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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타 성서 [Vulgate]와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제롬]

영국신사77 2007. 3. 9. 13:34
 

                          불가타 성서 [Vulgate]

 
  ('공동번역'이라는 뜻의 라틴어 editio vulgata에서 유래)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영어 이름<제롬(Jerome)>]가 번역한

  것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라틴어 성서.

 

  382년 교황 다마스쿠스가 당대 최고의 성서학자인 히에로니무스에게 당시 사용되던 여러 번역본을 토대로, 만족할 만한 라틴어역 성서를 출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83년경 복음서의 라틴어역 개정판이 나왔다. 그는 〈70인역 성서〉를 사용하여 새로운 라틴어역 〈시편〉(갈리아 시편)과 〈욥기〉, 몇몇 다른 책들을 펴냈다. 나중에 히에로니무스는 〈70인역 성서〉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히브리 성서 원본을 토대로 〈구약성서〉 전체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405년경에 이 작업을 끝마쳤다.

 

  히에로니무스의 번역은 즉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6세기 중엽부터 모든 낱권 성서들을 하나의 겉표지로 묶은 성서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책 안에는 보통 〈시편〉을 제외한 히에로니무스의 〈구약성서〉 번역본,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갈리아 시편〉, 〈토비트〉·〈유딧〉·〈복음서 개역본〉 등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 〈신약성서〉는 히에로니무스가 이전의 라틴어 역본에서 취해 약간 고친 듯하다. 또한 개신교와 유대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으로 분류하는 〈70인역 성서〉의 일부도 이전의 번역본에서 취하여 포함시켰다.

 

  여러 편집인과 교정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불가타 성서'의 여러 개정본을 발행했다.

 

  파리대학교는 13세기에 중요한 판본을 발행했는데, 그것의 1차적 목적은 신학 강의와 토론 때 통일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오래된 인쇄본인 불가타 성서는 모두 파리 판본에 근거를 둔 것들이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가 라틴어 성서로서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선언했으며, 결점을 최소한으로 줄여 이를 출판하라고 요구했다. 1

 

  592년 교황 클레멘스 8세가 발행한 이른바 〈클레멘스 불가타 성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 있는 성서본문이 되었다. 이것을 토대로 1941년에 '성심회' 역본이 번역되었고, 현대에 들어와 여러 교정판이 출판되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를 개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엠파스 백과사전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Eusebius]
  동의어 : 제롬[Jerome], 소프로니우스

 
 
  (영)Saint Jerome. 필명은 Sophronius.

  347경 달마티아 스트리돈~419/420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축일은 9월 30일.

  성서 번역자, 수도원 지도자.

 

 

                                           개요

  전통적으로 라틴 교부들 가운데 가장 학식이 높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동안 은수자(隱修者)로 지낸 뒤 사제가 되었고, 교황 다마수스의 비서로 일했으며, 389년경 베들레헴에 수도원 공동체를 세웠다.

 

  성서·금욕주의·수도원주의·신학에 대해 쓴 수많은 저서들은 중세 초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라틴어 번역성서 〈불가타〉로 유명하다.

 

 

                                           초기생애

  스트리돈(지금의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근처인 듯함)에서 부유한 그리스도교 부모에게 태어났다. 12세에 로마로 유학해 문법·수사학·철학을 공부했다. 라틴 문학에 매료된 진지한 학자로서 카타콤(지하묘지) 집회에 자주 참석했고, 366년경 로마 유학을 마칠 무렵 교황 리베리우스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뒤 20년 동안 일정한 주거지를 정하지 않은 채 이곳저곳을 여행했으며, 트레베리스(지금의 트리어)에서 수도원 생활에 깊은 매력을 느꼈고, 369년초 스트리돈 부근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 아퀼레이아에서 주교 발레리아누스를 중심으로 모인 금욕주의 엘리트 집단과 관계를 맺었는데, 이 집단에는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의 저서들을 번역한 저자 겸 학자인 루피누스도 있었다.

 

  373년경 이 집단이 흩어지자(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음) 동방을 통해 여행하기로 결심했다. 안티오크에 도착했을 때 여행으로 몸도 지치고 마음에도 갈등이 생겨 안티오크의 사제 에바그리우스의 손님으로 지냈으며, 아마 그곳에서 〈일곱 매질에 관하여 De septies percussa〉로 알려진 최초의 저서를 쓴 듯하다.

 

  안티오크에서 중병에 걸렸을 때인 375년 사순절 중반에 유명한 꿈을 꾸었다. 이 꿈에서 하나님의 법정에 끌려가 그리스도교도라기보다는 키케로주의자(BC 1세기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의 추종자)로 고소를 당해 심한 매질을 당한 뒤 다시는 이교 문학을 읽지도, 지니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다.

 

  오랜 뒤 루피누스와 논쟁을 벌일 때 이 꿈의 중요성을 최소화하기는 했지만, 이 꿈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고전문학을 읽을 수 없었고, 영적인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 꿈의 결과로 최초의 해석학 저서, 즉 성서의 〈오바디야〉에 대한 알레고리 주석을 썼는데, 21년 뒤에는 이 책을 젊었을 때 무지한 열정으로 쓴 것으로 간주해 평가절하했다.

 

  375년에는 칼키스 사막에 들어가 2년 동안 은수자로 지내면서 마음의 평정을 구했으나,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78년 히에로니무스는 수도생활에 대한 열망이 편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제 기능을 강요받지 않는다는 2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사제임명을 받았다.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스의 해석학 강의에 참석했고, 베레아의 나사렛파(유대인 그리스도교도)를 방문하여, 이들이 갖고 있는 히브리어 복음서가 〈마태의 복음서〉 원본인지를 조사했다.

 

  379~382년 거의 3년 동안 히에로니무스는 성서연구를 하면서 지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열렬한 제자였던 그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여,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신학자 이코니움의 암필로키우스와도 알게 되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그리스어 실력을 쌓았고, 오리게네스의 주석에 대해 점점 더 감탄하게 되었으며, 오리게네스의 〈구약성서〉 설교들 가운데 14편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연대기 Chronicon〉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378년에 마쳤다.

 

  그러나 생애 말기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교황 다마수스의 비서가 되어 로마로 돌아온 일이었다(382~385). 로마에서 성서연구를 계속하면서 금욕생활을 보급했고, 다마수스의 요청으로 간단한 해석학 논문들을 쓰고 오리게네스의 〈아가〉 설교 2편을 번역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수한 그리스어 사본들을 토대로 옛 라틴어 복음서 역본들을 자기 방식대로 개정한 일과 70인역(〈구약성서〉 그리스어 역본)의 몇몇 사본을 토대로 〈시편〉의 옛 라틴어 역본을 처음 개정한 일이다.

 

 

                                                후기 저작

  히에로니무스가 마지막 34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남긴 문학 유산은 당대의 논쟁들, 성서에 대한 열정, 수도원 생활의 산물이다. 당시에는 다양한 논쟁들이 벌어졌다. 이단에 반대한 주교 에피파니우스의 선동으로 동방에서 일어난 반(反)오리게네스 운동의 영향을 받아 오리게네스의 견해에 반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389경~392년에 〈루가의 복음서〉에 대한 그의 설교 39편을 번역한 바 있음), 친구들인 예루살렘 주교 요한네스와 루피누스에 대해서도 반대하게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처음에 편지를 주고받는 가운데, 이 아프리카 사람이 자신의 성서 관련저서들을 혹평한 데 대해 화를 냄으로써 서로에 대한 존경에 상처를 입힐 뻔했다.

 

  392(또는 393)년 이교도들의 이교문화에 대한 자부심에 맞서기 위해 그리스도교 저자들의 목록인 〈유명한 사람들에 관하여 De viris illustribus〉를 썼다. 처녀성과 혼인의 동등성을 주장한 수사 요비니아누스에 반박하여 신랄한 논쟁서 〈요비니아누스를 반박함 Adversus Jovinianum〉(393)을 썼다. 이 책은 대부분 명쾌한데 지나치게 거칠고, 때로 혼인을 쓸데없이 모질게 다룬 2, 3세기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사제 비길란티우스에 반박해 어느날 밤 수도원주의, 성직자 독신주의, 순교자 숭배와 관련된 특정 의식들을 옹호한 〈비길란티우스를 반박함 Contra Vigilantium〉(406)을 썼다. 펠라기우스 문제(인간 구원에서 신의 은총이 차지하는 역할을 최소화한 이단으로, 영국의 수사 펠라기우스의 이름을 땀)는 이 이단설을 주장한 저자가 직접 나타남으로써 로마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식(移植)되었고, 히에로니무스는 이에 대해 뛰어난 논쟁서 〈펠라기우스를 반박하는 대화 Dialogi contra Pelagianos〉(3권, 415)를 썼는데, 가공의 질문자들을 등장시키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객관화했다(→ 펠라기우스주의).

 

  베들레헴에서 벌인 성서제작 작업에는 성서학자들에게 유익한 2권의 서론적인 저서들이 포함되는데, 팔레스타인 지명들에 관한 유세비우스의 책을 번역 및 각색한 〈지명에 관한 책 Liber locorum〉과 히브리어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을 가공적인 어원 또는 출처와 함께 알파벳 순서로 소개한 〈히브리 인명 해석서 Liber interpretationis Hebraicorum nominum〉가 그것이다.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 Hexapla〉(히브리어 본문과 그리스어 역본을 나란히 6열로 배열하여 편집한 책)에 기초하여 70인역의 옛 라틴어 역본을 꾸준히 개정한 결과, 〈전도서〉·〈잠언〉·〈아가〉·〈역대기 상〉·〈역대기 하〉·〈욥기〉를 개정하게 되었고, 〈시편〉에 대한 로마 개정본에 오리게네스의 발음부호들을 덧붙였다.

 

  391~406년 원문을 토대로 〈구약성서〉 라틴어 역본을 제작했는데, 도구들이 매우 빈약했고, 또한 이 작업과정에서 받은 반발을 고려하면 주목할 만한 업적이었다. 베들레헴 주석들은 때로 성급한 집필, 전임자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 알레고리 해석에 대한 편애 등이 엿보인다.

 

  〈창세기의 히브리어 문제들에 관한 책 Liber Hebraicarum quaestionum in Genesim〉은 지리, 어원, 랍비 전승(성서시대 이후 유대인 학자들의 견해들)을 주로 다룬다. 〈시편〉에 대한 짧은 해설서들과 〈시편〉 10~16편에 대한 더욱 학문적인 해설서들을 썼다. 〈전도서〉 주석(387경)은 히브리 본문을 사용한 최초의 라틴어 주석이라는 점에서 해석학의 표본이다.

 

  대표적인 주석은 아마 〈구약성서〉의 예언서들일 것이다. 〈신약성서〉에 대해서는 〈마태오의 복음서〉를 문자적 의미를 강조하여 해설했고, 사도 바울로의 편지 4편(〈필레몬에게 보낸 편지〉·〈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디도에게 보낸 편지〉)을 알레고리 해석법을 강조하여 해석했으며, 304년경 순교한 라틴 해석학자 페타우(오스트리아)의 주교 빅토리누스가 천년지복설(千年至福說 : 장차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그의 추종자들이 1,000년 동안 다스릴 것이라는 견해)에 근거하여 쓴 〈요한의 묵시록〉의 주석을 개작했다. 그가 남긴 많은 편지는 해석학 문제에 대한 소논문들이며, 휘하 수사들에게 주는 성서 본문에 대한 설교들이다(→ 성서비평).

 

  베들레헴에서의 금욕주의에 대한 관심은 그가 벌인 많은 논쟁들에서뿐만 아니라, 유목민들에게 붙잡혀간 수사 말쿠스에 대해 쓴 전기, 기적과 여행 이야기들이 담긴 힐라리우스 전기, 콥트인들이 남긴 금욕주의 저서들(예를 들면 〈파코미우스의 규율 The Rule of Pachomius〉)에 대한 번역서, 수사들에게 한 설교들, 편지의 중요한 부분 등에도 반영되어 있다.

 

 

                                             영향

  히에로니무스는 폭넓은 학식, 특히 고전, 성서, 그리스도교 전승에 대한 이해로 유명하다. 깊은 사색가라기보다는 뛰어난 학자였고, 사색적인 신학자라기보다는 견고한 전통주의자였으며, 해석학자로서보다는 편집자로서 더욱 역량을 발휘했다. 그의 생애는 학문과 금욕주의를 절충한 것이며, 그가 남긴 편지는 사가(史家)·성서학자·신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을 끌었다.

 

  그의 영향은 특히 중세 초반에 더욱 폭넓고 깊었다. 주로 매체는 〈불가타〉(그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 역본)였으나, 해석학자 겸 인문주의자로서 남긴 저서들을 통해서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리스 사상의 많은 부분을 서방에 전달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W. J. Burghardt 글

                                                                                                                  엠파스 백과사전

 

 

 

 

                    요한 1서 5장 7절의 위조 경위

 

 
                                                                                출처 카페 > 성경비판 / 겸손
                                                                                원본
http://cafe.naver.com/biblewoo/3
 
 
 
 
  중세 시대에는 카톨릭의 전성시대와 함께 그들이 사용하는 라틴어 불가타역이 거의 성경 원문만큼의 신뢰를 얻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성경 그리스어 원문을 오히려 라틴어 불가타역에 맞추려는 시도까지 있었던 것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인본주의자(자유주의 학자)들의 선구자로서, 유명한 스페인 학자인 '안또니오 데 네브리하'(Antonio de Nebrija)는 스페인의 '알깔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 대학교의 3개국어(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대조 성경에 실릴 [불가타] 본문을 개정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카톨릭 교회가 히에로니무스(영어로는 '제롬')의 불가타역 성경을 공인된 유일한 역본으로 간주하기는 했지만 스페인의 학자 '네브리하'는 라틴어 불가타역 성경을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원문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시 존재하던 불가타역 성경 라틴어 사본들에 끼어든 분명한 오류들을 수정하고자 했습니다.

 네브리하는 불가타역 성경과 원어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어떠한 불일치한 점들이라도 해결하기 위해서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Jimenez de Cisneros) 추기경에게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권했습니다.

"우리 종교의 꺼져 버린 두 횃불, 즉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라는 횃불을 다시 밝히도록 하십시오. 이 일에 자신을 바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도록 하십시오. "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약의 라틴어 사본들 사이에 상이점이 발견될 경우에는 언제나 그리스어 사본들과 비교를 해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여러 라틴어 사본들 사이에 또는 라틴어 사본들과 그리스어 사본들 사이에 불일치한 점이 있을 경우에는 언제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믿을 만한 히브리어 원전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번역본을 회당에서 사용하는 것(히브리어 본문)과 동방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그리스어 본문)사이에 두었다. 이것은 로마 교회 즉 라틴 교회를 나타내는 예수의 양편에 도둑들이 매달려 있었던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네브리하가 라틴어 불가타역을 성경 원어 본문과 일치하게 수정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네브리하는 결함이 있는 개정판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보다는 그 작업을 그만두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알깔라 데 에나레스'의 3개국어 대조성경은 성서원어로 된 정련된 본문을 만드는데 있어서 분명히 큰 진전을 이룬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학문보다는 전통이 더 큰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편집자들은 불가타역 성경을 대단히 존중해서 몇몇 경우에는 라틴어 번역문을 그리스어 원문에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 원문을 라틴어 번역문에 일치시키기 위해서 신약의 그리스어 원문을 수정해야 한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한 가지 예를 '콤마 요한네움'(comma Johanneum)이라고 알려진 한 위조된 유명한 문구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문구는 신약의 요한1서 5장 7절인데, 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하늘에 아버지와 말씀과 성신이 계시니, 이 셋은 하나이니라." 

 이 문구는 어떤 초기 그리스어 사본에도 들어있지 않으며 요한이 편지를 쓴 지 몇세기가 지난 후에 삼위일체 논쟁이 격렬했을 때 언젠가 삽입된 것 같습니다.  

그 문구는 불가타역의 가장 오래된 라틴어 사본들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리스어 학자 '에라스무스(Erasmus)는 위조된 이 삽입 문구를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에서 빼버렸습니다.  

대조성경의 편집자들은 수 세기 동안 전통적인 불가타역 본문의 일부였던 그 문구를 빼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위조된 부분을 라틴어 본문에 그대로 두었으며 그 부분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그리스어 본문에 삽입하므로 두 난을 일치시키기로 하였습니다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60301&docid=460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