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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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러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 제왕(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 유목 봉건 영주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다. 이와 같이 유목 제국에 잠재된 근본적인 결함을 극복하려고,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의 아건조지대(亞乾燥地帶)에, 새로운 정치적 기지를 찾아서 강대하고 집권적인 제국(帝國)을 영위하려 한 것이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그는 형 몽케칸[憲宗]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 봉건 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 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集權的) 관료국가의 확립을 꾀하였다. 그가 시도한 정치적 사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1271년, 《역경(易經)》의 ‘大哉乾元’을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고, 중국 역대 왕조의 계보를 잇는 정통 왕조임을 내외에 선언하였다. 이어 74년에서 79년에 걸쳐 화이허강[淮河] 이남 지역에 있던 남송(南宋)을 평정해서, 명실공히 중국전토를 영유하게 되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일본 ·베트남 ·미얀마 ·자바 등지에도 침략군을 보냈다.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다스리는 동안에, 동아시아 전역의 대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쿠빌라이칸은 몽골제국의 종주권(宗主權)도 계승한 것이라며, 서방의 한국(汗國)들(킵차크 ·차가타이 ·오고타이 ·일 한국 등) 위에도 군림하려 해서, 유목적 전통을 고집하는 한국들은 그를 마땅치 않게 여겨, 원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대항하였다. 특히 오고타이한국의 왕 카이두는 이웃 차가타이 ·킵차크 한국의 왕들을 설득해서 반(反)쿠빌라이 동맹을 결성하여, 원나라 북서변의 요지를 공략하여 쿠빌라이 정권을 위협하였다. 항쟁은 쿠빌라이칸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는데, 1301년 카이두가 사망함으로써 전운(戰雲)이 가셨다. 이로부터 원나라는 한국들과 친교를 맺고 제국(帝國)의 종주권을 회복하였다. 아시아 전역에는 이른바 ‘몽골족 지배하의 평화’가 찾아와, 동 ·서의 문물이 자유롭게 교류하게 되어 국제무역이 번창하였다. 그 러나 원나라 내부의 국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여, 사회적 여러 모순들이 심화되어 갔다. 이에 편승해서 여러 지방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났는데도, 중앙에서는 권신(權臣)들이 정쟁(政爭)에 여념이 없었다. 폭동은 확대되어 한족(漢族)에 의한 민족적 반란으로까지 발전하여, 주원장(朱元璋:洪武帝)에 의한 명조(明朝)정권이 출현하였다. 68년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명나라의 군대에 빼앗겨, 순제(順帝:토곤 테무르)가 몽골 본토에 쫓김으로써, 원나라의 중국지배는 끝이 났다. 그뒤 몽골본토에 터를 잡은 원군은, 얼마 동안 명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쇠퇴하여 내분(內紛)으로 소멸되었다.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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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제국의 2배가 넘었던 원나라 원나라가 국경을 넓힐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절대적으로 원나라의 기마병의 위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원나라 기마병이 얼마나 강했는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목 민족의 기병 부대는 상당히 강한 편이었습니다. 몽골민족 역시 예외는 아니었지요. 그들의 기병이 강력하게 된 데에는 오랜 유목 생활을 통해 어릴 때부터 말을 다루기 때문에 말과 친숙하고, 초원에서 항상 멀리 보는 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얻어지는 좋은 시력, 오랜 내전으로 인한 전투에서 얻어진 실전 경험, 그들의 부대 편제에 있습니다. 종종 초원에 사는 몽골민족을 TV를 통해 볼 수 있는데, 초원에서 전통 방식대로 사는 사람들은 보통 낮은 시력이 좌우 2.0 이상입니다. 이렇게 좋은 시력이 평지에서는 절대적인 이점을 발휘하지요. 또한 그들의 말도 기마대가 위력을 떨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보통 병사 1인이 말 6마리를 끌고 출정했는데 이 말들은 전투시 사용하는 말이 지쳤을 경우 교대용으로 사용한 것 외에도 고기는 식량, 피는 식수, 뼈는 화살촉 등 매우 용도가 다양했습니다. 농경국가의 보병 부대가 보급을 유지하기 위해 대규모의 보급 부대를 두어야 했던 것과 달리, 몽고 기병은 별도의 보급 부대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에 훨씬 유리했던 것이지요. 특히 원나라의 가벼운 활과 검을 주로 이용하며 기동력을 이용해 전투를 했던 그들의 기동성은, 원의 유럽지배에 결정적이 승리 요인이었습니다. 당시 동부유럽에서 유럽 연합군이 항상 패배했던 것은, 당시 무거운 갑옷을 걸치는 기사 중심이었기 때문에, 기동성에서 밀려 전열이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어찌됐든 이런 기마병의 엄청난 이점을 안고 원나라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에까지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징기즈칸이 살아 생전에 정복한 땅만해도 약 777만 제곱킬로미터라고 하는데, 이는 알렉산더의 2.2배, 나폴레옹의 6.7배, 그리고 로마제국 영토의 4배에 해당하는 넓이라고 합니다.
징기즈칸이 정복한 지역은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에서 동쪽으로는 동중국해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시베리아의 삼림지대에, 남쪽으로는 파미르·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중앙평야까지 이릅니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의 잔존 세력과 대규모의 전쟁을 재개하여, 금을 멸망시키고 서방을 향한 새로운 정복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러시아와 동유럽의 점령을 위한 시도였는데, 볼가·부르갈인들의 제국은 1~2년만에 멸망했으며, 그 승리는 러시아 본토로 향하는 길을 연 셈이었지요. 그 무렵 러시아 중부와 북부는 도시국가와 독립 제후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몽골군에 차례로 함락되어갔습니다. 발트 해까지 진격했던 몽골군이 겨울 추위로 인해 진격을 멈춤에 따라, 러시아의 무역도시인 노브고로트를 비롯한 몇몇 도시만이 파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몽골군은 더 나아가 폴란드의 일부를 토벌했으며, 전위부대는 슐레지엔 지방에까지 그 세력을 뻗쳤습니다. 유럽과 서아시아에서의 몽골의 진격은 1241년 12월 오고타이의 죽음으로 중지되었습니다. 그래서 헝가리가 몽골의 땅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지요. 확대된 제국은 유목민 외에 수렵민·농경민을 포함하여 상당히 복잡했는데, 직할령인 남방 농경지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칭기즈 칸과 그의 동생의 자손들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리 강 유역을 중심으로 외몽골 서부에서 톈산 산맥에 걸친 몽골 고원 일대에 오고타이 한국(1224)이, 서요의 옛 땅인 중앙아시아에 차가타이 한국(1227), 바이칼 호 서쪽의 삼림지대와 남러시아의 킵차크 초원지대에 킵차크 한국(1243), 또한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이란 땅에 일 한국(1258)이 건국되었습니다. 몽골 제국의 5대 칸인 쿠빌라이는 원나라를 수립하여, 농경도시민이 공존할 수 있는 거대한 건조농업지대를 지배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복왕조로 변모하였습니다. 쿠빌라이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과제는 남송을 굴복시키는 일이었는데, 치밀한 준비 끝에 1268년 남송정벌을 재개하여, 11년후인 1279년에 긴 전쟁 끝에, 넓고 비옥한 남송의 토지를 복속시키고, 중국 강남지역을 최초로 정복한 왕조, 또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황제가 되었습니다. 한편 로마제국 이후에 동방과 교류가 없었던 유럽인들은, 몽골족이 빠른 기동력으로 엄청난 속도로 쳐들어오자, 그들을 당해낼 방도가 없어서 악마라고 부르면서 아주 두려워했습니다. 몽골의 기마병들은 잔인하기도 했으니까요. 원나라의 침입 후 페스트가 유럽에 퍼졌기 때문에, 이들이 페스트를 옮겼다는 설까지 있을 정도로 유럽에서는 원나라를 두려워했습니다.
원나라 기마병들이 초원을 달리며 저 멀리 유럽까지 정복해 갔던 모습을 상상하니 속이 다 후련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원나라의 정복전쟁이 고려에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속 시원해야 할 일만은 아니네요. 우리민족은 삼별초 항쟁 등으로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실패하여 결국 90년 간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일본은 원나라가 2번의 침공을 시도했으나, 태풍으로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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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제국과 원나라의 차이점
boyzone37 (2006-11-30 )
우선 몽고제국은 칭키즈칸의 죽음(1227년 ,60대 후반 추정)으로 칭키즈칸은 몽고제국을 크게 5한국으로 나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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