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그라쿠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Gracchus, Tiberius & Gaius]

영국신사77 2007. 2. 18. 15:21

     그라쿠스, 티베리우스 [Gracchus, Tiberius Sempronius]

 

  BC 169/164(?)~BC 133. 6 로마.

  로마의 호민관(BC 133 재임).

  소규모 자작농 계층을 되살리기 위한 토지개혁을 주장하다가 그에 반대하는 원로원 의원들이 부추긴 폭동에서 암살당했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형이다.

 

  로마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어머니 코르넬리아(카르타고 장군 한니발을 격파한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딸)와 누이 셈프로니아(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아내)를 통해 여러 유력한 집안들과 정치적 유대를 맺었다. 아내 클라우디아는 스키피오 집안의 강력한 경쟁자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집안의 당시 우두머리였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딸이었다.

  로마가 헬레니즘 국가들을 점령하자 진보적인 가문들은 새로운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도 그리스 문화를 배웠다. 이 덕분에 그는 훌륭하고 명쾌한 논리를 세우게 되어, 타고난 대중연설 재능을 더욱 빛낼 수 있었다. 스토아 학파인 스승 블로시우스는 티베리우스에게 특별한 영향을 끼쳤으며, 스토아 철학의 주요 가르침인 도덕적 의무는 타고난 결단력과 끈기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티베리우스가 연설에서 보여준 민주주의 이론도 다른 그리스 선생들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모른다.

  병역은 로마 귀족이 지는 당연한 의무였으므로 티베리우스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지휘하는 부대의 하급장교로서 정규 군대생활을 시작했고, 카르타고 전쟁(BC 147~146)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웠다. 그리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콰이스토르(재무관)가 되어 콘술(집정관)인 망키누스와 함께 오랫동안 질질 끌고 있던 스페인 식민전쟁(BC 137)에 참가했다.

  가문의 명성과 타고난 성실함에 힘입어 스페인 부족들과 명예로운 협정을 맺음으로써, 로마 군대가 누만티아에서 전멸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반대로 로마 원로원은 그 협정을 거부했다. 이를 계기로 티베리우스는 스키피오파(派) 원로원 의원들과 사이가 멀어졌고, 그대신 클라우디우스 집안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졌다.

  군대에서 겪은 경험으로 그는 로마의 보이지 않는 약점을 알게 되었다. 로마는 지중해 지방에서의 정치적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인력을 동원했지만,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인적 자원이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가난한 농민들을 먹여 살렸던 원시적 자급경제가 새로운 요인들 때문에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특히 제국주의 전쟁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노예나 일용노동자를 써서 환금작물 생산에만 주력했기 때문에, 병사로 징집할 수 있는 유일한 계층인 자작농은 줄어드는 반면, 땅이 없는 시민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로마사).

  티베리우스는 로마에서 오래전부터 시행해오다가 30년 전에 없어진 정책을 대대적으로 되살려 인력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 정책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해 얻은 방대한 공유지에, 땅이 없는 시민들을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로마의 젠트리 계급(귀족 바로 아래 계급)은 로마가 정복한 공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 땅을 자신의 사유지로 간주하고 있었다. 원로원 내의 강력한 집단, 특히 클라우디우스 파벌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치적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여기며 티베리우스의 계획을 지지했다. 그는 지지에 힘입어, 땅이 없는 노동자들에게 적당한 면적의 공유지를 다시 나누어주기 위한 법안을 만들었다.

  이 법안의 새로운 점은 분배할 토지의 면적이나 사람의 수를 제한하지 않았다는 것과, 토지관리를 전담하는 토지위원회를 상설한다는 것뿐이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반대할 것은 분명했지만, 티베리우스는 공유지를 많이 차지하고 있는 대토지소유자들을 위해, 그 땅의 꽤 많은 부분을 사유지로 남겨두도록 허용하는 관대한 조항을 마련하면 그들을 달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토지개혁).

  이 조치를 시행하기 위해 그는 BC 133년에 입법권이 있는 호민관 지위를 얻었다. 그당시에는 보통 원로원의 조언에 따라 코미티아(민회)에서 호민관 주재로 법률을 제정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호민관들은 원로원의 승인도 받지 않고 여러 번 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토지분배법안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 콘술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와 대부분 클라우디우스 파벌에 속해 있는 몇몇 유력한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권위로 반대의견을 억누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게다가 수많은 농민들이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로마로 떼지어 모여들고 있었다.

  지루한 공개토론이 끝나고 법안이 제출되었을 때, 동료 호민관인 옥타비우스가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하여 표결을 막았다. 그가 양보하지 않자 티베리우스는 뒤늦게 원로원에 승인을 요청했지만 헛일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났어야 했으나, 토지분배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굳게 믿은 티베리우스는 거부권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내어, 지금까지 호민관을 선출하기만 했던 코미티아로 하여금 옥타비우스를 공직에서 몰아내게 했으며, 그뒤 법안은 통과되었다.

  그러나 옥타비우스가 해임당하자, 티베리우스를 지지하던 많은 사람들은 거부감을 가졌다. 그들은 호민관의 권위 자체가 손상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민의 뜻을 거역하는 호민관은 호민관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는 티베리우스의 변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토지분배법에는 새로 땅을 받은 사람들에게 농기구를 보급하는 비용에 관한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또다시 말썽이 일어났다. 티베리우스는 전통에 따라 원로원이 자금을 할당해주리라고 여겼지만, 스키피오 파벌인 노장파 원로원 의원 스키피오 나시카는 이 자금을 매우 적은 액수로 제한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2번째로 터무니없는 제안을 내놓아 그들과 맞섰지만, 이것이 뜻하는 바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나톨리아에 있는 페르가몬의 왕 아탈로스 3세가 BC 134년에 죽으면서 자기 재산과 왕국을 로마에 맡겼는데, 티베리우스는 새로운 법안에서 국민의 이름으로 그 재산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토지위원회에게 그 돈의 처분을 맡김으로써, 공공재산과 외국문제에 대한 원로원의 전통적인 권한을 침해했다.

  그는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고 호민관 임기가 끝난 뒤 기소되리라는 위협을 받았다. 사실 그는 호민관에서 물러나면 자기가 내놓았던 법률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을 모두 잃어버리고, 부유한 계층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코미티아 켄투리아타[百人會]에 기소당해, 호민관 옥타비우스의 면책특권을 침해했다는 혐의를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백성들이 토지분배법 폐지나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승인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또 하나의 잘못을 저질렀다. 지난 300년 동안 호민관이 재선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모호하게나마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었지만, 티베리우스는 BC 132년 호민관 선거의 재출마를 선언했다.

  스키피오 나시카를 비롯한 원로원 의원들은 이를 격렬하게 반대하고, 콘술인 스카이볼라를 설득해 선거를 강제로 중단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스카이볼라는 이번 선거에서 절대로 불법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겠다고만 얼버무렸다.

  한편 코미티아에서는 티베리우스와 다른 호민관들이 선거관리를 둘러싸고 말다툼을 벌였다. 개표는 중단되었지만, 그때까지 나온 결과로 보아 투표가 무사히 끝난다면 티베리우스가 이길 것은 분명했다. 그는 어떠한 폭력도 예상하지 않았으므로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았다. 콘술이 모호한 태도를 보이자, 격분한 나시카와 그의 동료들은 원로원에서 뛰쳐나와 몽둥이와 막대기를 움켜쥐고 소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그저 호민관 선출회의를 해산하기 위해 소동을 부리기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티베리우스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시민들 수십 명을 학살했다.

  정치적 과오는 티베리우스에게 있었다. 그는 토지분배법을 내놓은 뒤 원로원에 있는 지지자들과 신중하게 협력하지 않았고, 많은 원로원 의원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법안으로 자신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이때문에 스카이볼라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그를 버렸으며, 그뒤에야 그들은 타협안을 내놓았다.

  원로원은 토지분배제도를 계속 시행하도록 권고하면서도, BC 132년에는 티베리우스의 나머지 지지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정치법정을 열었고, 간신히 기소를 면한 스키피오 나시카에게는 이탈리아를 떠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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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라쿠스, 가이우스[Gracchus, Gaius Sempronius]

 

  BC 160/153(?)~BC 121 로마 근처 푸리나 숲.

  로마의 호민관(BC 123~122 재임).

  9살 위인 형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제안한 토지개혁안을 다시 제정하고, 원로원 귀족들의 권력을 줄이기 위한 여러 가지 법안들을 내놓았다(→ 로마법).

 

  로마 귀족의 아들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국가의 고위 공직을 맡았고, 당시 정치권력을 쥐고 있던 가장 유력한 집안들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 가이우스는 형 티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문학·웅변·철학을 강조하는 새로운 그리스 문화를 배웠다. 정치혼란 속에서 형이 살해당했지만, 그는 공직자가 되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형을 죽게 만든 폭력사건 책임자로 지목된 원로원 의원 스키피오 나시카를 소리높여 비난하고, 토지위원회에 참여하여 형 티베리우스가 내놓았던 토지개혁법을 시행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했다. 오랫동안 군대에 복무한 뒤, BC 126년 콰이스토르(재무관)를 맡았다.

  BC 124년 로마 귀족들은 음모를 꾸며 그를 사르데냐에 파견한 뒤 근무 기한이 훨씬 지나도록 로마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가이우스는 소환도 받지 않고 로마로 돌아와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반격했다.

  그가 이 논쟁에서 정력적인 정치가의 모습을 보인 뒤 BC 123년에 호민관 후보로 나서자, 수많은 유권자들이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가문의 적들이 반대해,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지는 못했다.

  호민관이 되자 그는 호민관의 입법권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기 시작했다. 가이우스는 부유한 상류층이면서도 원로원 의원이 아닌 지주와 사업가에게로 눈을 돌렸다. 기병대로 복무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뒤에 '로마의 기사'(에퀴테스)라고 불린 이들은, 대대로 원로원을 지지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어떤 집단도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급진적인 개혁을 하기 위해서, 파벌의 이익을 조장한다면 이들 부유한 상류층 대부분이 원로원을 지지하는 대신 가난한 시민들과 손을 잡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민주정체(民主政體)가 아니었다. 그가 시행한 조치들 가운데 원로원과 임기 1년의 공무원들이 하던 일을코미티아(민회)가 영원히 대신하도록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코미티아를 행정조직이 아니라 법률개혁 수단으로 이용했는데, 이것은 로마 공화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정책결정자인 콘술(집정관)에게 속주(屬州)를 1년 단위로 맡기도록 규정한 것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이 법률에 따르면, 콘술을 선출하기 전에 미리 어느 속주를 맡길 것인지 정하기 때문에, 원로원은 마음에 들지 않는 콘술에게 보복하거나 마음에 드는 콘술에게 보답하는 수단으로 속주 배정권을 이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귀족이었으므로, 콘술과 행정관들이 사소한 부분까지 코미티아의 통제를 받도록 하려는 의도는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가이우스가 BC 123년, 122년에 내놓은 조치들을 어떤 순서로 실행했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참모습을 알기란 더욱 어렵다. 그러나 가이우스가 호민관에 재선되어 다른 문제, 즉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기 전에 로마 정부에 대해 갖고 있던 자신의 계획을 모두 끝마친 것은 분명하고, 또한 노예가 아닌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주는 법안이 그가 내놓은 마지막 법안이었던 것도 분명하다.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은 가이우스가 취한 조치들이 귀족정체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한 전면적 시도였다고 비난했지만, 급진주의자들도 그의 조치에는 만족하지 못했다. BC 123년에 취한 조치는, 권력남용을 막고 형 티베리우스가 내놓았던 경제정책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가족의 원수를 갚는 것은 로마 정치에 항상 있는 일이었으므로, 그는 우선 티베리우스의 적들에게 보복했다. 그는 코미티아가 해임한 행정관들이 더이상 공직을 맡을 수 없도록 규정한 법안을 만들었다. 가이우스는 이 법안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동료들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 법안에는 원로원이 법정을 열 경우 반드시 코미티아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한 법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BC 132년 티베리우스 지지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정치법정이 저질렀던 것과 같은, 법에 의한 살인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재판관의 부패와 관계있는 2번째 법률은, 배심원이 어느 누구의 압력도 받지 않고 '공무원 재물강요죄'를 심판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제정되었다. 배심법정은 속주 백성들이 부당하게 빼앗긴 돈의 청구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함으로써 로마 총독들의 부정행위를 억제하기 위해 이미 26년 전에 생겼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모두 원로원 의원이었던 배심원들은, 속주에서 빼앗은 재물에 사사로운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재물강탈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가이우스가 내놓은 배심법은 원로원 의원들을 배심원에서 모조리 빼고, 그대신 좀더 공정할 듯 싶은 에퀴테스 출신들을 배심원으로 내세웠다. 지금 상당 부분이 남아 있는 배심법 원문은 가이우스가 실제로 시행한 배심법이거나, 또는 그것을 거의 그대로 본뜬 개정안인 듯하다.

  법정의 부패, 권력남용을 막으려고 내놓았던 특별 법정에 관한 법률안에서 볼 수 있는 가이우스의 결단력과 섬세함이 이 배심법 원문에도 나타나 있다. 이 법에 따르면, 모든 행정관과 원로원 의원을 배심원에서 빼는 문제를 아주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고, 배심원과 피고인이 같은 단체의 회원일 때는 아무리 좋은 자격을 갖춘 배심원도 그 소송사건을 다룰 수 없으며, 투표용지를 배심원들에게 나누어주고 거두는 방법과 투표를 집계하는 방법까지도 매우 긴 조항에서 엄밀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런 자세한 부분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가이우스의 특징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자료가 있다.

  그다음에 시행한 2가지 조치는, 자신의 지지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대도시 로마는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고용과 물가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가이우스는 우선 첫번째 조치로 로마 시민들에게 기본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제도를 확립했다.

  2번째 조치는 세금징수업무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아시아에 새로 세워진 속주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수지 맞는 일을 그 지방의 상인들이 맡아 거두어들인 세금을 로마 총독에게 바쳤지만, 이제는 로마의 재정을 좌우하는 로마 기사들의 금융조합이 세금을 징수하도록 해, 로마 금융업자들의 독점권을 다졌다.

  이 2가지 조치는 로마에 사는 주민들에게 표를 얻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었다.

 

  가이우스는 또다른 2가지 조치로 시골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그때까지는 징병되는 농민이 내던 군복값을 이제는 로마 국고(國庫)에서 부담하도록 했고, 티베리우스가 내놓았던 법안을 고쳐 식민지에 자치공동체를 확립하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개혁 덕분에, 그뒤 로마 식민지는 널리 확대되어 남부 유럽이 라틴화했다.

 

  BC 123년 늦여름, 가이우스는 원래 호민관 선거에 나설 뜻이 없었지만, 열광하는 민중의 뜻에 떠밀려 2번째로 호민관에 뽑혔다. 그러나 그의 배심법은 평민회에서 투표권을 행사한 35개 집단 가운데 고작 18표를 얻어 간신히 통과되었다. 이렇듯 팽팽히 맞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가 거둔 성공은 더욱 값진 것이었으나, 그는 훨씬 더 어려운 계획안을 품고 있었다.

 

  당시 로마가 안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이탈리아 반도의 2/3를 차지하고 있던 로마 동맹국들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의 전 세계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에 병력 대부분을 대주었으며, 인종·언어·풍습도 로마와 비슷했지만 로마 귀족들은 그들을 점점 더 멸시하고 모질게 다루었다.

  가이우스는 이 문제에 대해 복합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라틴어를 쓰며 로마와 비슷한 공동체생활을 하고 있는 동맹국들을 로마로 편입시켜 완전한 시민권을 주며 각 지역을 지방자치단체로 만드는 한편, 라틴족이 아닌 이탈리아 사람들은 라틴 동맹국들 다음가는 지위를 주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 교묘한 해결책에는 공평하면서도 헌신적인 정치가인 가이우스의 성품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로마의 모든 계층은 로마 시민권이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는 것을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가이우스가 그 방안을 고집하자 그의 인기는 당장 떨어졌고, 정치적 반대세력이 강해졌으며, 결국에는 그의 정치생명까지도 위태롭게 되었다.

 

  가이우스는 2개월 동안 아프리카에 가서 카르타고에 6,000명이 정착할 수 있는 식민지를 세웠지만, 로마에서 그의 입장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수많은 옥수수 상인들은 수익금이 차츰 줄어들자, 더이상 그를 지지하지 않아 가이우스를 편드는 사람들의 수는 자꾸 줄어들었다.

  가이우스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민중의 지지를 되찾기 위해 애썼다. 우선 귀족들이 사는 지역에서 포룸(광장) 근처에 있는 평민거주지로 자신의 집을 옮기고, 민중은 대중오락을 무료로 구경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시민권 법안에 대한 투표를 하는 동안 이탈리아 사람들이 로마에 머무는 것을 금지하는 콘술 포고령의 집행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원로원의 반대에 시달리고 로마 기사들의 지지마저 잃어버린 가이우스는, BC 123년 때보다 더 고립되고 선동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다. 시민권 법안은 거부되었고, 가이우스는 BC 122년에 실시한 호민관 선거에서 떨어졌다.

  이같은 불운 속에서도, 가이우스는 목숨까지 버리면서 명분을 지켰던 형과 똑같은 굳센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티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정치적 주장의 토대로 삼고 있던 토지분배법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었다.

  BC 121년에 한 호민관이 카르타고의 넓은 식민지를 해체하자고 제안하자, 가이우스는 남아 있는 평민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비합법적인 반대시위를 벌였다. 소동 속에서 가이우스파 사람 가운데 1명이 죽었고, 시위대는 로마 평민들의 옛 피난처였던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간신히 후퇴했다.

  원로원은 이 기회를 틈타서 콘술들에게 촉구하여 모든 위험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도록 하는 개정 칙령을 통과시켰다. 가이우스는 겁을 먹고 화해를 요청했으나, 콘술인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는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고 중무장한 기사들로 부대를 편성했다.

  아벤티누스 언덕에서는 학살이 벌어졌고 가이우스는 자살했다. 그러나 그가 만든 법률은 대부분 살아 남았으며,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계획도 잊혀지지 않아, 다음 세대 정치의 토대가 되었다.

  거부당했던 이탈리아 통일방안은, 로마 권력 토대를 거의 무너뜨린 파괴적이고 불필요한 내전을 치르고 나서야 결국 BC 86년에 인정받았다. 그러나 공화국 말기에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처럼 정치적인 지혜를 갖춘 뛰어난 정치가가 없었으므로 그가 대안으로 내세웠던 것처럼 내용이 알차고 중요한 개혁안을 제시하는 인물이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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