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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 바이블―윤철원] 요한복음 어떻게… 역사적 사실인 본문과 대화하라

영국신사77 2007. 2. 27. 09:39
업데이트 : 2007.02.23 18:12:39
[뉴스 인 바이블―윤철원] 요한복음 어떻게… 역사적 사실인 본문과 대화하라


세상과 교회를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사고가 편협되기 쉽다. 따라서 기독인은 성경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보는 매주 토요일 전문가들의 글을 통해 각종 사회현상을 성경적 세계관으로 분석,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최근 출판된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는 성경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증폭시키고 있다. 이 책이 우리 사회에 전달하는 메시지는 제국주의의 격랑 속에서 암울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주체적으로 성경을 수용, 정신의 부활을 꾀했던 한국 교회의 기억을 담고 있다. 또 한국 교회가 활력을 상실한 세계 기독교의 운명을 결정짓는 창조적 대안이며 한국 교회의 미래는 오직 성경의 바른 이해에 달려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도올의 성경 이해는 불행하게도 기독교의 운명을 이끌 만한 푯대이기는커녕 오히려 혼돈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성경 본문에 더 밀착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경륜을 다양한 장르로 증언하고 있다. 특히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그리고 그의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선언한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는 그 자체가 지시하는 목적을 인지하고 본문에 밀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만약 성경의 이야기 구조가 함축한 목적을 부정하고 독자가 구축한 학문적 입장으로 성경을 재단하고 곡해한다면 이는 성경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유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책 제1장은 헬라철학에 대한 도올의 해박함이 묻어있으며 박학다식의 빛이 발광하는 부분이긴 하나 그가 헬라철학과 그 배경에 기울이는 관심에 비해 정작 해석의 대상인 요한복음의 본문에는 밀착하지 않을 뿐더러 요한복음 자체를 그의 주장을 입증하려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가 헬라철학을 길게 설명하는 것은 요한복음이 헬라의 이원론적 신화 구조를 차용했지만 요한복음의 메시지는 이원론적이지 않고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 있다고 주장하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적어도 요한복음이 어떤 사상적 배경, 어떤 문화와 소통하는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그는 요한복음의 헬라적 영향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문서들을 언급했지만 헬라철학만으로 요한복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가 요한복음의 유대적 영향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고의가 아니라면 그는 좀더 전문성을 함양하고 요한복음의 본문과 대화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사실에 근거했다

성경은 역사 기록이나 특정 인물의 전기적 묘사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서나 전기문학을 읽는 것처럼 성경에 접근하면 수박 겉핥기에 그치고 만다. 성경은 실제역사 속에서 사셨던 예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 이야기를 집필하기 위해 복음서 저자들은 요세푸스나 필로와 같은 당시의 저술가들이 그랬듯 실제 발생한 사건들 중에서 적합한 사건만을 선별,기록했다. 따라서 복음서들의 이야기에, 그리고 당시 역사가들의 서술에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은 놀랍지 않으며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만약 복음서 저자들 사이의 기록이 상이할 뿐 아니라 당시 역사가들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복음서 저자의 창작이라고 주장한다면 한 마디로 난센스다.

누가복음(눅 1:4)과 요한복음은 저술 목적(요 20:30∼31)을 분명히 밝히는 흔치 않은 책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며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 이어질 생명의 구원자임을 선포한다. 도올이 헬라철학을 논하면서 주장하고자 했던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서의 구원’은 요한복음의 한 면일 뿐이다. 실제로 요한복음만 예수가 아버지께 가서 우리가 미래에 거하게 될 처소를 예비할 것이라고 기록한다(요 14:2∼3).

도올의 경우처럼 독자의 의도가 본문에 앞서고 독자의 목소리가 본문의 목소리를 억압한다면 성경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치열한 논구에도 불구하고 학문 없는 범인의 읽기 수준에 그치고 말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윤철원 교수(서울신대·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