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강성했을
때는 유럽에서 트라키아(트라케) 지방부터 인도 변경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소유했던 제국(BC 312~64, 248년간
존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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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왕국의 창건자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에서 이 지역을 분리시켰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지 2년 뒤인 BC 321년에 바빌로니아의 총독(Satrap)이 되었다. 해체되어가는
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 장군들이 지리한 권력투쟁을 벌일 때,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로 마케도니아 왕위에
오른 안티고노스가 자신을 바빌로니아에서 추방했던 일이 있었으므로, 그에 대항하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도왔다.
BC 312년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보내준 병력을 사용하여, 가자에서 디미트리오스와
싸워서 이겼다. 곧이어 같은 해에, 얼마 안되는 병력으로 바빌로니아를 장악하고, 이곳에 셀레우코스 왕국을
건설했다.
BC 305년부터
왕국의 힘을 키운 다음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까지, 서쪽으로는 시리아와 아나톨리아까지 세력을 넓혀갔다.
서쪽에서는 BC 301년
잇수스에서 안티고노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BC 281년에는
케르소네소스 트라키아를 병합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불만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 의해 암살 당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장남인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가 BC 261년까지 통치했으며, 안티오코스 2세(BC 246~225), 셀레우코스 3세(BC 225~223), 안티오코스
3세 대왕(BC 223~187)이 그 뒤를 이었다.
안티오코스 3세 대왕 때에는 철저한 행정개혁이 특징이었다. 그는 문관과 무관 사이의 경쟁으로 늘 긴장되어 있는
2중권력체제를 제거하고, 이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체제에서 따온 여러 요소들을 근대화시켰다. 즉, 문관과 무관의
권력을 통합한 각지의 지방관(Stratgoi)들이 제국을 다스렸다. 서쪽은 사르디스가, 동쪽은 셀레우키아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국은
아나톨리아와 그 휘하의 그리스 도시들을 지배함으로써, 중동지역 전역에 막대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헬레스폰토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사이를 지나는 전략 요충지 타우루스의 통로를 장악함으로써, 이 지역의 상업과 무역도 지배하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국의 시리아
정착지, 그중에서도 특히 안티오크[안디옥]는 왕국이 군사적·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중심지 역할을 했다.
셀레우코스 왕국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중동의 토착문화보다 그리스 풍습과 관습들이 우세했다. 셀레우코스 왕국의 전(全) 역사를 통해 보면, 지배층은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던 마케도니아의 귀족계급 출신들이었고, 도시지역이 특히 그러했다.
그리스 문화의 주도권에 대한
저항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통치기간(BC 175~163)중에 절정에
달했다. 안티오코스 4세의 그리스 문화 증진책이 도를 넘어,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에게 바치는 조각상을 세우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행동은 BC 165년에
시작된 마카베인들의 봉기에 불씨를 당겼다. 이후 4반세기에 걸쳐 계속된 마카베인들의 저항으로, 마침내 셀레우코스 왕국의 유대교도들에 대한
지배는, 팔레스타인에 독립적인 유대 왕국을 창건함으로써 끝이 났다(→ 마카베오가).
셀레우코스 왕국은 BC
3세기경이 되면서 ,광대한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BC 190년 처음으로 로마인들에게
패배한 뒤로, 셀레우코스 왕국은 빠른 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에게 해의 그리스 도시들은 이미 셀레우코스의 명에를 벗어던졌으며, 카파도키아와
아탈리드 페르가몬이 독립했고, 다른 지역들도 켈트인들과 폰투스, 비트니아에게 빼앗겼다.
또 BC 3세기 중반경에는
파르티아·박트리아·소그디아나가 독립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코일레
시리아(레바논)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BC 200) 일시적이나마 아르메니아를 점령함으로써, 로마에게 빼앗겼던 아나톨리아 지역 대부분을 어느
정도 확충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죽고(BC 164), 시리아의 콤마게네와 팔레스타인의 유대 지역을 잃은 후부터, 쇠퇴는 가속화됐다.
BC 141년경에는
유프라테스 강 동편지역 전부를 잃었고, 디미트리오스 2세(BC 141)와 안티오코스 7세(BC 130)의 노력도, 이 왕국의 급속한 해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BC 64년 마침내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었을 때는, 이전의 강력했던 셀레우코스 제국은 시리아와 실리시아 동부지방에 한정되었으며, 그나마도 보잘것없는 지배력만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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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왕조 (BC358-BC163)
이 왕조는 귀족 안티오코스가 세운 왕국[셀레우코스 1세의
아버지가 안타오코스]이라, 안티오코스(혹은 안티고노스)왕조라고 한다.
셀레우코스1세 (BC358-280, 재위 BC 312~280, 32년간)는 시리아제국의 셀레우코스왕조를 건설한 왕이다.
마케도니아의 귀족 안티오코스의 아들로, 바빌로니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에우메네스와 싸워 패하여 이집트로 피신하기도 하였으나,
후에 회복하여, 영토를 이란과 마케도니아와그리고 인도북서부까지 다스리고, 찬드라굽타와도 관계를 맺었다.
BC312년부터 왕조를 열고 왕호를 사용하였다.
안티오코스1세(BC280-262)는 광대한 영토에 자기 이름의 도시를 많이 건설하여, 지배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 때에 만든
도시 중에 *시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이 성경에 등장한다.
또 시리아의 수도겸 맹주로 있었던 *다마스쿠스(다메섹)도 설명하려고 한다.
지중해연안은 프톨레마이오스가 빼앗아 돌레마이성을 건설하고, 이곳에 바울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 들린
곳이다.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에게 패하여 영토를 잃었다.
안티오코스2세(BC261-247)는 부왕이 잃은 땅을 회복하였다.
첫 번째 부인이 라오디케(라오디게아)로 왕비의 이름으로 건설한 도시가 7교회의 하나이다.
셀레우코스 1세(Seleucos Ⅰ Nicator,재위 BC 312~280, 32년간)
BC 358/354 마케도니아 에우로포스~281. 8/9 트라키아 리시마키아 근처.
마케도니아의 장군이며, 셀레우코스 왕조의 창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BC 323)에 벌어진 내분 속에서 그는 바빌론의 총독이 되었고, 다시 시리아와 이란을 중심으로 한 대제국의 왕이 되었다.
초기생애와 권력을 잡기까지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장군이었던 안티오코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알레산드로스 수하의 장교로서 페르시아 제국 정복전에 참전했고, BC 326년에는 히다스페스 강변에서 마케도니아 보병대를 이끌고 인도의 포루스 왕과 싸웠다.
BC 324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사람들을 동화시키려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수사에서 집단 결혼식을 올리게 했다. 이때 셀레우코스도 박트리아의 왕 스피타메네스의 딸인 아파마와 결혼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이혼하지 않은 마케도니아의 귀족은 셀레우코스뿐이었다.
BC 323년에 알레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셀레우코스는 헤타이로이(hetairoi : 동료들) 기병대의 지휘권을 넘겨받아, 섭정왕 페르디카스가 이집트의 총독(satrap) 프톨레마이오스를 축출하려고 벌인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이집트에 가서는 페르디카스 암살에 가담했다.
BC 321년 제국이 분열되었을 때는 바빌론의 총독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애꾸왕)가 페르디카스의 후원자였던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에 대한 정벌전의 지휘를 맡았다.
BC 317년 셀레우코스가 안티고노스를 도왔지만, BC 316년 에우메네스가 처형된 뒤, 안티고노스는 그에게 영지의 수입을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이것을 거부하고 도망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갔다.
BC 316~312년에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편의 제공으로 이집트에 머물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가진 안티고노스에게 위협을 느낀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리시마코스(트라키아의 왕), 카산드로스(마케도니아를 요구한 사람)가 동맹을 맺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동맹전쟁(BC 315~311)에서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장군이 되어,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군대를 지휘하여, 시리아 남부 가자 전투(BC 312)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인 디미트리오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로 다시 주의를 돌려, BC 312년 8월에 작은 병력으로 바빌론을 다시 정복했다. 셀레우코스 시대의 개막을 알린 이 사건은, 마케도니아 력으로 BC 312년 디오스(Dios) 1일(10. 7), 바빌로니아 력으로는 BC 311년 니산(Nisan) 1일(4. 3)로 기록되어 있다.
안티고노스는 바빌로니아의 동쪽은 장군인 니카노르에게, 서쪽은 아들인 데메트리오스에게 공격하게 했지만, 결국 셀레우코스를 쫓아내지 못했다.
BC 311년 안티고노스는 다른 적들과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셀레우코스는 여기서 제외시켰다.
왕조의 기반 강화
그뒤 몇 년 간 셀레우코스의 치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이 기간 동안 ,그는 이미 획득한 지위를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을 것이다.
BC 305년 다른 '후계자'(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디아도코이'라고도 함)들처럼, 그도 '왕'(바실레우스)이라 자칭했다. 그는 이란의 동부지역(위쪽 총독령들)을 지나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의 창건자 찬드라굽타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는 500마리의 코끼리를 받고, 영토를 양도한다는 협정을 맺었다.
BC 303 년, 인도에서의 전쟁을 끝낸 것은, 서부지역에서 정세가 변화한 탓도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가 안티고노스와 디미트리오스 부자에 대항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을 때, 셀레우코스도 여기에 참여했다. 그리고 BC 302년 겨울에 소아시아로 되돌아가,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와 연합하여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를 격파했다(BC 301).
안티고노스의 영토는 연합국들간에 분할되었는데, 셀레우코스는 시리아를 차지했다. 그런데 그 당시 시리아 남부지방인 코일레 시리아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것이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여러 차례에 걸쳐 벌인 시리아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그러나 한동안 셀레우코스는 그 지방을 차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왕국의 수도를 티그리스 강 유역의 셀레우키아에서 오론테스 강 유역의 안티오크로 옮겨,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데 그쳤다(BC 301~300).
프톨레마이오스는 리시마코스와 관계를 개선하려고 딸 아르시노에를 그에게 주었다. 이것을 본 셀레우코스는 데메트리오스의 딸인 스트라토니케에게 청혼하여, BC 298년 시리아의 로수스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셀레우코스가 실리시아·티레·시돈 등의 영토를 요구하자, 데메트리오스와 맺은 우호관계에도 금이 갔다.
4년후인 BC 294년, 셀레우코스의 궁정에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아파마가 낳은 셀레우코스의 아들 안티오코스가 새어머니 스트라토니케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져 건강까지 해쳤다. 셀레우코스는 아들에게 스트라토니케를 주고, 그를 군의 총사령관직에 임명하여 위쪽 총독령을 맡기고, 공동섭정의 지위도 주었다.
BC 285년 셀레우코스는 디미트리오스를 사로잡음으로써, 아시아를 정복하려 했던 그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디미트리오스는 아파메아에 억류되었다가 ,BC 283년 그곳에서 죽었다. 이어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가(家)의 불화에 관계하여, 그의 아들 아가토클레스를 암살했다.
BC 281년 2월 리시마코스는 코루페디움에서 셀레우코스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 왕국을 차지했다.
이제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을 다시 건설한다는 목표의 실현이 바로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에 쳐들어가기 위해 유럽을 횡단했다.
그러나 BC 281년 8월말 또는 9월초에, 셀레우코스는 이집트 왕위의 '후계자'로 프톨레마이오스가 보낸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셀레우코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1세는, 셀레우코스의 유골을 셀레우키아에 묻고, 그에 대한 사후 숭배를 하게 했으며, 그를 제우스 니카토르라는 이름으로 공경하도록 명령했다.
셀레우코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창건한 강력한 군주였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그의 치세 동안에 최대의 판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는데 크나큰 관심을 쏟아, 신도시도 많이 건설했다. 또한 학술적인 조사를 장려하여, 파트로클레스가 카스피해를 탐험했고, 메가스테네스가 갠지스 강을 조사했다.
그의 인상적인 얼굴과 당당한 인격을 잘 전해주는 청동흉상이 이탈리아의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되어, 현재 나폴리에 보관되어 있다.
J. Seibert 글
셀레우코스1세(BC358~BC280) 시리아
알렉산더 대왕의 부장으로 동방정벌에 참가했고, 알렉산더대왕 사후 BC321년 바빌로니아총독에 임명되었다. 한때 에우메네스와의 전투에서 져 이집트로 피신하기도 했으나, 곧 옛 영토를 회복하였고, 이어 이란 박트리아 인도 북서부까지 원정하였다.
안티오고스1세를 입수스 전쟁에서 물리친 이후에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원정을 준비하던중, 전날의 동맹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 당한다.
2대 안티오코스 1세 [Antiochos I, BC 324~BC 262?] |
시리아의 왕(재위 BC 280~BC 262?).
셀레우코스왕조의 초대 왕인 셀레우코스 1세의 아들. 광대한 영토에 많은 도시를 세워 지배의 기초를 다졌다.
BC 292년 이후 공동통치자로서 부왕의 영토 중 동쪽 부분을 다스리다가, BC 281년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왕이 되었다. 치세기간에는 많은 곤란에도 불구하고 부왕의 사업을 대부분 유지하였다.
BC 279년 그리스의 안티고노스 2세와 조약을 맺고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소아시아에서는 BC 276∼BC 275년 침입자인 야만족 켈트인(人)을 격파하여 소테르(Sōtēr:救濟者)의 칭호를 받으며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지중해 연안은 이집트에게 빼앗겼고, 또 신흥 세력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1세에게도 져서 점차 영토를 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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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행지]넴루트다이 유적지 | ||||||||||||
http://blog.naver.com/tiger6107/140009052407 | ||||||||||||
안티트로스 산맥 남동쪽 기슭 넴루트다이(넴루트산)에 있는 거대한 무덤유적으로서, 아나톨리아(소아시아) 동부에 있던 콤마게네왕국의 안티오코스 1세(재위 BC 69∼BC 34)가 건설하였다.
해발 2,150m의 산 정상에 돌을 잘게 부숴 만든 높이 50m, 지름
150m의 인공산이 있으며, 그 밑에는 곳곳에 바위 덩어리가 흩어져 있다. 1953년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나, 지하널방으로 통하는 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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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은 Antiochus the Great,
Antiochus Megas.
BC 242~187 이란 수사 근처. 헬레니즘 시리아 왕국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BC 223~187 재위). |
동쪽인 이란 지역에서 제국을 재건한 반면 소아시아
지역과 유럽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주(州)의 크기를 줄여 제국을 행정적으로 개혁하고, 군주숭배
의례(자기와 부인 라오디케를 신으로 받드는 것)를 창시했으며, 주변 국가의 군주들과 자신의 딸들을 결혼시킴으로써 관계를
개선했다.
셀레우코스 2세의 아들로 형 셀레우코스 3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안티오코스는 총리에 헤르미아스, 소아시아 총독에 아카이오스,
메디아와 페르시스 등 동부 속주들의 총독으로 몰론과 그의 형제 알렉산드로스를 선왕(先王)이 임명했던 대로 유임시켰다. 이듬해 몰론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을 참칭하자 안티오코스는 헤르미아스의 충고에 따라 남부 시리아를 장악하기 위해 벌였던 이집트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몰론으로 기수를
돌렸다. BC 220년 멀리 티그리스 강의 제방에서 몰론을 격파하고 메디아의 북서부지역인 아트로파테네를 정복했다. 그 직후 안티오코스는
헤르미아스를 죽임으로써 전대(前代) 통치의 영향력 대부분을 제거했다. 같은 해 아카이오스가 소아시아에서 왕을 자처했지만 자기 군대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안티오코스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이란사).
이제 안티오코스는 소위 제4차 시리아 전쟁(BC 219~216)을 벌이는 데 거칠 것이 없었다. 전쟁을 하는 동안 그는 셀레우키아인피에리아, 티레,
프톨레마이스와 같은 동부 지중해의 주요항구들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BC 218년 코일레시리아(레바논),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를 손에 넣었다.
BC 217년 시리아의 가장 남쪽 도시인 라피아에서 헬레니즘 이집트 왕국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의 군대(7만 5,000명 추정)와 접전을 벌였다. 그의 군대는 6만 8,000명이었다.
안티오코스는 이집트군의 좌익을 패주시켰지만 그의 군대는 중앙의 방진(方陣:중무장한 보병의 밀집대형)이 이집트의 새로운 방진에 의해 격파당했다.
뒤이은 평화조약에서 안티오코스는 셀레우키아인피에리아를 제외한 모든 정복지를 포기했다.
시리아 전쟁 이후 아카이오스의 반란에 대처했다.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와 동맹을 맺은 안티오코스는 BC 213년 아카이오스를 그의 수도 사르디스에서 사로잡아 야만적인 방법으로
처형했다. 소아시아 지방을 안정시킨 뒤 그는 유명한 동방 원정(BC 212~205)에 착수하여 멀리 인도까지 진출했다. BC 212년
안티오코스는 여동생 안티오키스를 아르메니아의 크세르크세스 왕과 결혼시켰고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쳤다. 파르티아 왕 아르사케스 3세의 수도 헤카톰필로스(카스피 해의 동남부)를 점령하고 BC 209년 그에게 동맹을 강요했다. 이듬해에는 박트리아의
에우티데모스를 격파했지만 그의 칭호와 통치권은 인정해주었다. BC 206년 안티오코스는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카불
계곡으로 진출했고 인도의 왕 소파가세노스와 우호관계를 새로이 했다. 아라코시아·드란지아나·카르마니아 등 이란의 속주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귀환한 그는 BC 205년 페르시스에 도착했으며, 페르시아 만 동부 해안의 상업국가 게르하의 시민들로부터 은 500탈렌트를 조공으로 받았다.
거대한 봉신국체계를 수립한 안티오코스는 '대왕'이라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비유하여
그에게도 '대왕'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죽은 후 안티오코스는 헬레니즘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 필리포스 5세와 비밀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두 사람은 이집트 밖의 프톨레마이오스 영역을 분할할 것을 꾀했다.
안티오코스는 남부 시리아, 리키아, 실리시아, 키프로스를, 필리포스는 서부 소아시아 지방과 키클라데스 제도를 차지하기로 했다. 안티오코스는
코일레시리아에 침입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장군 스코파스를 BC 200년에 요르단 강의 발원지 근처인 파니온에서 격파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획득했고 유대인의 신전국가에는 특별한 권한을 허용했다. 그러나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진군하던 필리포스는 로도스, 페르가몬과 전쟁을 벌였다. 두 나라는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로마에 원정을 호소하면서 두 헬레니즘 왕
사이의 동맹 사실을 알렸다. 로마는 헬레니즘 국가간의 관계에 결정적으로 개입해왔다. 필리포스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BC 200~196)에서 로마에게 패했다. 안티오코스는 그를 돕지 않았고 도리어 로마가 필리포스와 싸우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집트에 침입했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사절을 보냈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BC 195년의 평화조약에 의해 안티오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100년 동안 각축을 벌였던 남부 시리아 지방과 소아시아의 이집트 영토를 영원히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딸 클레오파트라를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시켰다. 이집트는 사실상 셀레우코스 왕조의 보호국이 되었다(→ 로마사).
만족할 줄 모르는 팽창욕에 휩싸인 안티오코스는 BC
198년에 페르가몬 왕국 일부, BC 197년에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를 점령했다. BC 196년에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일찍이 셀레우코스
1세가 BC 281년에 획득한 바 있었던 트라케에 진출하여 이곳의 종주권을 선언함에 따라 로마와의 지겨운 소모전과 외교전이 뒤따랐다. 로마는
안티오코스에게 여러 번 사절을 파견하여 유럽에서 물러날 것과 소아시아의 모든 자치 공동체들을 자유롭게 놓아둘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사실상 셀레우코스 제국의 서쪽 영역의 해체를 의미했으므로 안티오코스는 당연히 거절했다. 로마와의 긴장상태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때문에 더욱 고조되었다.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배한 후 카르타고에서 도망하여 BC
195년 안티오코스에게 왔고 그의 고문이 되었다.
안티오코스는 이전에 자신이 저버렸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에게 동맹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필리포스·로도스·페르가몬, 그리고 아카이아 동맹은 로마와 결합했다. 그리스에서 로마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불만을 가진 아이톨리아 동맹만이 유일하게 안티오코스에게 자신들의 해방자가 되어달라고 요구했으며 그를 동맹의 총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안티오코스는 이들에게 의지해 BC 192년 가을 단지 1만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데메트리아스에 상륙하여 에우보이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는 중부 그리스에서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BC 191년 2만 명 이상의 로마군이 트라케에서 안티오코스의 지원병력을 차단했고
테르모필레(그리스에 있음) 고개에 있던 그를 포위공격했다. 잔존부대와 함께 그는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도망했고 이곳에서 바다를 통해 에페수스로
건너갔다. 그의 함대는 로마·로도스·페르가몬 연합해군에게 완전히 괴멸당했다. 로마군은 BC 190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넜다. 안티오코스는 이제 로마가 이전에 제시했던 조건에 따라 협상하려고 했다. 그러나 로마는 그에게 먼저 타우루스 산맥 이서 지방에서
철병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거절한 안티오코스는 시필로스 산 근처의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잡다하게 끌어모은 7만 명의 병력으로 로마와 그 동맹군 3만 명을 맞아 싸웠다. 동부지방에서 전쟁을 계속할 수는 있었지만 그는 아파메아
평화조약을 맺고 유럽과 타우루스 이서 지방의 소아시아에 위치한 모든 정복지를 포기했다. 아울러 보상금으로 12년 동안 1만
5,000탈렌트를 지불해야 했고 그의 코끼리와 함대를 양도했으며, 아들 안티오코스 4세를 포함한 인질을 바쳤다. 그의 왕국은 이렇게 하여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서부 이란으로 축소되었다. BC
187년 안티오코스는 크게 부족한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공물을 강요했던 수사 근처의 한 바알 신전에서 살해되었다.
H. Volkmann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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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Antiochos IV, BC 215?~BC 163, 12년간재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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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ochos Epimanes('狂人')라고도
함.
(Epiphanes는'신의 顯現'이라는 뜻) BC 215경~164 이란 타바에. 헬레니즘 시리아 왕국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BC 175~164 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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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3세 대왕의 셋째 아들로, BC 190~189년 로마와의 전쟁에서 아버지가 패배하자 BC 189~175년
로마에서 인질생활을 했다. 이때 로마의 제도와 정책을 배우고 그것에 경탄했다. 그의 형제 셀레우코스 4세는 자신의 아들 디미트리오스와 그를 교환했다. 셀레우코스가 반란자 헬리오도로스에게 살해되자 안티오코스는 그를
내쫓았다. 시리아의 정정(政情)이 불안했던 이 시기에 이집트의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후견인들은 코일레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 등 이전에 안티오코스 3세가 정복한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시리아와 이집트 양측은 모두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BC 173년 안티오코스는 로마와
안티오코스 3세가 맺은 아파메아 조약(BC 188)에서 주기로 한 전쟁 배상금 나머지를 모두 갚았다(→ 로마사, 고대 이집트).
안티오코스는 이집트를 먼저 침략함으로써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집트의 공격에 선수를 쳤다. 펠루시움과 카시온 산 사이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펠루시움을 정복했다. BC 169년에는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이집트 전역을 점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안티오코스의 조카였으며(안티오코스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했음), 안티오코스는 로마가 간섭할 아무런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의 보호자 자격으로 이집트를 지배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형제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누이 클레오파트라 2세에게 대항 정부를 세우도록 간청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소요 때문에 안티오코스는 시리아로 되돌아가야 했지만 펠루시움에 강력한 부대를 배치하여 이집트에 대한 접근에 안전을
기했다.
BC 169(또는 168)년 겨울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는 안티오코스에게 모든 헬레니즘 왕국들에게 위험한 존재인 로마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자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그의 형제, 누이와 제휴를 맺고 로마에 새로이 원조를 요청했으므로 안티오코스는 전쟁을 준비했다.
안티오코스의 함대는 키프로스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키프로스의 총독은 그에게 섬을 넘겨주었다. 안티오코스는 BC 168년 이집트에 재차
침입하여 키프로스와 펠루시움의 할양을 요구하면서 하(下)이집트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진을 쳤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기반은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2일 로마군이 피드나에서 페르세우스의 마케도니아 군대를 물리치자 안티오코스가 거둔 승리는 빛을 잃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외 엘레우시스에서 로마 대사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안티오코스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철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놀란 안티오코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지만,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안티오코스가 서 있는 땅 주위에 원을
그리고 그 원을 벗어나기 전에 명확한 답변을 하라고 윽박질렀다. 이같은 공개적인 모욕에 당황한 왕은 곧바로 요구에 따르기로 동의했다. 로마의
간섭으로 다시 현상유지가 이루어졌다. 이집트가 지배권을 주장했던 남부 시리아의 영유권이 허용됨으로써 안티오코스는 영토의 상실을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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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동방인들, 즉 비(非)그리스인이 주로 거주하는
소아시아와 페르시아 지역에 그리스 도시를 건설하여 육성함으로써 경제적·사회적으로 왕국을 부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즉위하기 전에도 이미
안티오코스는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건설과 극장 장식에 헌금을 냈다. 그는 오론테스의 안티오크에 에피파니아(그의 이름을 본떴음)라는 구역을 새로 건설하여 시를 확장했다. 이 구역에다 도수관(導水管),
공회당, 시장,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에게 바치는 사원을 세웠다. 그를 아시아의 '소테르'(해방자, 구제자)로 숭배하는 바빌론은 그리스인
식민도시가 되어 자유가 보장되었다. 또다른 에피파니아가 아르메니아에 세워졌다. 엑바타나(페르시아에 있음)도 에피파니아로 불렸고 그리스 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여러 도시들은 그 내부에서 통용되는
동전을 주조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페르시아 만에 있는 안티오크의 조폐소는 인도와 메소포타미아 강 어귀 지역 사이의 해양무역에 기여했다(→
바빌로니아).
안티오코스의 헬레니즘화 정책이 번성하고 있던 동양의
사원조직, 특히 유대 사원과 갈등을 일으켰다. 안티오코스 3세 시대 이래 유대인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렸다. 유대인은 두
파벌, 즉 종교적인 정통 하시드파(독실한 자)와 헬레니즘을 선호하는 개혁파로 분열했다. 재정상의 이유 때문에 안티오코스는 개혁파를
지지했고, 상당한 자금을 받은 대가로 대제사장 야손에게 예루살렘에 김나시온을 세우고 젊은 층의 교육에 그리스 방식을 도입하도록 허락했다. BC 172년 안티오코스는 더 많은 공납을
받고 야손의 자리에 메넬라오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BC 169년 안티오코스가 이집트에서 전쟁중일 때 야손은 성채만
빼놓고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경쟁자 메넬라오스의 지지자들을 많이 죽였다. BC 167년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을 강습하여 탈환하고
헬레니즘화를 강화했다. 예루살렘은 특권을 박탈당하고 시리아군이 영구히 주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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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과 그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안티오크인들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야훼 숭배와 유대인의 모든 의식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 올림피오스의
제단을 세우고, 왕의 조상(彫像)을 우상으로 세우며 그 발 밑에 제물을 놓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신성 모독에 대항하여 반(反)그리스 유대인
지도자 유다스 마카베오는 게릴라전으로 하시드파 봉기를 일으켰고 수차에 걸쳐 안티오코스가 진압하라고 보낸 장군들을 무찔렀다. 유다스는 부분적인
사면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의 아크라 지구를 제외한 유대 지역 전부를 장악했다. 마침내 BC 164년 12월 제우스의 제단을 부수고 사원을 다시 정화할 수 있었다. 안티오코스는 확실히
하시드 운동의 힘을 과소 평가했다. 그 힘이야말로 약 1세기에 걸쳐 독립 유대 국가를 유지하도록 만든 배경이었다. BC 166년에 안티오코스는
안티오크 근처 다프나이에서 장대한 군사 열병식을 벌여 세상에 그의 힘을 과시했는데도 이때에 반란이 시작된 것을 보면 유대인의
투쟁정신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 열병식에는 2만 명의 마케도니아 방진군(方陣軍)과 로마 무기로 무장한 500명의 용병을 포함한 4만
6,000명의 보병이 참가했고, 그 뒤를 8,500명의 기병과 306기의 장갑코끼리 부대가 따랐다. 그뒤 안티오코스는 제국의 동쪽을 위협하던
파르티아에 대한 원정을 벌여 그 지역에서 세수입을 회복했으며, 그에게 등을 돌린 아르메니아의 아르탁시아스에게
종주권 인정을 강요했다. 또한 페르시아 만에 안티오크라는 도시를 건설했으며 아라비아 해안에 원정대를 보냈다. 그는 BC 164년말 페르시스의
타바에(또는 가바에:지금의 에스파한으로 추정됨)에서 병으로 죽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엘람(지금의 이란에 있음)에서 나나이아 신전을
약탈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벌로 죽었다고 믿었다.
H. Volkmann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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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쿠스4세 에피파네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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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王朝[Ptolemaeos dynast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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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emaeos Ⅰ
Soter)
* (Soter는 그리스어로 '구원자'라는 뜻)
BC 367/366(또는 BC 364) 마케도니아~283/282 이집트[84세].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대 왕. 마케도니아 장군 출신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에 있다가 훗날 이집트의 왕이 되어(BC 323~285),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판도 안에서 세워진 어떤 왕조보다 오랫동안 지속했으며, BC 30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마인에게 굴복했다.
초기생애
프톨레마이오스는 마케도니아의 에오르다이아 지역 출신의 귀족인 라고스의 아들로, 그의 가문은 그가 나타날 때까지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마케도니아의 아르가이 왕조와 친척 관계에 있던 아르시노에였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실의 시동(侍童)으로 있으면서 교육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때 알렉산드로스와 친해졌다.
BC 337년 그는 황태자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추방을 당했으나, BC 336년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오른 뒤, 마케도니아로 다시 돌아와 곧 왕의 근위대에 들어갔다.
BC 336~335년에 벌어진 알렉산드로스의 유럽 원정에 참여했던 그는, BC 330년 가을 알렉산드로스의 개인 경호원으로 임명되었고, 이 자리에 있을 때인 BC 329년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3세를 암살한 자객을 사로잡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고원지대로 진격해 들어가는 동안 그는 알렉산드로스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박트리아(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 있었음)에서 인더스 강으로 진격하던 중에(BC 327~325) 벌어진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워 히다스페스 강(지금의 인도 젤룸 강)을 지키는 마케도니아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같은 그의 군사적 업적에 대해 여러 번 표창을 내렸으며,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에서 페르시아인 아르타카마와의 성대한 결혼식을 열어주었다. 이 일은 마케도니아인과 이란인들을 서로 섞으려 한 알렉산드로스의 정책이 최고조에 달했던 행사였다.
이집트 총독 시절
알렉산드로스 밑에서 신중하고 믿음직한 군대 사령관으로서 명성을 확고히 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뛰어난 외교술과 전략적 능력을 지닌 정치가이기도 했다. 이 점은 BC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그의 왕위를 놓고 벌어진 오랜 기간에 걸친 분쟁에서 입증되었다.
장군들이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통일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음을 애초부터 확신하고 있던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바빌론에서 열린 회합을 통해 거대한 제국의 여러 속주(satrapy)들을 장군들끼리 나누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집트의 사트라프(총독)로서 인접한 리비아와 아라비아 지역까지 관장하게 되었고, 나일 강 유역이 갖는 지리적 고립이라는 이점을 잘 살려, 이곳을 헬레니즘 문화권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국내의 행정을 정비하는 여러 조처들을 취하고 키레나이카(리비아의 최동부 지역)와 키프로스를 비롯해 시리아 및 소아시아의 해안선 지역도 획득했다. 그의 생각은 이를 통해 군사적 안전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그리스에 대해서는 우호 정책을 취해 그곳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고히 유지했으며, 이집트 원주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BC 322년 프톨레마이오스는 내부의 분란을 이용해 키레나이카에 있는 그리스의 한 아프리카 식민 도시를 획득했다.
BC 322~321년 그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다른 '계승자들'과 연합해 옛 제국의 아시아 지역 통치자 페르디카스와 싸웠다. 그결과 계승자들의 연합세력이 승리를 거두었고, 페르디카스는 전쟁중 암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외교적 역량은 이 전쟁에서 시험을 받았다. 시리아 북부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제국의 여러 속주에 대한 분배가 다시 이루어져, 유럽 지역을 관장하는 장군인 안티파트로스가 마케도니아 제국의 섭정이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와 키레네에 대한 소유권을 재확인했다. 더 나아가 그는 안티파트로스의 셋째 딸인 에우리디케와 혼인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BC 317년경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카산드로스의 손녀 베레니케 1세와 다시 결혼했다.
카산드로스는 그에 앞서 BC 319년 아버지가 죽자 ,그가 사전에 지명해놓은 계승자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제국의 일부 지역을 점령한 그는 BC 305년 자신을 마케도니아의 왕이라 불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BC 315~311년 '제국의 계승자들'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키프로스를 얻었다. 이 전쟁중 그는 가자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BC 312)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집트인 부대가 이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BC 310년 전쟁이 다시 일어났고 BC 306년 키프로스를 다시 잃었다. 키레네도 한동안 상실했으며 BC 308년 손에 넣었던 코린트를 비롯해 인접한 시키온과 메가라에 있는 중요한 그리스 도시들을 되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BC 306년 키프로스의 살라미스 근처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큰 패배를 당했고, 이 해전의 승자인 안티고노스 1세는 아들인 디미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의 도움을 받아 BC 306년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 대한 안티고노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뒤, 그를 추종하고 있던 나머지 총독들도 BC 305~304년 제각기 왕이라 칭했다.
이집트의 왕 시절
자신을 왕이라 칭한 프톨레마이오스가,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계속되는 안티고노스와의 전쟁 문제였다. 이제 전쟁의 초점은 로도스 섬에 집중되어 있었다.
BC 304년 그는 로도스 섬의 주민들을 지원해 안티고노스에 대항했으며, 이때 '구원자'(Soter)라는 성스러운 칭호를 얻었고, 그뒤부터 그를 부를 때는 이 이름을 사용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해체는, BC 301년 소아시아의 입소스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눈앞에 다가왔다. 이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는 제국의 다른 계승자들에게 패배를 당했고, 이는 이들이 자기들의 왕국에 경계를 확고히 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같은 이유로 프톨레마이오스와 바빌론의 셀레우코스 1세 간에, 시리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특히 대상(隊商) 무역로의 종착지 역할을 했던 시리아 남부의 항구들이 분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타협을 통해 일시적이나마 평화적으로 해결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코엘레시리아(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팜필리아와 리키아, 소아시아 남부의 피시디아 일부까지 점령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는 BC 308~306년 군사적 패배를 당해 타격을 입었고, 따라서 재위 말기 15년간은 전쟁보다 동맹과 정략 결혼으로 자신의 제국을 보전하고 확대하는 정책을 취했다.
BC 300년 트라키아(지금의 불가리아)의 리시마코스와 동맹을 체결하고, BC 299(또는 298)년 그에게 자신의 딸인 아르시노에 2세를 주어 결혼하게 했다.
또한 이와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의붓딸인 테옥세나를 시라쿠스(시칠리아 남동부)의 참주 아가토클레스에게 시집보냈으며, BC 296년경에는 디미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자기 딸인 프톨레마이스와 그를 약혼시켰다.
디미트리오스의 매부로 이집트 궁정에 인질로 와 있던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에게는, 의붓딸인 안티고네를 주었다. BC 298년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 키레네를 복속시키고, BC 294년경에는 키프로스를 비롯해 페니키아의 해안 도시인 티루스와 시돈을 손아귀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벌어진 제국의 계승자들간의 전쟁(BC 288~286)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셀레우코스·리시마코스·피로스와 함께 디미트리오스에 대항했다. 이집트 함대는 아테네를 마케도니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고노스 1세가 BC 315년 결성해 에게 해에 있는 대부분의 그리스 섬들을 포괄했던 군도 동맹(League of Islanders)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집트가 그뒤 수십 년 간 지중해에서 전력의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군도 동맹 덕분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현실적인 정치적 여건에 따라 동맹과 연합 관계를 바꾸어 감으로써,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국제 정세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외교정책을 고수하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항해 이집트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해외 영토를 직접 통치하거나 정치적 주도권을 쥐는 방법으로 이집트의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내정을 정비하고 후계자를 양성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BC 290년 그는 아내인 베레니케 1세를 이집트의 여왕으로 세웠으며, BC 285년에는 베레니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BC 308) 둘째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공동 섭정이자 왕위 계승자로 임명했다. 이같은 이집트의 파라오 시대 때의 형식을 따른 왕위 계승 규정 덕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BC 283년에서 BC 28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죽었을 때, 권력 승계가 평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기 왕들은 이집트를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데 몰두해 있었으나,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없으므로 프톨레마이오스가 어떤 식으로 착취했는지 자세한 내용을 확정지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통치기간중에 이집트인들에 대한 차별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가 건설한 유일한 도시는 상(上)이집트에 있는 프톨레마이스였다. 또한 그는 마케도니아의 군사 지휘관들을 이집트 내 각 지방의 행정 책임자들 곁에 배치한 듯하며, 노골적이지는 않았으나 법적·재정적 문제에 어느 정도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재정 문제를 관리하기 위해, 당시 이집트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화폐제도를 도입했다.
처음부터 그는 이집트인들에게는 유화정책을 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4,000명이라는 보잘 것 없는 수에 불과한 자신의 군대에, 병사들을 충원하기 위해서는 이집트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멤피스에서 이집트와 그리스의 종교를 융합시키는 사라피스 의식을 정례화했으며, 페르시아인들에게 파괴당한 파라오의 신전들을 복구했고, 고대 이집트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한편, 이집트의 귀족과 성직자들을 후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학자와 예술가들이 함께 일하는 공동의 장소인 무제이온(Mouseion:박물관)을 세웠으며,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건립했다. 그는 예술과 학문을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글을 쓰는 작가였다.
죽기 전 몇 년 간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대한 신빙성있는 내용의 역사책을 썼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후세에 이 책을 대량으로 인용해 글을 쓴 역사가인 아리아노스를 통해 상당 부분의 내용을 재구성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생전에 몇 차례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신격에 이른 사람으로 찬양받았으며, 죽은 뒤에는 모든 이집트인들로부터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
프톨레마이오스1세
(BC367~BC283, 84세) 이집트
역시 알렉산더대왕밑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대왕이 죽은후 이집트로 건너가 기반을 잡고, 후에는 키레네를 병합하였으며, BC305년부터 왕이라 칭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외교적수단이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으며, 팔레스티나(유대지역)과 키프로스, 에게해의 여러도시와 소아시아를 손에 넣었다.
매우 강성했던 시리아의 셀레우코스1세도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암살됨으로써, 그의 세력은 줄어든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의 친구이기도 했는데, 후에 알렉산더대왕을 신격화하기도 한다.
그가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클레오파트라7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15세(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아들) 때 막을내리며, 그의 왕국은 마케도니아나 시리아와 달리, 친로마 정책 덕분에 수명을 연장하게된다. |
(Philadelphos는 그리스어로 '형제를
사랑하는'이라는 뜻)
BC 308 코스~BC 246.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2번째 왕(BC 285~246 재위). |
교묘한 외교로 세력을 확장하고, 농업과 상업을
발전시켰으며, 알렉산드리아를 예술과 과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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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지만, BC 283~282년 단독 통치자가 된 뒤 가족들 가운데 자신의 경쟁자가 될 만한 사람들을
모두 숙청했다. 이 권력 투쟁으로 그의 첫 아내 아르시노에 1세도 추방되었다. 아르시노에 1세는 트라키아의 왕인 리시마코스의 딸이었다.
그후 프톨레마이오스는 누이인
아르시노에 2세와 재혼했다. 이 사건은 그리스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알렉산드리아 궁정 시인들은 이 결혼을 축하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왕국과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어려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시리아와 소아시아 및 에게 해 지역에서 그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배를 확대하는 한편,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에서도 영향력을 주장했다. 이집트가 인도와 로마에 사절단을 보낸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정치적·상업적 이해관계가 얼마나 광범위했는가를 반영한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이집트의
새로운 전쟁(BC 274~270)은 경쟁 왕국들의 기본 입장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가 마케도니아 왕인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 대항하여 일으킨 크레모니데아 전쟁(BC 268 ?~261)은, 에게해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동맹국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에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2세 및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의 연합 세력과 맞서 싸운 제2차 시리아 전쟁(BC 260경~253)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군사작전의 실패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외교
수완으로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 그는 우선 안티고노스를 부추겨 강화조약(BC 255)을 맺은 다음, 딸 베레니케를 자신의
적인 안티오코스 2세에게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시집 보내는 방법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제국과 이집트의 전쟁을 끝냈다.
그의 정치적 수완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안티오코스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의 딸과 결혼하기 전에 전처인 라오디케를 쫓아내야 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당분간 셀레우코스 왕조의 적개심에서 해방되고 이집트 경제가 제공하는 재물의 뒷받침을 받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다시 그리스에 전념하여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국과 다시 맞서 싸우라고 그리스를 부추겼다.
마케도니아군이 그리스에 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에게 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거듭 발휘하여 크레모니데아 전쟁 때 당한 패배를 설욕했다. 그는 또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3세를 키레네 왕 마가스의 딸과 결혼시켜 자신의 상황을 더욱 개선했다. 그때까지 마가스는
상당히 골치아픈 이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세계에서 완전한 주도권을 누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경쟁자들을 그의 외국 영토가 이루고 있는 넓은
완충지대 너머에 묶어둠으로써 이집트에 되도록 유리한 정세를 확보하려고 애썼다. 그는 여기에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가장 심한 타격의 예봉은
모두 동맹국들에 돌리고 자신이 입은 군사적 상처는 외교수단으로 치료했다. 아내이며 누이인 아르시노에 2세가 그에게 미치는 영향은 특히 외교
문제에서 상당히 중요했지만, 당시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한 것만큼 광범위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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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문제에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기록한 업적도 매우 인상적이다. 파라오 시대부터 이집트에서는 농업과 공예가 고도로 체계화되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감독과 그리스
행정관들의 도움으로 이 체계는 일종의 계획 경제로 발전했다. 나일 강 유역의 농민 대중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이집트에서는 노예를 대량으로 수입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집트의 농촌을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세금원을 개척하는 명수가 되었다.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는 주요한 상업 및 수출 중심지 구실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집트
종교만이 아니라 그리스 종교에도 강렬한 관심을 보여 지방의 성소들을 순방했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 신전을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위를
확고하게 굳히고 왕조가 종교적으로 숭배받기를 갈망한 그는, 부모만이 아니라 자신과 왕비도 '테오이 아델포이'(형제 신들)로서 신성한 명예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그는 그리스인 통치자 숭배를 장려하는 가장 열렬한 주창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이것은
다시 로마 시대 황제 숭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시대에
알렉산드리아는 예술과 과학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시인과 학자들에게
너그러운 후원자로 명성을 얻었다. 칼리마코스와 테오크리토스를 비롯한 많은 궁정 시인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도서관을 확대하고 박물관에 자금을 공급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 박물관은 군주제에 좀더 강력히 반대하는 아테네 학파들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평형추로 세워진 연구
기관이었다(→ 교육사). 이곳에서 연구하는 학문은 철학과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고 수학과 자연과학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시대는
헬레니즘 문명의 절정기와 일치했다. 그 시대의 활력과 매력은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생생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그리스의 지도력이 낳은 결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평화 애호자는 아니었지만, 호전적인 군인 왕도 아니었다. 신중하고 계몽된 통치자인 그는, 외교적 능력에서 자신의 강점을
발견했고 광범위한 호기심에서 만족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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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전성기의 왕. 키레네를 재병합(再倂合)하고, 다시 제3차 시리아 전쟁(BC 246∼BC 241)에서는 시리아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를 손에 넣어 영토가 가장 넓었다. 그 후 20여 년 간은 대체로 평온하게 보냈으며, 예술을 보호하고,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에 다량의 서적을 보충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Ptolemaeos III, BC 264~BC 221, 43년간]
요약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제3대왕(재위 BC 246∼BC
221).
국적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왕조
활동분야
정치
본문
(Euergetes는 그리스어로 '은인'이라는 뜻)
?~? BC 264~221년[43년간 재위]에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
이집트와 키레나이카를 다시 통합하는
한편 셀레우코스 왕조와 제3차 시리아 전쟁을 벌여 성과를 거두었다.
BC 245년 전까지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는 오랜 약혼 기간을 끝내고 키레네의 왕 마가스의 딸인 베레니케 2세와 결혼함으로써, BC 258년
이래로 분리되어 있던 이집트의 키레나이카를 다시 통합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2세의 왕비로 갔다가, 안티오코스가 죽은 뒤 살해당한 누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지체없이 코엘레시리아에 침입했다. 그 지역 도시들의
반란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해군은, 셀레우코스 2세의 군대를 쫓아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까지 밀고들어갔다. 그 와중에 소아시아 반도 해안가에
있는 일부 섬들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BC 245년경 제지를 받았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는 육군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깊숙이 쳐들어가, 바빌론 근처에 위치한 티그리스 강가의 셀레우키아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자료들을 보면, 국내에서 소요가
일어나 진격을 멈추어야 했다고 나와 있다. 이와 함께 기근과 나일 강의 수위 저하, 그리고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가, 로도스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에 반대해 동맹을 맺은 것도 또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소아시아와 에게 해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체인 아카이아 동맹이 이집트와 동맹을 맺게 했으며, 셀레우코스 왕조가 흑해지역에서 2개의 동맹국을 확보함에 따라 더
한층 열기를 더해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BC 242~241년,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물러났고, 이듬해가 되어서야 평화가 찾아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2곳 모두 시리아 지역에 속하는 오론테스 강
유역과 안티오크,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와 트라키아를 가까스로 지켰으며, 킬리키아까지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안에서는 아버지가 개발해놓은
알파이윰(오아시스와 비슷한 카이로 남서쪽의 저지대)에 대한 식민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또한 달력을 고쳐 BC 311년을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원년으로 삼았다(→ 역법). 이집트 사제들의 회의에서 만들어 내놓은 일종의 선언문인 '카노푸스 칙령'은 4년마다 1일을 더하기로 하고, 1년의 일수를
365일과 1/4일로 승인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새 달력은 일반인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쓰이지 않았다.
사제들이 남긴 글이나 고대 문헌들을
보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을 때 약탈당한 성상(聖像)들을 프톨레마이오스가 다시 복구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는 거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신전이
있는 상(上)이집트의 에드푸에 건설 작업을 벌였고, 여러 신전에 기부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와 마케도니아를
계속 괴롭히고 있던 전쟁에 말려드는 것은 피했으나, 지진으로 황폐해진 로도스 섬에 대해서는 원조를 보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에 대항하려는
스파르타 왕의 계획에 대해서는, BC 222년에 피난처를 제공한 적은 있었으나, 지원금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소아시아에서는 그곳에 있는 한 왕국의
왕위 계승자를 자처하며 많은 분란을 선동했던 인물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토에서 망명지를 찾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곧바로 그를 억류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정책은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이집트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선포한 뒤, 국내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누리며, 최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이집트를 남겨놓고 죽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통치 시대에 대해서는 W. W. 탄의 〈헬레니즘 문명 Hellenistic
Civilisation〉(3권, 1952), A. 부셰 르클레르의 〈라기데스가의 역사 Histoire des Lagides〉(1903)
제1권에서 논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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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5세[Ptolemaeos V Epiphanes]
(Epiphanes는 그리스어로 '뛰어난'이라는 뜻) BC 210경~180.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 왕. |
왕위에 있는 BC 205년부터 시리아를 비롯해
이집트의 해외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 밑에서
일하던 부패한 신하 소시비우스가 어머니를 살해한 뒤 5세밖에 안 된 어린 프톨레마이오스는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고 소시비우스가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BC 2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역사가인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소시비우스 일파가 어린 왕의 즉위와 그 부모의 죽음을 선포한 뒤 뛰어난
관리들을 모두 이집트에서 추방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는 시리아의 통치자들은 이집트의 국력이 취약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시아와 에게 해에 있는 이집트의 영토를 분할하려는 계획을 꾸몄다. 소시비우스가 BC 202년 은퇴하자 그의 일파의 일원인
아가토클레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아가토클레스의 등장에 불만을 품은 펠루시움(이집트의 동쪽 변경도시)의 총독
틀레폴레모스가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해 들어왔고, 그의 지지자들은 군중들을 선동해 아가토클레스를 물러나게 하고 다른 궁정 관리를 그 자리에 앉혔다.
어린 프톨레마이오스는 대운동장에서 그의 부모를 죽인 살인자들을 처벌할 것을 외치며 그를 우러러보고 있는 군중 앞에서 한 궁정 신하의 암시에 따라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군중들은 아가토클레스와 그의 가족들을 색출해내 이들을 학살했다. 권좌를 차지하기에는 능력이 모자랐던 틀레폴레모스도
얼마 안 가 제거되었다.
이집트에 혼란이 계속되는 동안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는 코엘레시리아로 침공해 들어가는 큰 모험을 감행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는 역공격을 위해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나 BC 201년
안티오코스 3세가 다시 쳐들어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를 무찌르며 소아시아에 있는 이집트의 영토를 점령했다. 로마의 외교적 개입으로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평화조약의 규정에 따라, BC 194(또는 193)년 안티오코스 3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혼인했다.
이집트에서는 선왕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 때부터 일어났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BC 197년 프톨레마이오스는 나일 삼각주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며 항복해온 반란군에
대해서도 이들을 극도로 잔인하게 다루었다. 상(上)이집트에서는 BC 187(또는 186)년까지 계속해서 분란이 있었고, 그는 성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후견인과 고문들의 간섭을 받았다. 그는 더이상의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테베 총독의 권한을 상이집트 전역까지 포괄하도록
확대했다. BC 196년 프톨레마이오스는 칙령을 내려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겨넣었고, '로제타석'으로 알려진 이 비석은 1799년에 발견되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 또는 그림문자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었다. 이집트 원주민들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이 칙령에는 부채와 과세를 면제해주고, 죄수를 풀어주었으며 또한 항복한
반란자들을 용서하고, 사원에 대한 기부금을 늘렸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꾸준히 그리스와의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통치 말기에
그는 수완 좋은 환관 하나를 그리스인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했는데,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BC 180년 5월경 갑자기 죽었다.
그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남겼고 왕비가 이들의 섭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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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76. 이집트의 왕비. |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의 왕비로서,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의 섭정을 했다.
시리아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대왕)의 딸로 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의 전쟁 및 국경분쟁을 종식시킨 리시마케이아 평화조약에 따라, BC 193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지참금으로, 이집트가 되찾으려고 오랫동안 애썼던 코엘레시리아 지방의 징세권(영유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임)을 가져왔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죽은(BC 180) 뒤 클레오파트라 1세는 어린 아들의 섭정을 하면서 이집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그녀는 시리아와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로마와도 사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균형 있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이집트를 타국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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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metor는 그리스어로 '어머니를 사랑하는'이라는 뜻) ?~? BC 180경~145년에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
코엘레시리아로 쳐들어가려 했으나,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이집트를 점령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로마의 개입과 몇 차례에 걸쳐 자신의 형제와 공동통치하는 모험을 벌여 다시
이집트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클레오파트라 1세 사이의 아들로, 어머니와 공동 섭정으로서 함께 통치했다. 클레오파트라 1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주였으나, 시리아 편을 들지 않고 계속해서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함께 이집트를 잘 다스렸으나, BC 176년 어머니가 죽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2명의 야심만만한 궁정 관리들에게 크게 의지했다.
BC 173년경
그는 자신의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혼인했고, 고문들의 의견에 따라 코엘레시리아로 쳐들어갈 준비를 갖추었다.
BC 170년
형제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공동통치에 합류했고, 코엘레시리아에 대한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자인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이집트의 국경 도시인 펠루시움을 점령했다. 그는 BC 170년
이집트를 침공했고, 다시 BC 168년에도 쳐들어왔으나,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동맹국인 로마의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
BC 164년
10월경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쫓아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로마로 도망쳐 지원을 요청했고, 로마는 이에
따라 이집트를 분할해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키레나이카를,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키프로스와 이집트를 통치하도록 했다.
키레나이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2번이나 로마를 방문해 키프로스를 달라고 요구했다. 로마 원로원은 결국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능란한 외교술로 로마의 결정을 늦추게 하고, BC 154년 무력으로 키프로스를 차지하려 한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키레나이카를 다시 돌려주고, 자신의 딸과 결혼하게 하는 한편, 원조 명목으로 곡물까지 주었다.
한편 로마에서는
대(大)카토가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 훌륭하고 자비로운 통치자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것은 그뒤까지 계속해서 이어진 음모의 일환이었으나, 이집트는
비교적 안전한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BC 155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키프로스를 차지하려는 계략을 세우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증오심을 일부러 자극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위 계승자를
자처하는 알렉산데르 발라스라는 인물이 나타나자 BC 153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그를 지원할 채비를 서두르는 한편 ,그에게 자기 딸까지 주어
혼인하도록 했다.
BC 148년경 그는 다시
한번 시리아로 진군했고, 그때 또다른 왕위 요구자가 나타났다. 알렉산데르 발라스의 암살 기도를 물리친 그는, 발라스의 아내가 된 자기 딸을
새로운 왕위 요구자에게 주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새로운
왕위 요구자를 지원하기는 했으나 ,안티옥의 시민들과 시리아군은 이집트의 왕에게 시리아의 통치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이를 거절했으나, 얼마 안가 알렉산데르 발라스가 전투에서 패한 뒤, 살해당한 그 자리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그는 말에서 떨어져 머리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당해 며칠 뒤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