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곡간에 있는 은"을 모두 내주었으며,

         뇌물로 앗시리아의 위협을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 산헤립은 반역한 히스기야 왕의 항복을 받고

         그를 징계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다(18:1).

         군대장관 랍사개는 장문의 연설을 통해 유다 사람들에게 항복을 권유

       * 히스기야는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심

         그때에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그에게 보내어   

         구원을 약속해 주셨다.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해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19:34)."

       *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어 앗시리아 군대 185,000명을

         하루 밤만에 모두 죽임. 

       * 산헤립은 전멸을 당하고 수치스럽게 고국으로 발길을 돌아감

         그러나 그는 돌아간 후에 신복들에의해 죽임을 당함.


     5) 히스기야의 병과 바벨론 왕의 사신

                                       (대하 32:22-31, 왕하 20장, 사 38-39장)

 

        * 그 후에 히스기야는 병이 들어 죽게 되어

           여호와께 살려달라고 기도하였다.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15년을 연장해 주셨다.

           이때에 하나님은 구원의 표시로 일영표가 10도를

           뒤로 물러가게 하는 이적을 보여주셨다.(왕하 20:9-11).

        * 히스기야가 앗시리아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은 위문의 사신을 보냄

        * 바벨론은 유다와 동맹을 맺고,

          그동안 시달려 온 앗수르를 함께 공격하기를 원했다.

          그때에 히스기야는 교만해져서 그 사신들에게

          궁전의 보물들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부요함을 자랑했다(왕하 20:13).

        * 그때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어 그를 책망하셨다. 

          이사야는 장차 그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준 모든 보물들이

          장차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유다가 철저히게 파멸될 것이라고 예고

        * 히스기야 왕의 삶은 유다 왕국을 상징

          북방 이스라엘은 배도로 멸망했지만,

          유다 왕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 생명이 연장되었다.

        * 예루살렘은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들은 구원 받은 것에 만족하고,

          계속되는 심판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

          회개와 영적-도적적인 개혁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2. 므낫세(Manasseh)와 아몬(Amon)의 배도

 

 

    1) 므낫세(Manasseh) (주전 686-642년, 대하 33:2-10, 왕하 21:2-16)

 

        * 히스기야가 죽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면서

          진자 운동의 반대편 극에 달하게 된다.

          므낫세는 12살 때에 부왕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55년간을 예루살렘에서 통치하면서 남북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틀어

         가장 오래 동안 나라를 통치한 왕이 되었다.

 

        * 종교적 부패(대하 32:2-10, 왕하 21:2-16)

           - 므낫세는 열왕기에 가장 사악한 왕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왕들과 백성들이 그 동안 지은 죄의 총체적 종합판으로 묘사

           - 므낫세의 범죄 목록을 보면,

             55년간의 "배도의 광란기"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들을 다시 짓고,

             바알의 제단을 다시 세웠으며,

             아세라 목상과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했다(왕하 21:6, 대하 33:3-5)

           - 몰렉에게 아들을 번제로 드려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으며,

             점을 치고 사술을 행할 뿐 아니라(왕하 21:6, 대하 33:6),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 통치는 매우 박해적이고 억압적

           - 므낫세는 종교적으로 배도했을 뿐 아니라, 사법적으로도 부패하였다.

           - 그는 자신만 죄를 짓는 데서 끝나지 않고

             전체 백성들을 꾀어 죄를 짓게 만들었다(왕하 21:9).

             이러한 점에서 므낫세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범죄케 만든

             여로보암과 같았다(왕하 17:21-22).

           - 열왕기 기자는 므낫세와 유다의 죄를 북 왕국 이스라엘과 여호와께서

             가나안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했다"고

             언급

           - 앗수르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앗수르의 종교와 풍속을 따랐으나,

             오히려 앗수르에게 완전히 예속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  하나님의 징계와 회개(대하 33:11-20)

           - 므낫세의 배도는 너무도 엄청나서

             국가가 멸망으로 가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습 1:4-5).

           -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는 극에 달하였다(왕하 21:6,15).

             결국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앗수르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포로에서 돌아온 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기도하였고,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였으며,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섬길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대하 33:12-19)


    2) 아몬(Amon) (주전 642-640년:재위 2년, 대하 33:21-25, 왕하 21:19-26)

 

       *  므낫세의 아들 아몬(왕하 21:19-26)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

          2년간의 통치는 므낫세의 타락한 정치를 재현한 것에 불과

       *  따라서 열왕기 기자는 아몬이 므낫세의 길을 걸었다는 점을 언급한 후

         아몬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결론적으로 평가(왕하 21:22).

       * 더욱이 부왕인 므낫세는 말기에 회개라도 했지만

         아몬은 끝까지 자기 죄를 회개하려 하지도 않았다.

         마침내 아몬은 하나님의 징벌로 인해

         자기 신하들에게 배반을 당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 백성들이 일어나서 아몬을 죽인 자들을 모두 처형하고

         8살 밖에 되지 않는 아몬의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추대

 

 


                         3. 신흥 바벨론과 유다 왕국의 멸망

                                         (주전 640~586년, 대하 34~36장, 왕하 22~25장)

 

 


       * 요시야 왕을 계기로 하여 유다 왕국은 드디어

         그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는 앗수르의 세력도 매우 약화 되었다.

         앗수바니발 왕의 뒤를 이은 왕들은 그렇게 유능하지 못했으며,

         앗수르는 그 수도 니느웨가 멸망할 때까지(주전 612년)

         계속해서 약해져갔다.

 

       * 바벨론은 이때를 이용하여 새로운 주도권을 잡고 일어나게 되었다.

         요시야 왕이 통치할 때는 앗수르의 세력이 약해져 있었고,

         바벨론이 세력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다는 비교적 평화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

 

       * 요시야 왕의 뒤를 이은 왕들은 성장해 가는 바벨론에게 계속하여

         시달리다가 결국 주전 586년에 멸망을 당하고 만다.

 

 

    1) 요시야(Josiah)의 개혁

               (주전 640~609년, 대하 34~35장, 왕하 22:1~23:30)

 

       * 요시야는 8살의 어린 나이로 아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의 배후에는 경건한 신앙의 인물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요시야 왕을 충성으로 섬겼다.

 

       * 그의 치리기간 31년은 참으로 크게 부흥하고 발전하던 시기로,

         유다 왕국 창건이래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

 

       * 그는 남방 유다뿐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까지

         온 이스라엘의 우상을 제거했다.

 

       ★ 개혁 운동(대하 34:8~35, 왕하 22:3~23:25)

         - 열왕기 기자에 의하면, 요시야는 유다에서 최고로 선한 왕이었다.

           열왕기 기자는 요시야가 율법을 따라(신 17:18~20, 수 1:2~8)

           나라를 개혁한 다윗과 같은 왕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자료를 설득력 있게 배열하고 있다. 


           A. 평가 문장: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다윗의 길로 행함(22:2)

             B. 제 18년에 율법서 발견(22:3-11)
               C. 율법서에 대한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22:12-20)

                 X. 언약 갱신(23:1-3)

               C'. 율법서에 따른 요시야의 개혁(23:4-20)

             B'. 제 18년의 일: 율법서의 규례를 따라 유월절을 지킴(23:21-24)

           A'. 평가적 문장: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왕:

                                   전무후무한 왕(23:25)


         - 열왕기 기자는 요시야 왕을 평가하는 문장(A-A')에서

           요시야(Josiah)가 완벽에 가까운 왕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요시야의 실제 행적을 담고 있는 중앙 내러티브는(왕하 22:3-23:24)

           왕의 제 18년에 일어난 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 요시야가 제 18년에 율법서를 발견하고(B),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킨 이야기(B')는 두 번째 틀을 형성하고 있다.

           요시야는 왕에 오른지 8년, 즉 그의 나이 16살 때에 

           이미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이 된 지 12년, 즉 그의 나이 20살 때에는

           벌써 예루살렘과 유다와 북방 여러 성에 있는 모든 우상을 제거했다.

 

         - 정화 운동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려 6년의 세월이 걸렸다

                                                                               (대하 34:1~8).

           이러한 일은 유다 왕국의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부터 시작 되었다.

           일반적인 개혁운동은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율법 책을 인해

           가속이 붙어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제사장 힐기야는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그 책을 서기관에게 주어 요시야 왕 앞에서 낭독하게 했다.

           서기관이 낭독하는 율법책을 듣던 요시야는 그 자리에서 옷을 찢었다.

           그는 율법을 어긴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는 즉시 옷을 찢고 회개하고, 신하들을 보내어 유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여호와께 묻도록 요청했다(왕하 22:13).

 

         - 과연 므낫세와 아몬의 죄로 인해 타락한 유다는 어찌될 것인가?

           정녕 유다가 재앙을 피할 길은 없는가?

           이러한 요시야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 선지자 훌다를 통해 주어졌다.

           훌다의 예언은 여호와께서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유다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는 부분과(15~17),

           이 재앙에서 요시야가 면죄될 것을 선언하는 부분(18-20)으로 나뉜다.

            그러나 이 예언에는 유다가 재앙을 피할 길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율법서에 대한 요시야의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이 

           C단락(22:12~20)을 형상하고 있다.


         - 저주와 재앙을 피할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요시야는 놀랍게도

           율법에 순종하여 개혁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백성들을 모으고 율법책을 읽은 후에, 그 계명을 지키겠다는

           언약 갱신 의식을 치른다(X단락; 23:1~3).

 

        - 언약 관계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표징이기

           때문에, 임시적으로나마 유다는요시야의 통치 아래에서 황금기로

           돌아섰다.

 

        - 요시야 왕의 개혁은 과거 히스기야 왕 때보다도 더 철저했다.

          요시야는 언약 갱신을 근거로 해서 포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이 단락을 보면 왕이 주동이 되어 벌린 개혁의 조치들이

          얼마나 강력하고(폐하고, 불사르고, 빻고, 깨뜨리고),

          철저했는지(모든 제사장들, 게바에서 브엘세바까지)를 잘 보여준다.

 

        - 그는 우상을 처음에는 불에 태우고, 다음에는 빻아서 먼지로 만들고,

          유다 밖으로 가져가게 하였다.

          요시야 왕의 철저한 개혁을 통해, 남방 유다에서는 솔로몬 왕 때부터

          있었던 모든 우상과 산당들이 제거되었다.

 

        - 그 뿐 아니라, 요시야는 북방 이스라엘에서 여로보암이 세웠던

          모든 우상의 제단들을 훼파해 버렸다.

          요시아는 전국적으로 개혁을 단행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율법서에 지시한대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 우상 제거와 함께 신앙운동이 절정을 이른 것은

          온 백성이 함께 모여 유월절을 지킨 때였다.

          구약 성경은 사사 시대 이후 요시야 왕 때처럼 유월절을 크게 지킨

          적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대하 35:18, 왕하 23:22).

 

       ★ 요시야의 종교 개혁의 영향

 

        -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그 당시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말씀과 언약에 대해 보다 더 진지한 태도를 가지게 만들었다.

 

        -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왕이 직접 개혁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시작되며

          외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보려는 민족주의가

          이에 박차를 가하도록 만들었다.

 

        - 예레미야 역시 한 때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개혁이 점차적으로 형식적으로 흐르게 되자,

          그는 이에 대해 맹렬하게 공격하게 되었다.

 

        - 요시야는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다.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에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다(렘 4:4,5, 7:4).

 

        - 그러나 순종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안전이란 있을 수 없었다.

          어쨌든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통치방식이 훌륭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렘 22:15~16).


 

        -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면 그들의 땅을 잃게 될 것을 경고.

 

        -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일어난 후에 이러한 원리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만한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계속 발생했다.

 

        -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주전 538년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 백성들은 당연히 모든 예배는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바로 이 무렵에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될 짐승들을 팔고,

          돈을 바꾸어 주는 상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인 장소(예루살렘)

          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제물과 화폐를

          공급해 주었다.

 

 

       ★ 요시야 말기의 국제 정세와 므깃도 전쟁

                                         (대하 35:20-27, 왕하 23:28-30)

 

        - 그러면 요시야의 개혁은 유다를 용서받게 만들었는가?

          하나님은 요시야처럼 철저하게 순종한 왕을 인해

          유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는가?

 

          열욍기 기자는 요아스의 순종에도 불구하고

          이미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애굽 왕 느고와 싸우다가 전사(왕하 23:29-30).

 

       - 요시야의 개혁은 열왕기에 나오는 일련의 개혁의 절정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개혁이 아무 효력이 없게 되었다.

         므낫세가 저지른 죄로 인해 유다의 멸망은 시간 문제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 앗수바니팔이 죽은 후에(주전663년) 앗수르는 계속하여

         유약한 자들이 그 뒤를 이었으므로 국세는 점점 쇠약해져만 갔다.

       - 이처럼 약해진 앗수르는 바벨론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메데까지 바벨론과 연합하여 앗수르를 공격했다.

       - 주전 612년에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은 앗수르를 점령했고,

         또 2년 후에는 니느웨를 포위하였고,

         그 성은 포위된지 3개월만에 점령되었다.

 

       - 이러한 니느웨 성에 대한 멸망은 이미 선지자 나훔에 의하여

         20년 전에 예고된 바 있었다(나훔 3:1-7, 16-19).

 

       - 앗수르는 다시 대오를 정비하여 서북부 도성인 하란에서 전쟁을 개시

         주전 610년에 하란은 결국 바벨론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다.

         앗수르는 다음 해인 주전 609년에 또 다시 하란을 탈환하기 위해서

         전쟁을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 이때에 애굽의 바로 느고는 급속히 성장하는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해서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을 치려고 출정했다.

         이때에 요시야 는 이스라엘이 독립하려면 앗수르가 멸망해야 한다고

         생각

         그러므로 그는 바벨론을 치려고 진군하는 애굽의 군대를 막으려고 했다.

 

       - 요시야는 느고의 출정을 막기 위해 전쟁에 나갔다가

         결국 므깃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왕하 23:29-30, 대하 35:23-24).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애굽은 앗수르를 돕지 못하게 되었으며,

         결국 하란은 바벨론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 북방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죄에 아합의 죄가 더해졌을 때에 멸망,

         유다도 므낫세의 죄로 인해 급속하게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

   

       - 하나님께서 유다의 심판을 지연하신 이유는

         단지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이었다.

 

 

    2) 여호아하스(Jehoahaz) (주전 609년, 대하 36:1-4, 왕하 23:31-33)

                                             * 애굽 왕에게 폐위당함

 

       - 요시야의 죽음 이후에 유다 왕국은 급속한 해체 과정을 겪게 된다.

         요시야의 아들들과 손자가 차례로 왕 위에 오르지만,

         이들은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고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 요시야가 죽자, 백성들이 여호야김을 제쳐놓고

         당시 23세인 여호아하스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으나,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왕하 23:30~32).

 

       - 요시야 왕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요하난, 엘리야김, 시드기야,

          살룸](왕상 3:15), ①요하난: 요시야를 계승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요절한 것 같다(비교 왕하 23:30, 24:17). ④살롬: 부왕 요시야를

          계승하여 유다의 왕이 됐고 흔히 '여호아하스'로 불리워졌다

                                   (왕하23:31와 렘22:10 각주 참조-by '톰슨성경').  

 

       - 요시야 왕이 므깃도 전투로 전사한 후

         백성들은 그의 넷째 아들인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다.

 

       _ 그러나 이에 불만을 느낀 그의 형 엘리야김이

         자기 아버지 요시야를 죽인 애굽의 느고와 결탁해서

         자기 동생인 여호아하스를 제거했다.

 

       - 애굽의 느고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유다 왕 여호아하스를 제거했으며,

         엘리야김을 왕으로 세우고 그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고쳤다.

         이 일로 인해 요시야의 넷째 아들인 여호아하스는 왕이 된지 3개월만에

         느고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다(대하 36:3).

         그리고 그는 애굽에 포로로 잡혀가서 죽었다(왕하 23:34).

         이 사건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었다(렘 23:34).

 

       - 그때에 애굽 왕 느고는 유다를 속국으로 만들고,

         은 100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배상금으로 받은 후에,

         여호야김 왕에게 계속하여 은과 금을 조공으로 내도록 지시했다.

         여호야김은 느고가 정한 조공을 내기 위해서 국민 각 사람에게

         액수를 정하여 은과 금을 거두어 들였다(왕하 23:32).

 

      - 여호아하스나 여호야김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심히 악하게 행동했다.

        특별히 후일에 에스겔 선지자는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을 가리켜

        "사람을 움키는 사자새끼"라고 불렀다(겔 19:5-9).

 

 

 3) 여호야김(Jehoiakim)[엘리야김]

    (주전 609-597년, 대하 36:4-8, 왕하 23:34-24:7, 렘 22:13-19, 렘 36:1-32)

 

       - 애굽 왕 바로 느고의 꼭두각시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애굽에 바칠 많은 조공을 조달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괴롭혔고,

          사치한 생활을 위해서 백성들을 소집해서 더 큰 궁전을 짓고

          많은 양민들의 피를 흘렸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와 하박국을 통하여 그를 정죄하시고,

          그들을 갈대아 사람을 통해서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셨다

                                                             (렘 22:18, 합 1:3-4).

       - 특히 여호야김은 많은 의인들의 피를 흘렸다.

         그는 선지자 우리야를 죽였으며(렘 26:20-23), 

          예레미야도 죽이려 했지만

         하나님의 보호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렘 26:24, 36:26).

         그는 예레미야가 받은 계시의 말씀을

         불에 던져 태워버리는 악행을 저질렀다(렘 36:23). 

 


       - 므깃도 전쟁(주전 609년)에서 유다의 요시야 왕을 이긴 애굽의

          바로 느고는 하란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수리아 지역과 팔레스타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 그러나 후에 바벨론 왕의 맏아들이 군대를 이끌고

          유브라테스 강을 건너 와서 수리아의 북부 지방인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격퇴시켰다.

          이때에 애굽 군대는 하맛으로 후퇴하여 대오를 정비하려 했지만,

          추격하는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전멸되고 말았다.

          이 승리로 인해 애굽은 크게 세력이 약해졌으며,

          바벨론은 세계를 제패하는 나라로 등장하게 되었다.

 

       - 그 후에 바벨론은 유다의 왕인 여호야김에게

         애굽 대신 바벨론에게 조공을 드리게 만들었다.

         3년 후(주전 601년)에 느부갓네살은

         애굽이 다시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애굽을 다시 한번 공격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는 양편이 모두 많은 전사자를 내고

         느부갓네살은 후퇴를 하고 말았다.

 

       - 여호야김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느부갓네살을 배반하였다(왕하 24:1).

         이때에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에게 가서 바벨론을 배반하지 말라고

         권면했지만, 여호야김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렘 27:1-15).

         여호야김은 어려울 때에 애굽 왕이 자기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때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과 암몬인들로 보충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여호야김을 쳤다. 
         갈대아 부대를 보내어 유다를 다스리게 했다(왕하 24:2, 렘 35:11).

 

      - 기록에 의하면 바벨론의 주부대는

        주전 598년 12월에 예루살렘에 진입했으나,

        그 전에 벌써 여호야김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아마도 바벨론의 환심을 사기 위한 한 신하가

        그를 비밀리에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 이와 같이 여호야김은 11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수많은 죄를 저질렀으며(왕하 24:3,4),

        애굽과 바벨론을 왔다갔다 하면서

        섬기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렘 22:18).

 


 4) 여호야긴(Jehoiachin) (주전 597년, 대하 36:9~10, 왕하 24:8~16)

    : 유다의 첫 번째 포로

 

       * 주전 598년 12월에 여호야김이 죽은 후에

         그의 뒤를 이어 여호야긴이 유다의 왕이 되었다(왕하 24:6).

         그러나 그는 불과 3개월 10일 동안만 유다를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대하 36:9).

 

       * 주전 597년 3월 10일에 느부갓네살 왕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다.

         이때에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 왕을 바벨론으로 끌어가고,

         그의 숙부였던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세웠다.

           이때에 느부겟네살 왕은 여호야긴과 더불어

         수많은 유다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갔다(왕하 24:10-17).

         이때에 에스겔 선지자와, 왕, 왕의 어머니, 왕의 아내, 내시와

         기타 유력한 사람들을 끌어갔다.

 

       * 이 때에 유명한 용사 7,000인과 기술자 1,000명을 사로잡혀 갔으며,

         유다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왕하 24:15).

          그러나  여호야긴은 사로 잡혀 간 지 37년 에윌므로닥 즉위 원년에

        감옥에서 풀려 나와 후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그 곳에서 다른 나라에서 잡혀 온 왕들보다 높임을 받으면서,

        일생 동안 바벨론 왕궁에서 필요한 것을 공급받았다(왕하 25:27~30).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의 간청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시드기야(Zedekiah) : 왕국멸망

        (주전 597-586년, 재위 11년, 대하 36:11-21,왕하 24:17-25:21,렘 39:1-10)

 

       * 느부갓세살이 여호야긴 대신에 왕으로 세운 시드기야는

         느부갓세살의 허수아비였다(주전 597~586년; 왕하 24:17).

           그가 비록 유다의 왕의 자리에 있기는 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는 왕리라기 보다는 섭정자의 위치에 놓여있었다.

           바벨론 왕은 포로로 잡아간 여호야긴을 여전히 유다 왕으로 대접했고,

         유다 백성 역시 시드기야를 왕으로 간주하지 않음(왕하 25:27, 렘 52:31).

 

       * 그러므로 그의 위치는 매우 약했으며,

         또한 그의 통치 능력 역시 매우 부족했다.

          그는 그 후에 계속해서 반 바벨론 파와 친 애굽 파로부터

         바벨론을 배반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당시에 에돔과 모압과 암몬, 그리고 베니게의 여러 나라에서는

         새로운 반 바벨론 동맹이 이루어졌다(렘 27:1-3, 겔21:18-23, 21:8 참고).

         그리고 외국의 사신들이 시드가야를 찾아와서

         유다도 이 동맹에 가담해 달라고 요청했다(렘 27:3).

 

       * 궁중의 반 바벨론 파의 수뇌들은 시드기야에게

         그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배반하게 만든 또 한 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켜 주실 것이며,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들도 2년 안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바벨론의 멍에를 꺽으시고

         유다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렘 28:1-12).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도 받지않고

         자기 마음대로 백성들에게 "평안"을 외쳐댔다(렘 7:4).

         이로 인해 시드기야는 마침내 바벨론을 배반하고 말았다.


       * 이로 인해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 제 9년(주전 588년)에

         세 번째로 유다를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주전 586년)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말았다.

         느부갓네살은 도망하는 시드기야 왕을 사로 잡고,

         그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은 채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갔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서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렘 52:9-11, 왕하 25:6,7).

 

      *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주전 586년에 마침내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이 때에 성전도 함께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남은 백성들도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비천한 자들만이 남아서 그 땅을 지키게 되었다(렘 25:8).

        거짓 선지자들이 유다가 곧 회복될 것이라고 거짓 예언을 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끌려간 포로들이 곧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그 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 성이 평안하기를 구하라고 권고했다.

     *  예레미야는 그들이 다시 돌아오려면

        무려 70년이 지나야 한다고 예고했다(렘 29:10).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 역시 포로들과 함께 살면서

        그와 비슷한 예언을 했으며,

        그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겔 21:27).

 

      *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에게 포위되었을 때에

        애굽 군대가 와서 자기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애굽 군이 퇴각되어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렘 37:7).

        당시에 유다의 모든 성읍들이 망했으며,

        예루살렘과 아세가와 라기스만이 남아 있었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설명해 주는 "라기스의 편지"가 남아 있어서

        당시의 유다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바벨론 왕은 유다 백성들을 사로잡아 간 후에,

        남은 자들을 위해서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삼았다.

        그는 한때 예레미야를 숨겨주었던 아히감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조부인 사반은 요시야 왕의 개혁 당시에 서기관으로 있었다.

        흩어진 유대인들은 느부겟네살이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삼았다는

        소식을 듣고 미스바로 모여들었다.

        그달리야는 남은 유다 백성들에게 바벨론을 섬기면서 살도록 권면했다.

        그러나 이때에 돌아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에돔, 모압, 그리고 암몬으로

        망명했던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강경한 반 바벨론파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달리야가 친 바벨론 적인 말을 하는 것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

        그들의 두목이었던 이스마엘은 그달리야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는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도망쳤고, 이때에 예레미야도 강제로 애굽으로 가게 되었다.

        그 후의 유다 역사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더 황폐해졌으며,

        그 지역은 사마리아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지 약 1500년 후에

        그의 후손들은 이제 자유인이 아닌 포로로서

        다시 옛 고토인 갈대아 땅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만이 그 곳에 남아서 많은 고난 속에서 살게 되었다

 

      * 유다의 멸망과 은혜의 언약

        열왕기 기사는 여호야긴 왕의 석방에 대한 업급이 없이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지 삼십 칠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한 원년 십 이월 이십 칠일에,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선히 말하고,

          그 위를 바벨론에 저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고,

          저의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5:27-30)."

 

        이러한 열왕기의 마지막 문단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토론이 있어왔다.

        어떤 학자는 이러한 언급이

        여호야긴이 바벨론의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하면서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의미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여호야긴이 바벨론에서 좋은 대접을 받게 되는

         일을 통해, 다시 다윗의 후손을 통해 유다가 회복될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결말은 아무런 희망이 남지 않은 유다에 대한

        선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표현 밑에는 무엇인가

        다른 암시가 주어져 있다.

 

          죄악으로 인해 멸망당한 유다의 마지막을 언급하는 열왕기 기자의 말

       뒤에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조용히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이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폐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호야긴은 바벨론에서 죄수로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존경 받는 손님으로 죽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다윗 왕조의 회복의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이다.

       또한 바벨론에게 빼앗긴 성전의 기물들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후에 다시 성전이 회복되었을 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회복이

       인간의 순종이나 회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여호여긴은 그의 부친처럼 악을 행했다.

       그러므로 유다는 멸망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유다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삼하 7:14-16).

       다윗 가문은 벌받아 바땅한 짓을 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은 결코 그들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다윗의 왕조를 가리켜 "영원한 왕조"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의 손을 통해 징계하시고

       그들을 다시 연단되고 순수한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후에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서 자기의 백성을 삼으실 것이다.

       이러한 희망과 미래는 오직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셨던

       무조건적인 은총의 약속 안에서만 가능했다.

 

 

 

 

                          E. 결론 : 열왕기의 신학

 

 

 


                           1. 포로됨은 언약의 저주

 

 

  열왕기 기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이
여호와께서 살아계시지 않거나,
바벨론 신 마르둑이 여호와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따라
신실하게 징계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2. 여호와는 역사의 주인

 

열왕기 기자는 여호와께서 역사의 주인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잿더미로 변했다.


하나님은 실패하신 것인가?

하나님께선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는가?
바벨론의 신인 마르둑이 이스라엘의 여호와보다 강한가?

 

이는 이스라엘이 포로된 것은 하나님 실패가 아니라,
범죄한 나라를 심판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려했기 때문이다.

 

 


                               3. 회개의 촉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가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중에서 쇠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겔 33:10)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

 

이것이 바로 열왕기의 메시지이다.


이러한 약속들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열왕기는 미래,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와서,
다윗 왕조가 다시 회복되는 충만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만일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아직은 그들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다.

 


- 솔로몬의 기도

 

"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저희를 사로잡아 간 자의 앞에서 저희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저희는 주께서 철 풀무 같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주의 산업이 됨이니이다.
 원컨대 주는 눈을 들어 종의 간구함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간구함을 보시고

 무릇 주께 부르짖는대로 들으시옵소서!(왕상 8:47- 52)"

 

 


                      4. 다윗 언약은 아직도 유효함



여로보암에게 나라의 일부를 떼어주면서도 일부를 남겨 놓은 이유(왕상 11:12-13),
아비얌과 여호람의 죄에 대해 하나님이 분노하시면서도

끝내 그들을 멸하시지 않고 등불을 준 이유(왕상 15:4-5),
산헤립의 치명적인 공격(왕하 19:34, 20:6)에서 유다를 구한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즉 다윗에게 준 언약 때문이다.


영원한 왕조와 왕국을 보장하는 언약이 다윗에게는 무조건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윗처럼 여호와께 완전히 헌신하는 자손들만이

약속된 축복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희망을 형성하는 일부이기도 하다.

다윗과 맺은 언약과 연관해서 여호와께서 다윗의 왕조의 통치 아래
그의 백성을 다시 세우실 것이라는 희망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강하게 남아 있었다.

 

열왕기 기자가 이와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그가 마지막에 여호야긴 왕이 감옥에서 풀려나와
바벨론의 식탁에 앉는 영예로운 위치로 격상되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암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

 


 열왕기에서 선지자의 말이 성취되는 것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은
단순히 선지자나 예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언은 단순한 미래의 예고가 아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규정들과 연관시킨 후에,
이에 근거하여 장래의 모습을 선언한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말씀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언약의 규정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축복을,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저주하시겠다고 하신대로 역사를 이끌어 나가신다.

 

 단순히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왕정사를 기록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이 어떻게 역사 가운데 실증되었는지를 드러내 보이는 데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엘리야와 엘리사 사이클(왕상 17장~왕하 8:29)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두 명의 선지자가 차지하고 있는 기간은

역사적으로는 불과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두 선지자의 이야기는 열왕기 전체의 1/3(14장)이나 된다.


 결국 열왕기는 단순히 왕들의 통치 기록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실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맞서 싸웠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열왕기 기자의 관심은 지상의 왕들에게 있지 않다.

 

 결국 열왕기는 여호와의 통치를 지상에서 대리하는 왕들의 통치 아래서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열왕기를 통해서

"성령께서 오늘날의 교회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위대한 다윗의 아들 예수께서 오셔서 왕국을 확고히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고, 지금은 하늘의 성전에 앉으셔서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다스리면서
그의 목적을 달성하고 계심으로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출처 블로그 > RJ Project
                                                                  원본 http://blog.naver.com/echerish/80033637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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