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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학 동시 다발 작품 수출…판이 크게 움직인다 / 신경숙·한강 이후 싹트는 문학 한류

영국신사77 2020. 5. 11. 11:23

K문학 동시 다발 작품 수출…판이 크게 움직인다

신경숙·한강 이후 싹트는 문학 한류

추리소설 작가 서미애씨의 불어판 소설 『Bonne Nuit Maman(잘자요, 엄마)』이 프랑스의 한 서점에 진열돼 있는 모습. [사진 서미애]

추리소설 작가 서미애씨의 불어판 소설 『Bonne Nuit Maman(잘자요, 엄마)』이 프랑스의 한 서점에 진열돼 있는 모습. [사진 서미애]

소설가 서미애(55)씨는 30년가량 추리소설만 써왔다. 1994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 추리소설 당선작 ‘남편을 죽이는 서른 가지 방법’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늘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졌다”고 토로했다. 장르문학을 홀대하는 한국 문단의 시대에 뒤떨어진 ‘엄숙주의’ 때문이다. 지금은 아니다. 해외에서 특히 그렇다. 그의 2010년작 『잘 자요, 엄마』는 소녀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독특한 장편 스릴러. 이 소설의 판권이 지금까지 14개국에 팔렸다. 지난 2월 미국에서 번역 출간됐고, 영국에서는 인기 드라마 ‘다운튼 애비’를 제작한 카니발 필름이 드라마 판권을 사들였다. 글로벌 흥행에 따라 일정 비율의 순익을 챙기는 조건이다. 독일의 계약 조건도예상을 뛰어넘는다. 작가에게 지급하는 선인세가 5만 유로(약 6600만원)다. 수만 부 판매를 기대한다는 얘기다. 서씨는 “해외 출판 시장을 보면 뭔가 굉장히 크게 움직이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했다. 계약 단계에서 보증수표로 통하는 굵직한 출판사와 판권 계약이 성사되면 이웃한 나라의 출판사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과 출판 계약을 맺는 식이었다는 얘기다.
  

한국문학 수입 전문 출판사 생기고
국내 출판사 직접 작품 세일 나서
외국 출판사 수입 경쟁 붙기도
“학자 겸 번역자 키워야 오래 간다”

추리 작가 서미애 소설 14개국 팔려
 
『82년생 김지영』 의 일본판,

『82년생 김지영』 의 일본판,

서씨의 성공은 예외적인 인생 역전 사례가 아니다. 한국문학에 대한 해외 출판계의 인식이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는 게 작가와 출판사, 문학 에이전시, 한국문학번역원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진단이다. 한국문학도 돈이 된다는 판단에 따라 한국문학만 전문 출간하는 해외 출판사가 생기고, 지금까지 직접 번역이 불가능했던 언어권에서 경쟁력 있는 한국문학 번역자가 나온다.
 
『잘 자요, 엄마』의 프랑스판.

『잘 자요, 엄마』의 프랑스판.

프랑스의 마탱 칼므 출판사가 대표적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출간했던 세르팡 아 플륌 출판사에서 대표를 지내다 독립한 피에르 비지유가 지난해 설립한 출판사는 K 스릴러, 한국의 장르문학을 전문 출간한다. 김언수의 『뜨거운 피』, 서미애의 『잘 자요, 엄마』를 출간한 데 이어 김재희·도진기·이종관 같은, 서미애보다 더 생소한 작가들의 소설을 앞으로 출간한다. 그런데 초판을 4000~5000부나 찍는다. 장르소설 시장이 우리보다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번역료를 제외한 출판 비용만 3만 유로(약 4000만원)가량 든다고 한다. 그만큼 팔린다고 본 것이다. 번역원의 불어권 담당 하민경 대리는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아들이 상당액을 출판사에 투자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프랑스 최대의 서적 유통망인 인터포럼을 통해 대형 슈퍼에도 책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뭔가 산업적으로 달려드는 모양새다.
 
『딸에 대하여』의 일본 판.

『딸에 대하여』의 일본 판.

1994년생 네덜란드인 마토 맨더슬롯은 한국문학 번역에 뼈를 묻기로 한 경우. 이를 위해 영국 옥스퍼드에서 한국학을 공부한 그는 황선미 동화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서미애의 『잘 자요, 엄마』를 네덜란드어로 직역했다. 현재 번역원의 번역아카데미를 다니는데 “영어권은 번역자가 많아 경쟁이 치열하지만 네덜란드어 번역은 나뿐이어서 일감이 많을 것 같다”고 했다.
 
해외 문학 에이전시가 국내 에이전시를 끼지 않고 한국 작가를 직접 외국에 소개하는 현상도 이전에는 없었다. 영국인 켈리 팰커너가 2013년 설립한 아시아리터러리에이전시(asialiteraryagency.org)는 국내 소설가 배수아·천명관·한유주·김이설을 소속 작가로 보유하고 있다. 이 회사의 중개로, 배수아의 장편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가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번역자인 데버러 스미스의 번역을 통해 현지시간 5일 영국에서 출간됐고, 천명관 장편 『고래』를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의 번역자인 재미 변호사 김지영씨가 2022년 출간을 목표로 번역 중이다.
 
조남주, 서미애, 김혜진(왼쪽부터).

조남주, 서미애, 김혜진(왼쪽부터).

민음사 저작권부의 남유선 이사는 “이전과 비교하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같은 곳에서 만나는 외국 출판사 관계자들이 앉는 자세부터 달라졌다”고 했다. “미묘한 차이에서 프라이드까지 느낄 만한 상황”이라고도 했다. 과거에는 우리가 매달리는 편이었다면 이제는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온다는 얘기다.
 
이런 변화는 출판 계약에 반영된다. 한국문학을 출판하려는 해외 출판사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출판사들끼리 경쟁이 붙어 계약금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소설가 조남주와 김혜진이 그런 경우다. 2016년 가을 출간돼 지난해 가을 국내 판매 100만 부 판매를 찍은 조남주의 페미니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미국의 출판 공룡 사이먼앤슈스터의 계열사인 스크리브너가 수만 파운드 규모의 선인세를 지급하고 영국 판권을 사들였다.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의 소설을 내는 출판사다. 동성애를 다룬 김혜진의 장편 『딸에 대하여』는 영국에서는 3개 출판사가 경합한 끝에 피카도르 출판사가 판권을 가져갔고, 프랑스에서는 명문 갈리마르에서 책이 나온다.
 
해외가 뜨거워지자 국내 출판사들도 바빠졌다. 민음사는 국내 에이전시의 도움 없이 직접 해외 에이전시를 상대한다. 그만큼 보상이 뒤따른다는 판단에서다. 출판사 창비도 2018년부터 수출 담당 직원을 따로 뒀다. 김혜진의 경우 액수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경쟁이 붙으면 계약금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문턱 높은 일본 시장도 문 열릴 듯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번역원과 함께 한국문학 번역·출판을 지원해온 대산문화재단의 곽효환 상무는 “과거 국내 출판사나 작가들이 그저 해외 출판 계약을 맺는 데 만족했다면 요즘은 번역자가 누구인지 해외 출판사가 어떤 곳인지를 더 따지는 것 같다”고 했다. 양보다 질이라는 얘기다.
 
이런 흐름 속에서 조남주 소설이 폐쇄성 높기로 악명 높은 일본 시장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점도 전례가 없던 일이다. 일본에서 2018년 말에 출간된 『82년생 김지영』은 지금까지 15만 부를 인쇄했다. 서울대 윤상인 교수(아시아언어문명학부)는 “그동안 한국의 어떤 문학 작품도 일본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다고 하기 어렵다. 조남주 소설이 일본 내에서 화제가 된 것은 앞으로 한국소설의 일본 진출에 긍정적인 교두보가 되지 않을까 한다”고 평했다.
 

이런 변화의 출발점은 역시 2011년 신경숙, 2016년 한강이 거둔 성공이라고 봐야 한다. 아시아리터러리에이전시의 켈리 팰커너는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미국 시장 진출이 해외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혔다면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인터내셔널상 수상은 센세이션이었다”고 표현했다. 신경숙 미국 진출을 성사시켰던 KL매니지먼트 이구용 대표는 “신경숙·한강 이전까지 띄엄띄엄 이뤄지던 한국문학 수출이 이제는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느낌”이라고 진단했다.
 
물론 그렇다고 문학 한류가 본격화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학은 성격상 K-팝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얻을 수 없다. 아직 지류 수준이다. 남유선 이사는 “올라야 할 고지가 100이라면 아직 30수준”이라고 했다. 여전히 우리가 알아서 챙겨야 할 몫이 크다는 얘기다. 번역원 고영일 해외사업본부장은 “한국문학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일회성이 되지 않으려면 과거 일본이나 중국처럼 한국문학 작품을 현지 실정에 맞게 맥락화해 한국문학에 대한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학자 겸 번역자를 키워야 한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그 방안으로 외국의 한국학 연구자 지원을 지금처럼 외교부 산하 국제교류재단에서 할 게 아니라 문체부에서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